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공화당의 제7대 대통령 선거 광고
1971년 4월 11일 「조선일보] 1면 하단에는 민주공화당의 제7대 대통령 후보로 나선 박정희의 정치 구호가 담긴 광고가 실렸다. 3번째 출마하는 대통령 선거였다. "공화당과 함께 풍요한결실과 행복한 생활을! 민주공화당 기호 1번 박정희 ‘풍요한결실‘은 ‘풍성한 나락을 보며 미소 짓는 농부의 환한 얼굴‘로, ‘행복한 생활‘은 ‘마포아파트 단지 내 잔디밭에서 아이와 함께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부부의 모습‘으로 직설했다.* - P21
5·16 쿠데타 주도 세력은 1962년에 Y자 모양의 아파트6개 동(棟)으로 1차 준공한 마포아파트 건설을 1962년 정부와대한주택공사의 최대 성과로 자부했다. - P23
5·16 쿠데타 세력이 헌정 중단과 동시에 발표한 「혁명공약」 제5항을 국민에게 직접 보여주고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국가 프로젝트‘였기에 마포아파트 건설은 대북 선전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혁명공약」 제5항은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國土統一)을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는 것이었다. - P27
천정환과 정종현은이 무렵 "개발독재의 강력한 억압과 경제성장의 성과가 상호작용하며 부른 망탈리테 (mentalité, 집단심성)의 변화로 사회전반에 속물화와 물신주의가 팽배해져갔다고 평가했다.*** 이를 ‘마포아파트 체제‘나 또는 ‘단지공화국에 갇힌 (우리의) 도시와일상‘이 주조하기 시작한 한국인의 내면이라고 해도 크게틀리지 않을 것이다.****
*** 천정환, 정종현, 「대한민국독서사』(서해문집, 2018), 147쪽.
**** ‘마포아파트 체제‘란 박정현, 「콘크리트와 글로 빚은 20세기 한국건축」에서 언급한 ‘정권의 명운, 개인의인생, 정치경제적 이해관계, 입시와교육체제 등 모든 것이 아파트단지를중심으로 회전‘ 한다는 뜻으로, 세계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한국만의독특한 사회운영 체제를 의미한다.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일상을 지원하는모든 시설과 공간을 확보하는 것을당연시하는 ‘단지 중심적 사고‘에대해서는, 박인석, 「아파트 한국사회(현암사, 2013) 참조. - P27
쿠데타 세력의 국가 프로젝트 만들기
5·16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군부가 밀어붙인 대표적국가 프로젝트가 마포주공아파트다. "군부는 자신들이 무능하고 부패한 기성 정치인과 다르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스스로 혁명이라 부른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또 2년 뒤 약속한정권 이양을 번복하고 계속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시적인성과를 제시할 필요가 절실했다. (...) 1961년 5월 20일부터 1963년 12월 17일까지 2년 6개월가량의 국가재건최고회의시절, 군부가 완성한 프로젝트는 국립원호원, 새나라자동차공장, 워커힐 호텔 등이 있다. - P29
장동운 총재의 친필서명이 담긴 준공식 초청장이 USOM에 정중하게 전달되었다. USOM에 접수된 이 문건을 담당한 인물은 이탈리아계미국인으로 USOM의 주택국장이었던 귀도 낫조(GuidoNadzo)였다.*
* 귀도 낫조는 마포아파트준공식 초청장 검토 이전인 1962년9월 21일 박임항 건설부장관으로부터건설부 주택자문위원회(HousingAdvisory Committee) 위원으로위촉되었는데 이때 USOM의 직함은수석주택고문관(Senior HousingAdvisor)이었다. 그가 한국의주택정책과 주택공급에 대해 막강한영향력을 행사한 것을 다양한 기록을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1963년 2월에는대한주택공사 제2대 박기석 총재명의로 "한국의 주택문제 해결을 위한기본적 사항"에 대해 「주택」 제10호에담길 원고를 청탁하기도 했다. 극히예외적인 일이었다. 한편 박기석은육사 5기로 대한주택공사 총재와건설부장관 등을 지냈다. 마포아파트2단계 최종 준공(1964.11.20, 분양192호) 당시 주택공사 총재였으며, 공직에서 물러난 뒤 마포주공아파트가마포삼성아파트로 재건축할 당시 삼성건설 최고경영자였다. - P33
많은 것들의 시작점, 마포주공아파트 1차 준공식
정치적 수사나 홍보에 비해 행사는 소박하게 진행되었다. 만약 USOM의 킬렌 대표가 초청을 받아들여 준공식에참석했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그랬을 공산이 크다. 한국경제 전반에 상당한 발언권을 지닌 미국 대표가 참석했다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자 대통령 권한대행 역시참석했을 것이 분명하다. - P35
참석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상황은 한국의 기대와 달랐고, 박정희의 치사 (致辭)를 김현철 내각수반이 대독하는 것으로마무리되었다. - P35
즉 우리나라 구래 (舊來)의 고식적이고 봉건적인 생활양식에서탈피하여 현대적인 집단공동생활양식을 취함으로써 경제적인면으로나 시간적인 면으로 대단한 절감을 가져와 국민생활과문화의 향상을 이룩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인구의 과도한 도시 집중화는 주택난과 더불어 택지가격의 앙등을 초래하는 것이 오늘의 필연적인 추세인 만큼이의 해결을 위해선 앞으로 공간을 이용하는 이러한 고층아파트 주택의 건립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바입니다. - P36
단층 한옥을 배경으로 솟아오른 마포아파트 1단계 준공은 본격적인 경제성장을 알리는 상징과 같았다. 1960년대 초중반 군사정권은 양적 성장에 초점이 맞춘 개발계획을 밀어부쳤고, 지표상으로 뚜렷한 성과가 나타났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시작하고 이듬해인 1963년 경제성장률이 9.2퍼센트로 뛰어올랐고, 1972년까지 10년 동안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0.2퍼센트를 기록했다. - P37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인 1962~1966년 사이주택투자는 국민총생산의 1.7퍼센트에 불과했고(선진국의경우는 6~8퍼센트), 전체 투자 중 공공 부문이 차지하는비중도 8.8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 공동주택연구회, [한국공동주택계획의 역사』(세진사, 1999), 37쪽 - P37
민간 중심으로 건설산업을 육성해 주택을공급한다는 것이 정책의 기본 방향이었다. 공공주택 보급은처음부터 고려 사항이 아니었고, 융자를 지원해 민간 주도로주택을 공급하고자 했다. - P39
1962년 1차 준공식에 참여한 이들 중 한국 사회가아파트단지를 중심으로 재편되리라고 상상한 이는 아마 없었을것이다. 이들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어 아파트단지는 도시재개발 방식, 주택 공급 정책, 공동주택의 유형, 생활 습속 등지금의 한국 사회의 모습을 만들어나간다. 그 시작점에마포아파트가 있다. - P39
마포주공아파트는 "우리의 살림터는 아담하고 살기 좋은마포아파트로!"* 혹은 "우아한 현대식 6층 건물 아파트"**라는 임대 광고문이나 슬로건 이상이었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잡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집단의 야심찬 실험이자 선전도구였다.
* 1962년에 1차로 공급한마포아파트의 신문광고 문안, 이 광고문에 평면도와 임대 가격, 건설취지와 개요가 함께 게재되었다. ** 이 광고문이 등장했을 때는 이미최초 10층의 아파트 구상이 6층으로낮아진 이후로, 이는 「마포아파트임대 안내」, 『경향신문』 1962년 11월13일자 (6층 5동 366세대, 8호동은 공정지연으로 제외)에서 확인할 수 있다. - P91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부른 이들은 ‘토지의 효율적이용과 현대적 집단생활방식‘의 도입을 한국의 도시와 한국인의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혁명으로 여겼다. - P93
이는 장동운의 정치적인 발상과 대한주택영단의 전문직기술관료를 포함한 당대 건축가 집단의 이해가 일치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모든 욕망을 담았던 최초 구상이 그대로 구현되지는 못했으나 새롭게 등장한 정치권력 집단의 조급하고도 강력한요구를 건축가들이 기회로 포착하고 자신들의 또 다른 욕망해소를 위한 장치로 재포장해 실험을 감행한 결과였다. - P93
장동운은 1,000세대 (가구당 가구원 수 5인 기준으로5,000명 정도)는 되어야 현대적인 공동생활의 기준인 ‘단지‘가된다고 판단했다. 부지 규모를 여기에 견줘보니 대략 10층은되어야 했기에 10층 아파트 건설을 구상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반면 건축가와 기술가 집단은 10층짜리 아파트는불가능하거나 무모하다고 발을 빼면서도 조건이 충족된다면 하지 못할 것도 없겠다는 양가적인 입장이었다. - P93
권력 집단과 기술관료 집단의 이해 일치
앞에서 언급했듯이, 새롭게 등장한 권력 집단의 관심은무엇보다 높이에 있었다. 엘리베이터와 중앙집중식 난방은층수가 높아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설비였다. 영세민들이 사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당시 아파트에 대한 인상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주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최신 설비 등기존의 예와는 확연히 다른 변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위대한 세대의 증언 : 주거혁명의기수 장동운」, 『월간조선 뉴스룸』2006년 7월호 참조. - P97
‘인구의 과도한 도시 집중화는 주택난과 더불어 택지가격의 앙등을 초래하는 것이 오늘의 필연적인 추세인 만큼이의 해결을 위해선 앞으로 공간을 이용하는 이러한 고층아파트주택의 건립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바‘였다.**
** 대한주택공사, 「대한주택공사20년사』, 237~238쪽. - P97
대한주택공사 기술이사 홍사천은 고층화 필요성을땅의 경제성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주장했다. 1964년대한건축학회지인 「건축]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인구의 도시집중으로 인한 교통난과 주택의 절대적 부족 현상을 타파하기위해서는 도시의 입체화(고층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을펼치며 르 코르뷔지에의 마르세유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éd‘Habitation)의 예를 들어 강조했다. - P99
• 홍사천, 「주택문제 잡감」, 「건축]제8권 제1호 (대한건축학회, 1964), 7~12쪽. - P101
도시를 수평으로 끊임없이 확장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단독주택 보급 정책은 교통난과 공원 침탈 등의 문제를일으키기에, 대안은 ‘도시의 입체화‘라는 생각이 1960년대서구와 일본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 P101
슈퍼블록에 의한 입체도시 구현, 그리고대규모 단지화 전략이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이 슈퍼블록중심의 입체적인 개발 계획은 이후 본격화되는 도심 재개발의기본 방침으로 자리 잡는다.**
** 그러나 이 슈퍼블록 개발 방식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도심재개발에서 좀처럼 작동하지 않았고, 1980년대 개별 지구별 개발 방식으로전환된다. 이에 대해서는 박정현,『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4장 참조. - P106
건축가 강명구는 마포아파트 설계 작업에 직접 참여했던경험을 바탕으로 「공동주택 건설의 문제점」을 짚은 바 있다. 그의 주장은 "고층주택이 도시 형태로나 토지의 고도 이용상또는 거주 환경상으로나 시설의 공동 설치로 보아 확실히 큰 이점이 있다는 점은 누구나 다 이해하고 확신할 수 있는 일"이라 단정했다.****
**** 강명구, 「공동주택 건설의문제점」, 「주택」 제9호 (1962년 8월), 49쪽. - P106
1,000세대 10층 아파트 11개 주거동
"1953년 휴전 당시에 미국의 공병학교 고등군사학교 교육을받으러 갔다가 아파트 단지들이 나온 잡지들을 보고는 우리도 땅덩어리가 좁으니까 아파트로 올라가자 생각했고, 단지를 짓는다는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엘리베이터와 수세식이런 걸 하고, 전기는 주지만 난방이 안 되는 까닭에 을지로에가서 연탄보일러를 알아봐 설치하면서 젊은 사람들이아파트에 많이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장동운 총재의마포주공아파트에 대한 기억과 술회는 어디까지 진실일까?
* 장동운과 KBS 백승구 기자의2005년 인터뷰 녹취록 해당 부분발췌 요약. 1962년 6월 22일 작성된장동운의 경력 발췌서 (국가기록원소장)에 따르면, 장동운은1949년 5월 23일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1952년 11월 육군공병학교 II등군사반을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가1953년 11월 미국육군공병학교II등 군사반을 마쳤고, 1958년 3월에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 P107
또 다른 궁금함이 있다. 장동운이 젊고 유능한 공병장교였다 하더라도 건축 전문가는 아니었고, 또 고등군사훈련을 받는 동안 가까운 미래에 대한주택영단의 이사장이 될 것이라는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A형(一자형), B형(T자형), 그리고 C형(Y자형) 3가지 유형에 10층짜리 11개 주거동으로 5,000명 정도가 집단적으로 생활할 수 있다는 적정 밀도를 산출할 수 있었을까? - P111
* 11층짜리 공동주택33동이 지어진 프루이트 아이고공영주택단지는 르 코르뷔지에가 주도하는 CIAM의 유럽식모델을 도입한 대단위 공공주거단지계획으로 초기에는 저소득층의 파라다이스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세인트루이스시의 재정 악화로 유지·관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범죄와 마약의 온상지로 변했다는비판을 받은 뒤 20년 만인 1972년 3월 16일 철거되었다. 건축역사학자인찰스 젠크스(Charles Jencks)가프루이트 아이고 해체를 두고 ‘모더니즘의 종언‘이라 비평했던 것처럼 건축사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을 암시하는 사건으로 자주언급된다. 프루이트 아이고의실패와 치유 방법을 도시사회학적관점에서 논한 것으로는 에릭클라이네버그, 『도시는 어떻게 삶을바꾸는가』(웅진지식하우스, 2019), 85~91쪽 참조. - P111
1961년 12월에 발행한 대한주택공사의 기관지 [주택]제7호에는 10층의 아파트 주거동 11개가 마포형무소 노역장부지를 꽉 채울 듯 들어선 모형 사진이 게재됐다. 같은 잡지화보에 별도로 소개한 ‘마포아파트 조감도‘를 그리기 위해만든 모형이다. - P112
전기나 구조 등 설계 이외 분야는 전체를 전문가의 자문 등으로 해결했고, 주거동은 A, B, C형 등 타입별로 여러 건축가에게나누어 주어진 시간 내에 설계를 마무리하도록 채근한 것으로보인다. 이렇게 서둘러 마무리한 결과를 마포형무소 노역장터에 순서에 따라 부랴부랴 배치한 것이 바로 이 모형이다. - P112
마포아파트 최초 구상: A형, B형, C형
(전략) 따라서 대한주택영단 내부에서는 1961년 9월에 10층의마포아파트 초기 구상안 기본설계를 마무리하면서 이를 그대로 추진할 경우 부딪힐 기술적 한계를 심각하게 인식했거나, USOM과의 실무협의 과정에서 맞닥뜨린 부정적인 태도 등을 초기부터 감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P113
대한주택공사의 실무진이 설계를 완성했지만 최종적으로는구현되지 못한 주거동이 있는데 모형 사진의 중간 부분에 자리한 T자 모양의 10층짜리 주거동으로 당시 이를 ‘B형‘으로불렀다. 모형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듯 초기 구상에는 2개 동의 B형 아파트가 단지 중앙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1964년 5월14일에 개최된 대한주택공사 제8차 이사회에서 "(B형은)구조상 결함이 있고, 건평이 크므로 분양을 고려하여 A형아파트 3동으로 변경"하기로 의결하는 바람에 B형 주거동은도면으로만 남았다.*
* 대한주택공사, 「제11차 이사회회의록」 중 의안 제2호 ‘마포아파트건설사업 계획‘(1964.3). - P116
Y자 모양의 주거동 역시최초 설계와 달리 10층에서 6층으로 축소되면서 마무리됐다. 결국 C형 두 개와 A형이 살아남아 약간의 수정을 거쳐마포주공아파트단지를 채운다.**
** 마포아파트 최초 설계 과정에서 주거동의 각각 다른 형태에 A, B, C형이라 명명한 것은 좀 더 생각해볼여지가 있다. 일본주택영단의 ‘51C‘ 형표준설계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51C형이란 일본이 패전 후인1951년에 이상적이자 현실적인 보통공영주택을 궁리한 끝에 16평형(A형), 14평형 (B형), 12평형 (C형)을고안했는데, 이 가운데 일본주택영단이 가장 작은 C형을 전국적으로 널리보급하면서 일종의 별칭처럼 굳은용어다. 거실이 없어 흔히 DK형으로불리는데, 식사공간을 갖춘 넓은 부엌을둠으로써 소위 먹는 곳과 자는 곳의공간적 분리(식침분리)를 꾀했다. 이후 DK는 LDK로 진화했고, 이는침실의 수가 몇 개인지를 부기한 DLDK형식의 토대가 됐다. "1962년 설립된대한주택공사가 지은 아파트에도 51C의계획 개념이 그대로 적용되었다"고손세관은 해석한다(『집의 시대:시대를 빛낸 집합주택』 [도서출판 집, 2019], 290쪽). 한편 대한주택공사는 "1962년도에 건설한 12평형의 예를들며, 이 경우는 리빙룸이 특이했는데그것은 침실들이 완전 분산 독립되어있는 평면에서 유일한 공공공간이라고했다. 또한 그것이 때론 휴식공간도되고 객실도 되고 식당도 되도록설계되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평면에서는 부엌과 욕실을 한군데로집중시켜 설비비를 절감하였고반침 등을 두어 별도로 가구가필요 없게 만들었으며 연탄가스를배출시킬 굴뚝의 위치도 적절하게잡았다"(『대한주택공사 20년사』, 360쪽)고 기록하고 있다. 이 설명을따른다면 마포아파트 평면과 일본의 51C형과의 관련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P116
마포주공아파트는 짧은 기간에 무수한 전문가와 기술자가동시에 동원되었다. 이런 이유로 자신이 마포아파트 설계자임을자처하고 나선 이도 적지 않았고, 그런 까닭에 마포주공아파트설계자는 과연 누구인가 의견이 분분했다.****
**** 서울역사박물관 의뢰로정재은 영화감독이 기획한 「최초의설계자들」이라는 영상물 촬영 현장에서관련자 증언을 겸한 인터뷰에 초대된대한주택공사 조항구 구조계장(후일기술이사)은 2019년 2월 20일의구술 이후 기억을 다시 정리해 새롭게알려주었다. 마포아파트에 대해주택공사 내부에서는 장동운 총재-엄덕문 건설부장 - 임승업 공사과장-조항구 구조계장이 주로 의사결정과 실무 책임을 맡았으며, 외부자문위원으로는 김희춘(서울대건축공학과 교수), 정인국(홍익대건축과 교수), 나상진(나상진건축설계사무소장), 함성권(한양대건축공학과 교수), 김창집 (홍익대건축과 교수) 등이 있었다. 이들 자문위원은 마포아파트 설계자문위원이후 중앙정보부가 주도했던 워커힐지역개발 사업에 다시 참여했다. 당시일본으로 휴가를 가는 주한 미군들이한국에서 달러를 쓸 수 있도록 유도하기위해 워커힐 주변을 휴양지로 만드는사업이었다. 엄덕문에 따르면 "당시 워커힐 호텔에서 남한산성까지 케이블을 설치할 계획이었는데 워커힐비자금 사건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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