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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기원
천희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5월
평점 :
고독하고 음울한 죽음의 동화. 63빌딩 꼭대기까지 솟았던 휴일 앞 즐거움이 영의 기원이라는 싱크홀에 순식간에 잠식된 느낌이다. 우울할 때 읽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기승만 있고 전결이 없는 이야기들은 역시 힘들다는 한숨과 내 머리가 나쁜 건지 유독 이 책에서만 이해력이 딸리는건지 단편단편이 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불만과 이렇게 질척질척한 감성과 문장에 휘둘려보기도 오랜만이라는 감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과 환상과 SF라는 좋아하는 세계관 속의 이야기라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는 안도와 들려주고픈 이야기가 이게 정말 다였을까 단편이라 지나치게 쳐낸 가지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과 타인의 유서를 내내 읽고 있는 것만 같은 두려움과 죄책감이 뒤엉킨 밤. 이대로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감상 그대로를 여운으로 간직할지 작품해설을 읽어 조금이라도 뜻이 통하는 상태로 기억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우리는 그가 이해하는 바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그가 자신을 완전히 삼켜버리도록 늪과 같은 그림자 속에 자신을 던진 바, 그의 아내가 보여주려 하지 않았기에 드러나지 않았던 그 사건들처럼, 그가 스스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것을 우리 또한 결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에는 언제나 미리 삭제된 몇 개의 장면이 존재하며,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삭제된 바로 그 장면들이다. 나는 영원히 달아나지 못한다. 다만, 이제 불을 끌 시간이다. (p303, 화성, 스위치, 삭제된 장면들)"
창백한 무영의 정원 ("나는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 사랑해. 용서해 줘. 사랑해")
샤말란 감독의 영화 해프닝을 떠오르게 하는 단편. 의문의 전염병이 세상을 덮쳤다. 원인불명의 병은 순식간에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산발적인 죽음의 공포 속에서 B,C,D,E는 자살을 공모한다.
예언자들 ("종말은 불시에 찾아오지 않았다. 종말의 날짜가 모두에게 공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종말이 도래하리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예상보다 너무 멀리에 있다는 데에 당혹감을 느꼈다.")
종말이 예견되며 폐허가 되어버린 세상. 무대에서 달아난 바이올리니스트와 사형을 언도 받고 교살 당했던 남자가 깨어나 성당 앞 흘러내리는 음악 속에서 마주친다. 사과나무를 심고자 하는 낭만은 없으므로 세상에 종말이라는 게 온다면 그때의 오늘이었으면 좋겠다.
영의 기원 ("왜 자정을 0시라고 부르는 걸가. 마치 시간이 완전히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간의 측량이 불가능해지는 순간이 오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자살하기 전날 밤 잔뜩 술에 취해 나를 찾아온 친구 혹은 남자친구 영. 그가 식탁 위에 올려둔 시들지 않는 꽃과 컵, 돌아가는 길 문고리에 걸어둔 편지지 여섯 장과 볼펜 한 자루, 술 같은 것들을 내내 생각하고 있는 "나"의 이야기. 그가 쓰지 못했던 유서의 첫머리를 남은 '나'가 내내 골몰하고 있다.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 ("비열한 글쓰기란 그저 쓸 수 없는 것을 쓸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는 것.")
어느 여성의 자살을 목격했던 작가와 자살한 여성의 딸이 주고받는 편지들. 그들의 만남, 가족이 되고 부모처럼 자식처럼 함께 해온 세월을 엿보는 일이 따뜻했다. 레즈비언이라는 또 고아라는 딱지 속에서 각자가 짊어져야했던 짐들에 공감하며 순순한 마음으로 읽어내렸던 시간의 반전. 이토록 비열한 글쓰기는 영원히 성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신앙의 계보
잠들지 못하는 신부 P의 앞에 등장한 어린 소년. 학대 당했던 아이와 학대 당하고 있는 아이의 만남이라고 해도 좋을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신부님의 상상일런지 너무 오래 잠들지 못했던 신부님의 시각을 믿을 수가 없어서. 소설 속 좀체로 어려운 결말 중에서도 더욱 어려운 결말로 혼란을 준 단편.
경멸 ("나는 결백합니다. 그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기다려보십시오. 그가 곧 살아날 겁니다.")
죽지 않는 화가와 호기심으로 그 화가에 얽혀버린 기자의 며칠밤.
여덜번이나 칼에 찔린 그가 정말 곧 살아났을까?
사이렌이 울리지 않고 ("형인은 수진을 난도질하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수진의 몫은 그저 어둠 속에 매달려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는 형인의 모습을 목격하는 일 뿐이다.")
모욕 당하는 삶에 대하여. 형인은 고객의 시험접수 처리에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충분한 사과에도 불구하고 원장과 학부모에게 부당한 대우를 당한다. 시험을 치르고 돌아오는 학생을 공항까지 마중가라는 윗선의 지시, 수진을 태우고 돌아오는 길 형인이 꿈꿨던 복수, 나약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고작 그 정도의 범죄...를 형인은 완성할 수 있었을까?
화성, 스위치, 삭제된 장면들
화성 여행을 다녀온 아내의 자살. 아내의 흔적이 가득한 안방에서 잠들지 못하던 그는 곧잘 아이의 방에 몸을 누인다. 장성한 아이를 대신하여 짐을 정리하던 때에 발견한 아내의 일기장과 찢겨진 페이지들에 대한 의문, 뜬금없이 튀어나온 화성탐사선에서 발견한 석장의 편지와 그의 화성 여행, 화성에서 실종되었다는 사람들의 그림자에 뒤얽힌 역시나 수수께끼 같은 결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