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임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세상을 떠도는 유목민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이민자가 나이거나, 내 동생이거나, 내 엄마이거나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니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p79, <라스트 북스토어> 중)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대학을 다른 시로 가기는 했는데 아침에 통학버스를 타면 길 막힘 없이 5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어요. 옆동네 마실 가는 수준이라 타향살이의 고달픔은 아예 모르는 사람으로 커버렸습니다. 다른 지역권의 남자랑 결혼이라도 하면 모를까 아마도 저는 죽는 날까지 우리 고향 우리 집 근처로만 오며가며 살 심심한 인생 같습니다. 실은 거기에 별 불만도 없는 태평한 성격이지만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여기 9가지 단편 속 인물들은 저와 정 반대의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떠돌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죠. 미국 국적의 이민자이지만 다시 한국행을 택한 사람들, 이민을 가 청춘을 다바쳐 집을 장만한 부부, 미국인 남편을 만나 이민 왔지만 냉장고만은 따로 쓰는 여자, 남편과의 이혼 후 그와 다른 언어를 찾아 미국에 간 여자, abcd라는 쪽지 한장 들고 미국으로 입양됐던 할아버지, 어머니의 집을 찾아 여행하는 삼남매, 어머니를 만나러 한국에 와 공항에 발이 묶인 청년. 이민, 이주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되는 인생의 굴곡들이 있었습니다. 한국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미국인이랄 수도 없는 각종 위화감과 다시 한국인이 되기 위해 돌아온 땅에서 느끼는 소외감들, 타국에의 귀속에 온생애를 다바쳤다는 허무가 소설 면면에서 느껴졌어요. 작가인 임재희님이 하와이 이민자이기에 그 혼란을 더 깊게 통찰하고 글로 옮길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동시에 본인이 그 깊은 혼란을 깨치고 글을 쓰는 작가로 성장했기에 자기비하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물들을 그릴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구요. 하소연으로 시작하는 것만 같던 모든 단편의 말미가 어딘지 긍정적이거든요.

"제 몸 어딘가에서 잔뿌리들이 뻗어 나와 흙을 가르고 축축한 곳을 찾아 스스로 내려가고 있는 것만 같았던" (p34) 동희나 "세상의 끝, 어떤 순간의 마지막을 배웅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사람"(p89)을 알아보는 '나'와 "묻지 않아도 될 것과 알지 않아도 될 것들 속에서도 삶이 완전체로 흘러갈 것"(p116)을 믿는 또다른 '나'. 그리고 노래하는 로사의 "누군가는 찾으려 하고, 누군가는 숨기려 하고, 숨박꼭질은 계속되고, 열쇠는 처음부터 내 마음속에 있었고..."(p141)의 흥얼거림 같은 것을요. "그들이 잘 지내야 엄마가 잘 지낼 것만 같아"(p220)라고 차분히 소망할 줄 아는 폴, "콧등이 낮고 주근깨가 많았던 우리의 누이를"(p193) 기억해달라던 압시드의 깊은 연민엔 어여쁜 웃음과 눈물이 함께 일기도 했습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나를 동정할 때도 있지만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품고 더 많은 웃음과 울음과 인생을 알게 된 이들이 차분히 이야기하는 소설입니다. 떠나는 사람에게도 돌아오는 사람에게도 저처럼 내내 머무르기만 하는 사람에게도 위로와 감흥을 주는 책으로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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