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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그게 단 하나의 진짜 질문이다, 라고 나는, 결국, 생각한다." (p13)
일흔 줄의 작가가 쓰는 사랑 이야기는 어떨까. 더 많이 경험하고 깊게 사유하고 삶을 관조한 작가의 깨달음을,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홍보도 있으니만큼, 손에 잡힐 듯이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첫머리부터 이토록 가슴 두드리는 질문을 해오는 작가라면 말이다. 맨부커상을 받았다는 전작은 읽지도 못했고 그와는 아예 첫만남이지만 이 질문 앞에 고민하는 잠시 잠깐 사이 벌써 예감을 했던 것 같다. 이제껏 책으로 만나온 그 어떤 사랑과도 다를 것이며 때문에 전혀 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해피엔딩에만 열광하던 내가 끝없이 실패로만 다가가는 사랑에 흐느꼈다는 데서 예감은 완전한 YES. 사랑에 관해 여전히, 무엇도, 어떻게도 알 수가 없었다는 데서 예감은 완전한 NO. 번역가의 말처럼 "죽은 자는 말이 없고"(p383) 케이시 폴의 회고는 단편적이라 그들의 불미스런 사랑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들 관계의 완연한 실패와 혼란한 비극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에선 찾을 수 없었던 감흥이 일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19세 소년 케이시 폴 그리고 48세의 여인 수전 매클라우드가 사랑에 빠진다. 수전의 딸들이 그의 어린 연인보다 연상이었다. 그에겐 남편도 있었다. 누가 봐도 아들과 어머니로 보일 법한 이들이 우연히 테니스클럽의 파트너가 되어. 또 우연히 비슷한 높이에서 눈길을 마주해서. 또 우연히 그의 부모님은 절대 웃지 않는 포인트에 수전이 웃음을 터트리는 속에. 연정은 아무렇게나 싹을 틔운다. 둘 중 어느 한 명이라도 이 관계를 불꽃같은 놀음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면 다디단 관능의 기억, 순간의 치기, 성장통 정도의 이름을 붙여 넘겼을지도 모를 시간. 그러나 폴에게 수전은 첫사랑이었고 수전에게 폴은 이십년 가까이 남자를 몰랐던 몸에 찾아온 열정이자 비상구였다. 둘 중 어느 한 명도 사랑이라는 터널을 재빠르게 통과하지 못했다. 덕분에 가족과 이웃과 사회로 통하는 출구가 모두 막힌 채 수전과 폴은 암흑 속에서 표류하게 된다. 표류의 대가가 중년의 여성이었던 수전에게 더욱 가혹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남편의 주사와 폭행으로 술을 혐오했던 수전이 술을 찾아 원숭이처럼 장롱을 기어오르고 거리를 헤매고 술집을 전전한다. 경찰이 출동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우울증 약을 처방받는 시간이 폴과 사랑한 시간보다 길었다. 수전의 사랑이 썩고 문드러지는 동안 폴의 이십대도 멍이 들고 삭고 바스라진다. 사랑으로 무너지는 것인지 사랑 아닌 것으로 무너지는 것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던 수전.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혹하게 깎여 꼬챙이가 되어버린 폴. 완연히 부서져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기까지 꼬박 십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그 십 년에 다시 몇 십 년이 보태져 폴이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도록 수전의 잔상은 인생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수전의 나이를 훌쩍 뛰어넘어 일흔에 가까운 노인이 되어버린 폴의 인생, 폴의 자조, 폴의 회환, 그렇게 <연애의 기억>이 쓰여진다.
수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19세였던 자신의 앞에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노라고 이제와 생각하는 폴. 그럼에도 결코 그녀와의 사랑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폴의 독백 앞에서 나는 그의 진심을 가늠해보려 애쓴다. 소년과 함께 집을 나와 가난한 아파트에 정착했던 수전이 때때로 예전 집을 방문해 살림을 돌보고 페인트 색깔을 결정하고 남편의 영수증을 처리하던 장면도 돌이켜본다. 우리에게는, 그러니까 닳고 닳아버린 여자 사람에게는, 사랑이 유희 이상의 의미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사랑이 삶이 되도록 방치하지 말라는 수전의 목소리가 문득 들려오는 듯 했지만 알 수 없다. 수전이 수전의 입으로 사랑을 논의하는 장면은 딱 한번 밖에 없었으니까. 자살하는 사람처럼 사랑에 빠져버린 소년과 사랑에 빠진 후 술로 인생의 기억을 자살시킨 여인과 사랑을 저 먼 뒤안길로 보내고 난 뒤에도 그 상흔 속에서 살아가는 노년의 남자를 생각한다. 사랑을 잘못 배우고 잘 배우고의 의미가 돌연 희미해져버렸다.
"첫사랑은 삶을 영원히 정해버린다. 첫사랑은 그 뒤에 오는 사랑들보다 윗자리에 있지는 않을 수 있지만, 그 존재로 늘 뒤의 사랑들에 영향을 미친다. 모범 노릇을 할 수도 있고, 반면교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뒤에 오는 사랑들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다. 반면 더 쉽게, 더 좋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물론 가끔은, 첫사랑이 심장을 소작해버려, 그 뒤로는 어떤 탐침을 들이밀어도 흉터 조직만 나올 수도 있지만." (p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