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펭귄 하이웨이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0월
평점 :
멋진 녀석을 만났다. 아주아주 멋진 녀석이다. 옆에 있다면 꼬옥 끌어 안고 힘껏 사랑하고 싶어지는 대단히 멋지고 멋진 녀석. 이름은 아오야마. 보고 듣고 겪고 느끼는 모든 걸 필기하는 메모광이자 노트 애호가다. 바지 주머니 속에서도 필기하는 메모 장인은 연구광이기도 해서 우주, 생물, 구름, 로봇, 스즈키 제국관찰이라는 인간관계의 역학까지 두루 해독하는 괴짜다. '다른 사람에게 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어제의 나 자신에게 지는 건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를 좌우명으로 삼고 매일매일 성실하고 끈기있게 훌륭해지고 있다. 지나치게 훌륭해져서 큰일이 나면 어쩌지 걱정하는 마음이 백분 이해가 갈 정도로 기특한 녀석은 안타깝게도 초등학생이고 젖니가 빠지는 중인 4학년이다.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마음을 접지만 소녀들이여 책을 펼쳐라. 제목은 <펭귄 하이웨이>. 어리지만 근사한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
동생과 함께 하는 등교길. 아오야마의 걸음이 멈춘다. 눈 앞의 상황이 믿기지 않아 얼떨떨하다. 코 앞에서 움직이는 저건 뭘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 윤기 흐르는 까만 털에 몽실몽실 하얀 배, 장식처럼 달린 지느러미 같은 날개와 짧은 다리는 누가 봐도 펭귄이다. 그것도 한 마리도 아니고 떼로 걸어다니는 남극의 깡패 아델리 펭귄 무리! 평화로운 일본 소도시, 외롭게 자판기가 선 공터 옆의 주택가, 습도는 60 퍼센트, 날씨는 쾌청, 지금은 5월의 아침이다. 눈앞의 펭귄떼와 아오야마의 등교길은 너무 매치가 안된다. 차라리 까마귀가 유전자 변이를 일으켰다고 보는 게 더 신빙성 있는 가설 아닐까? 단체 멘붕에 빠진 초딩들이 침묵에 잠긴 사이 해님은 따뜻하게 온기를 뿜고 바람은 살랑살랑 공터를 휘돌아나간다. 113일 동안 진행될 아오야마의 연구와 그가 겪게 될 모든 모험의 여정은 이렇듯 황당하고 어딘지 눈부시게 시작이 됐다.
"이 수수께끼를 풀어봐. 어때, 할 수있겠니?"(p55)
<펭귄 하이웨이>라니. 제목부터 최고다. 펭귄이 좋아서. 어제보다 이 책을 다 읽은 오늘 펭귄이 더 좋아졌음은 말할 것도 없고. 아장아장 걷고 파닥파닥 날개를 펄럭이고 끼우끼우 울면서 지구를 지키는 펭귄 특공대. 그러나 이 소설, 펭귄 특공대와 소년의 우정을 그린 그렇게 만만한 소설이 아니다. 영화가 개봉됐기 때문에 쏠랑 들어가 버린 얘기지만 개정 전에는 "SF 대상 수상작"이라는 명판이 크게 붙어있는 책이었다. 그래서 SF구나 하고 읽기 시작하면 이거 좀 이상하다. 외계인이 우주선을 타고 내려와 아델리 펭귄 무리를 도시에 뿌리고 간다고 생각하면 뭔가 벙찌지 않나. 더구나 아오야마 소년이 목격한 펭귄의 탄생도 대단히 기이했다. 첫사랑 치과 누나가 자판기에서 뽑은 콜라캔으로 소년의 젖니를 뽑아주려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캔이 펭귄으로 뿅 하고 변신해 버리니까. 판타지인데 생각하면서 읽다 보면 다시 SF고 그러다 역시 판타지인가 헷갈리는 소설은 장르가 어찌됐든 재.미.있.다. 모험과 성장이 함께하는 소설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니까. 더군다나 누나, 펭귄, 재버워크(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괴물)의 숲에 나타난 '바다'의 정체 외에도 아오야마의 일상과 학교, 여름방학이 하나 같이 웃기고 귀엽다. 우주소년 우치다, 체스소녀 하마모토, 과학의 아이 아오야마가 갈릴레오 뺨치는 관찰로 진실에 다가설 때는 중력이 사라진 듯 엉덩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무중력 체험 재미라니. 다시 생각하니 이거 완벽하게 SF인데?
<펭귄 하이웨이>의 주인공이 어리다고 얕보지 말 것. 애니화된 이유가 있다고, 젖니가 두 개나 빠진 소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를 거라고 새끼 손가락 걸고 약속한다. 나란 독자는 재미있는 책이 아니면 이렇게 길게 리뷰를 쓰지도 않으니까:) 완벽한 결말 뒤로 3888일이 지난 어느 날에 새하얗게 빛나는 영구치를 가지고 누군가의 앞에서 활짝 웃을 아오야마를 그린다. 훌륭하고 훌륭하고 또 훌륭한 남자 어른이 되어서 그 때야말로 사랑의 중차대한 결심을 완성하리라. 아니 근데 이 행복한 결심 앞에 나는 왜 이렇게 눈이 시리지. 콧물도 좀 나는 것 같고. 이만큼 신나게 웃음 줬으면 됐지 괜히 감동까지 주고 난리다. 하여튼 꼭꼭꼭 영화까지 찾아볼 것! 아오야마 너란 소년에게 하트 백만개를 날려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