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과 다리의 가격 - 지성호 이 사람 시리즈
장강명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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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자들이 그저 눈을 감고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 잘못 없이 굶어 죽은 비극에 대해 더 슬퍼해주기를 바란다. 그런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 그게 누구의 책임이었는지 아는 것은 뒤로 미뤄도 된다. 비난의 대상을 찾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먼 미래로 연기하거나, 아예 하지 않아도 되고." (p9, 이 책을 쓰는 이유에 대하여)

1990년대 초반 학포탄광마을에 살았던 소년 성호의 이야기는 배경을 남한, 시대를 1960년대 정도로 바꾸어도 별로 어색하지 않을만큼 익숙하고 친근하고 정감가는 것이었다. 마을에 열 집 남짓하게 밖에 없는 흑백 텔레비젼, 티비에서 영화가 상영될 때면 발디딜 틈 없이 모여드는 마을 사람들, 김일성김정일의 생일이 되면 학교에서 배급하는 과자선물과 어려운 살림에 술이 마시고 싶을 때면 어머니 눈치를 봤던 아버지, 할아버지 댁에서 양껏 먹은 감자와 옥수수, 성공한 큰아버지와 고모부가 몰고 왔던 자동차, 어른들 몰래 송이버섯을 캐어 처음으로 장만한 중국제 운동화, 군인으로 진학할지 말지 고민했던 무수한 희망의 고민 같은 것들에 나도 모르는 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살아본 적도 없는 시대에 그리움이 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평화롭고 소박하고 모두가 근검했던 나날들은 매우 가파르게 깨져버렸다. 1993년 즈음, 제날짜를 어긴 채 식량배급이 이루어지는 날들이 늘어갔다. 94년 학포탄광마을에도 콩을 훔쳐 총살 당하는 두 명의 도둑이 생겨난다. 그 해 여름 '이번 달에는 배급이 없다'는 공문과 함께 학교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누구누구가 굶어죽었다는 소문까지 들려온다. 95년 배급은 완전 중단되었으며 실제로 성호와 가족들의 곁에서 굶어죽는 이들이 생겨난다. '고난의 행군'이었다.

처음에는 관을 짜서 가족을 묻던 이들이 어느 날부터는 널빤지에 헝겊 한장 대충 말아 시체를 정리했다. 죽는 이가 너무 많아 슬픔은 습관이 됐다. 관은 낭비, 사람들은 장례를 치른다고 하지 않고 직파한다고 했다. 옥수수 심듯 땅에 내던져지는 시체들이었다. 북한 사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붕괴되었는지는 말할 것도 없고 여기 성호, 이 소년의 평범했던 소년기도 무참히 파괴됐다. 집을 잃었고 도둑놈이 되어버린 삼촌으로부터 뒷통수를 맞았으며 먹고 살기 위해 석탄을 훔치다 기차에 한 팔과 다리를 빼앗겼다. 마취제도 없이 수술을 받고 뼈가 보일 정도로 곯아버린 상처에서 피고름을 닦아냈다. 그렇게 그가 살아나는 동안, 살아야겠다고 결심하여 일어나는 동안 어머니가 누이동생이 아버지가 떠나갔다. 소년은 하나 밖에 없는 팔과 하나 밖에 없는 다리로 두만강과 메콩강을 건너 한국으로 왔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픽션이 아니다. 소년 성호는 실존인물이며 2006년 막냇동생과 함께 탈북해 현재는 NAUH의 대표로 북한 인권에 앞장서는 인권 운동가로 활동 중이다. 장강명 작가는 이야깃거리를 구해 한 모임에 나갔다가 지성호 대표를 알게 되어 그의 실화를 바탕으로 이 소설을 쓴다. 아무 잘못없이 굶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독자인 우리와 함께 슬퍼하기 위해서.   

130 남짓 짧은 소설이지만 강력했고 강렬하다. 처음엔 너무 얇다 했는데 이보다 더 길었다면 나는 진작에 읽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내가 쉽게 소화할 수 있는 피폐함이 아니었다. 슬펐다. 슬프고 끔찍하고 몸서리가 쳐졌다. 누구는 33만 누구는 100만 누구는 300만이 죽었다고 말한다. 1994년 우리가 지독한 폭염으로 기억하는 그 한 해 동안 북한에서는 굶주림으로 인한 사상자가 매일 삼백명 남짓하게 발생했다고.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책을 읽으며 울었다. 겪어본 적 없는 굶주림이 폭력처럼 등을 때리고 갔다. 문을 열면 시체가 내 발에 채일 듯이 성호의 고백이 현장감을 몰고 왔다. 배가 부풀고 괄약근이 풀려 악취를 풍기는 아사한 시체가 떠올라 괴로웠다. 신문으로 교과서로 티비에 나오는 탈북자의 농섞인 회고로 접했을 땐 느껴보지 못한 진저리, 소설의 힘, 공감 속에서 발버둥쳐야 하는 시간이었다. 나를 위로하는 것은 다시 성호였다. 몸을 세우지 못해 다리를 질질 끌어 다가간 창가에서 맞은 봄. 세상 참 아름답구나 했던 성호의 깨달음. 한 팔과 한 다리를 잃은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고 결심한 성호의 미소와 의지. 책을 덮고 창밖을 본다. 94년의 여름처럼 덥고 하늘이 맑았다. 모두에게 아름다운 여름이기를. 정말로 아름다운 계절이기를 새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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