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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
와카타케 치사코 지음, 정수윤 옮김 / 토마토출판사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나는 생은 이제부터다.
터져나오는 웃음은 터져 나오는 의욕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모모코씨는 그렇게 생각하며 또 웃었다.
ㅡ p140,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
문학에서 최연소 수상자 누구누구에 관한 이야기도 그리 자주 듣는 건 아니지만 최연장, 최고령이 강조되었던 일은 더욱 드물지 않나 싶다. 작가 와카타케 치사코가 그 드문 경우 중 하나인데 그녀 나이 자그마치 63세 때 문예상을 수상하고 다음 해 64세가 되어 일본의 권위있는 문학상 아쿠타가와상을 받는다. 63세의 신인작가는 남편과 사별한 후 소설강의를 듣고 다시 8년이 지난 다음에야 이 책을 썼다고 한다. 5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썩 좋은 때가 아니라는 건 엄마를 봤기 때문에 잘 안다. 사춘기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 질곡의 노도를 보다보다 못견뎌 독립을 한 셈이니까. (물론 그 밖으로도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사춘기가 우울 속에도 성장하는 꽃봉오리라면 갱년기는 시든 나무를 보면서도 화분갈이조차 못한 채 손 놓고 있어야 하는 좌절감 같았다. 메마르고 푸석한 잎사귀가 사람 손에 닿기만 해도 바스라지는 것처럼 엄마는 자식의 관심조차 못견뎌해서 거리를 벌려주는 게 최선이었다. 일정한 시기가 지나고 거름을 채운 듯 엄마의 생기도 돌아왔지만 종종 그 때의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작가는 그런 시기에 남편까지 잃는다. 남편과의 사생활이 어땠는지 속속들이 알 순 없지만 반평생을 함께 한 사람을 저 세상으로 보내는 경험이 결코 가벼울리 없다. 그리고 그 무거운 마음 속에서 깨달은 어떤 바를 푹 고으고 양껏 떠내어 쓴 것만 같은 책이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였다.
74세의 모모코씨의 집. 모모코 씨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건강하던 남편은, 그래서 죽음에 대한 그 어떤 대비도 되어있지 않던 남자는, 한 순간에 세상을 떠난다. 아들은 모친의 지나친 관심과 구속을 지긋지긋해하며 독립했고 딸은 딸대로 모친의 자식 차별에 분노하며 연을 끊는다. 아무도 없다. 차를 마시고 밥을 해먹고 빨래를 널고 청소를 하는 그녀의 곁에는 바드득바드득 소리를 내는 쥐와 벌레들 뿐이다. 젊은 시절엔 무섭고 징그럽던 것들이 이제는 반가워지고 때때로 쏜살같이 지나가는 모습이나마 보려 먹이를 등 뒤로 던지기도 한다. 홀로의 노년은 이런 것이리라. 처음엔 그녀 이야기에 좀 서글픈가 싶었다. 그러나 곧 모모코씨 안의 수많은 기억들, 그녀 표현대로라면 융기 돌기의 존재들이 떠들어댄다. 토론하고 추리한다. 모모코 정말 그러냐? 정말로 외롭고 혼자인게 서글프냐? 사랑으로 보듬고 살았던 남편이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의 죽음 한켠에서 어떤 해방감도 느끼지 않느냐.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는, 어떻게 살든 혼자로 살아보고 싶다는, 그 자유를 만끽하게 되었지 않느냐. 그이가 인생에서 분명 중요한 존재였지만 적잖은 구속이었다는 사실을 남몰래 깨달으며 모모코씨는 미안해한다. 아이들의 도시락통은 버리면서도 어머니가 점심을 싸주시던 제 어린 시절의 튤립 도시락통은 결코 버릴 생각을 못했다는데서 아이들보다 자신을 더욱 사랑했던 마음도 깨닫는다. 아이들과의 관계를 이리 만든 것엔 반성이 들지만 자식을 돌보지 않아도 되는 지금의 심정엔 후련함도 있다. 74년이라는 시간을 분초로 나누면 읊는 것도 쉽지 않을 장대함일텐데 정작 그 안에 자신만의 시간은 거의 없었다는 자각. 노년을 불평하면서도 지금의 나는 무서울 것이 없다는 내면의 목소리. 인생을 옴싹달싹 못하게 만들었던 사랑들에서 벗어난 돌연한 기쁨.
그런 기분들에 점점이 빠져 한없이 모모코씨에게 끌려가는 시간이 날개짓한다.
(Ora Orade Shitori egumo)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를 번역가 정수윤님은 일본어를 모르는 나와 같은 독자를 위해, 또 모모코씨가 도호쿠 사투리를 쓰는지라, 그에 맞추어 소리나는데로 써주셨다. 미야자와 겐지의 시 속에 나왔다는 이 구절을 그녀가 그랬듯이 나도 주문처럼 외워본다.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 그 시절 자식조차 귀찮아하는 엄마를 이해 못했는데 엄마도 그런 심정이지 않으셨을까. 다 컸으니 제발 좀 알아서들 살아라.. 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젠 좀 혼자 있고 싶다, 누구 뒤치다꺼리 하지 않고 그냥 나만 있고 싶다, 걱정도 귀찮으니 나를 가만 좀 내버려둬라.. 하는 그런 마음이 엄마 속에도 있었던 거라면, 내가 그걸 좀 빨리 알았더라면 더 많이 배려하고 양보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인다. 엄마와 나 모두에게 일흔넷은 아직 멀리 있는 시간이지만 그때에 우리 모녀가 내 생은 이제부터다 라고 말할 수 있기를.
나침반처럼 모모코 씨의 말들과 생각을 가슴에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