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2차 페인트를 진행한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오랜만에 2차 페인트를 하려니 마치 어릴 적 장난감을 꺼내 보는기분이었다. 뭐, 그만큼 포근한 상황은 아니지만 말이다. - P100
오래전이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십 대 부부가 센터를 찾아왔다. 재산과 직업, 자라온 환경 모두 빠질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 P100
두 사람이 돌아간 뒤, 박은 다른 가디들에게 남자에 대한 보충 조사를 요청했다. 남자는 주위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 성실하고 깔끔하며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게 전부일까? - P101
남자는 정리 정돈에 집착했다. 특히 물건을 정리하는 데 강박이있었다. 집과 자동차, 하물며 아내까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놓여 있어야만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 P101
면접 순서는 처음과 같았다. 음료를 주문하자 곧 헬퍼가 들어와 주스와 탄산음료 등 마실 것을 놓고 갔다. 남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하나는 절대 연락이 안 올 거라고 했어. 너 같으면 우리 같은 부모를 만나고 싶겠니라는 말까지 했다니까." 남자가 혼자서 키득거리는 동안, 여자가 주스를 쭉 들이켰다. "사실이잖아. 심리 검사도 간신히 통과.." - P102
"제가 부담스럽지 않으세요? 벌써 열일곱인데." 왜 나에게 관심을 보이느냐는 질문이었다. - P104
NC 출신들을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하는 시선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런 낙인 때문에 NC의 아이들이 그토록 열심히 부모를 만들려 하는 것이다. - P104
"나는 두 가지를 알고 싶어.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NC출신들이 문제가 많은지. 그리고 인격이 형성된 후에 부모를 만나면, 그러니까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어느 날 가족이 되면 과연 어떤 생활을 하게 될지. 그 이야기를 써 보고 싶어." (중략). 최였다. 놀란 세 사람의 시선이 최의 얼굴에 가닿았다. "그만 돌아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P106
"아이는 실험 대상도, 연구 대상도 아닙니다. 글의 소재는 더더욱......." - P107
. 최가 나를 바라보았다. "제누, 잊은 모양인데 우리는 너를 보호할 의무가 있어." "저는 지금 아무런 신변의 위협도 느끼지 않았어요. 불쾌감도 모욕도 느끼지 않았고요." - P107
최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가 원하니 할 수 없군요. 죄송합니다. 앉으시죠." 최의 사과에 남자가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여자도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숨을 깊이 내쉬었다. - P108
"우리는 사실 예행연습도 없이 나왔어. 많이 두서없었지?" 남자가 사과했다. •대부분 예행연습 없이 부모가 되잖아요." 나의 말에 남자가 놀란 눈으로 최를 곁눈질했다. - P109
"센터장님은 어디 계세요?" 센터장이라는 말에 최는 두통이 이는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하루 휴가를 냈어." 박이 휴가를? 주말에도 센터에 남아 있곤 하던 그가 도대체 무슨 일로? 더욱이 나의 2차 페인트가 있는 날에. - P110
내 말이 끝나자마자 최가 인상을 찌푸렸다. "직접 보고도 몰라? 너를 단순히 글쓰기 소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더군다나 감정 기복이 심하고, 불안정해 보이고." "그래서 좋은 거예요." - P111
문득 최의 눈동자가 불빛 아래에서 반짝거렸다. "센터장의 말을 믿지 않았어." - P112
너는 네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 같지?
(중략). 이곳의 아이들에게는 좋은 인성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건강한 몸이었다. 우리는 하루에 삼십 분씩 의무적으로 운동을 했다. - P114
"아, 정말 매일 운동하는 거 싫다! 부모를 만나서 새 집에 가면운동 안 해도 되겠지?" - P115
얼굴을 확 찡그리는 아키를 보고 나는 장난을 멈췄다. "형은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만 가득해." "부정적인 시선이 아니라 명확한 시선이라고 해야지." - P116
"너는 네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 같지?" "그럼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남이 생각하는 대로 사냐?" 그래,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이라고 꼭 타의나 강요가 아닌 자신의 의지대로만 행동할까? - P116
"아키, 어쩌면 생각이 너를 조종하는 걸 수도 있어." - P116
"나 체육관에서 가디를 봤어. 땀을 뚝뚝 흘리면서 운동하던데." "가디라면, 박? 체육관에는 웬일이지?" - P117
"형이 몸이 떨린다. 아무래도 단것 좀 먹어야 할 것 같아." 따라오라는 내 손짓에 노아가 발을 놀렸다. 센터의 학비를 포함한 모든 운영 자금과 생활 비용은 정부에서 지급되었다. - P119
"벌써 몇 번째야? 자꾸 문제 일으키면 면접권 박탈당해." 문제를 일으키면 일으키는 족족 벌점으로 기록되었다. 벌점이 어느 수위를 넘으면 부모 면접권 자체를 박탈당했다. 부모를 만나지 못한 아이들은 결국에 홀로 센터를 떠나야 했다. - P121
여전히 스낵을 우물거리며 노아가 물었다. "너 혹시 어제도 박의 집무실을....." 당연하지, 싶은 얼굴을 보니 또 박의 집무실을 엿본 모양이었다. 노아 같은 아이를 제외하고 리모스룸을 찾는 아이들은 흔치 않았다. - P123
"센터 일에 집중해 달래, 너무 많은 생각은 오히려 일에 방해가된다나? 누가 최 아니랄까 봐. 대단해." 박의 갑작스러운 휴가를 나무라는 뜻이었을까? 내 2차 페인트가 있던 날이었으니까. 하지만 비록 그렇다 해도, 박도 사람이다. - P124
나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
(전략). "참, 형도 3차 페인트를 앞두고 있잖아. 형이 2차까지 간 것도 오랜만인 것 같은데." 글쎄, 그들이 좋은 사람인지는 아직 확신하기 어렵다. - P127
그 순간, 방과 복도 가득 황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지금 즉시 모든 사람들은 강당으로 모이도록, 강당으로 모이도......" 호출이었다. - P128
박은 긴장한 아이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한차례 온화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가 당분간 센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 길지는 않을 겁니다." - P129
"어디 멀리 여행을 가나? 해외에 나가는 거 아니야? 와, 가디는 좋겠다. 여태까지 휴가를 한 번도 안 갔으니까 길게 떠날 수 있겠지? 휴가 포인트를 꼬박꼬박 모아놨나 보다." "포인트?" - P131
"가만히 있는 노아를 왜 때린 거냐?" "리모스룸이 센터 건물로 이전됐다고 해서 견학차 왔습니다."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냐?" 황이 팔짱을 낀 채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 P133
보안 버튼을 눌렀다. 특수 합금으로 된 문의 한가운데가 스르르 투명하게 변했고 집무실에 앉아 있는 박의 모습이 나타났다. - P133
그때 낮은 멜로디가 울렸고 박의 멀티워치에 불이 들어왔다. 허공에 불쑥 최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오늘은 보고를 받지 않겠습니다." 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이 말하고는 순식간에 홀로그램을껐다. 박이 꿀꺽 침을 삼켰다. 이렇게 되면 일이 틀어지는데! - P134
그때, 지잉 소리와 함께 집무실 문이 열렸다. 아니나 다를까, 허락 없이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최였다. - P134
"이 중요한 시기에 센터장이 자리를 비우신다는데, 따로 할 말이 없다고요?" "황에게 위임했습니다. 물론 다른 가디도 계시고...? "선배." 선배? 선배라니, NC에서 그런 호칭은 통용되지 않았다. - P135
"퇴근 삼십 분 남았네. 내일 삼십 분 먼저 출근할 테니, 오늘은조기 퇴근 하지 뭐. 자, 이제 나 부하 직원 아니지?" - P135
"부하 직원 아닙니다. 정 듣기 싫으면 선배도 반말하든가." 빙긋 웃는 최를 향해 박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평소에도 곧잘 센터장인 박을 놀리곤 하던 최였다. "그래,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 P136
"어디에 다녀오려는 거야?" 최의 말에 박이 잠시 말을 멈췄다. "해외에 다녀올까 해. NC 센터와 같은 기능을 하는 곳들을 찾아보려고, 세부 일정은 짜지 못했지만 지금부터 준비를……………." "선배." - P137
"정말 가고 싶은 곳은 거기가 아니잖아." "....." "마지막으로 만나 뵙고 싶은 거 아니야?" - P138
박은 그 늙고 병든, 빈껍데기만 남은 아버지를 만나고 온 것이었다. 나의 2차 페인트 날에. "의사가 그랬어, 한 달을 넘기기 어렵다고. - P140
"나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P142
그 소문 들었어?
박이 떠난 뒤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센터는 전과 다름없이 바쁘게 흘러갔다. - P144
"어떤 센터에서 한 아이에게 페인트를 준비시켰다. 그런데 프리포스터들의 홀로그램을 보여 주지 않더래. 사전 정보도 가르쳐 주지 않고, 무조건 만나라고 했다. 좀 이상했지만 가디가 꼭 만나 봐야 한다고 강조하니까 일단 면접을 보러 갔는데, 그 애가 인터뷰룸에 들어서자마자 프리 포스터들이 소리 내서 우는 거야." - P147
"생부 생모를 따라간 거야?" "형은 똑똑한 것 같다가도 가끔 바보 같아. 그럼, 당연하지. 생부생모가 있는데 NC에 있겠어? 곧바로 퇴소했대." - P148
부모는 낳아 주었다는 이유로 모든 선택권을 갖는다. 아이를 직접 키울지, 아니면 NC에 맡길지. 반대로 우리는 아니다. - P149
인터뷰룸에는 네 명 이상이 들어갈 수 없다. 페인트를 시작하는아이와 프리 포스터들, 그리고 가디 한 명이 다였다. 물론 나는 두명의 가디와 면접을 본 적이 있지만 그날은 특별한 경우였다. - P149
박이었다면 아키가 부탁했대도 오늘 같은 일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략). 박의 휴가는 언제쯤 끝나려나. - P152
기다릴게, 친구
(전략). "정말 미안해, 중요한 면접인데 혼자 와서." 하나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홀로그램 영상을 주고받던 우리는 조금 더 가까워졌고, 나는 어느새 이 프리 포스터들을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 P153
오늘은 가디 없이 프리 포스터하고만 대화하는 날이었다. 그 - P154
하나가 저 멀리 홀로그램 숲을 바라보았다. "자기 이름을 직접 지을 수 있다는 거 말이야. 개명 같은 거랑은다른 느낌이야." - P155
나는 ‘본질‘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사랑 자체가 바로 핵심이자 본질이 아닌가. 딸을 위하는 엄마의 사랑 속에 다른 이유나 원인이 있다는 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본질요?" - P1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