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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ㅣ 비주얼 클래식 Visual Classic
제인 오스틴 지음, 박희정 그림, 서민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7월
평점 :
꼬박 1년 하고도 5일 만에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2017년에 시공사의 제인 오스틴 사후 200주년 특별판으로 만났던 <오만과 편견>에 이어 18년인 올해엔 박희정 작가의 일러스트가 수록된 위즈덤하우스판 <오만과 편견>을 만납니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매력적인 사양과 표지에 설레고 익히 알고 있지만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책을 펼칩니다. 그 시절 영국 사회의 모습 특히 혼인에 관하여 매우 함축적으로 표현해주는 명문도 한땀한땀 손으로 짚어가며 읽습니다
" 재산이 많은 남자가 미혼일 경우 사람들은 누구나 마치 당연한 진리처럼
그에게 아내가 필요하다고 믿는다.(p9)"
"부유한 남성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이다." 의 시공사 번역과는 또 조금 다른 느낌입니다. 백에 가까운 페이지 수 차이의 원인도 알게 하구요 :) 어쨌든 책을 읽어갈수록 부유한 남성이 아니라 실은 미혼 여성, 특히 상속재산이 없는 여성에게 재산이 많은 남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알게 되므로 이제는 첫문장에서부터 시니컬한 작가 특유의 유머를 느낍니다. 어쩌면 그녀는 이 문장을 쓰면서 그녀의 작은 이동식 책상에서 콧방귀를 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신 또한 미혼에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에게 의탁해야 하는 신세였으니까요. 제인 오스틴과 같이 미혼이지만 남자 형제가 없어 미래가 더욱 불투명한 베넷 가의 다섯 자매는 이웃 네더필드 파크가 빙리가에 임대되었다는 소식, 그가 영국 북부의 상류층 젊은이이며 일년 수입이 4, 5천 파운드나 된다는 사실에 흥분합니다. 특히나 베넷 부인은 자매들을 빙리와 혼인시킬 생각으로 아주 분주해지지요. 천사처럼 아름다운 미모에 마음씨가 좋은 첫째 제인, 영리한 머리와 재치있는 말솜씨를 지닌 둘째 엘리자베스, 학구파 셋째 메리, 베넷부인을 빼닮아 허영과 수다가 극심한 넷째다섯째 키티와 리디아는 엄마의 등살에 밀려 또는 자의로 결혼원정대에 몸을 실습니다. 그리고 시끌벅적한 대저택 네더필드의 무도회장에서 제인과 엘리자베스, 빙리와 빙리 이상으로 부유한 친구 다아시가 운명처럼 마주하지요. 누가 봐도 호감형인 제인과 빙리는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이끌리지만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만남은 안타까울 정도로 극악, 어떻게 보면 상극이었달까요.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다아시는 엘리자베스와 춤을 추라는 빙리의 권유에 "그럭저럭 봐줄 만은 하네. 하지만 내 마음에 들 정도로 매력적이지는 않아. 그리고 다른 남자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여자한테 관심 보이고 싶은 생각 없어."(p22)라는 말로 엘리자베스의 어처구니를 빼놓습니다. 자존심 강한 리지는 절대로 그와는 춤추지 않겠다고 결심하고요. 그러나 그 남자의 오만과 그 여자의 편견 속에서도 로맨스는 착실하게 싹을 틔워 다아시는 리지에게 끌려가는 제 모습에 당황하게 됩니다. 리지의 지성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아픈 언니를 찾아 3마일을 넘게 걸어온 그녀의 흐트러진 얼굴은 또 얼마나 생그럽던지요. 제게 잘 보이려는 많은 여자들 사이에서 까칠하고 솔직하고 털털한 리지의 독특함에 눈으로는 자꾸만 그녀를 쫓고 발걸음은 절로 리지에게로 향합니다. 혼인이 아니면 자존심을 지킬 수도 생계를 유지할 수도 없는 미혼의 여성이 일등 신랑감인 자신의 청혼을 걷어찼을 때 이러한 매력은 더욱 폭발해서 하늘이 뒤집히는 것과 같은 충격으로 다아시는 리지에게 빠져듭니다. 반면에 리지는 한번의 대화로 활짝 마음을 열게 된 군인 위컴에게 들은 다아시의 과거와 제인과 빙리를 갈라놓은 다아시의 방해공작에 그를 매우 미워하게 되지요. 그의 청혼에 한편으로 우쭐하면서도 결코 그를 좋아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설마하니 그 위컴과 막내 리디아가 달아나 그녀 가문의 명예가 시궁창에 처박힐 위험에 처하고 다아시가 해결사로 나설 줄을 꿈에도 모른 채 말입니다. 가슴 벅차게 아름다웠던 펨벌리 정원에서의 재회, 원수와도 같은 동생 리디아에게 뻗어진 구원의 손길, 차츰차츰 겸손해지고 성숙해지는 다아시의 인격에 반해 마음을 열게 된 엘리자베스와 새벽길을 열며 빙리와 함께 베넷가를 찾은 다아시의 결합에 미소 짓기까지 결국 저는 두 번째 독서에서도 밤을 꼴닥 새버렸습니다. (내일 아니 오늘 출근은 어쩐담;:)
샬롯 브론테의 평처럼 소설 오만과 편견 속 커플들의 사랑에는 확실히 정열은 부족한 느낌입니다. 영화 속의 낭만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두 커플의 애정은 조금 밋밋하기까지 하죠. 대신에 19세기 상류층 여성과 남성의 허영을 속 시원할 정도로 꼬집고 미혼 여성들의 배우자 찾기를 밝고 유쾌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려놓는다는 점에서 전 이 책이 정말 재미납니다. 제인 오스틴 소설 속에 언제나 등장하곤 하는 속물적인 인간들조차도 이젠 밉지가 않고 애정이 가요. 그 베넷 부인조차도 가끔, 아주아주 가끔 귀엽게 느껴질 때가 있었으니 말 다했죠. 무엇보다 "가장 행복하고, 가장 현명하며, 가장 합리적인 결말로!"(p528) 맞이하는 끝이 매우 취향이란 말씀! 상상력을 북돋는 일러스트와 함께 한시도 지루하지 않은 고전 오만과 편견을 꼭 한번 만나보시길 추천합니다.
재산이 많은 남자가 미혼일 경우 사람들은 누구나 마치 당연한 진리처럼
그에게 아내가 필요하다고 믿는다.(p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