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내려가자 사야마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하지만 사야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고 화장실이나 샤워실을 쓰는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1층 로비까지 내려갔다. - P295
나는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움직일수 없었다. 호랑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서였다. 호랑이는 유리 너머에 눕더니 조각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뭔가를 호소하듯 나를 쳐다봤다. 몹시 쓸쓸해 보이는 눈이었다.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 같았다. - P296
이튿날 아침, 나는 전망실의 간이침대에서 잠이 깼다. 블라인드를 걷으니 동쪽 하늘이 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사야마 쇼이치는 자기 방 구석에 있는 부엌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 P296
사야마는 "좋아"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테이블을 벗어나 해도 앞에 섰다. "난 ‘학파‘에서 파견됐어." "...... ‘학파‘라고요?" - P298
"얼마 전에 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군도‘ 이야기를 했지. 요새는 그걸 선원의 환각이거나 황당무계한 뜬소문으로만 보고 무시하거든.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노력을 거듭하는 건 오로지 학파뿐이야. 내가 이 관측소에서 지내온 건 그 때문이지." - P299
"학파의 목적은 그 수수께끼를 푸는 거죠?" - P300
"확실히 학파는 이 해역의 수수께끼를 풀려 하고 있어. 하지만 진짜 목적은 그 다음에 있지. 이 해역의 불가해한 현상을 성립시키는 기술, 즉 ‘창조의 마술‘을 손에 넣는 게 우리 목적이야" - P300
"마왕이야." 잔교에서 만났을 때 사야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중략) "이 인물이 다름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군도의 ‘지배자‘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창조자‘라고 하는 게 낫겠군. 이 해역의섬들은 모두 이 남자가 만들어 내고 있으니까." - P301
사야마는 또 다른 사진도 보여주었다. 그 젊은 여자 사진이었다. "이 사람은 마왕의 딸이야." - P302
"그날 밤 이 작업실에서 미쳐 날뛰는 폭풍 소리를 듣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어. 세계의 종말은 곧 세계의 시초이기도 하다. 이 폭풍이 지나가면 새로운 전개가 섬에 찾아들게 틀림없다고 말이야. 그랬더니 예상이 적중해서 날이 밝은 다음 앞바다에 이상한 섬이 출현했지 뭐야. 나는 당장 보트를 타고 상륙해 봤어. 역시 그건 ‘창조‘된 섬이었어. 대체 이건 무슨 징조인 걸까생각하는데……………." "제가 표류해 왔군요." - P303
"Row, row, row your boat." 사야마는 명랑하게 노래하며 노를 저었다. - P304
"아니, 도무지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저도 동감입니다." "걱정할 거 없어, 어차피 상식이 안 통하는 바다니까." "제발 호랑이로 변신하지는 말아주세요." - P305
"저게 문제의 자동판매기인데." 사야마는 그렇게 말하며 야자나무 밑을 가리켰다. - P305
・…눈물 나게 맛있군. 자네도 마셔 봐." 나는 사야마가 준 동전으로 콜라를 하나 뽑아 조심조심 입을 대봤다. 마술 같은 시원함과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향기, 목구멍에 남는 강렬한 단맛과 탁탁 터지는 거품의 자극. - P306
"마왕의 마술로 만들어졌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저는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죠." "뭐, 가능성은 부정하지 않겠어. 하지만 인간일 가능성도 마찬가지로 있어. 적어도 같이 생활해 온 내가 보기엔 네모 군은 충분히 인간으로 보이는데." - P306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간단해." 사야마는 콧방귀를 뀌었다. "아직 존재하지 않으니까." "존재하지 않으면 상륙할 방법이 없잖습니까." - P307
"이 섬이 마왕의 ‘함정‘일 가능성은......." "당연히 있지." "어떤 함정일까요." "가령 우리가 이 섬에 와 있는 동안 관측소 섬이 가라앉는다든지." - P307
"도망쳐! 네모 군." "무슨 일입니까?" "멍청아, 호랑이한테 잡아먹히고 싶어?" 사야마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당장이라도 변신이 시작될것 같았다. - P308
"사야마 씨, 이쪽으로 오세요!" 내가 손짓하자 그도 바다로 들어와 조심조심 걸어왔다. "물속에 길이 있는데요." •저걸 봐, 네모 군." 사야마는 앞쪽 바다를 가리켰다.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차통 같은 섬이 보였다. - P309
우리는 서커스에서 줄타기하는 사람처럼두 팔을 수평으로 벌리고 조심조심 걸었다. 홀연히 출현한 섬까지 거리가 200미터쯤 될까. 천천히 다가갈수록 섬의 세부가 파악됐다. "꼭대기에 건물이 있지? 저건 포대야." - P310
"지금 저기서 포를 쏘면 끝장인데요." "그야 그렇겠지. 그러라고 있는 포대인데." "이 상황에선 저를 먼저 쏠 겁니다." - P310
"낙담하지 말라고, 네모 군. 긍정적으로" 갑자기 사야마가 입을 다물더니 크게 재채기를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쉿!" 하고 주의를 줬다. - P312
얼마 지나 위를 올려다본 나는 팔랑거리는 하얀 것을 발견했다. 사야마도 "어라" 하며 실눈을 떴다. 가파른 절벽 중간에작은 창문 같은 것이 있고 그리로 털북숭이 팔이 나와 하얀 천을 흔들고 있었다. "무슨 뜻이지?" - P312
사야마는 창 안에 있는 인물과 뭐라 말을 주고받는 듯했다. 잠시 후 그는 오른팔을 창 안으로 넣었다. 그 위태로운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며 윙크했다. - P313
나는 로프를 잡고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파도 소리가 멀어지고 그것을 메우기라도하듯 바람 소리가 커졌다. 밑을 내려다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위만 보며 갈 수밖에 없었다. - P313
관측소 섬에서 왔다고 나는 대답했다. "이름은?" "네모라고 불립니다." "네모 군인가...... 좋은 이름이군." 상대방은 어둠 속에서 바스락거렸다. - P314
"당신은 누구죠?" "난 이 포대의 죄수야." - P314
시커먼 대포 2문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너머 나무들을 베어내 관측소 섬이 보이게 했다. 대포는 섬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창조의 마술을 부린다는 마왕그 원리를 훔치려는 학파. 양측 사이에는 긴 싸움의 역사가 있는 모양이다. - P315
그런데도 사야마 쇼이치는 내가 열쇠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바다에 감추어져 있던 길을 발견해 학파의 남자인사야마 쇼이치를 여기 포대의 섬으로 인도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마왕과 학파의 싸움에 말려든 모양이었다. 사야마를 믿어도 되는 걸까? - P316
그런 생갓을 하면서 막사로 이어지는 터널을 들여다봤을 때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주변 공기가 단숨에 변질된 느낌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펄쩍 물러나 터널 입구 곁에 숨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자 막사 문이 열리는소리가 들렸다.마. 누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허물어진 계단이 보였다. 벽돌담 위로 이어지는 계단이었다. - P316
"사야마 씨가 어디론가 가버리니까 그렇죠." "미안해, 생각보다 번거로워서." 사야마는 권총을 허리에 찬 권총집에 넣고 미소를 지었다. "내려와 일을 시작하지." - P317
"로프웨이는 아직 움직입니까?" "꼭 움직일 거야. 다른 섬으로 건너가는 방법은 저것밖에 없으니까." 사야마는 그렇게 말하며 막사 문을 열었다. - P318
"안경을 주워 주겠어?" "어이쿠, 이거 미안하군." 사야마는 마룻바닥에서 안경을 주워 남자에게 씌워주었다. "어때?" "이제 댁의 얼굴이 잘 보이는군." - P319
사야마는 또 다른 의자를 들고 와 남자 맞은편에 놓고 앉았다. 두 남자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흡사 서부극의 한 장면같았다. 두 사람의 옆얼굴을 보다가 나는 그들이 서로 초면이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P319
"방심은 금물이라고, 도서관장님." 사야마는 웃었다. "이 포대섬은 이제 우리 거야. 어느 쪽에 붙을지 잘 생각해 보는 게좋을걸. ‘도서관장‘이라는 이름은 그럴싸해도 결국엔 유배당한신세잖아? 그런데도 마왕한테 의리를 지킬 생각인가?" - P320
"이 해역에서 마왕을 배신할 사람은 없어." "역시 무서운가?" - P320
몸을 똑바로 편 자세로 얼마 동안 사야마를 지켜보던 도서관장은 문득 나를 돌아보더니 뜻밖에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어." 흡사 속마음을 읽힌 기분이었다. 내가 입을 열지 않자 그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는군." - P321
문을 열자 다른 하나의 반원형 방이 나왔다. 그곳에는 옅은 청색 타일을 바른 취사장과 창고가 있고 로프웨이 승강장으로 통하는 계단과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다보니 계단참의 알전구가 음울한 벽을 비추고 있었다. 그 너머는 보이지 않았다. - P322
죄수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잊어버린 줄 알았잖나."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아니, 불평하는 건 아니고." - P323
"그럼 네모 군, 가르쳐 주겠어?" 그는 친밀한 느낌으로 내어깨를 쳤다. "이 포대는 우리 학파 수중에 들어왔나?" "그런 것 같습니다." - P323
계단을 올라가니 진한 커피 향기가 풍겨왔다. 사야마는 취사장에서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그는 "왔군" 하며 풀려난 죄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P324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하잖아?" 죄수가 말했다. "준비도 없이 적지에 쳐들어간다면 마왕의 생각대로 될 뿐이야. 나도 그렇게 해서 당했으니 말이지....." "그럼 어쩌지?" - P325
나는 책꽂이 앞을 왔다 갔다 하며 책등을 훑어봤다. 학문적인 책이며 외국 서적이 많았지만 제목만 봐도 옛날생각이 나는 책도 있었다. 가령 쥘 베른의 『신비의 섬』, 대니얼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 셰익스피어의 『폭풍우』 그리고 『천일야화』도 있었다. - P325
"이건 누가 읽는 거죠?" 나는 물었다. 도서관장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사야마가 대신 대답했다. "여기 있는 건 ‘금서‘야." 쥘 베른이나 스티븐슨의 작품을 금지한다는 말은 처음 들어봤다. - P326
학파 남자들이 작은 목소리로 의논하더니 금세 ‘작전‘이 정해졌다. 그들은 도서관장에게 재갈을 물려 빛이 들지 않는 방 안쪽으로 옮겼다. - P327
학파 남자들은 마왕의 딸을 인질로 사로잡을 계획이었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으려니 로프웨이의 단조로운 진동이느껴지기 시작했다. 도서관장이 조용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라는 표정이었다. - P327
사야마가 "아가씨" 하고 말을 걸었다. 그녀는 멈춰 서서 돌아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오랜만이군요.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죠?" "조금 전에 이 포대를 점령했거든요." 그녀는 사야마의 권총을 응시했다. "......질리지도 않나요." - P328
"필요하면 딸이 탄 배도 침몰시키는 사람이에요." "그렇다고 그냥 죽게 두지야 않겠죠." "그래서 원하는 건 뭔데요?" "말 안 해도 알 텐데요. 카드 상자입니다." - P329
"지금 당장 항복하면 눈감아 줄게요." "이봐요, 아가씨." "항복할 생각이 없으면 당신들을 해적으로 취급하겠어요." - P329
나는 앞으로 뛰쳐나가 그녀를 감싸듯 두 팔을 벌렸다. "이런 방법은 옳지 않습니다, 사야마 씨." "이거 봐, 네모 군. 그러다 자네까지 쏘겠어." "누구 덕에 상륙할 수 있었죠?" 사야마는 "젠장" 하고 중얼거리며 총구를 천장으로 향했다.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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