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2 더하기 2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들으니 왠지 짜증이 난다. 피곤하다.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든다.
(중략). 컴퓨터다. 컴퓨터가 나를 귀찮게 군다. 이젠 더 짜증이 난다. - P10

실험을 해볼 시간이다. 인사나 한번 해볼까.
"안는쎄오?" 내가 말한다.
"틀렸습니다. 2 더하기 2는 무엇입니까?"
무슨 일이지? 알아보고 싶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 - P10

두 눈이 감겨 있는 것 같다.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뜨기만 하면 되니까. 눈을 뜨려 노력해 보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P11

LED 조명이 나를 내리쬐고 있다. (중략).
"느... 에에... 엣" 내가 말한다. 이 정도면 될까?
"틀렸습니다. 2 더하기 2는 무엇입니까?" - P12

나는 산소마스크를 끼고 있다. 마스크는 얼굴에 단단히 매여 있으며, 내 머리 뒤쪽으로 돌아가는 호스와 연결되어 있다.
일어날 수 있을까?
아니. 하지만 고개는 약간 움직일 수 있다. 내 몸을 내려다본다. - P12

(전략).
"틀렸습니다. 8의 세제곱근은 무엇입니까?"
하지만 난 틀리지 않았다. 그냥 컴퓨터가 얼마나 똑똑하지 알고 싶었을 뿐. 답은, 그리 똑똑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중략).
나는 후속 질문을 기다리지만 컴퓨터는 만족한 듯하다.
피곤하다. 나는 다시 잠들고 만다. - P13

손가락들을 움직여 본다. 손가락은 내 지시대로 씰룩거린다. 좋다. 이젠 뭔가 될 것 같다.
"손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컴퓨터가 말한다. "가만히 계십시오."
(중략).
남은 관은 딱 세 개다. 팔에 꽂힌 링거 줄, 엉덩이로 들어간 관 그리고 소변줄. 특히 뒤의 두 가지는 꼭 제거해 줬으면 하는 시그니처 아이템 같은 것이었지만, 뭐 괜찮다. - P14

나는 침대에 두 손바닥을 대고 밀어본다. 상체가 일으켜진다. 내가 정말 일어나고 있다! (중략). 침대가 아니라 딱딱한 해먹이라고 해야 할까. 기괴하다. - P15

"전신 동작이 감지되었습니다." 컴퓨터가 말한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중략).
그제야 문득 드는 생각은,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내가 뭘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 P16

나는 다시 깨어난다. 로봇 팔 하나가 내 얼굴에 닿아 있다. 무슨 짓이야?
(중략).
"의식이 감지되었습니다." 컴퓨터가 말한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중략).
나는 백인 남성이고, 영어를 쓴다. 어디 찍어보자. "조⋯⋯존?"
"틀렸습니다. 세 번째 시도.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 P17

그리고 소변줄이 뽑히면서 상처가 났다. 바닥에 작은 핏줄기가 그어져 있다. 저 빨갛고 가느다란 선은... - P18

(전략).

방금 건 대체 뭐였지?
갑자기 그 모든 게 기억났다. 그 장면은, 아무 경고도 없이 머릿속에떠올랐다.
나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건 별로 없었다.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산다.
그건 기억이 난다. 아침 식사를 챙겨먹는 것도 좋아한다. 그리고 예전에는 천문학계에 발을 담그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 P21

이제는 동료 환자들을 살펴볼 차례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혼자는 아니다. 근데 저 사람들이 죽어 있네. - P21

 핼러윈 장식처럼 보이지. 두 사람 다 나와 친한 사이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혹시 친했다면, 그 사실이 기억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중략). 아무리 여기가 격리 구역이라 해도 죽은 사람은 치워줘야 하지 않을까? 뭐가 잘못됐는지는 모르지만 단단히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 P22

혹시 저 해치까지 갈 수 있을까?
나는 한 걸음을 디뎌본다. 그리고 또 한 걸음. 그런 다음 바닥에 주저앉는다.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쉬어야 한다.
이렇게 근육이 잘 발달돼 있는데 왜 이토록 힘이 없는 걸까? 아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면 애초에 왜 근육이 탄탄한 걸까? - P22

나는 머리를 더듬어본다. 혹도, 흉터도, 붕대도 없다. 신체의 나머지 부분도 꽤 멀쩡해 보인다. 멀쩡한 것 이상이다. 나는 근육맨이다.
꾸벅꾸벅 졸고 싶지만 참는다.
다시 시도해 볼 때다. 나는 바닥을 짚고 일어난다. 웨이트트레이닝이라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더 쉽다. 내 몸은 점점 회복되고 있다(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 P23

나는 결국 사다리에 다다른다. 나는 앞으로 휘청하며 사다리의 가로대를 잡는다. (중략).
10피트짜리 사다리라니.
생각이 영국식 단위로 떠오른다. 이게 한 가지 실마리다. 나는 아마 미국인일 것이다. 영국인이거나 캐나다인일지도 모른다. 캐나다인들은 짧은 거리를 잴 때 피트와 인치를 사용하니까. - P23

나 자신에게 묻는다. LA부터 뉴욕까지의 거리는? 당장 떠오르는 대답은 3,000마일이라는 것이다. 캐나다 사람이라면 킬로미터를 썼을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영국인이거나 미국인이다. 아니면 라이베리아 출신이든지.
라이베리아에서 영국식 단위를 쓴다는 건 아는데 내 이름은 모르다니 짜증나네. - P24

"드십시오"
내 가슴에 치약 튜브가 놓여 있다.
(중략).
나는 튜브를 들어올린다. 흰색이고 검은 글자가 적혀 있다. ‘1일차, 1식.‘
(중략).
나는 뚜껑을 돌려 연다. 뭔가 맛있는 냄새가 난다. (중략).
세상에 끝내준다! 너무 맛있다! 진하지만 너무 느끼하지는 않은 그레이비 소스 같다. 나는 내용물을 입에 직접 더 짜 넣고 맛을 본다. 장담하는데, 섹스보다 이게 나을 거다. - P25

(전략).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난 의사인가? - P26

"자체 보행이 감지되었습니다." 컴퓨터가 말한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혼수에서 깨어난 혼수투스 황제다. 짐의 앞에 무릎을 꿇으라."
"틀렸습니다."
이제는 사다리 위에 뭐가 있는지 확인할 차례다. - P27

나는 새로운 공간으로 손을 뻗고 바닥 위로 몸을 끌어올린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탁 하며 불이 들어온다. 아마 컴퓨터가 한 일이겠지.
그 공간은 내가 떠나온 공간과 크기도, 모양도 같아 보인다. 이번에도 둥근 방이다.
보아하니 실험대처럼 생긴 커다란 탁자 하나가 바닥에 설치돼 있다. 근처에는 실험실용 의자가 세 개 있다. - P28

나는 장비가 잘 갖추어진 실험실에 있다. 대체 언제부터 격리 병동의 환자들을 실험실에 들어가게 해줬다고? 게다가 여기는 의학 실험실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대체 무슨 쌍쌍바 같은 상황이람?
쌍쌍바라고? 진짜? 난 어린 자식이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욕을 절대 안 쓰는 독실한 신자이든지. - P28

나는 벽을 따라 놓여 있는 더 큰 장비들을 살펴본다. 주사형 전자현미경, 서브밀리미터 3D프린터, 11축 밀링머신(커터를 회전시켜 공작물을절삭하는 공작 기계-옮긴이), 레이저 간섭 관측기, 1세제곱미터짜리 진공실.. 나는 이 모든 것의 정체를 알고 있다. 사용 방법까지도나, 과학자구나! 이제야 좀 알겠네. 내가 과학을 써야 할 시간인 거야 좋아, 천재 두뇌씨. 뭐라도 생각해 보라고! - P29

나는 사다리의 가로대에 불편하게 자세를 잡고 해치 손잡이를 밀어본다. 꿈쩍도 안 한다.
"해치의 잠금을 해제하려면 이름을 말하세요." 컴퓨터가 말한다. - P29

나는 근처의 시험관을 잡고 허공에 던져본다. 시험관은 당연히 위로올라갔다가 내려온다. 하지만 왠지 신경에 거슬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물체가 떨어지는 모습이 왠지 거슬린다. 이유를 알고 싶다.
뭘 가지고 알아보면 될까? 나는 실험실 하나를 통째로 가지고 있고, 그 실험실을 사용할 줄 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건?  - P31

일종의 ‘배터리 내장형‘ 장난감 같은 것이다. 주인이 최초로 사용하기 전에 배터리가 닳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작은 플라스틱 조각을 넣어두는 방식. 좋다. 이건 신상 중의 신상 스톱워치다. 그것뿐만 아니라이 실험실의 모든 것이 신상으로 보인다.  - P32

숫자를 계산해 보고 얻은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방은 중력이 너무 크다. 원래 지구의 중력가속도는 9.8m/s²이어야 하는데, 이 방의 중력가속도는 15m/s²이다. 낙하하는 물체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너무 빨리 떨어지니까 - P33

내가 있는 곳은 지구가 아니다. - P33

02

좋다, 심호흡하시고.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는 말자. 그래, 중력이 너무 높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말이 되는‘ 답을 생각해 내자. - P34

대체 병실과 실험실이 들어 있는 커다란 원심분리기를 왜 만든단 말인가? 모르겠다. 그게 가능하긴 한 일인가? 그 원심분리기는 반경이 얼마나 돼야 하나? 얼마나 빠르게 돌아야 하나? - P34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컴퓨터가 묻는다.
나는 이불 토가를 내려다본다. "나는 진자를 연구하는 위대한 철학자 진자누스다!"
"틀렸습니다."
나는 천장 근처의 로봇 팔 중 하나에 진자를 매단다. 잠깐은 팔이 가만히 있어주면 좋겠다. - P36

내게는 펜이 있지만 종이는 없다. 괜찮다. 벽이 있으니까. ‘벽에 낙서를 휘갈기는 미친 죄수‘ 같은 행동을 수없이 반복한 후, 나는 답을 얻는다. - P37

그러니까 나는 원심분리기 안에 있는 게 아니다. 지구에 있는 것도아니고다른 행성일까? 하지만 태양계에 이렇게까지 중력이 큰 행성이나 위성, 소행성은 없다. - P38

(전략).
나는 눈을 깜빡인다. 또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게 사실이었을까? 아니면 허무맹랑한 멸망 이론에 정신이 팔린사람과 이야기하던 기억이 아무렇게나 떠올랐을 뿐일까?
아니, 기억은 진짜다. 그 생각만 해도 겁이 난다. 갑작스러운 공포가 아니다. 머릿속 한편에 지정석을 차지하고 있는, 익숙하고 편안한 공포다. 나는 오랫동안 그 공포를 느껴왔다. - P42

모든 것이 맞아 들어가기 시작한다. 우리는 아픈 게 아니었다. 우리는 가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이 침대들은 영화에 나오는 마법 같은 ‘냉동실‘이 아니었다. - P44

뭘 먹을 기분은 아니지만 튜브를 보자마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중략).
나는 튜브를 열어 질척거리는 것을 입에 짜 넣는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맛있다. 채소 맛이조금 들어간 닭고기 같다. (중략).
"물?" 나는 입에 음식을 가득 문 채 우물우물 말한다.
천장판이 다시 열린다. (중략). 반짝이는 통에 적힌 글자는 ‘생수‘다. 나는 뚜껑을 돌려 연다. 아니나 다를까, 안에는 물이 들어 있다. - P45

"변기?" 내가 말한다.
벽의 판이 휙 돌아가며 금속으로 된 변기 겸용 의자가 나온다. 변기는 바로 그 벽에 붙어 있다. 교도소의 변기처럼. 나는 변기를 더 자세히 살펴본다. 버튼이며 이것저것 달려 있다. 변기의 둥근 부분에 진공파이프가 있는 것 같다. 중력이 있는 상태에서 쓸 수 있도록 개조한 무중력용 변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 P46

(전략).

"각도 이상." 컴퓨터가 말한다.
‘젠장!" 내가 말한다. "거의 알아냈다고! 내가 누군지 거의 기억해냈단 말이야!"
"각도 이상." 컴퓨터가 다시 말한다.
나는 책상다리를 풀고 일어선다. - P51

나는 애들을 좋아한다. 흠, 그냥 느낌이지만 나는 애들이 좋다. 애들은 멋지다. 같이 어울리는 것도 재미있다.
그러니까 나는 30대의 남성으로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아이는 없지만 아이들을 아주 많이 좋아한다. 마음에 안 들지만 내 생각엔 선생님이구나! 나는 학교 선생님이야! 이제 기억난다!
이런 세상에 내가 선생이라니. - P53

(전략).
"라일랜드 그레이스?" 웬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든다.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여성은 40대 중반으로 보였으며, 좋은 맞춤 정장을 입고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어, 맞는데요." 내가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 P57

"무기명 비밀투표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설명하자면 복잡합니다. 그레이스 씨가 쓰신 과학 논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만." - P58

스트라트는 서류 가방에서 파일을 하나 꺼냈다.
그녀는 파일을 펼치더니 첫 번째 페이지를 읽었다. "물 기반 이론에 관한 분석과 진화 모델 예측에 관한 재평가." 스트라트가 눈을 들고 나를 보았다. "그레이스 씨가 이 논문을 쓰셨죠?" - P58

스트라트는 파일을 다시 서류 가방에 집어넣었다. "아크라이트 탐사선과 페트로바선에 대해서는 아실 것 같은데요."
"모르면 무척 형편없는 과학 선생이겠죠."
"그 ‘점‘들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스트라트가 물었다. - P60

(전략)
"이건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스트라트가 내 등에 대고 말했다.
"제가 보기엔 선택 사항입니다만!" 나는 작별의 뜻으로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그래, 뭐.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아파트로 돌아갔는데, 우리 집 현관에 이르기도 전에 잘 차려입은남성 네 명이 나를 둘러쌌다. 그들은 내게 FBI 배지를 보여주고,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던 검은 SUV 세 대 중 한 대에 나를 몰아넣었다. - P61

스트라트가 말을 이었다. "외계 생물 추정학은 작은 분야입니다.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전 세계에 겨우 500명 정도밖에 없죠. 그리고 옥스퍼드 교수들부터 도쿄대 연구자들에 이르기까지 제가 이야기를나눠 본 모든 과학자들은, 박사님이 갑자기 학계를 떠나지만 않았더라면 이 분야의 지도자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 P63

나는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러시아, 캐나다, 미국이 전부 당신 지시에 따른다는 겁니까?"
"네. 토 달지 않고 따릅니다."
"이거 전부 장난입니까?"
"새로운 실험실에 익숙해지세요, 그레이스 박사님. 저는 다른 처리할 일이 있어서"
스트라트는 다른 말없이 문밖으로 나갔다. - P64

지난번과 똑같이, 내가 손잡이에 손을 대자마자 컴퓨터가 말한다.
"해치의 잠금을 해제하려면, 이름을 말하세요."
"라일랜드 그레이스." 나는 우쭐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라일랜드 그레이스 박사" - P65

나는 빨간색 경계선이 깜빡이는 화면을 발견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그쪽으로 몸을 숙인다.

각도 이상: 상대적 이동 오류
예상 속도: 11,423kps
측정 속도: 11,872kps
상태: 경로 자동 수정 중. 추가 조치 불필요 - P66

흠, 초속 1만 1,872킬로미터라.
속도란 상대적인 것이다. 두 사물을 비교하는 게 아니라면 속도라는개념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고속도로의 자동차는 땅에 비교했을 때 시속 70마일로 운동하는 것이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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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가능성 없는 무모한 시도였지만, 도널드는 그러고싶은 마음이 들었다. (중략).
비행기가 착륙하자 그는 중서부의 여름밤 속으로 걸어 나와 외딴 푸에블로 공항으로 향했다. (중략).
그녀의 아버지는 아직 살아 있었다. 하먼 홈스 판사 힐사이드 Hillside 3194번. - P27

가는 길에 도널드는 아까 전화로 나눈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공항에 있다‘는 말만으로도, 자신이 여전히 상류 중산층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 낸시가 집에 혼자 있다는 사실은, 혹시 그녀가 친구도 없고 그저 나이만 들어버린 매력 없는여자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 P29

"기퍼드 부인?"
(중략).
"도널드, 정말 너구나. 우리 둘 다 많이 변했네. 정말 반가워!"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며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오랜 세월‘이라는 말도 오갔다. - P30

"하이볼 마실래?" 그녀가 물었다. "안돼? 날 술꾼이라고 생각하진 말아줘. 그냥 좀 울적한 밤이라서 그래. 남편이 오늘 올 줄 알았는데, 이틀 더 늦어진다고 전보가 왔거든. 도널드,
남편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주 매력적이고, 너랑 분위기도 비슷해. 생김새도 닮았고."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뉴욕에 남편이 관심 있어 하는 여자가 있는 것 같아. 잘 모르겠어." - P31

도널드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썰매 타던 날이었다. 그는 짚이 깔린 썰매 구석에 앉아, 차가운 하얀 별을 올려다보며 웃는 그녀의 차가운 뺨에 입을 맞췄다. - P33

"네가?" 그가 외쳤다. "약국에서 나찼던 거 기억 안나? 혀까지 내밀면서 약 올렸잖아."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전혀 기억 안나. 내 기억엔 네가 나를 찼던 것 같은데." 그녀의 손이 위로라도 하듯 가볍게 그의 팔에 닿았다. "위층에 오랫동안 꺼내보지 않은 사진 앨범이 있어. 가져올게." - P34

도널드는 너무 많은 의미가 담긴 하지만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이는 말을 꺼냈다.
"우리가 다시 사랑에 빠지기라도 하면 큰일 날까?" - P36

"네가 도널드 바워스잖아!" 그녀가 소리쳤다.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다. "아니야. 난・・・ 도널드 플랜트야."
"전화로 말했잖아." - P37

낸시는 방 건너편에서 말했다.
"이 얘긴 절대 입 밖에 내지 마,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든 소문이 나는 법이니까." - P38

공항으로 가는 길, 도널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야 완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왔지만, 방금 겪은 일을 도무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 P39

도널드 역시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의 몇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인생의 후반부란 결국,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버려가는 긴 여정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 경험도 그리대수롭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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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입을 연다.
"버크 사회복지 사무소에 연락해봤어요. 상담 프로그램이 있는데 아주 비싸지도 않고.....
(중략).
도대체 몇 명일까? 마저리가 자주 찾는 곳이 몇 곳이나 될까? 모르긴 해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시빅을 팔아버렸으니 치과의사인가? 카니 박사? 하얀 가운 걸치고 설쳐대는 그 얼간이? 콜라병 같은 안경을 쓰고, 병적으로 손을 씻어대는 그 친구? 아니면, 뉴 버라이어티 극장의 그 자식이름이 뭐였더라? 머리는 벗어지고, 단정치 못한・・・・・ 파운틴 맞아, 그 친구. 그럼 파운틴일까? 아내가 다니는 곳에서 일하는 누군가일 것이다. - P130

순간 나는 돈이 없는 건 아내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실업 보험 수당이 끊어진 지 벌써 몇 달이 지난 상태다. - P131

"알았다고."
아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쳐다본다.
"알았다고요?"
"같이 상담을 받으러 갈게."
나는 말한다. 막상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 후련한 기분이 든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카운슬러가 누구이든 나는 나에 대한 많은 부분을 숨겨야 한다.  - P132

16

세 시간 후 나는 내 사무실에 들어와 있다. 이번에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이를 표적으로 삼기로 한다. (중략).
마저리는 거실에서 소설을 읽고 있다. 나는 말한다.
"드라이브 좀 하다 올게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말이야."
아내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사이는 굉장히 어색해진 상태다. - P134

아직 쉰 살이 되지 않았다고? 이런 개자식. 내가 영원히 쉰 살을 넘지못하게 해주지. - P136

뉴 헤이븐 가로 내려와 주차장으로 들어서니 내 차 옆에 세워진 주경찰관의 순찰차가 눈에 들어온다. 젊은 주 경찰관이 번뜩이는 눈으로 보야저 앞부분의 흠집을 살펴보고 있다. 내가 다가가자 그가 나를 돌아본다.
"이게 선생님 차 맞습니까?"
(중략).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지난주에 뉴욕 킹스턴에서도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 P140

그가 내 면허증과 등록증을 돌려주며 말한다.
돌아서는 그의 등에 대고 나는 말한다.
"이봐요,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습니까? 벌써 두 번째라고요."
그가 잠시 나를 쳐다본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입을 여는 타입인듯하다. 내 집요함은 결국 그를 무너뜨리고 만다.
"며칠 전 뺑소니 사건이 있었습니다. 뉴욕 북부에서요. 용의 차량이 선생님의 밴과 비슷합니다. 저희는 용의 차량의 왼쪽 앞부분이 손상을 입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P141

"뉴욕 북부에서요? 난 빙엄턴에서 사고가 났었는데요. 뭐 아무튼 알려줘서 고마워요"
나는 말한다. - P142

17

매번 일을 벌이고 나서 보면 목요일이다. 일부러 그렇게 계획한 건 아니다. (중략). 처음 세 명의 표적을 각각 목요일에처치했고, 다이어스 에디로 향하고 있는 오늘도 목요일이다.
과연 오늘 계획대로 케인 에이쉐를 제거할 수 있을까? 부디 그렇게 되기를 더 이상 문제될 건 없다. 차 수리도 마쳤다. - P143

"250달러 공제 조항이 있어요."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보험증을 들여다보았다. 내게 보험증을 돌려주며 그가 말했다.
(중략).
"제리, 내 상황 잘 알죠? 250달러는 내게 엄청난 액수예요." - P144

"요즘 다들 어려울 때 아닙니까, 데보레 씨. 우리 집사람도 얼마 전에병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가 동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중략).
"오하이오의 큰 의료회사가 병원을 인수했거든요. 인수 직후 대대적인 인원 감축을 시작하더군요. 적자가 어쩌고 하면서."
(중략). 지금껏 병원을 법인처럼 마음껏 사고팔 수 있는 상업기관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놀라운 일이다. 병원은 성당이나 소방서와는 또 다른 모양이다. (후략). - P144

"엑스선 기술자는 아홉 명에서 여섯 명으로 줄었습니다. 여섯 명이 아홉 명의 일을 하게 된 거죠." - P145

"지금 이 순간에도 정비 센터의 서비스 관리자를 셋에서 둘로 줄이려는 임원들이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은 잘릴 걱정이 없잖아요, 제리."
(중략).
"누구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데보레 씨." - P145

"서로 잘 아는 사이라 하는 얘긴데... 견적을 두 개 내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챙길 것, 그리고 보험회사에 제출할 것"
(중략).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제리에게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보았다. 제리에게 잘리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도 있었다. 나머지 서비스 관리자들 중 하나를 죽이면 된다고 그의 아내도 잘리기 전에 동료 엑스선 기술자 세 명을 제거해버렸다면 아마 지금쯤 아무 걱정 없이 병원에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 P146

카운슬러와의 첫 상담은 화요일로 잡혔다. 마저리는 주정부가 아닌 성처당을 통해 상담을 준비해왔다. 11년 전 서스튼 신부와 상담을 가졌을 때럼. - P148

그가 책상에 놓인 문서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갔다. 그리고 펜을 집어들며 말했다.
"우선 기본적인 것부터 짚고 넘어가죠."
그 기본적인 것이 거의 한시간을 잡아먹어버렸다. - P150

우리는 매주 화요일, 같은 시간에 상담을 갖기로 했다. 그는 보험회사가 비용의 상당 부분을 부담하게 될 거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20퍼센트의 공제 금액만을 내면 되는 것이었다.  - P151

마저리와의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면 나는 군말 없이 따를 각오가 돼 있다. 아내의 남자 친구를 죽이고, 새 일자리를 찾게 되면 모든 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 P152

18

(전략). 하지만 그들은 내 기대를 저버린다. 그들은 아예 밖으로 무선전화기를가지고 나왔다. (중략).
하지만 그들은 통화를 할 때도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집으로 들여보내야 한다. - P154

갓길에 차를 세워놓은 나는 완전히 노출된 상태다. 하지만 우편함으로 다가오는 그들은 내 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그만큼 서로에게만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다. - P155

마저리와의 비참한 경험을 통해 얻은 것도 있다. 더 이상 내 목적지를 밝히지 않아도 된다는 점. 우리 사이에는 대화가 많이 줄었다. 오늘 아침도 식사를 마치자마자 보야저에 몸을 싣고 집을 나섰다.
더 이상 목적지를 꾸며낼 필요도, 면접을 보러 간다거나 일자리 검색을위해 도서관에 간다고 둘러댈 필요도 없다. 나름 큰 부담을 덜게 된 셈이다. 덜어내야 할 부담은 아직 많이 남긴 했지만 - P156

19

오늘 밤, 잠이 오지 않는다. 마저리와 나는 서로에게 많이 정중해졌다. - P158

생각이 많은 게 문제다. 아카디아의 일자리, 신원이 확인되자마자 죽여버릴 아내의 남자 친구, 나를 이런 괴로운 지경에까지 몰아넣은 사정들, 그리고 밀레니엄. - P158

밀레니엄은 생산적인 직장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는 생산적인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잘라버리는, 이 말도 안 되는 경영 방식을 부추기고 있다.
단지 2000년이 다가온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실직한 이유도 인류가 미쳐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오래가지 않아欢극심한 공포에 눈을 뜨게 된다. - P160

20

오늘 하루는 늦게 시작된다. 힘겹게 잠이 든 만큼 깨는 것도 힘이 든다. 9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집을 나선다. - P161

그래서 에이쉐 부부의 애정 행각은 더 이상 지켜봐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알아서 서로로부터 떨어져주지 않는다면…………… 그의 아내까지 죽여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진다. (중략).
그래서 오늘 아침, 다이어스 에디로 차를 몰며 결심을 굳혔다. 남자 친구를 죽이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쉽고 유쾌한 결정은 아니었다.  - P163

요즘 사람들은 연쇄살인범이 있다고 믿는 듯하다. 연쇄살인범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수많은 영화와 소설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무슨 부족이나엘크스 같은 사교 클럽 회원이라도 되는 듯이. - P166

그렇게 10분쯤 기다리자 그가 나타난다. 그는 작은 상자와 흰색 비닐봉지들로 가득 찬 쇼핑 카트를 밀고 다가오고 있다. (중략).
몸을 앞으로 숙인 채 작은 상자와 봉지들을 속속 옮겨 싣는 그의 머리는트렁크 안 깊숙이 박혀 있다.
나는 그의 뒤로 슬그머니 다가간다.
"혹시 케인 에이쉐 씨 아닌가요?"
그가 돌아보며 호기심에 찬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요?"
"난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 P167

총알은 그의 눈에 박히지 않는다. 총알이 파고든 그의 오른쪽 볼이 너덜너덜해져버린다. 레인코트가 내 팔을 살짝 끌어 내린다. (중략).
나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 보야저로 돌아온다. 차에 오르자마자 시동을 걸고 후진해 차를 뺀다. 무릎에 얹어놓은 루거는 레인코트 자락으로 덮어놓았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무척이나 한산하다. - P168

21

(전략).
네 명이 제거됐으니 세 명이 남은 셈이다. 그래서인지 무거웠던 마음이모처럼 가뿐해졌다. 이 길고 고된 레이스도 이제 반만 더 가면 끝이 난다.
마저리와 나 사이의 벽도 조금씩 허물어져가는 것 같다. 아주 뚜렷하지는 않지만 나는 집안 공기에서부터 그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하찮은 것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대화가 늘었다는 점이 희망적이다. - P169

장기간의 실직 상태는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다. 해고된 직원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친다. 중산층에 가해지는 타격이 특히 크다는 내 생각이 틀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산층의 입장에서는 나는 아직도 중산층에 남기 위해 바둥거리는 중이다) 우리가 최대 피해자라는 생각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 P170

나는 이력서들을 유심히 훑어본다. 남은 두 표적, 둘 중 누구부터 제거할지 결정해야 한다. 그게 결정되면 내일 당장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표적의 집을 살펴보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작전을 짜야 한다. - P172

22

자고 있을 때 전화가 오는 일은 극히 드물다.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대부분 술에 취해 번호를 잘못 돌린 주정뱅이들이다. (중략). 아직도 잠에 잔뜩 취한 상태다. 마저리가 웅얼거리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중략). 1시 46분. (중략).
서서히 마저리의 통화 내용에 집중해본다. 애써 소리를 죽이려는 걸 보니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인 듯하다.
"네, 알겠어요. 최대한 빨리 갈게요, 고마워요"
아내가 말한다. - P173

내가 해고된 후로는 마저리가 한밤중의 전화벨을 처리해왔다. 더 이상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일까? 이제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는 건 내가 아닌 아내다. - P174

마저리가 전화를 끊고 나를 돌아본다. 아내의 표정이 어둡다.
"빌리 문제예요."
아내가 말한다.
(중략).
"체포됐대요, 빌리랑 또 다른 애가."
아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말한다.
"체포? 체포?"
나는 벌떡 일어나 앉는다. 하마터면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다. - P174

"가게를 털러 들어갔대요. 경찰에 쫓겨 도망치다가 잡혔다네요 지금 래스킬의 주 경찰국 유치장에 갇혀 있대요." - P175

이런 부담스러운 공간에서 형사에게 집중하는 건 쉽지 않다. 그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빨리 빌리를 보고 싶을 뿐이다.
마저리는 나보다 훨씬 노련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다. 아내는 쉴새 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답을 받아 적는다. 아내는 형사만큼이나 조용하고 차분하고, 교감적이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다. - P176

경찰은 모든 걸, 거의 모든 걸 확보한 상태다. 빌리의 친구가 한 자백. 강도질을 모의하고, 문에 손을 써두었다는 증거. 그들은 충동적으로 범행을 벌였다고 주장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있다. 게다가 경찰은 그들이 장물이 가득 담긴 가방을 매고 나오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고 한다. 도주 시도도 분명히 있었고.
하지만 그들이 아직까지 확보하지 못한 한 가지는 지난 세 차례의 강도질 역시 두 아이가 벌인 짓이라는 증거다. - P177

나는 말한다. 내 멍한 눈이 형사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이게 빌리의 첫 범행이라면 판사는 집행유예를 내릴 겁니다. 이게 네 번째 범행이라면 그 앨 감옥으로 보낼 거고요. 하지만 우리 아들은 감옥에가지 않을 겁니다. 이게 첫 번째니까요."
그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온다.
"데보레 씨, 판사가 어떤 판결을 내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 P178

(전략). 형사를 쳐다보는 아내의 시선에서는 더 이상 공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아내가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렸다고 판단하고 마침내 서류를 내놓는다. 피해 갈 수 없는 서류. (중략).
"빌리를 집에 데려가도 되나요?"
"죄송하지만 오늘 밤은 곤란합니다."
그가 말한다. 동정 어린 어조이지만 누가 봐도 어색한 연기다. - P179

예상 가능한 질문들이다. 물론 그중에는 뜨끔한 질문도 하나 있다.
"데보레 씨, 지금 무슨 일을 하십니까?"
"실직 상태입니다."
(중략)
"실직하신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데보레 씨?"
(중략).
"리드에 있는 할시온 밀스에서 생산 라인 감독으로 일했습니다."
"아, 그 부도난 회사 말씀이군요" - P180

"20년간 일했습니다."
"인원 축소 바람에 휩쓸리신거군요."
(중략).
그가 수줍은 듯 피식 웃는다.
"범죄는 성장 산업이거든요."
그가 말한다.
"왜 그런지 궁금하군요."
나는 말한다. - P181

형사가 말한다.
"10분 드리겠습니다. 오전 중에 풀려날 테니 못다 하신 말씀은 댁에 가서 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마저리가 말한다. - P182

나는 말한다.
"빌리, 네가 이런 일을 벌인 건 태어나서 이번이 처음이야. 그 가게에 불법 침입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고."
나는 눈썹을 추켜세우고 손가락을 뻗어 아들을 가리킨다  대꾸하라는신호다.
"네."
아이가 내 손가락을 쳐다보며 말한다. - P184

"날이 밝으면 변호사부터 알아봐야죠."
"날이 밝기 전에 할 일이 있어. 하지만 당신 말이 맞아. 날이 밝는 대로 변호사부터 알아봐야지. 우리가 집을 살 때 고용했던 변호사가 누구지?
그 친구 이름 기억해?"
나는 말한다.
"앰곳. 내가 연락해볼게요." - P185

아내는 나를 따라 집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곧장 빌리의 방으로 들어간다. 깨끗이 정돈된 방을 보니 아이가 얼마나 오랫동안 쇼핑을 못했는지 짐작이 된다. (중략).
"이걸 다 없애야 해. 지금 당장, 오전 중에 그들이 수색영장을 들고 찾아올지도 몰라."
나는 아내를 위로하려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한다. - P186

단지를 둘러보면서 커다란 초록색 쓰레기 컨테이너들을 차례로 살핀다. 슈퍼마켓의 쓰레기 컨테이너가 가장 마음에 든다. (중략). 상자, 봉지, 썩은 양상추들. 토요일 밤까지 치워가지 않아 쓰레기로 넘쳐나고 있다.
나는 봉지들을 차례로 컨테이너에 던져 넣는다. 봉지들은 다른 쓰레기들에 파묻혀 사라진다. 더 이상의 소프트웨어 쇼는 없을 것이다. - P187

23


집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경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오후 3시가 다 된 시간이다. 오전 내내 수화기를 붙들고 있었지만 변호사는 찾지 못했다. 일요일 오전이라 더욱 힘들었다. 10시까지 기다려도 소득이 없자 나는 주 경찰국에 연락해 법원의 위치를 물었다. - P188

나는 그녀에게 내 사정을 설명했지만 그녀는 아무 도움도 돼주지 못했다. 그녀가 갑자기 나, 또는 피고에게 관선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있는지 물었다.
(중략).
"지난 2년을 실직 상태로 보냈습니다. 실업 보험 수당을 다 써버렸어요. 수입도 없고요." - P188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빌리의 죄상 인부 절차는 오늘 아침에 진행됐어야 한다. 죄상 인부, 너무나도 생소한 단어다. 꼭 고문의 한 종류인 것처럼 들린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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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한동안 공상 과학 소설에 푹 빠져 지낸 적이 있었다. (중략).
하지만 스푸트니크가 우리 세대의 관심을 공상 과학물에서 떼어놓기 전 우리는 ‘자동화‘라고 불리는 무언가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접해왔었다. 머지않아 자동화가 지능이 필요 없는 일터를 장악하게 될 거라고 했다.  - P79

나는 아직도 일본 자동차 공장의 조립 라인에서 치과의 엑스선 촬영기계처럼 생긴 로봇이 분주히 움직이며 용접하는 뉴스 영상을 처음 봤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자동화였다.  - P80

그건 오래전 일이었다. 그렇게 미국의 육체 노동자들은 자동화의 영향에 무뎌져갔다. 요즘 공장 노동자들은 회사가 싼 노동력과 관대한 환경법을 찾아 아시아 등지로 이동할 때만 산발적으로 파업을 벌인다. - P80

하지만 컴퓨터가 도입된 후로는 중간관리직이 필요하지 않게 됐다. 물론 그 단계에 약간의 인력이 필요하긴 하다. 컴퓨터를 다루고, 특정 작업을 맡아 처리해줄 사람들. 하지만 수백, 수천 명의 관리자는 너무 많다.
나 같은 사람들. - P81

서랍에서 꺼낸 이력서 여섯 통의 주인들도 내 경쟁자다. 이 뚜렷한 변화를 막아낼 방법은 없다. 중간 관리직을 맡고 있는모든 이가 내 경쟁자가 된 것이다. 이제 곧 굶주린 수백만 개의 얼굴들이 몰려들 것이다. 학력 좋은 중년의 중산층 사람들.
홍수가 나기 전에 내 자리를 확고히 지키는 수밖에 없다. - P82

13

뉴욕 고속도로의 통행료는 꽤 부담스럽다. - P85

나는 베트남에 가본 적이 없다. (중략). 다인스가 보란 듯이 베트남참전 경력을 이력서에 적어놓았다는 사실이 거슬린다. 그래서 어쩌라고? 25년이나 지나서 무슨 보상이라도 받아내겠다는 거야? 그게 무슨 특별한 참작 사항이라도 돼? - P85

몇 년 전, 텔레비전에서 특별 방송을 본 적이 있다. 진행자는 ‘과도적 기술‘에 대해 설명했다. 철도 시설에 대한 프로그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도적 기술은 쉽고 상식적인 기술이 개발되기 전까지 쓰이던 성가신 기술이다. 미봉책 치고는 개발에 들인 시간과 노력과 비용이 엄청난 것으로 이를테면 철도 교량, 운하 등.
하지만 모든 것이 과도적 기술이다. 나는 이제야 그걸 깨닫기 시작한다. - P87

이 동네 집들은 독립형 차고를 하나씩 갖추고 있다. 그중 대부분은 집의 옆이나 뒤편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하지만 혹독한 겨울 날씨 탓에 집과 차고를 이어주는 통로를 만들어 놓은 곳도 간간이 목격된다.
264번지의 차고는 통로 없는 독립형 차고다. - P89

말. 과도적 기술.
나는 264번지에서 한 블록쯤 떨어진 지점에 차를 세워놓고 있다. 바로옆에는 매물로 나온 집이 우뚝 서 있다. 앞뜰 잔디에는 ‘매물‘ 표지판이 박혀 있고, 창문에는 커튼이 달려 있지 않다. 오늘은 집을 보러 온 연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이웃의 누군가가 블라인드 뒤에 숨어 의심에 찬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 P91

내가 기름을 넣고, 공중전화를 썼던 주유소는 8번 국도가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주유소의 대각선 맞은편에는 식당이 하나 서 있다. 
(중략). 그는 여전히 신중한 모습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목적지는 있지만 전혀 급하지 않다는 듯. (중략).
. 나는 교차로의 신호등에 걸려 차를 멈춰 세운다. - P94

4시 50분. 그가 안으로 들어간 지 한 시간이 지났다. 안에 여자 친구라도 있는 건가? 대체 여기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 대낮에 식당에서 월하길래? 그는 신문을 쥐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스포츠 재킷 주머니에 문고판 소설이 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대청소 중인 아내를 위해 및시간 집을 비워주기로 했는지도 모르고 - P95

차문을 걸고 식당으로 들어가본다. 그가 보이지 않는다. - P95

하지만 대체 왜? 아까 추측한 대로 여자 친구와 밀회를 즐기러 사라진걸까? 아니면 새 일자리를 구하기 전에 은행이라도 털려는 걸까? (물론 그건 나 역시 생각해본 적 있다.)혹시 날 노리고 있는 건 아닐까?
전부 이치에 닿지 않는다. 보나마나 그는 화장실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 P96

그가 카운터 뒤에 있는 스윙 도어를 열고 불쑥 튀어나온다. 초록색 앞치마를 두른 그는 피쉬 앤 칩스 접시를 들고 있다. 그가 내 왼쪽에 앉은 손님앞에 접시를 내려놓는다.
그는 여기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충격에 머릿속이 하얘진다. - P96

중간관리자 출신이 동네 식당에서 일을 하다니. 여기서 버는 돈으로는 세 블록 떨어진 집의 융자금도 제때 갚지 못할 것이다. - P97

그들과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면 안 돼. 이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세워뒀던 방침이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다짐해온 내용이었다. - P97

하지만 이제 난 어찌 해야 하나? 그는 언제까지 여기서 일을 할까? 주차장에 세워놓은 보야저에서 여덟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닌가?
여섯 시간! 열두 시간? - P98

(전략).
나는 맞장구친다. 부디 이것으로 불편한 대화가 끝나기를 바라면서.
그가 팔짱을 풀고 내 오른쪽을 가리킨다. 나는 그의 눈을 올려다본다. 지금손에 루거가 쥐어져 있었다면 이 자리에서 볼일을 해결할 수 있을 텐데.
"8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2.5킬로미터쯤 내려가면 도슨스 모텔이 있습니다. 거기서 묵어본 적은 없지만 나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 P99

드디어 궁금증을 풀 기회가 왔다. 나는 묻는다.
"여기서 풀타임으로 일하십니까?"
"거의 풀타임이죠. 하루에 여덟 시간씩 일합니다. 일주일에 네 번 나오고요 오후 4시부터 자정까지." - P100

그가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젓는다.
"제 전문 분야와는 거리가 멀죠 전 페이퍼 업계에서 25년간 일했습니다."
그가 말한다.
나는 모르는 척하며 묻는다.
"신문 말씀입니까?"
"아뇨. 제지업 말입니다." - P101

나는 말한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선생이 주문하신 게 다 된 모양입니다."
벨 소리가 난 주방을 돌아보며 그가 말한다. 그리고 다시 스윙 도어 안으로 사라진다.  - P101

(전략).
"메모지, 주문서, 회계 문서, 뭐 그런 것들을 취급했죠. 중간관리직으로, 생산 라인을 감독했습니다."
나는 어색하게 킬킬 웃는다.
"그러니까 선생 쪽으로부터 재료를 공급받아 왔던 거죠."
"저희 쪽은 아니었을 겁니다. 저흰 산업용 특수 용지만을 취급했거든요."
그가 씨익 웃으며 말하곤 이내 다시 고개를 젓는다. - P103

"요즘 벌어지는 일들 말입니다. 범죄나 다름없어요."
"대량 해고 말씀이죠?"
"인원 삭감, 직원 줄이기. 그들이 어떤 완곡어법을 쓰든 범죄는 범죄죠." - P103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보스들이 이러도록 내버려두는 사회가 문제죠. 아시아 어떤 나라의 미개한 부족들은 신생아들을 산허리로 데려가 죽인다고 합니다. 그래야 그들을 먹일 필요도, 돌봐줄 필요도 없어지니까요. 먼 옛날 에스키모들은 나이 든 부모를 빙산에 놓아두고 왔다죠? 그렇게 정처 없이 떠다니다가 죽도록 말입니다. 더 이상 부양이 힘들어지면 그런 방법을 쓴다고 하네요. 하지만 지금 이 사회는 가장 생산적인 사람들, 한창때의 사람들, 인생의절정에 다다른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폐기 처분시키고 있습니다. 이게 미친게 아니면 뭐겠습니까?" - P104

비치 보이스의 <굿 바이브레이션스>가 흘러나온다. (중략). 꿈에서 깨보니 나는 도슨스모텔에 누워 있다. 맞춰놓은 대로 밤 11시 30분이 되자 라디오가 켜진것이다. (중략).
도슨스 모텔은 고풍스럽게 꾸며진 곳이다. (중략).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나이 든 남자는 간만의 손님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가 내민 현금을 보자 그 미소는 더욱 환해졌다. "난 신용카드를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대세를 거스를 순 없겠죠." 그가 말했다.
현금, 과도적 기술. - P106

모텔 문도 구식이다. 나갈 때마다 열쇠로 일일이 잠가야만 한다. 다행히 지붕이 돌출돼 있어 문을 걸어 잠그는 동안 비를 맞지 않아도 된다.  - P106

왼편의 주유소는 문을 닫았다. 하지만 오른편의 식당은 아직 영업 중이다. 내 바로 앞 교차로를 건너는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스포츠 재킷에 모자. 빗속에서 어깨를 움츠린 채 터덕터덕 걸음을 옮기고 있는 남자. 에버릿 다인스다!
젠장! 빌어먹을! 이렇게 일찍 나올 줄이야! 일부러 시간을 정확히 맞춰왔건만! - P107

나는 헤드라이트를 끈다. 그렇게 차는 밤의 어둠 속에 파묻힌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기가 무섭게 나는 왼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조금씩 속도를 내본다.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차의 왼쪽 좌석에 앉은 채 오른쪽 창밖으로 총을 쏘는 것 말이다. - P108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는다. 보야저가 미끄러지며 앞으로 돌진한다. 밤의 어둠 속에서 그는 그저 검은 덩어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게 비에 젖어 반짝인다. - P108

브레이크를 더 세게 밟아 차를 세운다. 그런 다음, 헤드라이트를 켜고후진 기어를 넣는다. 후진등이 들어오고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룸미러, 왼쪽 백미러, 그리고 오른쪽 백미러로 그의 상태를 확인한다. 그는아직 움직이고 있다.
오, 맙소사, 안 돼. 그냥 쓰러져 죽어버리라고. 이걸로 부족해? 그는 몸을 굴려 일어나려 하고 있다. - P109

이번에 확실하게 끝내야 해 나는 다시 기어를 주행에 넣고 천천히 전전하기 시작한다. 그의 머리를 가는 채로 쿵, 왼쪽 앞 타이어 중 왼쪽 뒤 타이어 됐어나는 차를 멈춘다. 후진 기어를 넣자 다시 후진이 들어온다. 나는 세 개의 백미터로 그의 상태를 다시 확인한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 P110

모텔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흐느껴 운다. 모텔에 도착해서도 흐느낌은멈추지 않는다. 기운이 빠져 핸들을 붙잡고 있기가 힘들 지경이다.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제대로 밟을 힘도 없다. - P110

흐느낌은 멎어 있다. 하지만 극심한 피로는 여전하다. 침대 옆 라디오 시계는 12시 47분을 알리고 있다. 에버릿 다인스를 죽이러 모텔을 나선지 딱 한 시간 만에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이런 상태로는 천 년도 넘게 잘 수 있을 것 같다.
침대로 들어가 불을 끈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또다시 울음이 터질 것만 같다. 머릿속에서는 비와 어둠과 보야저의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뒤덮인 네더 가의 풍경이 계속 아른거린다. - P111

미쳐가고 있는 걸까? 어떻게 내가 이런 짓을 할 수 있지? 허버트 에벌리, 에드워드 럭스와 불쌍한 그의 아내, 그리고 에버릿 다인스. 그는 나와 같은 처지였다. 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다. - P112

지금까지 총 네 명을 죽였다. - P113

내 마지막 이력서.
서명은 하지만 날짜는 적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내일 내가 무슨 일을 꾸미게 될지 알 길이 없다. 저기 옷장 속 파이프막대에 걸린 레인코트에서 루거를 꺼내와 자살을 하거나 다시 리치계에트로 돌아가 자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 P114

14

모처럼 푹 잤다. 눈을 떠보니 개운하고 편안하다. 그리고 며칠 굶은 곰처럼 배가 고프다. 일부러 알람을 맞춰놓지 않아 정말로 원 없이 잘 수 있었다. 라디오 시계는 9시 27분을 알리고 있다. 원래 7시 30분이면 가뿐히 일어나던 나였다. 오늘 이런 모습은 나답지 않다. - P115

나는 테이블에 앉아 어젯밤 적어놓은 고백의 내용을 다시 읽어본다. 오싹한 공포가 온몸을 휘감는다. 어젯밤 내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긴장고 불안했고 겁에 질려 있었다. 불면증에도 시달렸다. 하지만 이 고백의 글 덕분에 모처럼 단잠을 이룰 수 있었다. - P116

 운전을 하는 내내 차에 남은 살인의 흔적을 걱정한다. 우선 수리를 해야 할 것이다. 보험회사에 보고도 해야 할 거고. 물론 공제액을 넘을 가능성은 적지만. 마저리에게도 차에 대해 해명해야 할 것이다. - P116

경찰이 이 밴을 찾아 나설 거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장 살인으로 단정 짓고 수사를 벌이지는 않겠지만 뺑소니 역시 과실치사로 꽤 중한 범죄다.
그들이 어떤 단서를 잡았을까? 보나마나 타이어 자국이 전부일 것이다. - P117

도로 왼편으로 재목 저장소가 보인다. 그 앞에는 차가 몇 대 세워져 있다. 차들은 전부 도로를 등지고 있다. 갑자기 소형 오픈 트럭 한 대가 뒤를 충분히 살피지 않은 채 맹렬히 후진해 나오기 시작한다. (중략). 오히려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아 트럭과 충돌하게 만든다. 내차의 왼쪽 앞부분과 트럭의 왼쪽 측면이 스치면서 접촉사고가 난 것이다. - P118

그중 하나가 트럭으로 달려가 운전자에게 시동을 끄라고 한다. 남자는 시키는 대로 한다. 시동이 꺼지자 요란한 음악이 뚝 멎는다. 또 한 명이 내게 말한다.
"경찰을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저 친구가 뒤도 안보고 튀어나왔다니까요."
나는 말한다. - P119

모두가 내 잘못이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트럭 운전사조차도 음악을 크게 튼 채 뒤를 확인하지 않고 튀어나온 자신을 탓한다.
주 경찰은 선량한 피해자 대하듯 나를 다룬다. 젊은 트럭 운전사는 졸지에 나쁜 놈이 돼버린다.  - P119

15

마저리와 나는 아직도 일요일을 특별하게 여긴다. 더 이상 그럴 이유가 남아 있지 않음에도. - P121

"버크! 버크!"
마저리와 나는 가운 차림으로 거실에 앉아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일요일판 『타임스』를 훑고 있는 중이다. (중략). 마저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내 왼쪽 소파에 앉아 있다.  - P122

아내가 말한다. 아내의 눈 밑에는 흰색의 작은 얼룩이 나 있다. 광대뼈 바로 위에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은 분위기다. 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말한다.
"일 때문에 그래, 여보, 지금 내 정신이......" - P124

그녀가 말한다.
"곧 그렇게 될 거야. 우린 서로를 사랑하고 있잖아. 우린 충분히 강하다고"
"우린 강하지 않아요. 난 강하지 않아요. 이젠 지쳤어요. 더 이상 비참해지긴 싫다고요. 이런 절박함도 싫고 마치………… 마치 덫에 걸린 마멋 (미국과 캐나다 등에서 서식하는 설치류 동물로 오소리와 비슷하게 생겼음)이 된 기분이에요!"
상상이 잘 되지 않는 이미지다. 아내는 오랫동안 이 문제를 고민해왔을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아무 낌새도 채지 못했다. - P125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불가능한 일이야. 나는 말한다.
"마저리, 우리 사정을 들어줄 제삼자는 필요 없어. 그냥 우리끼리 대화로 풀면 된다고, 그동안 우리 잘해왔잖아. 아무리 큰 시련이 닥쳐도......"
"당신이 날 버리고 떠나려 했을 때 말이죠?"
그녀가 말한다. - P126

"마저리, 일에 대한 문제라면 얼마든지 대화로 풀 수 있잖아."
"당신과는 대화가 안 돼요."
아내가 말한다. 아내의 시선이 전망창 쪽으로 돌아간다. 아내는 많이 진정된 상태다.
"그게 문제라고요. 당신과는 대화가 안 된다는 거 말이에요."
"내가 당신에게 무관심했다는 거 인정해. 하지만 지금부터 달라질게. 확 달라질 거라고."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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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이 책은 디자이너이자 사업가인 콘란과 디자인 비평가 베일리가 쓴 일종의 백과사전식 디자인 역사서다. 디자인 분야의 실무자와 경영자. 이론가가 함께 책을 쓴 드문 경우인 만큼 책의 성격도 특별하다.
대부분의 사전류 또는 용어 해설집의 경우. 다른 글을 이해하는 데에 보탬이 되는 참고서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은 앞부분의 디자인 사적인 고찰과 뒷부분의 사전식 설명이 상호 보완의 관계를 이루기 때문에, 독립적인 한 권의 책으로도 손색이 없다. - P-1

좋은디자인에 대한 단상

테렌스 콘란 Terence Conran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너무나 흔하지만 여기에 명쾌한 답을 제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사실 답은 간단하다. 좋은 디자인이란 사물 그 자체에서 드러나게 마련이다. - P10

나는 좋은 디자인 또는 사려 깊은 디자인이란 98퍼센트의 상식과 2퍼센트의 신비한 요소, 즉 우리가 흔히 예술 또는 미학이라고 지칭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 P10

혁신성은 좋은 디자인의 결정적 요소다. 현존하는 문제에 대해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디자이너가 해야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좋은 디자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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