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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 나타나는 정신 이상에 걸린 등장인물들

Psychopathische Personen auf der Bühne (1942 [1905-1906])

막스 그라프 박사는 1942년 『계간 정신분석』에 실린 논문을통해서 1904년 프로이트가 이 논문을 썼으며, 자기에게 선사했다고 밝혔다. 이 논문은 프로이트에 의해서 출판된 적이 없다. 논문에 헤르만 바르의 글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 글이 쓰인 연도에 대해서는 약간의 착오가 있었던 듯하다. - P135

무대 위에 나타나는 정신 이상에 걸린
등장인물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이래로 극(劇)의 목적은 관객의 마음속에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켜 <감정을 정화(化)>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되어 왔다. - P137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일차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분명 <울분을 풀어냄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지워 버리는과정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은 완전한 감정의 해소에서 비롯되는 안도감이나 위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즐거움이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 해소과정에 수반되어 일어나는 성적 흥분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 P137

여기서 관심을 가진 관객이란 경험이 적은사람, 스스로를 그 어느 의미 있는 일도 일어날 수 없는 가엽고불운한 존재로 느끼는 사람, 세상사의 중심에서 자신의 인격으로 꿋꿋하게 서고자 하는 야망을 이미 오래전부터 일찌감치 거두어들인 사람, 그래서 더더욱 모든 일을 자신의 욕망에 따라 느끼고 행동하고, 해결하고 싶어 하는 사람- 간단히 말하면 바로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 P138

더 나아가 관객은 자신의 생명은 <하나밖에 없는 것이라는 사실과,
역경에 맞선 그런 영웅적 투쟁을 <단 한 차례> 벌이다가도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 P138

극 이외에 창작의 다른 형식들에서도 즐거움의 향유를 위한 전제 조건은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어떤 형식보다도 서정시는, 옛날 한때 춤이 그랬던 것처럼 다양한 종류의 강렬한 감정이 분출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해 왔다는 의미에서 즐거움의 향유라는 목적을 충실히 이루어 온 셈이다. - P139

그러나 극은 감정의 가능성을 더욱 깊이 탐구한다는 점에서, 불행의 전조(前兆)에도 즐거움의 형태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그래서 갈등을 겪는 주인공을 묘사하고, 더 나아가 패배로 괴로워하는 주인공을 (피학적인 만족속에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문학 형식과는 다르다.  - P139

그러므로 어떤 형식으로 주어지든 고통은 극의 주제이며, 그고통을 통해 극은 관객들에게 쾌락을 약속한다. 이제 우리는 극이라는 예술 형식의 첫 번째 전제 조건에 도달한 셈이다. 극은 관객에게 고통을 불러일으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만족을 줄 수있는 가능한 방법을 통하여 관객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공감적 고통을 보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현대 작가들은 바로 이와같은 규칙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다). - P140

정신적 고통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는 주로 그 고통을 유발하는상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정신적 고통을 다루는 극은그 고통의 원인이 되는 사건을 보여 주어야 한다. 보통 극이 그사건의 전개에서 시작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일부 극에서, 가령 「아약스」²나 「필록테테스」에서처럼 원인이 되는 사건보다는 정신적인 고통이 먼저 소개되는 경우도 있긴 한데, 그런 경우는 분명히 예외에 속한다.

2 소포클레스의 비극으로, 아약스 Ajax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의영웅이다. 트로이 전쟁 시 아킬레스의 시신을 구했지만 그 아킬레스의 갑옷이 오디세우스에게 돌아가자 질투심 때문에 자살하고 만다. - P141

그러나 필요한 전제 조건이여실히 드러나는 또 다른 경우를 우리는 개인 사이의 갈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런 경우가 바로 <성격> 비극이다. - P142

<종교>, <사회>, <성격>극 등이 고통으로 나아가는 행위의전개 영역에서 본질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는 극의 전개상 또 다른 영역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바로 <심리>극이다. 심리극에서는 고통을 유발하는 갈등이 주인공의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 P142

그러나 고통의 양상에 따른 극의 종류가 여기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또 그로부터 우리가 즐거움을 이끌어내는 고통의 근원이 거의 동등한 두 의식적인 충동 사이의 갈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식적인 충동과 또 하나의 억압된충동 사이의 갈등에 있는 경우, 심리극은 정신 병리학적 극(사이코드라마)으로 바뀌게 된다. - P143

이 경우에는 단 한 차례의 억압 행위를 가해도 예전부터 억압되어 온 충동을 완전히 억제하는 것이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신경증 환자에게는 억압의 힘이 거의소멸 직전에 있다. 말하자면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지속적인 억압이 필요하다. - P143

그러므로 극의 주제가 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갈등이 신경증 환자에게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도 극작가는 단순히 해방의 <즐거움>만을 촉발시킬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반발심>도 불러일으켜야 할 것이다. - P143

 『햄릿』은 이 글의 논의와 관련하여 중요한 듯이 보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주인공이 원래부터 정신병 환자는 아니다. 다만 극에서 행위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정신병 환자가 되었을 뿐이다. (2) 주인공 내면의 억압된 충동은 우리 모두에게서 마찬가지로 억압되어 있는 그런 충동들 가운데 하나다. - P144

 (3) 의식 속에 떠오르려고 애를 쓰는 충동은,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리 분명하게인식하려고 해도, 뭐라고 정확히 이름 붙일 수가 없다는 사실이바로 이 작품과 같은 예술 형식의 필요 전제 조건이다. 따라서 관객들에게서도 역시 이 과정은 회피된 관심 속에 이루어지게 되며,
관객은 벌어지고 있는 일을 자세히 살펴보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만다. - P144

다른 많은 정신병적 등장인물들이 현실 생활에서처럼 무대에서도 아무런 공헌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앞의 세 가지 전제조건을 무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경증 환자의 갈등은 그것이 완전히 고착(固着)된 경우에 우리가 처음 마주하게 되면, 그 갈등을 전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145

더욱이 이것은 우리에게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억압을 처음 제시할때 특히 필요한 작업이며, 무대 위에서 신경증을 다루는 데 햄릿보다도 한 단계 더 발전된 양상을 보여 주게 될 것이다. - P145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대중들의 신경증적 불안정, 그리고 관객들의 반발심을 피하고 그들에게 사전 쾌락을 제공할 수 있는 극작가의 능력만으로도 무대 위에 등장하는 비정상적인 인물들에게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의 한계를 설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 P146

작가와 몽상

Der Dichter und das Phantasieren (1908[1907])

이 글은 원래 1907년 12월 6일에 빈 정신분석학회 회원이자출판업자인 후고 헬러 Hugo Heller가 제공한 장소에서 90명의 청중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었다. 이 강연의 모든 내용이 처음 실린곳은 1908년 초 새로 창간된 베를린 문학 잡지인 ‘신평론NeueRevue』이었다. 글의 주된 관심은 「그라디바』에 관한 연구에서도언급되고 있는 몽상에 관한 것이다. - P147

작가와 몽상

문외한인 우리는 문학을 창작하는 특별한 사람들이 과연 어디서 소재를 가져오는지, 또 그 소재를 통해 어떻게 그토록 우리를사로잡을 수 있고, 우리로서는 생각조차도 불가능해 보이는 감동들을 어떻게 우리의 가슴속에 불러일으키는지 - 가령 아리오스토에게 그 유명한 질문을 했던 추기경의 심정이 되어 매우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149

즉 작가들은 자신들의 특이성과 인간의 보편적인 본질을 구분하는 거리를 그들 스스로도 기꺼이 좁혀 보려고 한다.
모든 인간 속에는 시인이 숨어 있고 마지막 인간이 사라질 때 마지막 시인도 사라진다는 점을 누누이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 이들은 문학인 자신들이었다. - P150

라 오히려 현실일 것이다. 유희 세계에 모든 감정을 집중시키면서도 아이는 현실과 자신의 유희 세계를 구별할 줄 알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의 가시적이고 만져서 알 수 있는 사물들을 상상적인 대상과 상황들과 연결 짓는 것을 좋아한다. 어린아이의 <놀이>를 <몽상>에서 구별시켜 주는 것 역시 바로 이러한 연결 고리다.

창조적인 작가는 결국 놀이를 하는 아이와 동일한 것을 하고있다. 그 역시 몽상적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고, 그 세계를 진지하게 여기고 있다. - P150

 언어는 재현될 수 있는 유형의 대상과 연관되어 있을 것을 요구하는 상상적 글쓰기의 형식에 Spiel(놀이)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있는것이다. 이 단어는 Lustspiel(희극), Trauerspiel(비극)이라는 말들속에 들어 있고, 이러한 극들을 공연하는 사람을 Schauspieler(배우)라고 부른다.²

2 프로이트는 여기서 독일어의 복합 명사들 속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요소를 추출함으로써 자신의 논거를 세우려고 한다. 독일어의 희극Lustspiel, 비극 Trauerspiel, 배우Schauspieler 등의 단어들 속에는 실제로 놀이나 행위를 뜻하는 Spiel이라는 단어가공통으로 들어가 있다. Spiel이라는 단어에 각각 <쾌락>을 뜻하는 Lust, <슬픔>을 뜻하는 Trauer 등의 단어가 합성되어 있고, 배우 Schauspieler의 경우에는 <바라보다>라는 뜻의 Schau가 Spiel에 결합된 것이다. 영어에서는 익히 알려져 있듯이 극작품을 지칭할때 a play라고 한다. 프랑스어에서는 독일어와는 달리 jouer un role (역을 한다. 어떤역으로 출연하다), jouer une comédie (희극을 공연한다)라고 표현한다. - P152

현실과 유희 사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유사성을 밝히기 위해양자의 대립적 관계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해 보자. 아이가 성인이되어 더 이상 놀이를 하지 않게 되고, 또 몸소 체득한 것을 통해 수십년 동안 현실을 이해하려고 정신적으로 노력을 기울인 이후라고 해도 그가 어느 날 현실과 유희의 대립을 다시 무너뜨리는 어떤 정신적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있을지 모른다. - P151

사춘기를 지나 청년이 되면 놀이를 중단하여 언뜻 보기에는 그가 놀이에서 얻을 수 있었던 쾌락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적 삶이 어떤 것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한 번 경험한 쾌락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다는 사실 또한 알 것이다.  - P153

어린아이의 놀이는 욕망들에 의해 인도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아이의 인격 형성에 도움을 주는 욕망, 즉 자라서 어른이 되겠다는 욕망에 의해 인도된다. 아이는 <어른인 것처럼> 놀며, 어른들의 삶에서 배운 것들을 놀이에서 모방하게 된다. - P153

이들은 신경이 극도로 예민한 자들로서 의사를 찾아가 고백을 해야만 하고, 의사가 정신적 치료를 통해 원상태대로 회복시켜 주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어서 그들의 몽상까지 털어놓곤 한다. 우리가 가장 정확한 지식을 얻는 것은 바로 이곳인데, 우리를 찾아온 환자들이 건강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는 것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 P154

오히려 두 방향의 빈번한 일치를 강조해야 할 것이다. 수많은 성당의 벽화 속에서 흔히 모서리 한구석에 그려져 있는 기증자의 얼굴을 볼 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우리는 대부분의 야망적몽상의 어느 후미진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한 귀부인을 만나게되는데, 이 여인을 위해 몽상가는 업적을 쌓아야만 했고, 또 자신의 모든 성공은 이 여인의 발아래 바쳐지기 위한 것이었다. - P155

그러나 이러한 상상 행위의 결과들, 즉 몽상들, 모래성들, 비몽사몽 등을 언제 어디에서나 고정불변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것들은 오히려 변화무쌍한 삶의 여러 인상 속에서 형성된 것들이고, 개인적인 상황이 변화할 때마다 같이 변화하며, 또매번 우리가 흔히 <시대의 각인>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자국들을덧붙이게 된다. - P155

이제 몽상의 몇 가지 특징들을 알아보자. 행복한 사람들은 몽상을 좇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오직 만족을 모르는 자들만이몽상을 좇을지도 모른다.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몽상을 움직이는힘이고, 모든 몽상은 욕망의 완결이며 동시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보정(補?)이다. - P154

그러나 이들은 그 자신들이 지향하는 두 가지 주된 방향에 따라 무리 없이 두 그룹으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의 격을 높이려는 야망과 관련된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성적 욕망이다. - P154

그러나 이러한 상상 행위의 결과들, 즉 몽상들, 모래성들, 비몽사몽 등을 언제 어디에서나 고정불변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것들은 오히려 변화무쌍한 삶의 여러 인상 속에서 형성된 것들이고, 개인적인 상황이 변화할 때마다 같이 변화하며, 또매번 우리가 흔히 <시대의 각인>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자국들을덧붙이게 된다. - P155

(전략), 이 상황이 욕망이 충족되는 상황, 더 정확히 말해 백일몽 혹은 몽상인 것이다.
이 욕망은 현재의 계기와 과거의 기억에서 출발해 욕망이 시작되었던 기원의 흔적들을 정신 활동 속에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시간을 가로지르는 욕망의 도화선이 요컨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시간대를 꿰뚫고 있다. - P156

몽상에 대해서는 이 외에도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장 간략한 몇 가지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신경증과 정신 이상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들을 형성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여러 몽상이 모였을 때 그로부터 몽상들이 얻게 되는 지배적인 지위이다. - P156

나는 몽상과 꿈의 관계에 대해서도 그냥 지나쳐 버릴 수가 없다. 우리가 밤에 꾸는 꿈들도 역시 이미 꿈의 해석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 것처럼 이와 같은 몽상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⁵

5 『꿈의 해석』 참조. - P157

만일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꾸는 꿈의 의미가 많은 경우 불분명한 채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수치스러워서 우리 자신에게도 숨겨야 하고, 또 이런 이유로 해서 억압되고 무의식 속으로 밀려나야만 했던 욕망들이 밤에도 낮처럼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 P137

몽상에 대해서는 이쯤 해두기로 하고, 이제 문학 창조에 대해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과연 우리는 정말로 문학 창조자와 대낮에 꿈꾸는 자>를 아무 주저 없이 비교할 수 있고, 또 그의 창조를낮에 꾸는 꿈과 견주어 볼 수 있을까? - P157

이 이야기꾼들의 창조 속에는 다른 무엇보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모든 이야기들은 흥미의 중심에 주인공이 있고, 이 주인공을 위해 작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 내려고 한다. 또한 작가는 마치 특별한 섭리라도 지닌 듯이 주인공을 보호하려고 한다. - P158

이러한 자아 예찬식 소설들이 지니고 있는 또 다른 특징들 역시 동일한 친족 관계에 포함시킬 수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여자들이 남자 주인공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낮에 꾸는 꿈의 한 요소로 볼 수 있다. - P159

우리는 많은 문학 작품들이 단순하기 짝이 없는 백일몽의 모델과 매우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가장 극단적인 변형들이 일련의 전이 과정을 거쳐 동일한 모델과 관련을 맺을 수 있다는 우리의 추측을 지워 버릴 수없다.
흔히 <심리> 소설이라고 부르는 작품들 속에서 나는 주인공이라는 단 한 인물만이 그 내부에서부터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적이 있다. - P159

 심리 소설의 특이성은 전체적으로 볼 때 아마도 현대의 작가들이 자신을 관찰하면서 자아를 여러 개의 부분적인 자아들로 나누는 경향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 P159

창조적인 작가들과 꿈꾸는 자들을 동일시하고, 또 문학 창조와 낮에 꾸는 꿈을 동일시하는 우리의 논리가 어떤 의미를 지닌다면,
무엇보다도 이 논리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이론으로서 풍요성을 입증해야만 할 것이다. - P160

무(無)에서 시작되는 자유로운 창조가 아니라 기성의 익숙한 소재들을 재가공한 소설들이 있다. 이제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소설들로 다시 돌아가 보자. 같은 모델에 기초한 소설들이라고 해도 작가에게는 여전히 모델을 선택하고 변형시키는 과정에서 자신의 개인적 성향을 드러낼 수 있는 여지가 주어지고, 또 흔히 모델과 상당히 거리가 먼 소설들이 태어나게 한다. - P161

독자들은 문학 창조에 대해 말할 것처럼 제목을 정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문학 창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몽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 P161

 나는 여기서 몽상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해 문학 창조자들의 소재 선택에 관련된 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단지연구자들에게 자극을 주고 권유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문제, 즉 어떤 과정을 거쳐 작가가 우리에게 정서적 충격을 주게 되는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할 수가 없었다. - P162

한 개인과 다른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수많은 장벽들과 관련된 이러한 거부감을 넘어서서 줄거움을 줄 수 있는 바로 이 기교 속에 아마도 진정한 시학(詩學)이 존재할 것이다. 이 기교는 두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P162

내가 보기에 문학 창조자들이 제공하는 쾌락은 이와 같은 사전쾌락의 속성을 지니고 있고, 또 문학 작품이 고유하게 갖고 있는 쾌락이란 우리의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긴장들이 해소됨으로써 발생하는 것 같다. 문학 창조자들을 통해 우리 역시 스스로의환상을 즐길 수 있게 되는데, 이 사실 또한 문학 작품이 생산해 내는 결과들 중 하나일 것이다 - P163

8 프로이트는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에서 이 <사전 쾌락>과 <상여 유혹>의 이론을 농담에 적용시키고 있다. 그리고 「나의 이력서」(프로이트 전집 15, 열린책들) 제6장에서는 창작 과정과 연관시켜 이 이론을 논하고 있다. 쾌락은 독자가 마치 실제의일인 듯 상상의 상황 속으로 들어갔을 때만 얻어지는 정신적 움직임에서 나오므로, 이쾌락은 비록 그것이 상상의 유혹이지만 유혹을 당했을 때 일종의 덤으로 얻어진다. 따라서 육체의 움직임이 수반되지 않는 쾌락이므로, 다시 말해 행동 이전에도 가능한 쾌락이므로 사전 쾌락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두 개념을 프로이트는 농담에도 적용했고,
또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프로이트 전집 7, 열린책들)에서도 분석한 바 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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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변화의 양상

정부 권력과 기업 권력의 갈등

이 책을 통해 지금까지 우리는 ① 갈등의 발전 내지 확대, 즉 정치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규모의 변화와 ② 지배적 갈등이 종속적 갈등을 대체함으로써 나타나는 갈등의 성격 변화에 관해 논의했다.  - P187

먼저 해소될 수 있는 갈등과 해소될 수 없는 갈등 간의 몇 가지 차이를 말해 두는 편이 좋겠다. 해소될 수 없는 갈등에서는 어느 쪽도 압도적 우위를 확보할 수 없다. 양쪽은 무한정 계속해서 투쟁할 것이며 기꺼이 그렇게 하고자 한다. 어느 쪽도 투쟁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 P188

충분히 발전되어 있으면서도 해소될 수 없을 것 같은 갈등의 좋은 실례는 정부와 기업 간의 갈등이다. 이 갈등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체제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P188

*충분히 발전되어 있으면서도 해소될 수없을 것 같은 갈등의 좋은 실례는 정부와 기업 간의 갈등이다. 이 갈등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체제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것이다. - P188

이는 『연방주의자 논설』이나 헌법 관련 문헌에 나와 있는 어떤 것과도 부합하지 않는, 권력 관념의 혁명적 변화이다. 이것은 의회의 법률이나 연방대법원의 판결 혹은 헌법제정회의나 수정헌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전반적인 동의에 의해 이루어진 변화이다. - P189

몇 가지 다른 예들을 살펴보자. 한 세대 전 널리 공유되었던,
헌법상의 조약 관련 조항*은 현실에서 실행될 수 없다는 견해는어떻게 되었을까? 오늘날 제한 정부의 원리 **는 실제로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까?

*헌법상의 조약 관련 조항 : 미국 헌법 2조 2절 2항은 "대통령은 상원의 권고와 동의를 얻어조약을 체결하는 권한을 가진다. 다만, 그 권고와 동의는 상원 출석의원 2/3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본문의 내용은 이 조항을 엄격하게 따를 경우 효과적인조약 체결이 어렵다는 견해가 한 때 미국 정가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말한다.
**제한 정부의 원리(doctrine of limited government) : 개인과 이들로 구성된 시민사회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이에 대한 정부의 관여는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는 정치 원리. 이런 정부운영 원리는 고전적 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 보수주의 이념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나 미국의 헌법, 특히 권리장전으로 알려진 수정헌법1~10조는 정부 권력의 제한을 명시한 사례라 할 수 있다. - P190

순전히 형식적인 의미만을 따진다면, 마치 헨리 포드Henry Ford의 자전거 정비소가 오늘날의 포드 자동차 회사와 동일하듯 현재의 미국 정부 또한 1789년에 확립된 정부와 동일한 것이라고말할 수 있다. - P191

만약 우리가 정부 구조의 복잡성을 무시하고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권력 투쟁을 연구하기 시작했더라면, 미국 정치의 역동성을 이해하는 데 좀 더 커다란 진전을 이뤄 냈을지도 모르겠다. - P191

정부와 기업 간의 갈등은 오늘날의 정치를 지배하는 긴장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 준다. 정부와 기업 사이의 관계가 현대사회에서 가장 큰 긴장 가운데 일부를 초래했고, 이와 같은 긴장이 정치체제를 지배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해별도의 증명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 P192

기업은 정부 밖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확고한 우위를 보이기때문에, 정부 자체와도 경쟁할 수 있는 권력 체계이다. 근대 이전의 서구 사회에서는 교회가 주요한 비정부 제도였지만 오늘날의 그것은 기업이다.  - P192

미국 사회의 기반이 되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조합은 긴장을 전제로 한다. 이런 긴장은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라는 두 권력 체계의 권력이 매우 다른 원리를 통해 조직된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증폭된다. - P194

이에 반해, 경제체제는 배타적이다. 그것은 높은 수준의 불평등을 조장하고 권력의 집중화를 장려한다. 게다가 기업의 공적책임이 제한적이라는 가정은 기업 활동의 자유와 같은 강한 독단적 교리를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두 권력 체계의 편향성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 P194

공동체 구성원의 90%가거의 아무런 영향력도행사할 수 없다고 가정해보라. 나아가 진행 중인사안에 대해 소수파는매우 제한된 정보만을 획득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라. 이것이 바로 기업이 운영되는 방식으로 정치체제가 운영될 때의모습이다. - P194

정부와 기업이라는 두 권력 체계가 아무런 충돌 없이 같은 공간에 존재하기는 어렵다. 만약 어떤 경쟁이 정치체제 내에 뿌리내리게 되었다면, 그것은 바로 정부와 기업 간의 갈등이다. - P194

정부와 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의 이원성은 우연이나 불운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미국인들이 처음에는 순수한 민주주의를 확립했으나 그 후 금권 세력에 의해 이 체제가 부패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낭만주의적 오독誤讀이다.  - P195

왜 미국인들은 이와 같은 발전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우리의 역사관은 전통적인 인민주권 개념의 관점에서 과거를 해석하려는 충동으로 인해 왜곡되어 왔다. 전통적인 민주주의 정의의 관점에서는 미국혁명 시기에 시민들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는 신화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었다.  - P195

오늘날 기업이 정부를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것은, 우리가 정부의 기능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정부와 기업 간의 관계에 대한 분별없는 논의들이 너무나 많이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이들 두 권력 체계의 분리야말로미국인들이 이룬 가장 위대한 정치적 업적 가운데 하나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 P199

민주주의 정치 이념이 폭넓은 대중적 동의를 얻었던 때와 대략 비슷한 시기에 나타났던, 중상주의*의 몰락과 공공정책에대한 자유방임주의적 관념*의 부상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분리를 용이하게 해주었다.

*중상주의(mecanillism): 15세기부터 18세기 후반까지 유럽 국가들에서 실행되었던 경제정책과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이론, 정책으로서의 중상주의는 자국 산업자본의 발전을 위해 국내시장을 보호하는 동시에 국외시장을 개척할 목적으로 채택되었던 일련의 정책, 곧 외국산 완제품의 수입은 금지 및 제한하고, 외국산 원료의 수입과 국내 상품의 수출을 장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론으로서의 중상주의는 상품교환의 등가물인 귀금속이 부의 본원적원천이며, 이윤은 생산과정이 아닌 유통 과정에서 발생한다는 전제 하에 무역상의 수익 확대를 경제 발전의 중심 목표로 상정했다. - P196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 :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동시에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도록 하는 경제 이념과 정책, 이 사상을 체계화한 대표적인 학자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이다. 그는 1776년에 발행된 『국부론』에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사회적 부를 창출한다고 보았으며, 시장이 부의 공정하고 효율적인 배분을 통해 사회적 조화를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 P197

정부에게는 자신에 대한 공격이 있을 때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대중은 경쟁적인 권력 체계를 좋아한다. 대중은 민주주의와 높은 수준의 삶의 질 둘 다를 원하며, 체제 내 민주적요소와 자본주의적 요소 사이의 역동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들 모두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 P198

사람들은 정부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왜냐하면 정부야말로 자신들이 전적으로 승인하지 않은 경쟁적 권력 체계로서의기업, 즉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거나 두려워하는 권력 체계에 맞서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 P199

 만약 정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단지 공식적인 정부제도만이아니라 정부의 경쟁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 P199

오직 강자들만이 경쟁할 수 있는 이유는 적대자들의 규모와힘이 늘 경쟁의 규모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경쟁적인 상황은 상호 비슷한 역량을 유지할 때에만 지속될 수 있다. - P200

균형의 변화에 매우 민감한 사회에서는 권력관계의 촘촘한 그물망을 건드리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그 밖의 모든 것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간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사적 갈등에서는 강자들이 승리하는 반면 공적 영역에서는 약자들이 자기방어를 위해 세력을 규합한다는 것이다. - P200

균형이 역동적인 이유는 그것이 권력을 얻고자 하는 모든 경쟁자들의 극적인 성장 속에서 유지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국내에서든 국외에서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 P201

기업과의 권력균형을 회복하려는 추동력의 긴박감이 너무나강하고 그에 대응하는 정부의 변화는 너무나 순조롭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 변화를 인식하기 어렵다. 이와 같이 대응은거의 자동적이다. 이것이 바로 지난 30년에 걸쳐 과거와는 다른새로운 정부가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다수가 이를 인식하지 못했던 이유이다. - P202

교회와 국가의 갈등, 왕과 귀족의 갈등이 자유의 기원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이유는 약자들은 강자들의 분열로부터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의 미국에서는 새로운 권력 분할의 기반을 만들어 낸 현대 민주주의와 현대 산업주의의 부상이 정부와 기업 간의 새로운 균형을 가능하게 했다. - P202

이것은 헌법을 통해 제도화된 힘의 균형에 수정을 가한 첫 번째 사례도 아니다. 영국의 명예혁명 헌법*은 왕을 견제하기 위해 마련된 덫이었다. 한 세기가 지난 후 이 나라에는 왕이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이 덫을 수입했다.

*명예혁명 헌법(Glorious Revolution Constitution, 1688) : 명예혁명은 가톨릭교도로 왕위에 올랐던 제임스 2세의 전제적 통치와 친가톨릭 정책에 대항해 의회가 새로운 왕을 옹립하면서자신들의 권한을 유지·강화했던 역사적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의회는 왕위 계승 및과세, 상비군 유지 등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샤츠슈나이더가 말하는 "명예혁명 헌법‘이란 이렇게 강화된 의회 권한을 명시해 놓은 권리장전(Bill of Rights)을의미한다. 명예혁명과 권리장전을 통해 영국은 입헌군주제에 바탕한 본격적인 의회정치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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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내려가자 사야마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하지만 사야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고 화장실이나 샤워실을 쓰는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1층 로비까지 내려갔다. - P295

나는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움직일수 없었다. 호랑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서였다.
호랑이는 유리 너머에 눕더니 조각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뭔가를 호소하듯 나를 쳐다봤다. 몹시 쓸쓸해 보이는 눈이었다.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 같았다. - P296

이튿날 아침, 나는 전망실의 간이침대에서 잠이 깼다.
블라인드를 걷으니 동쪽 하늘이 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사야마 쇼이치는 자기 방 구석에 있는 부엌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 P296

사야마는 "좋아"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테이블을 벗어나 해도 앞에 섰다.
"난 ‘학파‘에서 파견됐어."
"...... ‘학파‘라고요?" - P298

"얼마 전에 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군도‘ 이야기를 했지. 요새는 그걸 선원의 환각이거나 황당무계한 뜬소문으로만 보고 무시하거든.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노력을 거듭하는 건 오로지 학파뿐이야. 내가 이 관측소에서 지내온 건 그 때문이지." - P299

"학파의 목적은 그 수수께끼를 푸는 거죠?" - P300

"확실히 학파는 이 해역의 수수께끼를 풀려 하고 있어. 하지만 진짜 목적은 그 다음에 있지. 이 해역의 불가해한 현상을 성립시키는 기술, 즉 ‘창조의 마술‘을 손에 넣는 게 우리 목적이야" - P300

"마왕이야."
잔교에서 만났을 때 사야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중략)
"이 인물이 다름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군도의 ‘지배자‘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창조자‘라고 하는 게 낫겠군. 이 해역의섬들은 모두 이 남자가 만들어 내고 있으니까." - P301

사야마는 또 다른 사진도 보여주었다. 그 젊은 여자 사진이었다.
"이 사람은 마왕의 딸이야." - P302

"그날 밤 이 작업실에서 미쳐 날뛰는 폭풍 소리를 듣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어. 세계의 종말은 곧 세계의 시초이기도 하다.
이 폭풍이 지나가면 새로운 전개가 섬에 찾아들게 틀림없다고 말이야. 그랬더니 예상이 적중해서 날이 밝은 다음 앞바다에 이상한 섬이 출현했지 뭐야. 나는 당장 보트를 타고 상륙해 봤어. 역시 그건 ‘창조‘된 섬이었어. 대체 이건 무슨 징조인 걸까생각하는데……………."
"제가 표류해 왔군요." - P303

"Row, row, row your boat."
사야마는 명랑하게 노래하며 노를 저었다. - P304

"아니, 도무지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저도 동감입니다."
"걱정할 거 없어, 어차피 상식이 안 통하는 바다니까."
"제발 호랑이로 변신하지는 말아주세요." - P305

"저게 문제의 자동판매기인데."
사야마는 그렇게 말하며 야자나무 밑을 가리켰다. - P305

・…눈물 나게 맛있군. 자네도 마셔 봐."
나는 사야마가 준 동전으로 콜라를 하나 뽑아 조심조심 입을 대봤다. 마술 같은 시원함과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향기, 목구멍에 남는 강렬한 단맛과 탁탁 터지는 거품의 자극. - P306

"마왕의 마술로 만들어졌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저는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죠."
"뭐, 가능성은 부정하지 않겠어. 하지만 인간일 가능성도 마찬가지로 있어. 적어도 같이 생활해 온 내가 보기엔 네모 군은 충분히 인간으로 보이는데." - P306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간단해." 사야마는 콧방귀를 뀌었다. "아직 존재하지 않으니까."
"존재하지 않으면 상륙할 방법이 없잖습니까." - P307

"이 섬이 마왕의 ‘함정‘일 가능성은......."
"당연히 있지."
"어떤 함정일까요."
"가령 우리가 이 섬에 와 있는 동안 관측소 섬이 가라앉는다든지." - P307

"도망쳐! 네모 군."
"무슨 일입니까?"
"멍청아, 호랑이한테 잡아먹히고 싶어?"
사야마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당장이라도 변신이 시작될것 같았다. - P308

"사야마 씨, 이쪽으로 오세요!"
내가 손짓하자 그도 바다로 들어와 조심조심 걸어왔다.
"물속에 길이 있는데요."
•저걸 봐, 네모 군."
사야마는 앞쪽 바다를 가리켰다.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차통 같은 섬이 보였다. - P309

 우리는 서커스에서 줄타기하는 사람처럼두 팔을 수평으로 벌리고 조심조심 걸었다. 홀연히 출현한 섬까지 거리가 200미터쯤 될까.
천천히 다가갈수록 섬의 세부가 파악됐다.
"꼭대기에 건물이 있지? 저건 포대야." - P310

"지금 저기서 포를 쏘면 끝장인데요."
"그야 그렇겠지. 그러라고 있는 포대인데."
"이 상황에선 저를 먼저 쏠 겁니다." - P310

"낙담하지 말라고, 네모 군. 긍정적으로"
갑자기 사야마가 입을 다물더니 크게 재채기를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쉿!" 하고 주의를 줬다. - P312

얼마 지나 위를 올려다본 나는 팔랑거리는 하얀 것을 발견했다. 사야마도 "어라" 하며 실눈을 떴다. 가파른 절벽 중간에작은 창문 같은 것이 있고 그리로 털북숭이 팔이 나와 하얀 천을 흔들고 있었다.
"무슨 뜻이지?" - P312

사야마는 창 안에 있는 인물과 뭐라 말을 주고받는 듯했다. 잠시 후 그는 오른팔을 창 안으로 넣었다. 그 위태로운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며 윙크했다. - P313

나는 로프를 잡고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파도 소리가 멀어지고 그것을 메우기라도하듯 바람 소리가 커졌다. 밑을 내려다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위만 보며 갈 수밖에 없었다. - P313

관측소 섬에서 왔다고 나는 대답했다.
"이름은?"
"네모라고 불립니다."
"네모 군인가...... 좋은 이름이군."
상대방은 어둠 속에서 바스락거렸다. - P314

"당신은 누구죠?"
"난 이 포대의 죄수야." - P314

시커먼 대포 2문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너머 나무들을 베어내 관측소 섬이 보이게 했다. 대포는 섬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창조의 마술을 부린다는 마왕그 원리를 훔치려는 학파.
양측 사이에는 긴 싸움의 역사가 있는 모양이다. - P315

그런데도 사야마 쇼이치는 내가 열쇠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바다에 감추어져 있던 길을 발견해 학파의 남자인사야마 쇼이치를 여기 포대의 섬으로 인도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마왕과 학파의 싸움에 말려든 모양이었다.
사야마를 믿어도 되는 걸까? - P316

그런 생갓을 하면서 막사로 이어지는 터널을 들여다봤을 때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주변 공기가 단숨에 변질된 느낌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펄쩍 물러나 터널 입구 곁에 숨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자 막사 문이 열리는소리가 들렸다.마.
누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허물어진 계단이 보였다. 벽돌담 위로 이어지는 계단이었다. - P316

"사야마 씨가 어디론가 가버리니까 그렇죠."
"미안해, 생각보다 번거로워서."
사야마는 권총을 허리에 찬 권총집에 넣고 미소를 지었다.
"내려와 일을 시작하지." - P317

"로프웨이는 아직 움직입니까?"
"꼭 움직일 거야. 다른 섬으로 건너가는 방법은 저것밖에 없으니까."
사야마는 그렇게 말하며 막사 문을 열었다. - P318

"안경을 주워 주겠어?"
"어이쿠, 이거 미안하군."
사야마는 마룻바닥에서 안경을 주워 남자에게 씌워주었다.
"어때?"
"이제 댁의 얼굴이 잘 보이는군." - P319

사야마는 또 다른 의자를 들고 와 남자 맞은편에 놓고 앉았다. 두 남자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흡사 서부극의 한 장면같았다. 두 사람의 옆얼굴을 보다가 나는 그들이 서로 초면이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P319

"방심은 금물이라고, 도서관장님." 사야마는 웃었다. "이 포대섬은 이제 우리 거야. 어느 쪽에 붙을지 잘 생각해 보는 게좋을걸. ‘도서관장‘이라는 이름은 그럴싸해도 결국엔 유배당한신세잖아? 그런데도 마왕한테 의리를 지킬 생각인가?" - P320

"이 해역에서 마왕을 배신할 사람은 없어."
"역시 무서운가?" - P320

몸을 똑바로 편 자세로 얼마 동안 사야마를 지켜보던 도서관장은 문득 나를 돌아보더니 뜻밖에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어."
흡사 속마음을 읽힌 기분이었다.
내가 입을 열지 않자 그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는군." - P321

문을 열자 다른 하나의 반원형 방이 나왔다.
그곳에는 옅은 청색 타일을 바른 취사장과 창고가 있고 로프웨이 승강장으로 통하는 계단과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다보니 계단참의 알전구가 음울한 벽을 비추고 있었다. 그 너머는 보이지 않았다. - P322

죄수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잊어버린 줄 알았잖나."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아니, 불평하는 건 아니고." - P323

"그럼 네모 군, 가르쳐 주겠어?" 그는 친밀한 느낌으로 내어깨를 쳤다. "이 포대는 우리 학파 수중에 들어왔나?"
"그런 것 같습니다." - P323

계단을 올라가니 진한 커피 향기가 풍겨왔다. 사야마는 취사장에서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그는 "왔군" 하며 풀려난 죄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P324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하잖아?" 죄수가 말했다. "준비도 없이 적지에 쳐들어간다면 마왕의 생각대로 될 뿐이야. 나도 그렇게 해서 당했으니 말이지....."
"그럼 어쩌지?" - P325

나는 책꽂이 앞을 왔다 갔다 하며 책등을 훑어봤다.
학문적인 책이며 외국 서적이 많았지만 제목만 봐도 옛날생각이 나는 책도 있었다. 가령 쥘 베른의 『신비의 섬』, 대니얼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
셰익스피어의 『폭풍우』 그리고 『천일야화』도 있었다. - P325

"이건 누가 읽는 거죠?"
나는 물었다. 도서관장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사야마가 대신 대답했다.
"여기 있는 건 ‘금서‘야."
쥘 베른이나 스티븐슨의 작품을 금지한다는 말은 처음 들어봤다. - P326

학파 남자들이 작은 목소리로 의논하더니 금세 ‘작전‘이 정해졌다.
그들은 도서관장에게 재갈을 물려 빛이 들지 않는 방 안쪽으로 옮겼다. - P327

학파 남자들은 마왕의 딸을 인질로 사로잡을 계획이었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으려니 로프웨이의 단조로운 진동이느껴지기 시작했다. 도서관장이 조용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라는 표정이었다. - P327

사야마가 "아가씨" 하고 말을 걸었다.
그녀는 멈춰 서서 돌아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오랜만이군요.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죠?"
"조금 전에 이 포대를 점령했거든요."
그녀는 사야마의 권총을 응시했다.
"......질리지도 않나요." - P328

"필요하면 딸이 탄 배도 침몰시키는 사람이에요."
"그렇다고 그냥 죽게 두지야 않겠죠."
"그래서 원하는 건 뭔데요?"
"말 안 해도 알 텐데요. 카드 상자입니다." - P329

"지금 당장 항복하면 눈감아 줄게요."
"이봐요, 아가씨."
"항복할 생각이 없으면 당신들을 해적으로 취급하겠어요." - P329

나는 앞으로 뛰쳐나가 그녀를 감싸듯 두 팔을 벌렸다.
"이런 방법은 옳지 않습니다, 사야마 씨."
"이거 봐, 네모 군. 그러다 자네까지 쏘겠어."
"누구 덕에 상륙할 수 있었죠?"
사야마는 "젠장" 하고 중얼거리며 총구를 천장으로 향했다.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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