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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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페미니즘에 관한 책이 많이 출간되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흔치 않은 소재이리라 생각합니다. <비바, 제인>의 주인공은 남성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위협 당하고 삶을 저지 당한 인물이거든요. "20살의 인턴과 하원의원의 관계에서 시작하는 페미니즘 소설" 이라는 소개를 받으면 무슨 생각부터 드시나요? 의례히 위계에 의한 성폭력을 예상하지 않을까요? 저도 그랬구요. 그러나 이 책엔 강압에 의한 희롱도 폭력도 없습니다. 반대로 인턴인 학생쪽에서 클라크 켄트 같은 매력을 가진 다부지고 핸섬하며 거대한 성공을 거둔 하원의원에게 먼저 몸과 입술을 밀어붙이죠. 세간의 표현대로라면 유부남에게 꼬리를 친 겁니다. 물론 아버지 뻘의 연륜에 의원으로서의 도덕심, 가정과 기독교적 윤리를 생각한다면 의원측에서 마땅히 거절해야 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죠. 남자의 양심 대신 뇌가 먼저 반응합니다. 일반적 성교 대신 항문섹스를 하는 방향으로요. 그리고 어린 여성은 왜?라고 의아해하지요. 왜 그는 나를 사랑한다면서 나와 성교하지 않는가? 어머니에게 묻고 싶지만 그 정도 분별력은 가지고 있으므로 대신에 익명의 블로그를 만들어 관련한 글을 게시합니다. 하루 방문객이 넷 내지 여섯 정도 되는 블로그에 무슨 문제가 생기겠나 했지만 네, 물론,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이 타고 가던 차가 교통사고가 났고 상대 운전자인 노인이 사망했으며 대중들은 그들의 관계를 의심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저 익명의 블로그를 캐냈죠. 관계의 모든 하이라이트까지 상세하게요. 아비바 스캔들의 시작입니다.

"네가 뭘 했길래? 그건 섹스였어. 그 남자는 케케묵은 아저씨였지. 넌 애였고."(p389)

이름의 정체성으로 구분한다면 총 다섯 명의 화자가 등장합니다. 존경받는 유대계 학교의 교장에서 하루아침에 성 스캔들 주인공의 모친이 되어버린 레이철,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앞에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제인 영, 아비바를 저주하며 불륜을 저지른 정치인 남편을 비호하고 용서한 아내 엠베스, 엄마의 스캔들을 신문사에 고발하는 제인의 딸 루비, 20살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동시에 세상 모든 것이 두렵고 혼란했던 낭만적인 철부지로 유부남을 사랑한 아비바. 아비바의 사랑이 몰고 온 폭풍은 거셌습니다. 레빈은 첫 유대계 대통령이 될지도 모를 인기 의원이었고 블로그는 노골적이었죠. 정보의 바다는 좀비와도 같아서 삭제하고 또 삭제해도 그녀가 이력서를 넣은 회사, 정치인 사무실, 하다못해 자원봉사단체에까지 전력을 쏟아냅니다. 레빈과의 관계가 완벽히 파탄난 후에도 사회는 그녀의 잊힐 권리를 인정하지 않아요. 그녀는 대중의 끊임없는 비난과 편견, 비웃음에 노출되야 했고 인생 리셋은 커녕 생의 유지조차도 버겁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습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그녀는 고향을 떠납니다. 이름과 성을 모두 바꿔서요.
그러나 새로운 삶에서도 아비바 스캔들은 여전한 그녀의 족쇄입니다. 

 반면 레빈은 어떨까요? 레빈의 반성은 통했습니다. 그는 아내와 자식과 사회에 용서를 구했고 재선에도 성공합니다. 그가 대중 앞에서 어떤 모욕을 느꼈든 스캔들 발생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사건은 그의 커리어에도 가정에도 신변에도 변화와 손실을 주지 않았어요. 아비바와는 정말 다르죠. 아비바와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그녀의 반성 또한 우리 사회를 통과하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 어쩌면 그녀들에게 사회적 용서라는 잣대를 가져다대는 것이 합당한가 라는 의문입니다. 그건 그냥 섹스였고 성인의 섹스를 당사자와 이해 관계자들이 아닌 이상 대중이 무어라고 판단하는 게 정말로 도덕률에 맞는 일인지. 그것도 매우 여성 편향적으로만 들이대는게요. 20살의 아비바를 비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오롯이 여성에게만 향하는 가혹한 시선과 조리돌림만큼은 불공평합니다. 공정하지 않아요.

또 하나. 불륜한 남편과 헤어지지 않은 엠베스의 선택 또한 반페미니즘이 아니라는 겁니다. 엠베스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이 부정한 남편을 내내 뒷바라지 하는 삶이라 해도 그 여성의 삶 또한 존중받아 마땅한 선택이며 권리라는 것. 페미니즘 교수의 말에 꼭 뒤통수 한대 맞은 듯이 얼얼하더군요. 수치 당하기를 거부하고 여전히 사랑하거나 또 어쩌면 여전히 필요한 남편과 거듭 새 삶을 살 권리는 철없는 아비바뿐만 아니라 굴욕과 배신감을 감내한 엠베스에게도 마땅히 존재한다라는 깨달음을 가슴에 새깁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걸 품고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책인데 의외로 가볍습니다. 경쾌하고 빠르고 유머러스하죠. 성장하고 전진하고 연대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시원시원하고 소설 속의 남성은 사회의 악도 적대적 원수도 아닙니다. 토양과 바람 등의 환경이 바뀌는 것으로 우리의 생태와 성질이 바뀔 수 있음을 은유하며  자연스럽게 변화를 촉구해요. 그래서 추천합니다. 싸우고 계몽하고 이기는 소설이 아니기에 반감없이 읽을 수 있는 페미니즘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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