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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 챈스의 외출
저지 코진스키 지음, 이재경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8년 9월
평점 :
"챈스는 결국 글을 깨치지 못했다. 남들이 그에게 하는 말이나 그의 주변에서 떠드는 말들도 대게는 이해하지 못했다... 챈스는 하라는 대로만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이상자들이 가는 특수시설로 보내지고 감방에 갇히고 세상에서 잊히는 신세가 된다. 어르신이 한 말이었다." (p16-17)
"자네는 딱 부러져. 자네는 상황 판단이 빠르고 , 그걸 숨김없이 말해. 스스로도 알고 있겠지만." (p61)
고작 50여 페이지만에 한 사람에 대한 평이 이토록이나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 신기하다. 정원사 챈스.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고 어르신의 집에 입양되어 자란 티비 밖에 모르는 청년. 그는 정원을 벗어나 집 밖으로 벗어난 적이 한번도 없다. 하녀인 루이즈를 제외한 다른 고용인과의 대화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어르신은 끔찍할 정도로 챈스를 가둬 키웠고 챈스는 그 집의 정원과 함께 성장하며 티비만을 벗했다. 어르신이 죽기 전까지, 일 원 한 푼 받지 못한 채 어르신의 가방 어르신의 양복 어르신의 구두를 신고 집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챈스는 이름없는 꽃이었다. 출생증명서도 없고 주민번호도 없고 운전면허증도 없고 의료보험증도 없고 세금 납부는커녕 과태료 한번 물어본 적 없는 인생이 이 복잡한 세상을 어떻게 버텨낼지 독자인 나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설마하니 185 페이지로 완결이 나는 책을 만들기 위해 작가 저지 코진스키가 매우 재빠르게 챈스를 전복시킬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집에서 나오자마자 교통사고라니, 교통사고를 낸 자동차의 주인이 챈스를 집으로 모셔갈 정도로 마음씨가 좋았다니, 그 주인의 남편이 미국제일금융의 이사회장으로 대통령과 개인면담을 나눌 정도의 지위라니. 그런데 그런 사람이 챈스, 랜드의 부인 EE의 귀 이상으로 이제는 촌시 가디너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챈스를 매우 똑똑하고 신중하고 현명한 비지니스맨으로 판단하다니. 풍자도 이 정도면 풍작이다. 챈스가 걸치고 나온 꽤 부자였던 어르신의 물건들이 오해의 발단이었고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침묵하거나 티비에서 본 것을 흉내내거나 지적장애로 인해 상대방에게 온전히 공감하지 못하는 평정 등이 절정을 이끌었다. 결말은 더욱 기가 막히다. 정원사로 자라 오로지 정원일 밖에 모르는 챈스가 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되니 말이다. 챈스는 그저 정원사로사의 경험을 말한 것 뿐인데 듣는 사람들이 저들 듣고 싶은 대로 의미 부여를 하더니 어마어마한 환호를 보낸다. 예컨데 "정원에서는 모든 게 자랍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선 시들어야 합니다. 나무가 새잎을 내고 더 굵고, 더 튼튼하고, 더 높게 자라려면 먼저 낙엽이 져야 하죠. 그 과정에서 어떤 나무는 죽지만, 어린 묘목들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정원은 많은 보살핌을 필요로 해요. 하지만 정원을 사랑하는 정원사는 거기서 힘들여 일하고 기다리기를 마다하지 않아요. 그러다 적당한 계절이 오면 반드시 번창하는 정원을 보게 됩니다."(p92) 등을 미국 대통령이 인용하여 어려운 미국 경제의 해답으로 내어놓더니 언론은 이 남자의 말을 부추기며 뒤쫓고 대중은 열광하며 희망을 그린다. 미국과 소비에트 모두가 챈스를 뒷조사한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다. 어떤 증명도 개인사도 찾아내지 못한다. 그게 또 오해를 부른다. 희극인 동시에 비극이다.
모든이들이 챈스를 부르는 연회장을 벗어나 챈스는 정원의 한가운데서 차오르는 평화를 느낀다. 이것으로 소설은 끝. 그러나 챈스의 엔딩이 이로써 끝날리 없다. 챈스의 맞은편에 앉아 챈스를 제멋대로 관람하는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챈스의 평화를 깨는 결말을 가져오지 않을까. 하나의 몸짓으로 끝나고픈 인생도 있는 법이라고, 무엇도 되고 싶지 않은 무엇도 있는 법이라고, 그것이 내 적합한 이름이 아니라면 누구도 내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챈스는 또 작가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김춘수의 시 <꽃>을 떠올리게 하는 짧고 조금은 어리둥절해지는 풍자소설이었다.
** 주제와 별개로 인상적이었던 구절. 한 출판사에서 챈스에게 책을 출간하자고 요청하며 나누는 대화.
"나는 읽지를 못해요."
"물론 그러시겠죠!" 스티글러가 외쳤다. "요즘 누가 읽을 시간이 있나요? 그저 다들 훑어보고, 말로 때우고, 듣고, 볼 뿐이죠. 가디너 씨, 출판인이 할 말은 아니지만, 요즘 세상에 출판업은 딱히 꽃피는 정원이 아니랍니다."
"그럼 어떤 정원인가요?" 챈스가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음, 과거에 어떤 정원이었든 지금은 아닙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자라고, 여전히 확장하고 있죠. 하지만 너무 많은 책들이 잡다하게 나와요. 거기다 불황에, 경기침체에, 구직난까지...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더는 책이 팔리지 않아요." (p141-142)
이 책은 1970년도에 출간되었다.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그리스의 어느 낙서처럼 (맞나??) 출판사들도 혹시 아주아주 옛날부터 매해 이런 불평을 해온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