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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라이즈 ㅣ 아르테 미스터리 16
T. M. 로건 지음, 이수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8월
평점 :
아이의 손을 잡고 높은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의미심장하다. 아니다. 어쩌면 높은 계단의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일까. 역광으로 그늘진 남자와 아이의 모습이 앞을 향한 것인지 뒤로 돌아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마치 앞으로 조셉의 앞에 펼쳐질 고난들처럼. 가파르고 혼몽한 속임수가 표지를 뚫고 책을 잡는 순간부터 독자를 향해 돌진해온다.
엄마보다 아빠보다 BMW와 아우디와 르노를 먼저 말했다는 아이가 엄마의 차를 한눈에 알아보는 건 어쩜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멀의 차가 호텔로 진입했다. 아내를 놀래켜주기 위해 부자가 멀의 뒤를 따른다. 목요일이었고 퇴근시간이었다. 장소가 호텔이지만 조셉은 조금도 아내를 의심치 않았다. 거래처와의 만남 때문일 게 뻔했고 조금 기다렸다 깜짝 이벤트처럼 아내 앞에 등장해 함께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진실로 멀이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 베스의 남편과 마주앉아 있을 줄은 몰랐다. 친밀한 접촉을 시도하고 대화하고 싸우다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뛰쳐나갈 줄은 진정 몰랐다. 결혼 십 주년. 누구는 거짓말이라고 할지 몰라도 조셉은 여전히 멀을 보면 가슴이 뛴다. 멀 또한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니 믿어야 했다. 제가 본 게 무엇이든 오해가 있을 것이기에 조셉은 멀을 쫓아나간다. 늦었다. 멀의 걸음이 너무 빨라 이미 그녀의 폭스바겐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남은 이는 벤. 베스의 남편과 대화해야 했다. 벤은 조셉과 마주치자 마자 험한 말을 뱉어내고 아무 것도 모른다며 그를 무시하더니 폭력을 행사했다. 조셉 입장에선 정당방위였다. 그저 차로 자신을 처박는 벤을 밀어내려던 것 뿐이었다. 그 자신이 한때 럭비선수였고 너무 큰 몸과 힘을 가지고 있기에 주의도 했다. 그럼에도 벤은 넘어졌고 쩌억 소리가 날만큼 머리를 크게 박았으며 곧이어 아래로 피웅덩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사고를 목격한 아들 윌이 천식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결코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건의 어느 순간 휴대폰이 실종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구급차도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모든 불운이 몰려오듯 윌은 숨 넘어가기 일보직전이었고 휴대폰은 사라졌다. 호텔에 호흡기가 있다고 예측하기도 힘들었다. 차를 몰고 집으로 달려갔고 호텔 주차장으로 돌아왔을 땐 벤도 벤의 차도 조셉의 휴대폰도 모든 게 사라지고 없었다.
"거짓말을 잘하려면 기억력이 좋아야 돼.."
아내를 취조한다.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믿고 싶어서다. 멀이 대꾸한다. 호텔에 간 적 없는데? 벤을 만난 적이 없는데? 다시 벤을 만나기는 했지만 일 때문이었는데? 그리고 다시 벤을 만난 것은 실은 벤의 협박 때문이었는데?그리고 또 다시 벤과는 키스 한번이 전부였을 뿐인데? "이 창녀 같은 년!" 이라는 욕설과 함께 벤이 숨겨둔 멀의 알몸 사진 수백 장을 베스가 들고오기 전까지 멀이 토해낸 거짓말이 몇 개이던가. 아내를 믿고 싶은 조셉은 매번 갱신되는 거짓말에도 또 매번 속아 넘어간다. 이것으로 멀의 거짓말은 끝이라고 믿었다. 이렇게까지 사람이 뻔뻔할 줄은 그도 몰랐고 독자인 나도 예상치 못했다. 거짓말 하는 사람의 기억력 따윈 문제가 아니다. 상대가 나를 믿고 싶어한다면 그 거짓말의 수준이 아무리 바닥을 칠지라도 먹힌다. 양심적인 사람은 비양심적인 인간의 바닥따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조셉이 그 증거다. 그 사이 잠적하여 실종신고까지 들어간 벤은 조셉의 휴대폰으로 페이스북을 조작하고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리겠다고 협박하고 조셉의 가정의 깨트리겠다고 장담하며 네 아내는 내것이다 따위의 도발을 전화와 메신저, 메일 등으로 수시로 건내온다. 그러니 조셉은 벤이 살아있으리라 여긴다. 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경찰의 의심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 모든 증거를 조작으로 몰고 자신을 벤의 살해용의자로 올리는 경찰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벤은 살아있다. 조셉에겐 증거가 있다. 그러나 조셉의 눈에만 보이는 증거다. 조셉이 화자이기에 조셉이 내보이는 이 증거가 사실인지 아내를 뺏기고 싶지 않아하는 편집증적인 남편의 집착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신뢰는 깨졌지만 아내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는 남편의 무한한 사랑과 끝도 없는 믿음이 경이롭기도 했다. 멀의 뻔뻔함에 기가 차면서도 숨어버린 벤의 목적과 행위가 지나쳐 전개가 오리무중처럼도 비춰졌다. 그러다보니 또 밤을 꼴딱. 가정을 지키려는 순정남의 초인같은 의지가 새삼 빛나는 시대, 저 남자의 사랑과 마주한 여자와 아이가 조금 부럽다. 놀라운 반전도 그 부러움을 상쇄시키지는 못했다. 과연 이 반전을 예상할 수 있는 독자가 한 명쯤은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