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죽으러 갑니다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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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살고 싶었어."
매번 그랬다. 번개탄 가스 속에서 기어 나올 때도, 하이타이를 먹고 토해 낼 때도, OOO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때도, 살고 싶어서 발버둥쳤다.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건 살고 싶어서였다. 이 한심스러운 인생을, 답답한 가슴을 죽고 싶다는 말을 토해내는 걸로 버텼던 것이다. 그런 속내를 태성 스스로도 이제야 깨달았다. (p350)

그대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지? 최초의 기억이라니 그런 게 존재하기는 하나? 나는 없다. 물론 어린 시절의 몇 몇 기억을 못떠올릴 것은 없지만 뭐가 최초인지는 구분해 내기 어렵다. 그러나 여기 <지금 죽으러 갑니다>의 주인공 김태성은 인생 최초의 기억이 무엇인지 또렷히 기억한다. 빛으로 환한 천장, 마주쳐오는 간호사의 눈, 깜짝 놀란 그녀가 그를 등지고 뛰어가는 장면. 순간 이 장면을 엄마 뱃속에서 나온 때라고 착각하여 천재 주인공이 등장하나 보다 했는데 아이쿠 알고 보니 기억상실증 환자였다. 아버지의 부도, 사업빚, 부모의 자살결심, 그 와중에 무능력한 백수 아들도 함께 데리고 떠나자 라는 의식의 흐름은 크게 낯선 것은 아닐터다. 자녀를 소유물처럼 생각한 부모가 삶을 끝낼 때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경우가 없진 않아서 종종 뉴스에 등장하곤 하니까. 물론 그 아이가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었던 경우는 극히 드물었던 것도 같지만. 연탄불을 피워놓고 아들이 죽으면 다른 곳에서 함께 죽음을 맞이하려던 태성의 부모는 존속살인미수로 감옥에 갔고 그 사이 태성은 병원에서 홀로 눈을 뜬다. 경찰이 가져다준 신문으로 제 사연을 알고 난 후 그저 약간의 우울감만 안은 채 기초수급생활자가 되었다. 드라마 서울의 달에 나왔던 것 같은 가난한 동네에 기거하며 하루하루 빌어먹고 사는 삶. 죽고 싶은 이유도 없지만 딱히 살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자살을 결심한다. 더 헤븐, 자살을 소원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인터넷 카페를 발견해 소개글을 올리고 동반자를 찾던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온 카페의 회장 메시아. 그의 도움으로 회원을 결집해 집단자살을 위해 달려간 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당장의 죽음이 아니라 번듯한 집 한 채였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 행복한 시간을 갖자는 메시아의 부탁 앞에 당혹과 의문, 불만을 토해내는 회원들. 인생 끝에 선 너희를 위해 시간과 돈과 정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회장의 목적은 무엇일까. 죽기로 결심했던 이들 앞에 놓인 예비된 5일의 시간 속엔 메시아의 말처럼 만족할만한 행복이 존재했을까. 행복을 경험한 이들이 과연 죽음을 선택할 수는 있었을까. 지금, 그들은, 죽으러 간 게 맞기는 한 것일까????

"정말 어이가 없네. 행복하게 죽는다고?"

 / 죽은 사람이 매일 밤 찾아오는 그 고통을 누가 알까, 왕따 여고생 최린
"가죠. 우리 계획대로 죽어요. 지금."

 / 몇 번이고 죽기로 결심했지만 이런 식의 죽음은 아니지, 기억상실환자 김태성
"각자 유서부터 작성하실까요?"

 / 잘 생기고 돈 많고 자신만만한 남자는 어떨 때 죽음을 결심할까, 대기업외손자 한동준
"그럼 너 먼저 죽어, 바로 여기서"

 / 죽으러 온 남자가 무슨 짐이 이렇게 많은지 꿍꿍이 속이 궁금해진다, 작가 정태오
"저...... 안 죽으면 안되나요?

난 억울해 까짓 인생 행복 한번 못누려보고, 성폭행 피해자 민서라

죽기 위해 모인 천국의 다섯 회원이 맞이한 3일의 밤 (왜 5일이 못되었는지는 책으로 확인하시길) 축축한 긴장감에 몸서리가 쳐진다. 하필 오늘 비까지 와서 더 을씨년스럽다. 각기 다양한 사연으로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 어릴 적 언제쯤엔가의 나는 그런 그들을 한심해 했던 적이 있었다. 죽기로 결심한 그 마음으로 살지 라고 손쉽게 말하기도 했었고. 그러나 벽을 타고 넘어 다리에서 자살하던 사람들을 두고 하루(중력 삐에로/이사카 코타로)가 말했듯이 누군가에겐 다리에 있는 벽을 넘어서는 일보다 인생의 벽을 넘어서는 일이 더 힘들지도 모름을 알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각각의 사연을 편견없이 납득하고 더는 그들의 힘듦에 경중을 따지지 않기로 한다. 죽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저렇게 죽을 이유도 없다고 태성의 마음에 동조하여 응원도 해본다. 연쇄 자살 사건을 뒤쫓는 정의로운 경찰들의 짧막한 참견이 빚어낸 반전도 놀랍고 주인공 태성의 집착없는 삶의 태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뜩이는 관찰력 앞에서 깜짝깜짝하게 되는 미스터리 소설. 한국 미스터리를 많이 못읽어봐서 비교는 어렵지만 이 정도면 수작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내 기준 재미가 확실해서 아주 좋았다. 작가의 전작 봉명 아파트 꽃미남 수사일지도 책장 어디인지 책탑 어디인지에 박혀있을텐데 얼른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참고로 태성은 꽃미남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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