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화 4: 맥밀런 자매

모든 여정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건 맥밀런 가족을 찾는 일이었다. 그건 정말 컴컴한 어둠 속에서 바늘을 찾는 일이었다. 내가 맥밀런 가족을 찾고 싶었던 이유는 비비안과 맥밀런 가족의 아버지가 필름을 함께 현상했기 때문이다. 맥밀런 가족을 찍은 사진은 수십 장이나 있지만, 이 가족에대한 정보는 글라신지 봉투 한 장에 적은 ‘업스테이트 뉴욕‘이 전부였다. - P412

 사진에 찍힌 주변 건물을 살펴보고 구글어스의 도움을 받아 나는 가족의 집이 1번로360번지이거나 390번지임을 알 수 있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인구조사기록이 없었기에 훨씬 정보량이 적은 전화번호부로 이 가족을 추적할 수밖에 없었다. - P412

비비안이 찍은 사진을 크게 확대하고, 다시 철저하게 살피며 단서를 찾다가 문득 장난감 전화기의 다이얼 가운데적혀 있는 글자를 발견했다. 오랫동안 나는 그 글자가 가짜 전화번호라고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이름처럼 보였다. - P413

. 그러자 1번로의 주소를 찾으려고 전화번호부를 뒤질 때 본 적이 있는 맥밀런이라는 성이 생각났다. 1번로 390번지에 살고 있는 자스(제임스James의 줄임말. 옮긴이) R.맥밀런이라는 이름이 말이다. - P413

잘 보이지도 않는 장난감 전화기의 글자는 애초에 ‘세라‘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래도 직감을 확인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 P414

 나는 계속해서 스크롤을 움직이며 주변 환경을 살폈다. 그리고 곧, 길을 따라 쭉 세워져 있는 나무 담장이 보였다. 비비안이 사진으로 담은 그 담장이었다! - P414

공개된 정보에 따르면, 세라는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루시아는1954년에 함께 살았던 보모를 기억하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메리에게 주목했고, 뉴멕시코에 살고 있는 메리를 찾아냈다. 처음에 메리는 비비안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진을 보여주자가족에게 중요했던 추억과 이야기들을 기억해냈다. - P415

메리는 그토록 따뜻한 휴가 사진은 모두 엄청난 허구라고 했다. 그때 메리의 부모는 약물 남용, 불륜,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메리의 아버지는 평생 아내와 애인 사이를 오갔다. - P415

메리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사진은 현실을 충분히 오도할 수 있음을, 사진에 담긴 장면이 반드시 진실이거나 무언가를 상징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진 속에 담긴가족의 단란함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 P415

다양한 일화를 들려준 메리의 이야기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사실은 비비안이 사진을 나누어주기를 꺼려했다는것이다. 그때 이미 비비안에게는 사진을 모으는 수집벽이 나타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P416

비화 5: 마이어 가문

콕사키 감화원에서 보관하던 파일에는 흔히 전기작가들이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가 들어 있었고, 군대 기록에는 유전성 정신 질환에 관한 기록을 비롯해가족의 역사가 가득 들어 있었다. 칼의 기록은 비비안 마이어의 인생을 열 - P416

그래서 비비안의 직계 가족을 아는 사람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마리 조소나 니콜라스 바일 같은 경우에는 어렵지 않았다. 모두 90세가 넘었지만, 아직 샹소르 계곡에는 두 사람을 아는 이가 몇 명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P416

칼 마이어

 십 대 때 칼에게 편지를 보냈던 친구들은 오래전에 칼의 곁을 떠났고, 몇 사람은 감옥에, 몇 사람은 이른 죽음을 맞았다.  - P416

뉴저지주 앳코에 위치한 L&S 쉼터는 노인 돌봄 학대에 관한 심층 연구의 대상이기도 했던 시설로, 그 결과는 뉴저지주 문서 보관소에서 열람할 수 있다. 이 시설은 비교적 높은 점수를 받았고, 해당 연구는 칼이 그곳에서 경험했을 일들을 상당히 자세하게 알려주었을 뿐 아니라, 시설의 오랜 소유주 이름도 알려주었다. 그들은 플로리다에 살고 있었다. - P417

나는 칼이 문제 많고 자기 파괴적인 사람이었다고 증언하리라 예상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묘사를 듣는 동안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칼이 아니라 비비안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사람을 묘사했다. 칼은 유창하게 말을 하고, 옷을 단정하게 입었으며, 바른 태도를 지녔고, 덩치는 컸지만 상당히 조용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 P417

찰스 마이어 시니어

나는 비비안의 아버지를 직접 알고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엄청난 시간을 투자했고, 결국 보상을 받았다. 내가 시도한 방식은 찰스의 두 번째 아내의 가족을 찾는 것이었다. - P417

뉴욕에서 대중에게 공개되는 유언검인소 기록은 개인의 가족 역동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베르타는 이렇다 할 유언을 남기지 않고세상을 떠났지만, 행정 기록을 보면 베르타의 후손은 다섯 갈래로 뻗어나갔음을 알 수 있다. - P418

 찰스에 관해서는 그의 어머니가 이미 형편없이 묘사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좋은 이야기가 나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조카는 말문을 떼는 것이 망설여질 정도로 자신이 알고있는 이야기가 너무 추잡하다며 입을 닫으려 했다. - P418

 오빠와 달리 비비안은 정말로 자기 아버지와는 거의 교류가 없었기를 바랄 뿐이다. - P419

외제니 조소

. 요리사로 크게 성공하기도 했고, 남긴 편지에서 느껴지는 인상이 맞는다면, 외제니는 윤리적이고 따뜻하며 현명한 사람이고, 비비안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 같았다. 무엇보다 비비안에게는 깊이 새겨진 올바른 가치관이 있었다. 그 가치관은 누군가의 영향을 받았을 테니, 비비안의 자질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중요했다.  - P419

가족에게 제니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는데도, 외제니의 사진은 비비안의 소지품에서도, 오트잘프 문서 보관소에서도, 프랑스에 있는 친구나 가족에게서도 찾지 못했다.  - P419

뉴욕시나 서포크 카운티와 달리 낫소 카운티는 카운티에서 발행한 문서를 직접 보관하고 있었고, 그 문서들이 검색 가능하게 된 것은 내가 비비안의 가족에 대한 조사를 모두 끝마친 뒤였다. - P420

그때쯤이면 외제니가 1901년에 미국에 도착했음을 입증할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입국 확인 증명서도 함께 제출해야 했다. 필요한 서류를 모두준비하고 증인도 찾아야 했다. 외제니가 그 과정을 모두 마쳤을 때는 이미 한 해가 지나 1932년이 되어 있었다. - P420

. 그 서류를 보는 순간 나는 외제니의 귀화가 낫소카운티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미국 이민국에서 처리되었음을 받았다. 귀화 신청을 연기함으로써, 외제니가 나에게 아주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준 것이다. 마이어 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초기에 귀화를 신청한 사람들은 사진을 제출할 필요가 없었다. - 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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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언어 검사

첫 번째 답변과는 달리, 데카르트가 제시할 수 있는 두 번째 답변은 라메트리가 제기한 반대와 관련이 있다. 우리가 오직 의식을 상정함으로써만 설명할 수 있는 행동 유형을 구체적으로 지적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더 나아가 동물이 아닌 오직 인간만이 그러한 유형의 행동을 나타낼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 P106

우리는 데카르트에게서 그런 논증을 찾아낼 수 있다. 즉 데카르트는 언어 행위를 그러한 유형의 행위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는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다. - P106

지금으로서는 데카르트가 앞으로 언어 검사(language test)로 부르게 될 특별한 검사를 추천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검사는 개체가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단어이든 혹은 이에 상당하는 것(예를 들어 농아가사용하는 신호)이든,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개체는 언어 검사를 통과하고, 이를 통해 의식이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그렇게 하지 못하는 개체는 언어 검사를 통과하지 못하고, 그 결과 ‘생각이없는 것‘이 입증된다. - P108

데카르트는 동물들이 이러한 검사를 통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언어 검사의 적절성을 검사해보기에 앞서 데카르트의 이런 생각이 과연 옳은지부터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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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물 체계

우리는 기저귀를 차고 고무젖꼭지를 빨았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 또한 자신의 이름은 알지만 이 이름을 얻게 된 경위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대략 다섯 살 이후로는 아꼈던 애완동물, 장난감,
선생님, 친구, 숙모들의 달갑지 않은 포옹, 골을 넣은 순간, 여름 캠프, 할로윈 축제 등 삶에서 일어난 일을 상당히 잘 기억한다. - P34

톨스토이는 "다섯 살 때부터 지금의 나 자신까지는 한 단계에 불과하지만 갓 태어났을 때부터 다섯 살 아이가 되기까지는 어마어마한 거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우리는 울고 옹알이하는 신생아에서 각자가 속한 문화에서 의미를 찾는 성인으로 변모하는가? - P35

심리적 안정감을 향한 욕구

어린 시절은 심리적 안정감 구축에 매우 중요하다. 어린 시절이 원만하지 않으면 성인기로 향하는 여정이 대단히 참혹할 수 있다. - P35

사이프리언은 동물원 같은 고아원에서 자라는 17만 명에 이르는 루마니아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이곳 아이들은 늘 배를 곯았고 기저귀도 아주 가끔밖에 갈아주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 맑은 공기를 쐴 기회도 없었다. 아이들 방은 오줌 냄새와 퀘퀘한 체취로 가득 차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 P36

. 1992년 여름 부쿠레슈티에서 양부모가 사이프리언을 데리러 왔을 때 그는 ‘성장 실패 상태‘, 즉 성장과 발달이 멈춘 상태였다. 당시 그는 신체적으로 쪼그라들고 영양실조 상태인 두 살배기아기였다. 정신적으로는 더더욱 심각했다.
그러나 사이프리언은 몇 안 되는 행운아 중 한 명이었다. 양부모는 그에게 캐머런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고 그를 미국으로 데려갔다. 새 가족은 그에게 애정과 관심을 쏟아 부었다.  - P36

다섯 살 무렵 캐머런이 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대니얼과 그의아내는 아들을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
캐머런은 ‘반응성 애착장애 reactive attachment disorder‘라고 하는 심각한 심리적 질환을 앓고 있었다. - P37

‘안정감‘이라는 감정은 아기에게는 우유와 온기만큼이나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그러나 아기에게 이런 감정은 저절로 생겨나지않는다.  - P37

반면, 인간 신생아들은 모든 생물 중에서 가장 미숙하고 무력한 존재이다. 자궁 밖으로 나온인간은 한동안 남의 도움 없이는 목을 가누거나 몸을 뒤집을 수도 없다. - P37

20세기 내내 심리학자들은 아기가 부모를 사랑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라고 생각했다. 부모가 먹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P38

 이후 행동심리학자 B. F. 스키너 Skinner는 유아기 유대 관계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강화reinforcement‘라고 주장했다. 강화 이론은 우유를 들고 반복해서 나타나는 사람이 누구든 간에 명백히 수유와 연관이 있으므로 아기의 애착과 애정을 받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 - P38

그러나 애착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해리할로 Harry Harlow가 일련의 유명한 실험을 실시하기 전인 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P38

할로는 새끼 원숭이들에게 안정의 기반은 테리 직물 어미라고 설명했다. 부드러운 어미와 편안하게 접촉하면서 처음에 느꼈던 공포가 누그러지자 원숭이들은 자신감을 되찾았다. 할로는 우리가 부모를 사랑하는 이유는 부모가 먹을 것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는 결론을내렸다. 우리는 부모와 신체를 접촉함으로써 편안한 안정감을 얻기때문에 부모를 사랑한다.
할로가 실험을 하는 동안 정신과의사 존 볼비 John Bowlby는 이와 일맥상통하는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을 전개했다. - P40

 볼비는 유아가 생존하려면 관심을 주는 양육자와 감정적으로 애착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아는 무력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불안에 유달리 취약하며, 애착 대상과의 분리는 그들에게 최악의 위협 요인이다. 볼비는 이러한이유로 유아에게 자신이 안전하고 정상이라는 감각, 즉 ‘기본적 신뢰basic trust‘ 형성은 지극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 P41

신뢰와 시련
오늘날 우리는 랭크, 할로, 볼비를 비롯한 여러 학자 덕분에 영아초기에 심리적 안정감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원천이 부모의 사랑과 보호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 P41

운 좋게도 애정이 넘치는 가정에 태어나면 신생아 노릇은 꽤 할만한 일이다. 엄마의 따스한 품으로 파고들면 달콤한 영양분을 얻을수 있다. - P41

걷기 시작하면 이러한 즐거운 반응을 끌어내기란 힘들어지며 부모가 좋아하지 않는 행동을 할 때는 특히 더 그렇다. 이 시기에 아이는 흙먼지를 입에 넣기도 한다. 어항에 오줌을 눌 수도 있다. 찻길로 굴러가는 공을 쫓아가기도 한다. - P42

부모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면 아이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때로는 이 일에 말 그대로 생사가 결정되기도 한다. - P42

그러나 자녀가 부적절하게 행동하면 부모는 질책, 타임아웃(time-out, 일정 시간 동안 자녀를 격리하여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못하도록 하는 행동 수정 기법의 일종-옮긴이), 체벌, 혹은 승인의 철저한 배제 등으로 대응한다.  - P43

안정의 기반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으로부터 공격받거나 버림받는 일보다 더 나쁜 건 없을 것이다. - P44

이렇게 성장하면서 우리는 ‘착한‘ 소녀나 소년이 되는 일은 보호및 행복과 연결되고 ‘나쁜‘ 소녀 소년이 되는 일은 불안 및 취약성과 결부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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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C

비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운과 인내였고, 대부분의 추적에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비비안의 여정과 사진에 강하게 끌리기도 했지만, 나 자신에게도 도전해보고 싶었다. 나는 대부분 무료로 구할 수 있는 정보를 이용했다. - P398

뉴욕에서는 비비안을 아는 사람을 한 명도 찾을 수 없어서, 사진 속 익명의 피사체들은 알려지지 않은 비비안의 생애를 채워줄 잠재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찾을 수 있는 단서는 나이 든 부부와 세 명의 젊은 아가씨들이라는 것, 그리고 공동주택의 옥상뿐이었다. 이 가족의사진에는 드물게도 날짜가 적혀 있는 사진이 몇 장 있었고, ‘란다초 부인‘
이라고 적혀 있는 사진도 한 장 있어, 성을 근거로 탐문할 수 있었다. - P399

인터넷으로 재빨리 검색해보니 란다초는 시칠리아계 성이었다. (중략) 놀랍게도 1940년에 실시한 인구조사대로라면 뉴욕시만 해도 란다초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거의 700명에 달했다. - P399

옥상 사진에서는 남쪽에 있는 대단지 흰색 아파트를 비롯해 먼 곳의 건물과 주변 풍경이 보인다. 브롱크스와 퀸즈에 그런 고층 건물이 많다는 사실을 떠올린 나는 다음 6개월 동안 딸이 셋인 란다초 가족을 찾으려고 두 지역의 옛 사진들과 인구조사 기록을 체계적으로 조사했다.  - P399

그러던 어느 날, 차를 타고 3번로를 달리고 있을 때, 문득 위를 올려다보았고, 마침내 발견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위치와는 정반대 방향에서 말이다. - P399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나는 원본 사진을 뒤집어보았고, 지금까지 무엇을 놓쳤는지 알 수 있었다. 흰색 아파트 단지를 공동주택의 북서쪽으로 보내고 나자, 비로소 헌터 칼리지의 낯익은 작은 탑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에서는 박공 건물이 옆에 있었지만, 구글어스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 P400

사진에서 북쪽의 위치를 확실하게 정하자 사진 속 인물 가운에 한 명의 어깨너머로 훨씬 남쪽에 있는 특수외과병원(HSS)이 보였다. 지금까지 찾은 건물들을 삼각측량법으로 배치해, 결국 비비안이 사진을 찍은 장소가이스트 63번가 403번지임을 확인했고, ‘올드 뉴욕 시티‘에서 그곳에 있던건물 역시 철거됐음을 알았다. - P401

어쩌면 란다초 가족은 1940년 이후에 63번가로 이사했을 수도 있었기때문에 1940년 인구조사에서 뉴욕에 살던 모든 S. 란다초나 란다사를 찾는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에 착수했다. 하지만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 P401

. 1940년 인구조사 기록에는 ‘란드소‘
라고 성이 잘못 기재되어 있었고, 전화번호부에도 ‘란다사‘라고 잘못 적혀있어서 그렇게 찾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철자가 틀리면 족보가 뒤틀릴 수 있다!) 나를 괴롭혔던 그 옥상은 비비안이 살았던 64번가 아파트에서 한 블록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 P402

부고를 뒤지자 아직도 건강하게 살아 있는 란다초 자매 가운데 한 명의 결혼한 성과 주소를 찾을 수 있었다. - P402

사진 속 인물들을 아주 오랫동안 조사하고 찾아다니다 보면, 마치 내친구 같다는 기분이 들어 직접 만나기 전부터 친근하게 느껴지는데, 애나를만났을 때가 딱 그랬다. 애나는 정말 더없이 좋은 인터뷰이였다. - P402

소피의 사진은 특히 실험적으로 보였는데 애나는 그 이유를 소피가 괴짜였고, 비비안의 진짜 친구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피와 비비안은 동갑으로, 동네에서 만났다. - P402

2.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의 조앤

(전략)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 살던 매력적인 어린 소녀를 찾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고. 이 여섯 살 아이는 여러 카메라로 촬영하고, 잘라내기와 인화를 여러 방법으로 실험하던 과도기에 피사체가 되어주었다. 조앤 가족의 사진은 500장에 이르는데, 이는 비비안이 뉴욕에서 찍은 사진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 P403

그토록 사진이 많은데도 고용주들의 신원을 밝힐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 어떤 글이나 이름, 특별한 장소조차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진에서 읽을 수 있는 정보는 그들이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340번지로 식별되는 아파트에 사는 가톨릭 신자이며, 중년의 부모와 그들의 딸로 구성된 가족이라는 것뿐이었다. - P403

인구조사 기록이 없을 때 가족 구성원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한방법은 부고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나는 리버사이드 드라이브340번지에 살았던 시드니 샬랫sydney Charlat을 찾아냈고, 그에게 네 자녀가 있음을 확인했다. - P404

나는 루시아 샬랫의 생김새가 1953년 밸런타인데이 때 비비안이 찍은 사진에서 내가 찾고 있는소녀의 뒤에 서 있던 여인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진 속 여인이루시아라면, 두 가족은 친구였을 것이다. - P404

샬랫 자매에게 연락하기 전에 확실히 하고 싶었다. 인터넷을 다시 검색했고, 확실한 증거를 찾았다. 2014년 텍사스 뉴스레터에는 캐럴 샬랫의 주방을 소개하는 글이 실렸는데, 그곳 식탁에 비비안의 사진에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촛대가 놓여 있었다. - P405

조얀은 캐럴과 함께 기억을 더듬은 뒤에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서 살 때 프랑스인 보모가 있었던 아이는 한 명뿐이며, 자신들도 그 보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그 아이의 이름도 조앤이었고, 아이의 어머니 이름은마리이며, 그 가족은 유명한 스테이크하우스를 운영했다고 했다.  - P406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비비안의 수많은 사진에서 이미 보았던 아이의 어머니가 수년 동안 내가 계속 바라보던 얼굴이 거기 있었다. 그토록 찾아 헤맨 피사체의 정체가 마침내 드러났다. - P406

공교롭게도 조앤은비비안 마이어의 팬이었고,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까지 보았지만, 그 주인공이 자신의 보모였다는 건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조앤은 보모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저 모두 ‘마드모아젤‘이라고 불렀으니까! - P406

두 조앤은 비비안의 생애를 밝히는 데 필요한 새로운 세부 사항을 들려주었다. 본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두 조앤도, 두 조앤의 형제와 사촌들도, 보모는 차가웠고 엄격했으며, 공감 능력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비록자신이 찍은 사진을 관대하게 나누어주었지만 말이다. - P407

비화 3 여성 사진작가들

비비안의 초기 작업과 그녀가 나이든 동료들에게 보인 강한 관심에 관한 정보는 모두 부족한 상황이었다. 두사진작가의 사진과 네거티브 필름 말고는 신원을 알 수 있는 단서도 없었다. - P407

처음 두 사진을 확대하고 밝게 하자 암실 사진에서 뒤에 보이는 의자와 사무실 벽에 걸린 사진에 등장하는 의자가 같은 의자라는 것이 드러났고, 두 사진 속 인물이 동일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을 두 장이나 찍었을 뿐 아니라, 두 번째 사진은 비비안 자신이 직접 인화해 간직했던 것으로 보아 이 사람은 비비안에게 중요한 인물이었음이 틀림없다. - P407

사진작가의 책상에 놓인 외국어 신문 「카를스루에 카탈로그Karlsruhe catalog」와 벽에 걸린 사진들을 근거로 사진작가가 독일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407

그밖에는 다른 단서가 없었기 때문에1950년대에 비비안이 자주 다니던 지역을 조사했고, 그곳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1953년에 영화 <택시> 촬영장에서 찍은 여러 사진의 배경에 한 사진 스튜디오가 보였다. - P408

스튜디오의 간판에는 ‘캐롤라 스튜디오‘라고 적혀 있었고, 유명인, 여권 사진,
결혼사진 샘플을 전시하고 있는 것으로보아 스튜디오의 주인이 비비안 사진의 주인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P408

. 철자가 다른 캐롤라를 수없이 찾고, 여러 사진을 들여다본 끝에 1933년도 기록에서 3번로 987번지 부근에서 살았던 사진작가 캐롤라 헴스를 찾을 수 있었다. 오래된 인구조사 기록에서 캐롤라가 남편과 함께 일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전화번호부에서 캐롤라의 일터가 3번로 987번지였음을 확인했다.  - P409

 나는 대안을 찾다가 귀화하지 않은 엘리제 뢰펠 멜스가 2차세계 대전 동안 독일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했던 적국 시민 등록을 했을 거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실제로 엘리제 멜스의 적국 시민 등록증에는 비비안의 사진 속 인물과 동일인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닮은 여자의 사진이 있어, 캐롤라 헴스가 엘리제의 자매이자 비비안의 멘토임을 확증할 수 있었다. - P410

1956년에 뉴욕으로 돌아온 비비안은 뜬금없이 스튜디오에 걸려 있는결혼식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 덕분에 나는 비비안이 실제로 헴스의 스튜디오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 속 거울에 지금은 사라진 캐롤라스튜디오 간판 위에 얹혀 있던 지압사chiropractor 간판이 비춰보였기 때문이다. 그때 비비안은 멘토를 찾아 스튜디오로 왔지만, 이미 캐롤라는 은퇴하고 독일로 여행을 떠난 뒤였고,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사망했다. - P410

 1940년대와 1950년대에 헴스 스튜디오가 있는 건물에서 한 건물 건너에 있던 3번로 983번지는 사진작가들의 성지였다. 비비안의 사진에도 많이 나오는 이 건물은 분명히 사진과 관련된 활동을 할 때 비비안이 자주 가는 곳이었다. - P410

 캐롤라를 찾고 1년이 지났을 때, 나는 두 번째 사진작가를 찾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유로 오트잘프에 머물면서 디지털로 저장된 1953년 뉴욕시 전화번호부를 살펴보고 있었다. ‘맥M‘으로 시작하는 수많은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지면에서 갑자기 익숙한 주소가 튀어나왔다. 3번로 983번지. - P411

(중략), 제네바 매켄지라는 사진작가가 그 건물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순간 나는 제네바라는 사진작가가 비비안이1954년에 찍은 인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앤세스트리‘ 사이트에서 제네바의 1908년 학급 앨범을 찾아보았고, 내 직감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 P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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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126, 129, 132, 134, 136, 137, 139, 140, 143, 144, 146, 147, 150, 153, 157, 158, 159, 160, 161,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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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207, 208, 209, 212, 214, 216, 217, 218, 220, 221, 222, 224, 225, 226, 228, 231, 232, 233,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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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177, 182, 242, 245, 248, 253, 257, 286, 295, 398, 400, 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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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프랑스인 • 권위적인/소극적인 • 배려하는/냉담한 •여성적인/남성적인 •재미있는/엄격한•너그러운/고집 센 • 쾌활한/냉소적인 • 깔끔한/지저분한 • 친절한/심술궂은 • 열정적인/둔감한 • 매력적인/심각한 • 정중한/퉁명스러운 • 책임감 있는/무신경한 • 사교적인/비사교적인 • 페미니스트/전통적인 • 눈에 띄는/은둔하는 • 메리 포핀스/사악한 마녀
-비비안 마이어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묘사한 비비안의 모습 - P11

이야기는 2007년, 시카고 경매장에서 시작한다. 경매장을 찾은 존 말루프John Maloof는 구매한 물건(당시 집필하던 책에 실을 만한 사진이 있을까 싶어 낙찰받은, 낯선 사진으로 가득 찬 버려진 상자들)을 살펴보다가 자신이 엄청난 보물을 갖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 P11

 그는 경매에서 같은 작가의 사진을 구매한 사람들을 찾아내 사진과 네거티브 필름들을 사들였다. 그 뒤로도 계속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진을 구매해, 그무명 작가의 작품을 거의 다 모을 수 있었다. - P11

사람들은 비비안 마이어를 찾으려고 인터넷을 뒤지고 또 뒤졌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2009년 4월, 며칠 전에 시카고에서 세상을 떠난 보모가 그 모든 사진을 찍은 작가임을 알려주는 부고를 발견했다. - P12

그사이 말루프는 자신이 모은 돈 상당 부분을 비비안의 사진을 사는 데써버렸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작품을 여러 사람과 공유하고 판매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 P12

(전략) 비비안의 사진에 감탄한 많은 이들이 사진을 공유하고 또 공유하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플리커에 올린 사진은 스무 장밖에 되지 않았지만, 다양한 주제와 인물을 다루는 비비안의 작품에는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풍부한 감정과 개성이 담겨 있었다. - P12

결국 말루프는 비비안 사진의 또 다른 주요 구매자 제프리 골드스타인Jeffrey Goldstein과 함께 비비안의 아카이브를 준비해나갔다. 두 사람이 구매한 작품 14만점 가운데 인화한 사진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이 네거티브필름이거나 현상하지 않은 필름이었다. 작품을 모두 분류하자, 비비안이 인쇄한 형태로 남아 있는 7000여 점 외에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 P12

말루프와 골드스타인이 비비안의 작품을 공개할 때마다 그녀의 대단한 업적과 탁월한 재능을 입증하는 증거가 쌓여갔다. 언론은 새롭게 발견한 경이로운 보모에 관한 기사를 계속 실었고, 그에 힘입어 강연과 전시, 책과 찬사가 순환하듯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 P13

 비비안이 시카고에서 입주 보모 일을 했던 집을 십여 곳 찾아가 그녀에 관해 물었지만, 그 사람들은 자기 집에머물며 아이들을 돌봤던 여인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비비안이 사진을 찍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사진이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 P16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2014년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Finding Vivian Maier>는 2015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고, 사진작가였던 보모를 명성이라는 소수의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성층권 안으로 쏘아올렸다. - P16

영화 제작팀은 비비안이 어렸을 때 6년 동안 프랑스 친척 집에 머물렀으며, 서른 살이 될 때까지는 맨해튼에서 살았음을 밝혀주는 가족력을찾아냈지만, 뉴욕에서 비비안이나 비비안의 가족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만나지 못했다. 서른 살 이후로는 죽을 때까지 시카고에서 살았지만, 비비안의 고용주 가운데 그 누구도 비비안이 태어난 곳이나 성장한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고, 비비안에게 가족이나 친구가 있었는지, 무엇 때문에 사진을 찍었는지, 왜 직업 사진작가가 되지 않았는지, 어째서 찍은 사진 대부분을 현상하지 않았고 자신의 작품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 P17

이 사진작가와 관계를 맺게 된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나도 그 궤도로 들어갈 가능성은 아주 낮았다. 나는 회사의 임원으로 일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욕망과 동기, 행동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연구와 분석을 하며 30년을 보냈다. 나에게는 하찮은 세부 사항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답을 모르는 채로 남겨둬도 좋을 의문은 하나도 없었다. - P17

몇 주 안에 나는 존 말루프와 제프리 골드스타인에게 연락해 함께 비비안의 이야기를 따라가보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1940년대 이후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비비안의 오빠, 찰스에게 일어난 일을 밝히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다. 비비안의 귀중한 유산의 직접적인 상속자가 될 찰스와 찰스의 후손을 찾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했다 - P18

(중략), 찰스의 죽음으로 모두가 미심쩍어하던 사실이 명확해졌다. 비비안의 유산을 물려받을 분명한 상속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사실 말이다.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은 내 이야기를 특집 기사로 실었고, 쿡 카운티의 유산 관리자들은 정보를 교환하자며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 P18

내가 비비안의 생애를 계속 쫓는 동안, 말루프와 골드스타인은 각자 나에게 비비안 마이어의 생애 전반을 다룬 권위 있는 전기를 집필해달라고요청했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사진을 언제라도 마음껏 활용할 수 있게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두 사람이 수집한 비비안의 사진 14만 점을 검토한 사람이 되었고, 그 사진들은 이 전기의 초석이 되어주었다. - P18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비비안 마이어가 태어난 세상의 얼개를 짜기 위해 가계도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내가 찾은 비비안 가족의 매장지 정보는 흔치 않은 이야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비비안의 가족 열 명은 모두 맨해튼에 묻혔는데, 묻힌 장소가 아홉 곳이나 됐다! - P19

 마이어 가족이 모두 다른 곳에 묻혔다는 사실은 그들이 영원히 함께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한 불화가 가족 내에 있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교육 받은 기록도 없고, 직업을 가진 기록도 없고, 사람들과 교류한 기록도 없는 비비안의 오빠가 마이어 가족의 비밀을 풀 열쇠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P19

 그리고 마침내, 뉴욕 주립 문서 보관소에 보관돼 있던 콕사키 뉴욕 주립 직업훈련원 수감자 목록에서 칼 마이어라는 이름을찾아냈다. 1936년도 기록이었다. 물론 이 칼이 내가 찾는 비비안의 오빠라는 확신은 없었다. 콕사키는 세 개 주가 만나는 지역으로, 이곳에 살았던칼 마이어는 K로 시작하는 칼도, C로 시작하는 칼도 많았고, 찰스 마이어도 많았다. 하지만 수감자의 출생일을 보자마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성 베드로 루터파 교회에 남아 있는 세례식 기록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 P20

문서 보관소에 도착하니 자원봉사자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7~8센티미터가량 되는 두툼한 서류철을 내밀었다. 편지와서류가 가득 차 있던 서류철에는 칼과 칼의 두 할머니, 칼의 부모, 감화원의 시각으로 전하는 비비안 가족의 완전한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 P20

당시 나는 칼의 입대 기록과 제대 기록을 포함한 칼의 군 생활 기록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열심히 들쑤시고 있었다. 하지만 1973년에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개인정보 보관소에 불이 났고, 그때 기록이 모두 소실됐다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 P20

약간의 반발심을 가지고 나는 다시 군대 문서보관소를 조사했고, 마침내 칼 마이어의 이야기를 담은 두툼한 서류철을 찾아냈다. 군대 기록에는 칼의 복무 내용뿐 아니라 남은 인생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는 정보가 담겨 있었다.  - P21

비비안은 사진에 정보를 거의 적어두지 않았기 때문에 비비안과 교류한 사람들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수년 동안 사진에서 찾은 단서들 위에 다른 정보들을 추가하면서 사진에 찍힌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려고 애썼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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