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편지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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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편지는 일본군 '위안부'였던 소녀 금자가 어머니께 부치는 편지로부터 시작합니다.

어머니, 나는 아기를 가졌어요.
오늘 새벽에는 초승달을 보며 아기가 죽어버리기를 빌고 빌었어요. 변소에 가려고 마당에 나왔다가요. 초승달에 낀 흰 달무리가 몽글몽글 떠오르는 순두부 같아 나도 모르게 입을 벙긋 벌렸어요. 그것을 먹으려고요.

어머니, 나는 아기가 죽어버리기를 빌어요.
눈동자가 생기기 전에.....
심장이 생기기 전에..... (p7)

이름도 모르는 어머니께로, 주소도 모르는 꼭 제비집만 같던 고향의 집으로, 검지의 손톱만 살그마니 담가 강물에 흐르는 편지를 씁니다. 풀물 같이 씻겨내려가는 삿쿠(일제강점기 군용콘돔)을 물에 헹구어내며 15살 소녀가 쓰는 편지 속에는 오로지 아기와 그리운 어머니 뿐입니다. "어머니, 아기는 벌써 심장이 생겼는지도 몰라요... 어머니 어머니.." 하고. 아기가 죽기를 바라면서도 아기의 영혼이 혹 닫힌 창문에 막혀 들어오지 못할까 겁먹는 순진한 소녀는 어머니가 싸주신 까만 광목 보자기를 쥐고 집을 나섭니다. 치마 한 벌, 무명 솜저고리 한 벌, 낡은 버선 한 켤레, 새로 지은 광목 버선 한 켤레, 그 위에 치마저고리를 새로 해주지 못한 어머니의 아쉬움과 걱정을 가득 담고서요. 비단 짜는 공장에 취직해 얼른 어머니께 돈 보낼 생각을 하니 치마가 폴싹일 정도로 설레던 발걸음. 함께 온 맹순언니의 백설기를 나누어 먹으며 희망을 꿈꾸던 금자의 나이 고작 열 셋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 긴 밤의 시간을 지나 세계위안소에서 시작한 여정이 낙원위안소를 가로지릅니다. 어쩌다 아기도 생겼습니다. 검은 밤 속에 꼬옥 눈을 감고 흔들리던 날에는 뱃속의 아기도 함께 눈을 감기를 바랐습니다. 엄마의 얼굴을 보지 않기를 바라면서요. 엄마가 버텨야 할 상대를 보지않기를 바라면서요. 죽은 군인들과 죽어가는 은실을 보지 않길 바라면서요. 그렇게 아기에게 눈이 생긴 줄을 알았습니다. 아기에게 입이 생긴 것도 압니다. 먹으면서도 배가 고픈 것이 보리밥 한 알, 묵은 단무지 하나, 물 한 방울까지 아기가 고스란히 삼켜서임을 알게 됩니다. 아기에게 발이 생긴 것도 알아채지요. 그들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들어오지 말라고 고함치는 뱃속의 아기 발길질을 느끼니까요. 눈도 코도 입도 손도 발도 심장에 영혼까지 모두 생겼을 아기를 품고 금자는 더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부른 배를 안고 탯줄을 자를 가위를 준비합니다. 눈이 먼 금실 언니의 삿쿠까지 씻어놓고서 오늘은 다시금 그리운 편지를 씁니다.

어머니, 오늘 밤 나는 아기를 낳을지도 몰라요.
닭띠 아기를요. (p291)

금자가 23번이 되고 후유코로 불리워졌던 많은 시간들을 저는 그저 생략하려고 합니다. 이 짧은 리뷰로 그 시간들을 모두 불러올 수도 없거니와 고통을 요약하는 것조차 죄스럽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낙원이라 불리었던 소설 속 무수한 일본군 '위안부'의 자리를 읊어봅니다. 중국 하북성의 석가장, 중국 무안 적경리, 중국 하북성 한구, 중국 흑룡강성의 동안성, 중국 훈춘, 중국 북경 진송. 삼백 남짓한 페이지 속에도 끝순이와 금실은실 자매, 악순 언니, 연순 언니, 에이코 언니 그리고 수많은 금자들이 떠돌았던 지옥이 이렇게나 많습니다. 지옥의 삶을 떠올리면 나는 다시 또 슬프고 눈물이 납니다. 그래서 웃을 일을 생각합니다. 금자의 닭띠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겠지 하고요.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기의 생존을 바라게 된 금자 또한 무사히 살아 어머니의 하늘 아래로 돌아갔겠지 하고요. 틀림없이 아기의 돌잔치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달무리 같이 몽실몽실한 순두부에 식혜, 시루떡, 송편, 토란국, 동지 팥죽, 수제비, 곱게 빻은 멥쌀가루에 버무려 찐 쑥버무리, 설탕 버무린 검정콩이 박힌 맹순언니의 백설기"가 상에 올랐을 겁니다. 어머니 손맛 가득한 동치미 무에 가마솥 찐고구마도 빼놓지 않습니다. 무청김치를 금자의 고구마 위에 돌돌 말아 올려주고 싶습니다. 아기가 방긋 웃는 상에 우리 다같이 빙그레 웃는 고소하고 배부른 상상입니다. 남의 피묻은 몸빼가 아니라 어머니 새로 해주신 실팍하고 톡톡한 치마저고리를 입은 금자의 모습도 눈에 훤합니다. 모든 날의 행복은 장담할 수 없어도 어느 하루는 틀림없이 따뜻하고 기뻤을 겁니다. 살았으니까 살아남았으니까 지금 우리가 이 일에 대해 다시 얘기할 수 있으므로 틀림없이 울음 보다 웃음이 더 많은 인생이 기다렸을거라고. 그러나 이제 남은 시간이 길지 않으므로 하루 빨리 모든 반성과 사과가 가슴을 씻듯 쏟아져서 더 크게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도 바래봅니다. 금자의 흐르는 편지가 제 마음에도 흘러 읽는 내내 정말 미칠 것만 같았지만 지금은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가 우리들 마음과 정치와 사회의 강에서 강으로 흘러 저기 바다 건너 땅에도 꼭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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