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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 24시 - 상
마보융 지음, 양성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시체들로 뒤덮인 봉화 보루. 장소경을 포함해 기껏 열 셋 밖에 남지 않은 8군단 병사들은 이백에 가까운 돌궐 늑대 전사들에 맞서 싸운다. 누군가는 떠나자고 했지만 전장에서 조국을 위해 몸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는 문무기와 소규의 강한 집념이 장소경과 병사들에게 전염되며 그들은 마지막 전투를 치른다. 단 세 명만이 살아남았다. 지원병 없이 버텨낸 끝에 오직 셋만이. 조국을 지킨 그들의 삶은 이후 어떠하였던가. 아홉 번 죽어도 후회 없다는 병사들을 위해 조국은 무엇을 해주었는가. 문무기는 장안 자신의 집에서 살해 당했다. 싼값에 가게 터를 사들이려는 귀족의 음모였다. 가게는 산산조각 났고 고명딸 문염은 감옥에 끌려간다. 소규는 여동생을 겁간하고 가족을 몰살시킨 귀족을 고발한 후 마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장소경이라고 다를 바 없다. 9년 넘게 장안 불량수로 성실하게 근무했지만 문염을 지키려다 사형수가 되었고 해를 지나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돌궐족 늑대전사들이 장안을 잿더미를 만든 음모를 꾸미고 숨어들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의 죽음과 남은 인생이 조금은 수월했을까?차라리 사형수로 마감하는 편이 더 편안한 인생이지 않았을까? 그런 의문이 들만큼 그의 앞에 펼쳐지는 24시간의 고난은 너무나 괴로운 것이었다.
이필이 사면을 제안하며 수사관 자리를 제안했을 때 장소경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황제 나부랭이도 귀족도 지키고 싶지 않았다. 퇴역 후 당한 배신이 산처럼 쌓인 상태였고 생에 어떤 집착도 없었다. 그런 그가 움직였다. 감옥을 나와 정월의 추위 속에서 얼음장 같은 물을 뒤집어쓰며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초원의 전사들을 찾기 위해. 대테러를 막기 위해. 오로지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그들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는 것도 아깝지 않았으니까. 그런 그의 걸음을 막은 이는 누구였던가. 정안사의 최고지위 하감이었다. 그는 사형수 장소경을 씀으로 해서 정안사의 뒷배인 태자가 비난 받을 것을 두려워했다. 황제의 12번째 아들 영왕이었다. 그는 문염을 탐내다 장소경에게 고문 당했다. 죽지 않는 장소경이 저주스러웠으리라. 태자의 반대편에서 세력을 구축 중인 우효위였다. 태자의 흠을 잡아 그의 세력을 죽이려는 이들에게 장소경은 좋은 빌미거리다. 그리고 장소경을 감옥에서 끄집어낸 이필이었다. 그는 진실이라 착각한 무언가에 근접했을 때 차라리 장소경이 죽었기를 바랐다.
이득을 위해 지위를 위해 권력을 위해 적이 된 장안의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장소경은 칼에 찔리고 폭발에 휩쓸리고 화상을 입고 얼음물에 떨어지고 자기 손가락을 자르고 두피가 뜯기고 살이 찢기며 구르고 밟히고 고문 당한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적이 물을 때 나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첩자가 되고 수배자가 되고 기어이 테러의 배후로 지목되기까지 했는데 그가 장안을 위해 적을 무찔러야 하는가. 저 썩을 놈의 세상 차라리 뿌리부터 싹 다 타버리는 게 옳지 않나. 적의 유혹 앞에선 장소경의 선택, 그 선택에 내가 공감하고 있는지 아닌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그 남자 장소경을 존중한다. 현종과 양귀비의 시대에 그들이 아닌 단 한 줄 역사로 이름을 올린 남자를 이만큼이나 가공해낸 작가에 대해서도. 중국 역사 엔터테인먼트 소설로 이보다 흥미롭고 이보다 가독성 높은 소설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