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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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한 남자가 희생된 이야기이다. 학살과 전쟁과 폭력과 증오가 세상에 남긴 자욱을 지워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도발레 G의 인생, 그의 천일야화, 긴 긴 세월 주저리주저리 떠들어왔던 그의 밤 중 가장 마지막 밤의 한 자락에 도착해 문을 연다. 말 한 마리가 되어 술집으로 들어가 먼 발치의 빈 의자에 엉덩이를 올린다. 키가 작고 홀쭉하고 안경을 쓴 남자가 휘청거리며 튀어나온 무대 위 그의 관객이 되어 듣고 웃고 울고 관람하는 시간. 동의하고 항의하고 공감하고 분노하게 되는 도발레 G의 두 어 시간의 스탠드업 코메디 쇼. 시작은 이렇게,

"안녕! 안녕! 안녕하신가, 위풍당당한 도시 카이사리야아아아아아!"

아가 다섯개가 맞는지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시작하는 독서, 아니 관람, 도발레 아저씨의 공연에는 나 말고도 다른 많은 관객들이 존재한다. 도발레의 이웃집에 살았던 난쟁이 소녀, 어쩌면 도발레의 아이들일지도 모를 검은 가죽옷을 입은 두 바이커, 반짝 눈을 빛내는 숏커트의 여성, 그의 코메디가 짜증나서 자리를 박차는 대머리 아저씨와 그의 아내, 떠나려는 친구들에게 등을 돌린 채 다시 돌아와 앉는 젊은 여성 기타등등 그리고 여기 그의 쇼에 우리를 초대해 준 화자 아비샤이가 있다. 열네살 사춘기 시절 스치듯 도발레의 친구가 되었으나 괴롭힘 당하는 도발레를 외면하고 잊고 지워버린 고독하고 유약했던 소년이 아내를 잃고 고통과 허무에 빠져 살다 도발레의 공연을 관람한다. 자의는 아니었다. 어느 날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그를 이 자리로 이끌었다.

"나를 봐주면 좋겠어." 그가 격하게 토해냈다.
"나를 봐주면, 정말로 봐주면, 그런 다음에 말해주면 좋겠어."
"뭘 말해줘?"
"네가 본 걸."  

그렇게 시작한 쇼에서 도발레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터놓는다.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않았던 순결한 이야기, 그러나 결코 하얗거나 깨끗하거나 백지처럼 청순하진 않은 삶의 굴곡들이다. 유대인 대학살 속 폴란드 남자 세 명에게 상납하는 것으로 생을 이어온 여자와 그런 여자를 사랑하지만 끌어안는 행위조차 편하게 할 수 없는 남자의 만남.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구역을 휩쓸어 승전했다는 소식 앞에서 몇 시간이고 피부가 벗겨지도록 목욕하는 그 여자와 그런 여자에게 분노해 화를 폭발시키는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도발레였다. 날씨가 좋아도 간신히 158센티미터를 넘을 뿐인 왜소증의 소년은 양 손목에 깁은 자국이 있는 엄마를 웃게 만들기 위해 넝마를 뒤집어 쓴 채 쇼를 하고 물구나무서기로 거리를 내달린다. 집에서는 아버지에게 밖에서는 친구들에게 두들겨 맞고 학대 당하면서도 요정처럼 반짝반짝. 그랬던 아이가 캠프의 교관이 들고온 소식 한 자락에 마음을 잃는다. "고아."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고아"가 된 사정에 부딪힌 도발레의 앞에서 운전병은 유머를 늘어놓는다. 말 한 마리가 술집에 걸어들어와서 골드스타 맥주를 한 파인트 위스키도 한 파인트 테킬라도 한 파인트 보트카도 한 파인트 다시 또 맥주를 한 파인트.. 말 한 마리로 시작한 운전병의 유머는 도발레의 머리속을 꽉꽉 채우고 어쩌면 그의 영혼까지도 가득가득 채워버린 건지도 몰랐다. 한 파인트 또 한 파인트 너무 채워 도발레가 트럭을 튀어나가 구토할 때 영혼의 귀퉁이까지 함께 게워진 걸지도. 목구멍에서 쏟아지는 쿠키와 달걀과 살라미 샌드위치와 주스의 잔해를 헤치면 동전만한 영혼이 톡 튀어나오지 않았을까. 그걸 찾았다면 그는 취하지않고 비틀대지 않고 남은 인생을 잘 헤쳐나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인생이라는 술집에 참전하기에 그는 너무 어린 망아지였지 않은가. 술 같은 웃음으로 뇌를 씻기에는 너무너무 어린 소년이었지 않느냐고 나는 맨손으로도 잔해를 헤집어줄 수 있을 것만 같이 슬퍼져버렸다.

"살아 있는 거! 살아 있는 거! 살아 있는 거!
그냥 살아 있자는 게 얼마나 놀라운 생각인지 이해할 수 있어? 그게 얼마나 전복적인 것인지?"

그는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다 각기 엄마가 다른 다섯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었다가 다시 다섯 아이들의 양육비를 대는 헤어진 아버지가 되었다가 갈비뼈가 다 드러날만큼 홀쭉한 몸에 궤양으로 쪼그라든 피부와 반점을 단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오눌, 그가 태어난 날, 57세의 생일, 출생의 순간부터 모친과 함께 우울증을 앓아왔던 그가 엄마가 돌아가신 그날로부터 묻어둔 소년기의 영혼을 들춰 그 영혼 전부를 게워내는 쇼를 보여줬다. 첫관람은 너무 얼떨결이었다. 나는 이런 소설과 이런 쇼가 존재할 수 있는지조차 몰라서 다소 불편하게 엉덩이를 걸치고 이제나 끝날까 저제나 끝날까 하며 쇼의 막바지까지 안절부절 못했다. 웃기지 않는 유머에 조소하다 되려 그의 고통 앞에 웃음을 터트리게 되는 번역 문학의 모순 앞에서 헐떡헐떡 눈물을 꿀렁꿀렁 쏟아가면서. 좀 더 여유있게 너그럽게 읽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그러나 이것은 쇼이면서 책이라 언제든지 리바이벌이 가능하다.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진지한 관객이 되어 의자에 앉기를 결심한다. 이번엔 그의 가까이에 그의 눈물과 웃음을 코 앞에서 목격할 수 있는 바로 앞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들을 테다. 그리고 쇼를 관람하는 내내 바랄 것이다. 그가 배를 가르며 쏟아버린 이 이야기 대신으로 평안을 담고 돌아가는 밤을 맞았기를. 오늘도 부디 잘 살아 있기를.

"모두들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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