대한민국 독서사 - 우리가 사랑한 책들, 知의 현대사와 읽기의 풍경
천정환.정종현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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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어디쯤에서 태어났다. 외판원으로부터 계몽사, 금성, 학원출판사 전집을 공급받던 끝물의 세대이다. 전집에 대한 관심이 식을 때쯤 전국 일만 여개도 넘었다는 도서대여점의 부흥에 힘입어 말괄량이 시리즈 같은 지경사 소녀명랑소설, 마니또 문고 등에 눈을 떴다. 동네마다 하나씩은 꼭 있던 손바닥만한 서점에서 추천받아 미스 마플과 푸와로도 알게 됐다. 중학생 때 퇴마록과 드래곤라자, 바람의 마도사 등 1세대 판타지 소설 붐이 일었고 곧바로 비뢰도, 묵향 등의 신무협 소설이 등장했다. 백수 아저씨들이나 읽는 야한 책이라는 편견을 벗어나 어느 순간 나도 옆구리에 무협과 판소를 나란히 끼고 다녔다. 원수연, 이미라, 천계영, 한승원, 김숙 등 걸출한 한국만화가들의 작품과 넘치는 일본 해적판 속에서 한 권에 300원이라는 대여비에 갖은 용돈을 투척하며 풀방구리 쥐 드나들듯 책방도 오고갔다. 등교길에 아이들로 발 디딜 틈 없는 속에서 만화책을 빌리고 수업 시간과 야자시간에 돌려 읽다 하교 시간에 반납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밖에서는 이것도 책이냐며 귀여니를 욕했지만 실은 방구석에서 눈물콧물 쏟으며 늑대의 유혹을 읽고 다락에 숨겨놓기도 했다. 도서관 다독상이 항상 내 것은 아니었지만 때때로 내 것인 때였다. 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나의 독서사다. 책 좀 읽었다는 사람들은 저마다 얼마간의 특별한 독서사를 가지고 있을테다. 취향에 따라 나름의 개성으로 쓰여졌을 이 독서사를 조금 더 큰 그림, 조금 더 확대된 시간, 조금 더 보편적인 관점에서 보게 하는 책을 만났다. <대한민국 독서사>, "우리가 사랑한 책들과 知의 현대사와 읽기의 풍경"을 알려주는 두 국문학 교수님의 작품이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었을까? 어째서 그 책을 읽었을까? 시대가 어떤 식으로 책에 영향을 끼쳤을까? 어떤 출판사들이 있었고 그 출판사들은 무슨 목적에서 책을 만들었을까? 어떤 작가들이 있었고 또 어떤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을까? 우리 현대사는 어떤 책은 용인하면서 또 어떤 책은 불용했고 어떤 독자는 환영하면서 또 어떤 독자는 감옥으로 밀어넣었다. 해방과 전쟁, 분단과 이념, 독재와 혁명, 개발과 저항 그리고 컴퓨터라는 기술이 존재하기 시작한 대한민국사의 면면에 기록을 남긴 책들이 위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벌쟁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내가 넘은 삼팔선>, <자유부인>, <광장>, <얄개전>, <상록수>, <어린왕자>, <별들의 전쟁>, <전태일 평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무소유>, <인간시장> 등 내가 읽어보지 못한 다수의 책들과 그 책들의 뒷 얘기에 웃었고 슬펐고 감동 받았다. 1945년 12월 설립된 을유문화사의 역사에 놀라고 66년에 창간된 유서 깊은 창비와 신경숙이 얽힌 표절 얘기에 씁쓸했으며 청년 문화의 아이콘 최인호와 공보처장 부인에게 폭행 당한 김광주(김훈의 아버지), 80년대를 주름잡으며 선호작가 1위의 자리를 지켰던 이문열,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여류작가라는 표현 속의 공지영과 신경숙의 존재들이 흥미진진했다. 우민화 정책만 쓴 줄 알았던 독재 정권이 어떻게 독서를 부흥시켰는지, 금지된 책을 읽기 위한 젊은이들의 움직임이 어떠했는지, 함께 읽고 연대하던 독자들이 어떻게 혼자 읽고 감상하는 독립 분파로 서게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교수님들이 쓴 책이라기에 지루하지는 않을까 하던 염려는 스윽 지워지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 아닌 다른 독자들의 풍경 속으로 떠밀려갔다. 누군가의 서재를 구경하는 정도가 아니라 시대의 서재를 엿본다는 쾌감으로 충만했던 시간. 이전 세대의 책들로 자극받고 내 세대의 책들을 반추하고 내 다음 세대의 독서를 추측하며 <대한민국 독서사>라는 뜻깊은 풍경 읽기를 마친다.

덧, 아무도 흥미없겠지만 나의 독서사를 조금 더 밝히자면 책 좀 그만 읽고 공부 좀 해라는 잔소리를 듣고 컸던 문학소녀는 그 후로 5년 이상 책을 안읽고 살았다. 단 한 권의 소설책이나 만화책도 내 소비 내역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일 년에 책 한 권도 안읽고 살 수가 있어? 하고 책 안읽는 대한민국을 욕했는데 나도 그 전형이 되어 있었다. 시간이 또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라는 핑계로. 근데 그땐 정말 그랬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자리가 잡히기 전까진 어떻게 해도 책이 눈에 들어오지가 않더라. 관련한 뉴스가 뜰 때 더는 예전처럼 비난의 말을 하지 못하는 이유다. 192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독서의 계절" 가을. 책이 함께 했던 풍경을 추억하며 모두의 마음에 책 한 권 읽을 정도의 여유는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주 큰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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