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턴성이란 의미 있는 잡음과 의미 없는 잡음 모두에서 의미있는 패턴을 찾아내는 경향임을 상기하라.³⁸ 우리의 사고에서 이 특징이 진화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사고 실험을 해보자. - P120

38 Michael Shermer, The Believing Brain: From Ghosts and Gods to Politics and Conspiracies-how We Construct Beliefs and Reinforce Them as Truths (New York: Henry Holt, 2011, 59-86. - P374

음모 탐지 능력이 진화했다는 증거는 복잡성, 보편성, 영역 특이성, 상호 작용성, 효율성, 기능성 등 모든 심리적 적응에 필요한 요건을 충족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⁴² 음모론은 패턴 및 행위자 탐지, 동맹 탐지, 위협 관리 같은 복잡한 소인을 포함하고, 보편적이며 인간의 삶과 사고 영역에 특화되어 있고, 다른 인지 영역과 상호 작용하며, 탐지 단서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촉발한다. - P122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위험한 세상에 살며 건설적 음모주의를 기본 태도로 여길 수 있다. 위험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면 해를 입지 않은 것에 더해 약간의 편집증 정도로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아도 된다. 위험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 건설적 편집증을 갖는 것은 보상을 받는다. 다시 말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보라! 이 모델에서 건설적 음모주의는 일종의 패턴으로 우리 조상들이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에 더 집중함으로써 이득을 얻었던 세상에 대한 믿음이다. - P122

42 David P. Schmitt and June J. Pilcher, "Evaluating Evidence of Psychological Adaptation:How Do We Know One When We See One?," Psychological Science, 15, no. 10 (2004),
643-649. - P375

그러므로 건설적 음모주의는 패턴성의 형태로 - 뇌에 깊은 진화적 기반을 가지고 있지만 그 외에도 더 많은 것이 있다. 음모론은 보통 사악한 일을 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다른 사람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 패턴에 의미, 의도, 행위자를 불어넣는 경향인-행위자성 개념을 설명 모델에 추가할 필요가 있다. - P123

예를 들어 어두운 방에서 빛을 반사하는 점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피험자는 특히 점이 두 다리와 두 팔 모양을 하고 있다면 그 점이 사람이나 의도적인 행위자를 나타낸다고 추론한다.⁴⁴ 아이들은 태양이 생각을 하며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믿는다. 태양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종종 웃는 얼굴을 추가하여 태양에 행위자성을 부여한다.⁴⁵ - P123

44 Bruce M. Hood, Supersense: Why We Believe in the Unbelievable (New York: Harper Collins,
2009), 213.

45 Hood, Supersense, 183. - P375

음모론을 믿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은 "컴퓨터 화면에서 움직이는 삼각형 모양 같은, 인간이 아닌 물체가 마치 생각과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행동한다고 말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즉 다른 사람이보지 못한 곳에서 의미와 동기를 추론해 낸다."⁴⁸ - P124

마지막으로 음모론 신봉자는 얼마나 편집증적일까? 이 질문은롤랜드 임호프 Roland Imhoff와 피아 램버티 Pia Lamberty가 ‘편집증과 음모론 믿음 사이의 연결과 단절에 대한 더 세분화된 이해‘를 위해던진 질문이다. 이 연구자들은 한 건의 메타 분석과 두 건의 상관관계 연구를 조사하여 둘 사이의 연관성을 추정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둘 다 타인의 불길한 의도를 가정하지만 음모론에 대한 믿음은 편집증(모든 사람)보다 타인이 누구인지(권력 집단)에 대해 더 구체적이다. 반대로 편집증은 음모론(사회 전체)보다 부정적인 의도의 대상이누구(자기 자신)인지에 대해 더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점과 음모 믿음이 편집증 같은) 개인 (간의) 통제 및 신뢰가 아니라 정치적 통제및 신뢰와 뚜렷한 연관성을 보인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음모믿음이 정치적 태도를 반영하는 반면 편집증은 자기 관련 믿음이라는 점에서 두 가지를 서로 다른(비록 상관관계는 있지만) 구성으로 취급할 것을 제안한다.⁴⁹ - P125

49 Roland Imhoff and Pia Lamberty, "How Paranoid Are Conspiracy Believers? Toward aMore Fine-Grained Understanding of the Connect and Disconnect Between Paranoiasand Belief in Conspiracy Theories," European Journal of Social Psychology 48, no. 7 (2018),
909-926. - P375

2장

음모론과 음모주의자의간략한 역사

음모주의의 과학을 향하여


2019년 3월 15일 금요일, 총기 다섯 정을 소지한 28세의 호주남성이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모스크 두 곳에 난입해총기를 난사하여 50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 P59

범인이 2012년 프랑스 작가 르노 카뮈 Renaud Camus가 출간한 같은 제목의 책에서 영감을 받아 쓴, 74페이지 분량의 장황한 선언문 《거대한 대체 The Great Replacement》에서 한 가지 해답을 찾을 수있을 것이다.² - P59

2장 음모론과 음모주의자의 간략한 역사



2 Norimitsu Onishi, "The Man Behind a Toxic Slogan Promoting White Supremacy,"
New York Times, September 20, 2019, https://nyti.ms/2Q9WVBu/.
Dicht - P365

뉴질랜드 살인범의 이름은 브렌튼 해리슨 태런트Brenton HarrisonTarrant이며 그의 선언문은 세 번 반복되는 "그것은 출산율이다"라는 첫 문장을 시작으로 이 음모론에 초점을 맞춘 백인 우월주의적 비유로 가득하다.⁴ - P60

4ㅍBrenton Harrison Tarrant, "The Great Replacement: Towards a New Society, 74-pagemanifesto, https://bit.ly/3sse/iT/. - P365

레인은 음모론에 빠져 쓴, 나치 총통이 으르렁대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서 영감을 받았다.


우리가 싸우는 목적은 우리 민족과 인민의 존립 및 번식, 자녀의 부양과 피의 순수성,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여 우리 민족이 우주 창조주가 부여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성숙하게 하려는 것이다. 모든 생각과 사상, 모든 교리와 지식은 이러한 목적에 부합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 검토되고 그 유용성에따라 사용되거나 거부되어야 한다.¹⁰ - P61

10 Barry Balleck, Modern American Extremism and Domestic Terrorism: An Encyclopedia ofExtremists and Extremist Groups (Santa Barbara, CA: ABC-CLIO, 2018), 40 - P365

앞 장에서 음모를 두 명 이상의 사람 또는 집단이 비도덕적, 불법적으로 이득을 얻거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비밀리에 모의, 행동하는 것으로, 음모론을 실제 여부와 관계없이 음모에 대한 구조화된 믿음으로, 음모론자 또는 음모주의자를 실제 여부와관계없이 가능한 음모에 대한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으로 정의한 것을 상기하라. - P62

역사학자 앤드루 맥켄지 - 맥하그Andrew McKenzie-McHarg는 1967년 CIA 긴급 문건 1035-906를 토대로 ‘음모론‘이라는 꼬리표가처음 사용된 시기를 추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단어는 존 F.
케네디 암살을 둘러싼 의심이 커지면서 《워런위원회 보고서 WarrenCommission Report (케네디 대통령 암살은 리 하비 오즈월드의 단독 범행이며 다른 어떤 인물이나 단체가 개입되지 않았음을 천명한 보고서. 이 보고서가 오히려 불신을 촉발했다. 옮긴이)에 ‘음모론이라는 경멸적인 꼬리표‘
를 붙이기 위해 사용됐다.¹⁵ - P63

15 Andrew McKenzie-McHarg, "Conspiracy Theory: The Nineteenth-Century Prehistoryof a Twentieth-Century Concept," in Joseph Uscinski (ed.), Conspiracy Theories and thePeople Who Believe The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9), 62-81. - P366

정치학자 랜스 드헤이븐스미스 Lance deHaven-Smith는 "오늘날 음모 믿음에 대한 전면적 비난은 정의상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196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와 《워런위원회 보고서》를 의심하는 사람들을 망신 주려는 시도를 예로 들었다.¹⁹ - P64

19 Lance deHaven-Smith, Conspiracy Theory in America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2013), 25-27.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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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출간 준비를 하면서 글을 추가하거나 수정하면서 구성을 약간 바꾸었다. 추가한 내용은 현대미술을 둘러싼 상황 리포트, 수정한 것은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이다. ‘가십‘과 ‘견해‘라고 대치해도 좋을 듯싶다. - P9

견해는 말할 것도 없고, 가십거리도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현대미술이 ‘미술(美術)‘이 아닌 ‘지술(知術)‘인 이상(6장 참조), 미술계의 움직임이나 미술을 둘러싼 상황의 변화는 작품의 가치를 크게 좌우하며, 작품의 감상법을 바꾸기까지 한다. 시장에서 - P9

연재가 끝난 2017년, 현대미술은 아니지만 <살바토르 문디(구세주)>가 큰 화제가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예수그리스도의 초상화로, 그해 11월 15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수수료포함 4억 5,031만 2,500달러(약 5,000억 원)에 낙찰되었다. 미술품 낙찰가로는 (그 당시) 사상 최고가다.
정말로 다빈치의 손으로 그린 것이 맞는가 하는 의문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지만, 여기에서는 작품의 진위는 따지지 않고자 한다. 문제는누가 이런 고액의 미술품을 손에 넣었느냐인데, 주요 언론 보도로 유추해보면, 아무래도 무함마드 빈 살만인 듯하다. - P11

그러나 왕세자는 부를 쌓는 데에 열을 올려, 비밀리에 개인적인 물욕을 만족시키고 있었다. 「뉴욕타임스」의 잇따른 특종에 의하면, 20151년에는 한눈에 반한 중고 요트를 약 6,500억 원에, 파리 교외에 있는 루이 14세의 성이라 불리는 대저택을 약 3,900억 원에 사들였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와 합치면 1조 5,000억 원에 가까운 엄청난 재산이다. 전 인구의 2~3%를 차지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일을 시켜, 그로 인해 생긴 불로소득으로 한 쇼핑이다. - P12

"선택하고, 이름을 붙이고,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다." 마르셀 뒤샹이정한 ‘현대미술의 규칙‘은 항상 그 기저에 있으며 이는 변함이 없다. 감상자가 작품을 해독하고 해석하는 행위가 있어야 비로소 작품이 완성된다는 구도도 거의 정착되었다. - P12

2017년에 개최된 제57회 베니스 비엔날레의 테마는 「Viva Arte Viva」였다. 지난 회와는 확연히 달라진 다소 가벼운 주제에, 미술계의 식견있는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반면, 「도큐멘타 14」는 그 어느 때보다 급진적이었고(7장 참조),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2017에도, 베니스의 각국 파빌리온의 일부에도 뛰어난 정치적인 작품은 있었다. - P13

『뉴스위크』(일본판)의 연재에 쓴 「중국의 검열에 가담한 히로시마시 현대미술관」도 표현의 자유를 침범한 한 예이다. 일본의 공립 미술관에서도 이런 추악한 행태가 은밀히 벌어지고 있었다. 더구나 언론이나 아트 저널리즘은 그에 관한 후속 기사를 한 줄도 쓰지 않는다. - P13

미술은 훨씬 자유롭고 유연한 것이어야 한다.
8장에서 언급할 현대미술의 일곱 가지 창작 동기 중 하나만 돌출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 P14

한마디로 말하면, 이 시대는 광기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2002년에 간행한 졸저(편저) 『백 년의 우행』은 20세기에 인류가 범한 우행에 대한책인데, 2014년에 속편 속 · 백 년의 우행을 내면서, 영문 제목을 『OneHundred Years of Idiocy』에서 『One Hundred Years of Lunacy』로 변경했다. 속편은 2001년의 미국 9.11 테러 사건부터 2011년의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까지를 다루고 있다.  - P14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6장에서 다룰 사뮈엘 베케트의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죽은 상상력을 상상하라." 외람될지 모르나 이 말을 모든 미술애호가들에게 선사하고 싶다. 상상력의 죽음은 현대미술의 죽음일뿐더러, 인간성의 죽음임에 다름 아니다.


마르셀 뒤샹 서거 50주년, 교토에서
오자키 테츠야 - P15

3장 비평가

비평과 이론의 위기


. 이리하여 동아시아에서는 21세기 초에 우선 일본, 이어서 한국. 그리고 중국에 영어 혹은 2개 국어로된 현대미술 잡지들이 잇달아생겨났고, 경제 침체와 함께 조용히 사라져 갔다. 일본에서 내가 창간한 『아트 잇』(Art iT)은 현재는 온라인에서만 볼 수 있다.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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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날 밤은 하마마쓰초의 호텔이었다.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교코는 기운을 쥐어짜서 출근했다. 막판에 못 간다고 하는 일이 많으면 블랙리스트에 올라간다. 게다가 다른 컴패니언들을 만나면 뭐든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 P56

고통의 2시간이 지나가고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아야코가 곁으로 다가왔다.
"그 얘기 들었어? 에리하고 사장이 사귀는 사이였다는거."
교코는 놀라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누구한테 들었어?"
"다들 알고 있어. 진짜 굉장한 뉴스지?" - P57

"뭔 소리야? 사장이랑 관계가 틀어지는 바람에 자살한 게틀림없잖아."
여기서 아야코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 P57

호텔을 나와 지하철역까지 교코는 아야코와 함께 가기로했다.
"아까 그 얘기 말인데."
아야코는 사건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교코로서도 바라는 바였다.
"에리가 실은 삼각관계로 고민하다가 자살했다. 진짜 바보 같아."
"삼각관계?" - P58

"사장과 요코 팀장은 상당히 깊은 사이야. 그러니까 에리와는 잠시 잠깐 불장난이었어. 근데 에리는 진지하게 좋아했고 혼자 속을 끓이다가 결국 자살까지 한 거겠지."
"에리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그거 말고는 자살할 이유가 없잖아."
그런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 P60

4


본인들은 알지 못했지만 그날 밤 교코와 시바타는 호텔앞에서 서로 스쳐 지나갔다. 시바타가 에자키 요코의 진술을 듣기 위해 호텔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에자키 요코가 대기실에서 받은 전화는 시바타가 건 것이었다. - P61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요."
가토가 운을 떼자 마루모토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다 교코가 말했던 대로 긴 얼굴이 기름기로 번들거렸다. 어딘지 기복이 부족한 밋밋한 얼굴이어서 기품 없는옛 귀족 같은 풍모였다. 37세라고 했지만 그보다 나이 들어보이는 건 구부정한 어깨 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신과 에리 씨의 교제가 시작된 게 언제부터죠?" - P62

"오늘 아침에 여기 소속 컴패니언 몇 명을 만나봤는데 그중 한 사람이 당신에게 꽤 오래전부터 사귀던 여자가 있을거라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같은 컴패니언 동료라던데요?
그 여자의 이름까지는 묻지 말아 달라고 손사래를 치긴 했지만."
말을 하면서 가토는 핥듯이 마루모토를 지켜보았다. - P63

"에리 씨는 당신과 요코 씨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시바타가 물었지만 마루모토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비밀로 하긴 했지만 어쩌면 눈치를챘는지도 모르죠."
"당신, 에리 씨를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요? 단순히 장난삼아 만났어요?"
"아뇨, 장난삼아 만난 건 아니었어요. 진심이었습니다."
"그럼 요코 씨 쪽이 장난이었나?" - P64

에자키 요코는 약속한 8시 40분에 딱 맞춰서 나타났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긴 머리가 검은 스웨터 어깨까지 흘러내렸다. 오다 교코나 죽은 마키무라 에리를 생각해보면 컴패니언은 대부분 그 비슷한 체형의 여성을 뽑는 모양이다.
"아직도 물어볼 게 있으신가요?"
요코는 약간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낮에도 다른 수사원이다녀갔기 때문일 것이다. - P65

요코의 차가운 말투는 변함이 없었다.
"당신은 마루모토 사장과 에리 씨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다던데, 맞습니까?"
"네."
그녀는 새침한 얼굴로 턱을 쓰윽 치켜들었다.
"그 일로 마루모토 사장과 얘기한 적은 없었어요?"
"얘기라니, 뭘요?"
"그러니까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라든가, 그런 얘기로 다툰 적은 없어요?" - P66

"마루모토 사장은 당신과도 에리 씨와도 헤어질 생각이었다고 하던데요?"
"네, 그랬나 봐요. 하지만 나한테는 아직 헤어지자는 말은안 했어요."
"이제 곧 할지도 모르죠."
"그럴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뭐, 그것도 괜찮아요."
"그것도 괜찮다니, 헤어져도 된다는 말입니까?"
"네." - P67

5


(중략). 에리에 대한 소식은 그날 이후로는 더 이상 신문에 실리는 일도 없었다. 장례식이 어딘가에서 치러졌을 테지만그녀의 유해를 누가 인수해갔는지도 교코는 알지 못했다.
에리의 원룸에 전화를 해봤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게다가 옆집 형사는 계속 집에 돌아오는 기척이 없었다. - P68

"며칠째 경찰서에서 잤더니만, 꼴이 말이 아니죠? 밤늦게이런 집에 들어와봤자 편히 쉴 수도 없고."
얼핏 들여다보니 현관 앞까지 이사 박스와 비닐 봉투가 그대로 쌓여있었다. 아직도 이삿짐 정리를 못한 모양이었다.
"여태 밥도 못 먹었어요?"
시바타의 손에 들린 컵라면을 보고 교코가 물었다. 그는아랫입술을 툭 내밀고 지긋지긋하다는 얼굴이었다. - P69

"교코 씨가 클래식 팬이라는 건 예상을 못 했는데요?"
그가 감탄한 듯 말했다.
"아니에요, 이제부터 팬이 될 생각이죠." 교코가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건 아까 레코드 대여점에서 빌려온 거예요."
"왜 갑자기 클래식 팬이 될 생각을 하셨을까?"
"신데렐라의 조건이거든요. 내가 찍은 왕자님이 클래식을좋아하셔서." - P70

"그 사건 말인데요. 아무래도 자살로 결론이 날 것 같아요."
교코는 카펫에 자리를 잡고 그를 올려다봤다.
"뭔가 밝혀진 거예요?" - P71

"에리가 어떻게 그런 걸 갖고 있었죠?"
교코가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캐물었다.
"바로 그게 문제였어요. 조사해보니 본가에서 가져왔더라고요."
"본가라뇨?" - P72

"에리 씨가 사건 발생 사흘 전에 본가에 갔었어요. 청산화합물은 그때 가져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죠."
"청산화합물을 본가에서? 에리의 본가가 도금공장 같은곳이에요?"
교코의 말에 스파게티를 먹던 시바타가 켁 하고 사레들린소리를 냈다. 서둘러 물을 마시더니 교코 쪽을 보았다.
"도금공장에서 청산화합물을 사용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 P73

"아니, 약간 다른 의견이 있긴 해요."
시바타의 말에 교코는 얼굴을 들었다.
"다른 의견이라면, 자살이 아니라는?"
"아뇨, 결과적으로 자살이라는 건 다름이 없지만, 독극물을 입수한 시점에는 동반자살을 할 계획이었던 게 아니냐는 의견이에요. 하지만 결국 자기 혼자 죽기로 했다. 뭐, 그런 설이죠." - P74

"그래서 결국 범죄 혐의는 없다는 거네요?"
교코가 말했을 때, 시바타 옆에 놓인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교코는 그쪽 의자에 앉아 수화기를 귀에 댔다. 그리고 네, 라는 대답만 했다. 장난 전화일 경우를 대비해 먼저이쪽 이름을 밝히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오다 교코 씨입니까?"
남자 목소리였다. 어딘지 귀에 익었다.
"네, 그런데요."
"지난번에 만난 다카미라고 합니다만, 기억나십니까?" - P75

"왕자님이 전화해주신 모양이죠?"
"네, 그래서 말인데, 형사님께 부탁이 있어요."
교코는 오른손으로 시바타의 무릎을 잡고 왼손으로는 공손히 손 인사를 했다.
"내일 우리 회사에 전화해서 저녁에 오다 교코를 조사할게 있으니 일을 좀 빼달라고 말해주세요."
시바타는 어엇, 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 P76

"에리하고도 자주 얘기했었어요. 꼭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하자고 돈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당연히 더 좋잖아요?"
"그건 흠, 글쎄요."
시바타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친구가 죽은 참에 불경스럽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내가행운의 기회를 잡으면 에리도 기뻐해줄 거예요. 어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글쎄요, 난 모르겠네요." - P78

"단정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
시바타는 옆에 있던 컵을 움켜쥐며 말을 이어갔다.
"그 호텔방에는 원래 유리컵 두 개가 비치되었어요. 그중하나를 에리 씨가 사용했는데, 자세히 보니까 또 다른 컵에도 살짝 물기가 있더라고요. 그렇다면 누군가 또 한 사람이썼다는 얘기가 되겠죠."
"그 방이라면 우리 컴패니언들이 먼저 이용했어요. 그러니까 컴패니언 중의 누군가가 컵을 썼는지도 모르죠. - P79

"자, 문제는 여기서부터예요. 교코 씨라면 이 컵에 독을어느 정도나 넣을까요?"
"(중략)."
"이 물을 어떻게 마시죠? 단숨에 마실까요, 아니면 조금씩 홀짝홀짝 마실까요?"
"물론 단숨에 마시겠죠. 찔끔찔끔 마시면 괜히 더 고통스러울 것 같아요." - P80

"여기서 의문이 생겨요. 자살자의 심리를 살펴보면 대개는 단숨에 마실 수 있는 음료를 선택하는 게 일반적이에요.
그렇다면 에리 씨가 맥주를 선택한 건 이상하죠. 지난번에교코 씨에게도 물어봤지만, 에리 씨는 술이 그리 세지 않아서 맥주 한 잔이 적정량이라고 했어요. 즉 그녀에게 맥주는 결코 마시기 쉬운 음료가 아니었어요. 실제로 죽을 생각이었다면 역시 물이나 주스 쪽을 선택하지 않겠어요?"
(중략). 아닌 게 아니라 이승의 마지막 음료로 그리 좋아하지도않는 맥주를 선택한 것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 P81

3장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1

다음날 오후, 시바타는 퀸호텔에 찾아가 사체 발견 당사자인 지배인을 만났다. 도쿠라라는 이름의 지배인은 마흔이넘은 마른 체형의 남자였다.
"그 사건은 이미 해결된 거 아닌가요?"
도쿠라는 명백히 영업에 방해가 된다는 눈치였다.
"잠깐 몇 가지만 확인하면 돼요." - P84

시바타는 그 사슬 하나하나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예전에 사슬 한 개를 펜치로 벌려서 풀고 외부로 탈출한 뒤에 다시 이어놓는 트릭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그런조작을 한 흔적은 없었다.
(중략).
이름은 모리노라고 했었다.
"처음에 마루모토 씨와 함께 이 방에 왔을 때, 분명 도어체인이 걸려있었던가요?"
"네, 확실합니다." - P86

"그 펜치 말인데요, 그걸 항상 비치해두는 거예요?"
"그건 말이죠." 도쿠라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뒤를 이었다.
"이번 같은 경우가 있기 때문에 우리 호텔에서는 미리 철저히 준비해둔 겁니다."
"그렇군요. 도어체인을 절단하고 안에 들어간 다음에는어떻게 했는지, 얘기해주세요."
"그 얘기라면 지난번에도......."
"아, 다시 한번 듣고 싶어서요." - P87

"그렇습니다. 마루모토 씨가 밤비 뱅큇 사람이 아직 호텔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찾아봐달라고 해서……………."
그렇다면 그 시점에 이 방에 남아있던 사람은 마루모토와도쿠라뿐이다. 게다가 도쿠라는 전화를 걸고 있었다. 시바타의 시선이 욕실로 향했다. 그곳에 범인이 숨어있었고 마루모토가 그를 도주하게 해줬을 가능성은 없을까. - P88

"도쿠라 씨, 체인을 자를 때 나온 파편이 없는데요? 그건어디 있죠?"
"어디냐니, 그야 경찰에서 가져갔죠. 조사한다면서."
"아 참, 그렇지."
시바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몇 번이나 고개가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래, 알겠네. 그렇게 된 건가. 그런 수법을 쓰다니 대단하네…....... - P89

범인, 마루모토 본인이거나 마루모토의 공범은 역시 아까생각했던 대로 펜치 등을 사용해 사슬 하나를 벌려 밖으로나가고 그다음에 다시 한번 그 사슬을 이어둔 것이다. 하지만 그대로는 펜치의 흔적이 남아버린다. 그래서 나중에 펜치를 쓸 때 그 사슬 부분부터 절단했다. - P90

다만 이 추리에도 문제점이 있었다. 그런 상황이 되었을때, 이 호텔에서는 반드시 펜치를 사용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어야 한다.
"도쿠라 씨, 펜치를 항상 준비해둔다고 하셨는데 지금까지 그걸 사용한 적이 있었습니까?"
"있었죠." 도쿠라가 대답했다. - P90

"절단하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셨는데, 이 사슬하나를 펜치 같은 것으로 벌린다는 방법도 있지 않나요?"
(중략).
"그것도 가능하긴 한데, 오히려 손이 더 많이 갑니다."
"왜죠?"
"현재 거기에는 없지만 도어체인에 가죽커버가 씌워져 있어요. 사슬 하나를 풀기 전에 우선 그 가죽커버부터 벗겨내야 합니다. 그러느니 아예 한꺼번에 잘라내는 게 빠르죠." - P91

가죽커버가 씌워져 있었다면 사슬 하나를 벌리고 탈출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 아무도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할 텐데……."
"그래서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습니까." 도쿠라가 내뱉듯이 말했다.
"도어체인은 안쪽에서가 아니면 걸 수도 풀 수도 없어요.
더구나 바깥쪽에서는 절대로 풀 수가 없다니까요." - P92

 2

(중략).
"너무 일찍 왔나요?"
"아뇨, 딱 좋았어요."
교코의 말에 그는 다시 하얀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오늘 타고 온 차는 소어러였다. 교코가 조수석에 앉고 그가 핸들을 잡았다. - P93

프랑스 요리와 이탈리아 요리 중에 어느 쪽이 좋으냐고물어서 교코는 이탈리아라고 대답했다.
"이탈리아 요리를 좋아해요?"
"네, 《장미의 이름》을 보고 이탈리아 팬이 됐어요."
"아, 숀 코넬리? 나도 그 영화 봤어요. 아주 재미있던데요."
그런 식당이라면 아마도 아오야마 근처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소어러는 세타가야의 주택가 한복판을 달려갔다. - P94

그렇게 다카미가 적당히 주문을 했다. 와인도 시켰는데 음주운전을 하게 되는 게 아닌지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지난번 일은 그 뒤에 어떻게 됐어요?"
웨이터가 나간 뒤, 다카미가 물었다. 지난번 일이라니, 하고 어리둥절했지만 곧바로 에리 얘기라는 걸 알았다.
"잘은 모르지만, 자살일 가능성이 높은 모양이에요." - P95

"교코 씨는 컴패니언 일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됐어요?"
"대략 말하면......" 교코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헤아려봤다. "3년 정도?"
"계속 지금 그 회사였어요?"
"아뇨, 1년 전에 다른 곳에서 옮겨왔어요. 지금 회사는 설립한 지 아직 1년 반밖에 안 됐거든요."
웨이터가 와인을 가져와 두 사람의 잔에 따라주었다. - P95

"상당히 재미있는 사업인 것 같아서…………. 어떤 사람이 운영하는지 궁금했어요."
"별로 재미있는 일도 아니에요."
"그래요? 하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오르되브르가 나와서 대화가 끊겼다. 굴을 입에 넣으며교코는 다카미의 표정을 관찰했다. 이 사람은 오늘 무엇 때문에 나를 만나자고 한 걸까………….. - P96

"프리마돈나 모리시타 요코 씨는 역시 대단해요. 요즘 한창 궤도에 올랐다고 할까. 완성 단계라고 할까. 지난번에《백조의 호수》를 보고 왔는데 정말 훌륭했어요. 제3막의 흑조에서 서른두 번의 턴을 발끝 위치가 거의 밀리는 일 없이 해내더군요."
잘 알지 못하는 이런 화제가 나올 때, 교코는 방실방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준다. 머릿속에서는 발레 책도 사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가 다시 사건에 대한 얘기를 꺼낸 것은 식후의 에스프레소 커피가 나왔을 때였다. - P97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올 때, 다카미는 그녀에게 자동차 키를 건넸다.
"미안하지만 먼저 타고 있을래요? 점장에게 인사하고 올테니까 금방 끝나요."
소어러 조수석에 앉아 교코는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많이 먹었는데도 그리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카미는 왜 그렇게 에리의 죽음을 궁금해하는 걸까. - P98

교코는 괜히 원망스러워서 그 전화를 흘겨보았다. 하필이럴 때 울릴 게 뭐람.
하지만…………….
만일 그의 가족의 급한 전화라면 어쩌지? 교코가 전화를받지 않은 것을 나중에 알고서 센스 없는 여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여자라면 다카미 슌스케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다고 할지도 모르는데... - P99

교코의 귀에 뭔가 들려왔다. 소음인가? 사람 소리인가? 교코는 수화기에 귀를 바짝 댔다.
그것은 흐느껴 우는 소리였다. 전화 너머에서 누군가 울고있었다. 그것은 깊고 음울한 슬픔에 휘감긴 듯한 소리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것은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 P99

그때 톡톡 소리가 나서 그녀는 작은 비명을 올렸다. 돌아보니 다카미가 창유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후우 안도하며그녀는 도어록을 풀었다.
"미안해요." 그가 사과하면서 차에 올랐다.
"어때요. 제법 괜찮은 레스토랑이었죠?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고....... 아, 내 얼굴에 뭔가 묻었습니까?"
"아, 아뇨." 교코는 고개를 저었다. "저녁, 잘 먹었습니다."
"다음에는 프랑스 요리를 잘하는 곳을 소개하죠. 맛있는와인을 종류별로 구비한......."
말을 끊은 것은 다시 전화가 울렸기 때문이다. - P100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수화기를내려놓고 차의 엔진을 켰다. 하지만 사이드브레이크를 풀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것처럼 교코 쪽을 보았다.
"혹시 전화・・・・・・ 받았어요?"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아뇨."
교코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할 만큼 서툰 연기였다.
다카미는 시선을 앞으로 돌리고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 P101

3


수많은 차량이 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교코는 조금 전의전화에 대해 생각했다.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먼저 그 얘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물어보면 안 될 듯한 뭔가가 다카미의 옆얼굴에서 배어 나왔기 때문이다.
"다음에 또 만나고 싶군요."
교코의 원룸에 도착했을 때, 그가 말했다. 무슨 목적으로만나려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교코는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이 어떻든 상관없다.
(중략).
일단 자주 만나다 보면 기회도 생길 것이다.
"네, 다음에는 제가 직접 요리해서 대접해드릴게요."
마음먹고 말을 꺼냈다. - P102

집에 들어가기 전에 시바타의 현관문을 두드렸다. 부루퉁한 굵은 목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어떻게, 왕자님과의 만남은 잘됐어요?"
그는 교코의 얼굴을 보자마자 말했다.
"무승부라고나 할까요."
그런 영문 모를 대답을 하고 교코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늘 미안해요. 덕분에 아주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려고 잠깐 들렀어요." - P103

"실은 오늘 교코 씨 회사에 다녀왔어요."
시바타가 캔의 마개를 치익 당겼다.
"어머, 나 때문에 일부러 간 거예요?"
"교코 씨의 땡땡이만을 위해 내가 거기까지 갔겠어요? 마루모토 사장의 평판을 다른 직원들에게 넌지시 물어보러갔죠."
"사장을 의심하는 거네요?"
"발견자를 의심하는 건 수사의 기본이에요. 덕분에 딱 두가지, 마음에 걸리는 걸 발견했죠." - P104

"첫째로 마루모토와 에리 씨의 관계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점이에요. 에자키 요코와의 관계는 아는 사람이 꽤 많았는데."
(중략).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하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마루모토의 출신지예요. 그자도 나고야 사람이더라고요." - P105

시바타가 맥주를 풋 하고 뿜었다.
"교코 씨가 왜 거길?"
"아니, 나도 갈 수 있죠. 에리의 장례식에도 못 갔는데 이참에 향불이라도 올려주고 싶어요. 게다가 내가 함께 가면 형사님도 말하기가 훨씬 수월하잖아요."
"회사는 또 땡땡이?"
"그건 괜찮아요. 내일은 다행히 일이 없거든요. 어때요. 정해졌죠?"
"허참." 시바타가 쓴웃음을 지었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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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하시고 존경하며 흠모하는 영주님,
잘츠부르크 대주교이자 군주이신 볼프강 테오도릭 님께¹
베네 사람² 조반니 보테로 올림



1) 볼프 디트리히 폰 라이테나우(1559~1617). 1587년부터 1612년까지 잘츠부르크의 군주이자 대주교였다. 강력한 권력자였던 알템프스 추기경 마르코 지티히 폰 호헤넴스(바로 아래에서 언급됨)의 조카이자 밀라노 대주교이자 추기경인 페데리코 보로메오의 사촌이다. 그는 1588년 5월 20일 로마로 가서 알템프스 추기경의 궁에 머물렀는데, 당시 보로메오를 수행하여 이미 그곳에 있었던 보테로는 이때 그를 만났던 것 같다.

2) 보테로는 지금의 이탈리아 북서쪽 피에몬테 지방의 베네 바지엔나 출신이다. - P41

 저로서는 이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하는 것도(제가 종종 이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저술가에 대해 잠시 살펴보았더니, 간단히 말해서 마키아벨리는 양심의 부재 위에 국가이성이라는 것을 세워놓았고, 티베리우스 카이사르는 극히 야만적인 반역법으로 자신의 폭정과 잔혹성을 은폐하였으며,³ 또한 세상의 지극히 비천한 여인뿐만 아니라, 비록카이우스 카시우스가 최후의 로마인은 아니었지만,⁴ 로마인조차도 도저히참지 못했을 다른 여러 방식으로 그렇게 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3) 티베리우스는 군주에 대해 범죄를 저지른 자를 처벌하는 반역법(lex maiestatis)을 되살려냈다. 하지만 이 고대법은 원래 로마 인민의 주권(maiestas)을 침해하는 행위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를 계승한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이 법을 실시하였다(Tacitus, Annales, I. 72.2~4). 이는 법으로 위장한 불의의 전형적인 경우였다. 이 법이야만적이라는 보테로의 판단은 의심의 여지 없이 수에토니우스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이 법이 가차 없이 적용되었다고 말한다. Suetonius, De Vita Cesarum, Tiberius, 58.

4) 카이우스(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브루투스와 함께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 중 하나이다. 기원전 42년 10월, 안토니우스에게 패하자 그는 적에게 붙잡히지 않으려고 자살하였다. 브루투스는 "카시우스의 시신 앞에서 오열하면서 그를 최후의 로마인이라 불렀다"(Plutarkos, Vioi Paralleloi, "Broutos," 44, 2). 공화주의자가 아닌 것이 분명한 보테로가자신의 저작 서두에 공화적 대의의 상징인 이 구절을 써놓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 P42

분노인지 열의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것에 떠밀려 저는 이들이 군주의 통치와 정책에 유입함으로써 신의 교회에서 생겨난 모든 추문 및 그리스도 교계의 모든 불화를 야기한 갖은 부패의 양상에 대해 글을 쓸 마음을 여러 번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제 고명하신 영주님께 드리는 이 책 『국가이성론』에서 적어도 그중 어떤 것을 대략이나마 기술하게 되었습니다.⁵

5) 원래 1589년판, 1590년판, 1596년판에는 "적어도 그중 어떤 것을 대략이나마 기술하게 된것입니다"라는 구절 대신에 다음의 더 긴 구절이 들어 있었으나, 1598년판에서는 대부분 삭제되고 위의 짤막한 구절만 남아 있다. "하지만 만약 제가 먼저, 군주가 위대해지고 인민을잘 다스리기 위해 반드시 따라야 할 진실하고도 왕자다운 방도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부패의 양상에 대한 저의 논고가 아무런 신뢰도 권위도 가지지 못할 것임을 고려하여, 첫 번째생각을 다음으로 미루고 적어도 두 번째 생각을 대략이나마 기술하게 된 것입니다." - P43

당신은 목자의 염려와 군주의 엄중함을 보기 드문 형태로 결합하고있는데, 당신을 향한 신민의 깊은 존경심은 전자 덕분이며, 모두가 경탄하는 당신의 명성은 후자 덕분입니다. 끝으로 당신은 모든 행동에서 군주로서든 성직자로서든 어느 쪽에 더 위엄을 두는지 의아할 정도로 잘 처신하고 계십니다. 저는 제가 이 작은 노고의 결실을 당신께 보내고 바치게 한 이유를 고명하신 영주님께서도 충분히 이해하시고 당신께 어울리는 도량과 예로써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기꺼워하리라 감히 자신합니다. 제가 바치는 것이 너무 보잘것없어 다른 사람이라면 그것을 물리칠 수도 있겠으나, 저는 오히려 그 때문에 당신의 은전을 더 확신하면서 그것을 당신께 드리고자 합니다. - P44

1권


[1]
국가이성이란 무엇인가


국가란 인민에 대해 확고한 지배권을 가진 영지이며,¹ 국가이성이란 그러한 영지를 창건하고 보존하며 확장하는 데 적합한 수단에 대한 지식이다. 

1) State un dominio fermo sopra popoli" 이 구절은 1596년부터 나타난다. 본 역서의원문 텍스트를 편집한 로맹 대상드르 보테로가 국가를 지배권 혹은 영지로 축소한 이러한정의를 통해 권력의 행사를 무한정한 조건에서가 아니라 오직 인민에게 한정하려는 것처럼보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정권, 영주권, 혹은 ‘도미나 - "군주가 재산과 인민의 영주(도미누스)가 되어 가부장이 노예를 부리듯이 인민을 통치하는"[Bodin, Les Six Livresde la République(1576), I, p. 570]-의 의미를 보존하고자 하는 법학자의 용어로 국가를 정의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stato‘에 대한 보테로의 이러한 정의는 "인민에 대한 통치권을 가졌거나 가지고 있는 모든 국가, 모든 영지는 예나 지금이나 공화국이거나 군주국이다"라고 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1장 첫머리를 연상하게 한다. 인민(uomini/popoli)에대한 통치권을 가진 영지(dominii/dominio)를 국가(stati/stato)와 동일하게 보고 있는 것이똑같다. 따라서 보테로의 국가이성이 본질적으로 국가 통치를 위한 일종의 법이라는 데상드르의 주장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fermo‘란 형용사는 안정성과 힘이라는 두 가지 함의를 갖는데, 로마공화국을 지칭한 ‘res publica firma‘를 연상하게 한다(Cicero, De Re Publica, II.
1: Sallustius, De Catilinae coniuratione, 52). 16세기 정치 언어에서 복수형으로 나타나는
‘popolf‘는 여러 민족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구의 다수를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용법은 홉스에게서 다시 나타나는데(Thomas Hobbes, De cive, VIII, 1), 그는 왕국을 다수의 사람에대한 지배권"으로 정의한다. - P47

[2]
영지의 구분


영지에는 오래된 것, 새로운 것, 빈한한 것, 부유한 것, 그리고 이와 유사한 여타의 성격을 지닌 것 등 많은 종류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에좀 더 맞추어서, 영지 중 어떤 것은 우월하고 어떤 것은 그렇지 못하며 또어떤 것은 자연적이고 어떤 것은 획득되었다고 하자. 여기서 자연적이라함은, 통치자가 왕의 선출에서와 같이 명시적으로든 권력에 대한 적법한승계처럼 묵시적으로든 신민의 의지에 따라 통치하는 것을 말한다.  - P49

무력으로 획득하는 경우, 전력(戰)을 사용함으로써 혹은 조약을 맺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또한 조약은 승자의 재량으로 혹은 협상을 통해 맺을 수 있다. 획득 과정에서의 저항이 클수록 영지의 질은 나빠진다. 더욱이 영지 중에는 작은 것도 있고 큰 것도 있으며 또 중간 크기도 있다. 물론 크기는 어디까지나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며, 인접국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다. - P49

[3]

신민에 대하여



신민 - 이것이 없이는 영지가 존재할 수 없다 - 은 본성상 한결같거나 경박하거나, 혹은 온순하거나 거친데, 상업에 종사하거나 군대에 복무하며, 우리의 신성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어떤 분파에 속할 수도 있다. - P50

분파가 진리에서 더 멀어지고 그것에 더 반할수록 그들에 대한 평가는 틀림없이 더 나빠질 것이다. 게다가 모든 신민은 동일하거나 상이한 법과 형태로 복속된 어떤 방식 아래 있는데, 이는 에스파냐의 아라곤인과 카스티야인 및 프랑스의 부르고뉴인과 브르타뉴인에게서 보는 바와 같다. - P51

[4]

국가 멸망의 원인에 대하여


자연의 산물은 두 종류의 원인에 의해 쇠락하는데, 어떤 것은 내적이고 또 어떤 것은 외적이다. 내적 원인이란 기본 성질이 과도하거나 부패한 것을 말하며, 외적 원인이란 칼과 불 그리고 다른 형태의 폭력을 가리킨다. - P51

내적 원인은 군주의 무능으로, 그가 너무 어리거나 기량이 모자라거나 어리석거나 혹은명성을 상실했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신민에 대한 잔혹함과 함께, 특히 귀족 및 도량이 큰 사람의명예를 더럽히는 음욕(淫慾) 역시 내적으로 국가를 멸망하게 한다. - P51

반면에 외적 원인은 적의 계략과 힘이다. 그래서 로마인은 마케도니아인을 야만인은 위대한 로마를 멸망시켰다. - P52

[5]

국가를 확장하는 것과 보존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위대한 일인가


의심할 나위 없이 국가를 보존하는 것이 더 위대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사란 마치 달이 그렇듯이 거의 자연적으로 영고성쇠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융성할 때 그것을 안정시켜 쇠락지 않게 지탱하는 것은 특출하고도 거의 초인적이라 할 만큼 뛰어난 업적이다. 국가의 획득에는 기회, 적의 무질서, 그리고 다른 사람의 행동 등이 큰 역할을 하겠지만,
획득한 것을 유지하는 일이야말로 어떤 탁월한 덕의 결실이다. - P53

 힘은 다수가 지니고 있지만 지혜는 소수의 몫이다.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는 최악의 인물이 힘을 가지며, 평화와 평온의 시기에는 선한 자질이 필요한 법이다."¹¹

11) Tacitus, Historiae, IV, 1, 3. - P53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런 견해를 갖고 있었는데, 그는 『정치학』에서 입법자의 주요 과업은 도시를 만들고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오랫동안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¹⁵


15)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는 이러한 구절을 찾을 수 없으므로 이는 보테로의 자유로운 해석으로 보인다. - P54

[6]

크거나 작거나 중간 크기의 제국¹⁸ 중
어느 것이 더 영속적인가


중간 크기의 제국이 유지하기에 더 적합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18) 보테로가 사용하는 ‘제국(imperii)‘이라는 말은 위계상 왕보다 상위인 황제의 통치권 혹은그가 다스리는 국가 물론 이는 반드시 근대 ‘국가‘라는 의미는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니라, 타국을 병합하여 식민지로 삼거나 협약을 통해 보호령으로 유지하는 등 다양한 방식의 영토가 혼재된 국가를 의미한다. 앞의 2장 말미에서 보듯이 제노바공화국이나 에스파냐왕국이 제국으로 지칭되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이다. 또한 텍스트 여기저기서 ‘제국‘ 외에도
‘국가‘, ‘왕국‘, ‘영지‘ 등의 말이 그냥 ‘국가‘로 바꾸어도 별 무리가 없는 정도로 쓰이고 있다.
‘제국‘을 ‘국가‘와 유사한 의미로 쓰는 이러한 용법은 고전 고대적 용례에서 유래하는데, 실제로 로마공화국 시절이나 제국 시절이나 로마인은 스스로의 국가를 가리켜 ‘임페리움 로마눔, 즉 로마제국이라 불렀다. 직역하자면 로마의 통치권(역)이라는 뜻이다. - P56

 단순 소박함은 기만에, 선은 악의에 굴복하며, 그리하여 국가가 커짐에 따라 견고함의 기초는 약화하게 된다. 철에 그것을 갉아먹는 녹이 발생하고 익은 과일에 그것을 망가뜨리는 벌레가 나타나듯이 큰 국가일수록 점차, 때로는 단번에, 그것을 무너뜨리는 악습들을 낳는 법이다. 이로써 큰 국가의 경우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야기한 것 같다. - P58

[7]

결합된 국가와 분리된 국가 중 어느 것이 더 영속적인가


영토가 나뉘어 있는 국가를 분리된 국가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중간에 적이나 적으로 의심될 만한 강력한 군주가 끼어 있어 상호 지원을 할 수 없거나, 혹은 지원이 가능한 두 경우가 있다. 지원하는 방법에는 돈의 힘으로 하거나(하지만 이는 가장 어려운 방법이다), 그의 영토를 지나가야 하는 군주와 잘 협의하거나, 또는 제국의 모든 영역이 바다와 접하고 있어서 해군력으로 쉽게 유지될 수 있는 세 가지가 있다. (중략).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멸망의 내적 원인에는더 취약한데, 위대함은 자만을, 자만은 부주의함을, 그리고 부주의함은 명성과 권위에 대한 경멸과 그것의 상실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힘은 부를 가져오는데, 이러한 부는 환락의 원천이며 환락은 모든 악습의 원천이다. 이러한 것이야말로 영지가 번영의 절정에서 쇠퇴하는 원인인데, 세력이 증가하면 용맹함은 감소하며 부가 넘치면 덕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 P60

만약 군주가 나태하고 무능하다면, 결합된 국가는 분리된 국가보다 더 쉽게 피폐하고 부패하게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적에 더 취약해질 것이다. 반면 분리된 국가는 결합된 국가보다 외국인에게 더 취약한데, 이는 물론 분리 상태가 그것을 허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P62

(전략). 설사 이런 국가가 본성상 결합된 국가보다 더 취약하다고 해도, 그것은 또한 많은 이점도 갖고 있다. 첫째 그런 국가를 동시에 공격하기란 쉽지 않으며 각 지역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러한 가능성은 더 줄어든다.
왜냐하면 한 군주가 혼자 그렇게 할 수는 없으며, 여럿이 함께 연합하기도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영지의 한 지역이 공격받으면 그렇지 않은 다른 지역이 언제나 지원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 P62

[8]

보존의 방법에 대하여


국가의 보존은 신민의 평온과 평화로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소요 및 전쟁이 자신의 신민에 의한 경우와 외세에 의한 경우로 나뉘는 것과 같다. 신민에 의한 경우에는 두 가지 방식으로 고통을 겪는데, 서로 싸움으로써 내전이라 불리거나 혹은 군주에 대항함으로써 반란혹은 모반이라 불리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 P64

(전략). 그리하여 이 두 가지가 신민을 복종시키고 평화롭게 만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왕의 선출에 더 큰 힘을 갖는 것은 명성과 사랑중 어느 것인가?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명성인데, 인민이 공화국 정부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은 그들을 기쁘게 하거나 그들의 호의를 얻으려 함이 아니라 공공선과 안녕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P65

마르쿠스 리비우스는 자신이 받은 치욕과 불명예로 인해 오랫동안 사람들에 의해 수없이 경멸과 비난을 겪었고, 이로 인해 시민들의 눈밖에 난 지 오래되었으나, 공화국이 필요로 하자(온갖 야심의 기술을 발휘하여 인민의 사랑과 총애를 얻으려 했던 인물을 모두 제치고) 집정관직에 앉아 군지휘관으로 한니발의 동생에 맞섰다. 명성은 루키우스 파울루스를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에, 마리우스를 킴브리인과의 전쟁에, 폼페이우스를 미트라다티스와의 전쟁에 불러들였다. - P65

 한 인물의 선량함과 완전성이 평범한 것을 넘어서서 어떤 뛰어난 경지에 이르게 되면, 그가 자신의 선한 본성으로 얼마나 사랑받든 간에 이러한사랑은 탁월성에 의해 추월되며, 다시 탁월성은 그에게 사람의 사랑보다는 존경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존경이 신앙과 경건함에 토대를 둔다면 그것은 숭경(崇敬)이라 한다. 만약 그것이 정치적, 군사적 기술에 토대를 둔다면 그것은 명성이라 불린다. - P66

정의보다 더 사랑받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 P66

[9]

군주에게 덕의 탁월함은 얼마나 필요한가


모든 국가의 주요한 토대는 상위자에 대한 신민의 복종이며, 이는 군주의 덕이 얼마나 뛰어난가에 달려 있다.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원소와 몸이그 고귀한 본성 때문에 천체의 운동을 거스르지 않고 복종하며 천계 간에도 하위의 것이 상위의 움직임을 따르는 것처럼, 인민 역시 뛰어난 덕이 찬란히 빛나는 군주에게 기꺼이 무릎을 꿇는다. - P67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군주의 우월성이 부적절하거나 거의 또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에서가 아니라 기백과 재능을 고양하고 거의 하늘과 신에 필적할 만한 위대함을 드러내도록 하며, 그 인물을 다른 사람보다 진정으로 더 뛰어나고 더 낫게 만드는 그런 일에서 발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 P67

[10]

군주가 지녀야 할 덕의 탁월함의 두 종류에 대하여


그런데 이러한 탁월함은 절대적이거나 부분적이다. 절대적이라 함은 모든 혹은 많은 덕에서 범상함의 수준을 넘어서는 경우이며, 부분적이라 함은 통치하는 자에게 적절한 어떤 특정한 덕에서 다른 사람을 앞서는 경우이다. - P68

[11]

어떤 덕이 사랑과 명성을 얻는 데 가장 적절한가


그러나 설사 모든 덕이 그것으로 장식한 사람에게 사랑과 명성을 가져오는 데 적합하다고 해도, 그럼에도 어떤 덕은 명성보다는 사랑에 더 적합하고 또 어떤 덕은 그 반대이다. 첫 번째 범주에는 전적으로 유익함을 주는 덕들이 들어가는데, 이는 인간성, 정중함, 자비 등으로서 모두가 정의와 관용으로 환원 가능한 것들이다. 두 번째 범주에는 대업에 적합한 어떤 위대함이나 강력한 의지 및 뛰어난 재능을 동반하는 덕들이 있는데,
강인함, 군사 및 정치의 기술, 항심(恒心), 굳센 의지, 기민한 재능이 그러한 것으로서 우리는 이를 분별과 용맹함이란 이름 아래 넣을 수 있다. - P71

[12]

정의에 대하여


그런데 신민을 이롭게 하는 첫 번째 방법은 정의를 통해 자신을 보존하면서 각자에게 그것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며, 평화와 더불어 인민 간의 화합을 굳건히 하는 토대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P71

고대의 시인은 유피테르 또한 정의의 도움 없이는 사람을 적절히 다스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플라톤은 정치에 관한 자신의 책에 ‘정의에 대하여‘란 제목을 붙였다.⁵⁰
왕에게 법을 세우는 것보다 더 필요한 일은 없다.

50 플라톤의 국가를 가리킨다. - P72

[13]

왕의 정의의 두 측면


왕의 정의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그 하나는 왕과 신민 간의 정의이고, 다른 하나는 신민과 신민 간의 정의이다. - P74

[14]

왕과 신민 간의 정의에 대하여

인민은 군주에게 자신들 사이에 정의를 유지하고 적의 폭력에서 그들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권력을 부여해야만 한다. 또한 군주는 이러한 권력의 한계에 만족하고, 그들의 힘에 부치는 지나칠 정도의 과세로 인민을 괴롭히고 학대해서는 안 되며, 탐욕스러운 장관들이 세금을 통상적이고 적절한 정도를 넘어 부풀리거나 갈취하도록 놔두어서도 안 된다. - P74

(전략). 이와 마찬가지로, 군주는 수입(그의 종신들의 피와 땀과 다르지 않은)을 결코 헛되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민에게는 군주의 위대함을 북돋우고 국가를 유지하도록 자신들이 곤경과 고통을 겪으며 준 돈을 그가 아무렇게나 써버리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허영이란 끝도 없고 잴 수도 없는 법이기 때문에, 돈을 헛되이 쓰는 사람은 무질서와 결핍에 빠지게 되어,
결국 사기와 악행을 범하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게 될 것이 틀림없다.  - P75

 즉 군주가 덕에 기뻐하면 덕으로, 그가 허영에 차 있으면 아첨으로, 그가 잘난 체하는 성격이면 화려한 의식으로, 그가 탐욕스러우면 돈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기량에 따라서가 아니라 선호에 따라서 지위와 관직을 주는 것보다 왕에게 더 해로운 일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덕에 대한 모욕이라는 것은 제쳐놓고라도)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보잘것없는 사람이 더 선호된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종종 봉사하지도 복종하지도 않을 것이며, 또 그 같은 사람에 의해 통치되는 인민은 장관에 대한 미움으로 군주 그 자신을 경멸하여 그에게 반란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 P76

[15]

신민과 신민 간의 정의에 대하여


신민 간의 모든 일이 정의롭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은 군주의 의무이다. 이를 위해서는 농촌과 도시를 폭력과 사기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폭력은 유배자, 도둑, 살인자, 흉악범에 기인한다. 그들은 강력한 조치와 공포로써 반드시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78

 설사 군주가 봉신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지 않는다 해도, 만약 국가의 이익에 대해 염려하지도 그것에 기여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개개인의 부를 소모할 뿐인 고리대금업자의 탐욕에 그들을 희생시키도록 놔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리고 그 피해가 어찌 개개인에만 국한될 것인가? 고리대금업은 재정을 고갈시키고 공공수입을 파탄에 이르게 한다. - P79

. 그런데 돈이 투여되지 않는다면 상업이 제대로이루어질 수가 없다. 또한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쌓고자 하는 사람은, 무역은 포기하고(왜냐하면 이는 손해 볼 위험을 감수하고 몸과 마음을 소진할 각오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는 시간을, 또 일부는 돈의 사용을파는 셈인 종잇조각을 통해 이익을 취하고, 빈둥거리면서 다른 사람의 돈으로 자기 자신을 살찌운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 P79

[16]

법관에 대하여


군주 자신이 법령을 관장하고 판결을 내리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므로,
자신을 위해 이 일을 할 유능한 관리들을 충분히 임명해야 한다. 관리를 뽑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P81

장관직을 파는 군주는 큰 비난을 받을 것인데,
이는 법정에다 정의가 아니라 탐욕을 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이다. 네로가 "그 지붕 아래서는 탐욕도 야심도 결코 관용되지 않는다"⁶⁷라고 했을때, 그는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 규준을 제시한 것인가! 선물을 받는 법관이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신이 말씀하시듯이) 선물은 현자조차도 눈멀게 하기 때문이다.⁶⁸



66) Historia Augusta, 45, 6.
67) Tacitus, Annales, XIII, 4, 2. - P81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쿠르고스의 법을 비판했는데, 왜냐하면 관직(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에 적임자인 사람에게 안배되어야 하는)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필히 유세를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⁷¹


71) Aristoteles, Politica, II, 9, 1271a 10. - P82

그러나 우리의 경우 이 제도는 법에 따라서가 아니라 적절한 장관 선발 과정을 통해 시행된다. 왜냐하면 현명한 군주라면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이 정의의 집행과 인민의 통치를 위해 승진시키려는 사람의 능력과 성실함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P82

삶의 일관성에서 나타나는 마음의 겸손과 절도(節度)도 필요한데, 침착한 마음에서 제대로 통제되지 않은행동이 나올 리 없기 때문이다. 관대함과 자선 역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해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쉽게 불의를 행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론과 명성도 중요한 논거가 되는데,
그것은 거의 속이는 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관직에 (덕 이상으로) 명성과 신뢰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 P83

고대의 입법자는 부자가 아니면 관직을 가질 수 없도록 했는데,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은 착취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별로 중요성이 없는 논점이다. 필요한 것은 내적 선과 양심으로몸과 마음을 제어하는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다른 좋은 치유책은 없다. 왜냐하면 탐욕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될 때 그것을 끝없이 추구하는 것은 부자가 빈민보다 훨씬 더 심할 것이다. 왜냐하면 빈민이 부자가 되려 하면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자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을 것이고, 궁핍으로 인해빈민이 나쁜 짓을 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악의 근원인 탐욕은 부자가 훨씬더 큰 악행을 범하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 P84

[17]

장관을 통제하는 것에 대하여

그러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장관을 선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가 일단 임명되면 이후 부패하지 않을지 모든 경계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수많은 비둘기가 까마귀가 되며 양이 늑대가 되기 때문이다. 관직보다 사람의 내면을 더 잘 드러내는 것은 없는데,⁷⁹ 그것이 손에 권력을 쥐어 주기 때문이다.


79) 이는 7현인의 하나로 불리는 프리에네 출신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 비안테의 금언을 번역한것으로 보인다. 특히 귀차르디니는 이탈리아사를 "왜냐하면 관직이 그것을 행사하는 사람의 가치를 명료하게 드러나게 해준다는 속담이야말로 진정 사실일 뿐 아니라 최고의 칭송을 받을 만하기 때문"이라는 말로 끝맺음으로써, 그 금언을 되새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Guicciardini, Storia d‘Italia, XX, 2. - P86

 왕은 법관에게 식량, 숙소, 가구 및 각종 용기(用器), 관리인, 하인 등 그들의 편안함과 위엄에 맞는 모든 것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정의를 집행하고 자신들에게 부여된 직분을 수행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생각도 갖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그들은 매우 엄격하고 엄정한 규칙하에 있었기 때문에, 공복 상태가 아니면 법정에 들어갈 수도 심리(審理)를 할 수도 없었다.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음료 한 잔혹은 그와 유사한 것이 허용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술을 마실 수는 없었다.⁸¹


81) Juan González de Mendoza, Historia de las cosas mas notables, ritos y costumbresdelgran reyno de la China (Roma, 1585), libro III. - P87

정의를 훌륭히 집행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 사항은,
군주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장관에게 결코 최종 판결에 대한 재량과 전권을 부여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판단은 유보하고 반드시 법이 규정한 바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따라야 할 것은 법이지 이런저런 감정에 휘둘리는 다른 사람의 판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 P87

로마인은 스스로가 비난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의해 제어되었다. 왜냐하면 그 도시는 야심 찬 경쟁으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그 누구도 언제나 자신을 압박하고 깎아내릴 만한 기회만 노리는 정적을 갖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 P88

람프리디우스에 따르면,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누구든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부패할 여지가 있기에, 아무에게도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신뢰할 만한 인물을 통하여 모든 사람의 행적에 대해 알고 있었다."⁸⁵ 그래서 토스카나 대공 코지모는 비밀 첩자를 이용하였는데, 그들은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이런저런 일에 끼어들어 관리들의 행동에 대해 자신이 들은 모든 사항을 대공에게 알려주었다.⁸⁶



85) Historia Augusta, 23. 2. 아일리우스 람프리디우스(Aelius Lampridius)는 이 책을 쓴 여러저자 중의 하나로 전해오는 인물이다.
86) 코지모 1세는 1537년에서 1569년까지는 피렌체 공작이었다가 1569년에서 1574년까지 토스카나 대공작으로 재위하였다. - P88

궁정의 사정에 정통한 한 신사는 왕이 진실한 사정을 알려고 한다면 수많은 가짜 보고에 기만당하지 않도록 귀머거리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높은 망루 위에서 거울로 모든 일을 지켜보아야 할 것이라고 나에게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는 할 수 없기에,
첩자를 쓰고, 때로는 몸소 심의를 진행하고, 변장을 한 채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사안과 무관한 사람에게서 진실이 무엇인지 듣도록 하자.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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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리맨은 여자처럼 비명을 지르며 찢긴 바바리를 붙들고 줄행랑을 놓았다. 초아는 그런 바바리맨의 뒷모습을 매섭게 노려보고 서 있었다. 건방이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검법을 배운 애였구나. 어쩐지 분위기가 살벌하더라니."
- P62

그때였다. 초아가 얼음처럼 차갑게 소리쳤다.
"언제까지 숨어 있을거니?" - P63

건방이는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이제와 굽힐 수도 없었다.
"흥, 누가 할 소릴? 그까짓 검법 좀 쓴다고 내가 무서워할 줄알아?"
‘그까짓‘이라는 말에 초아는 정말로 화난 듯했다.
"감히 내 검법을 모욕해?" - P64

 자칭 권법 천재 건방이였지만 기본기를 마스터하기까지 꼬박 이 년이 걸렸다. 오방도사는 "보통 정도의 자질만 있어도 일 년이면 되었을 것을, 쯧쯧쯧." 한탄하고는 했다.
자신의 검을 맨손으로 받아내자 초아의 얼굴색이 살짝 변했다. - P65

6. 대도(大盜) 도꼬마리


"검법을 배운 애가 전학을 왔다고?"
오방도사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을 한 점 집어 들며물었다.
"네. 기다란 연검을 쓰는데, 완전 포악한 기집애예요." - P66

건방이는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오방도사를 바라보았다.
"나도 옛날에 검법을 익힌 소저를 사랑한 적이 있었더랬지.
그녀의 이름은 꽃님, 이름처럼 청초하고 아리따운 소저였지. 하지만 검을 휘두를 때만큼은 한겨울 눈보라처럼 매서웠던 꽃잎소저! 그녀와의 첫 만남은 이랬느니라...……."
오방도사는 눈을 갸름하게 뜨며 아름다운 과거를 회상하기시작했다. - P67

오방도시는 상추쌈을 볼이 미어터지게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대답했다.
"간겨그 주디 마"
"간격을 주지 말라면, 바짝 붙어서 싸우라고요?"
웅얼거리는 소리로밖에 안 들리는 오방도사의 말을 건방이는 정확히 알아들었다. - P68

한참 먹는 데에 집중하던 오방도사가 건방이의 손목을 가리키며 물었다.
"손목은 왜 또 그러느냐?"
건방이는 발갛게 부어오른 손목을 힐끗 내려다보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아까 걔가 내리친 검을 막았더니 이래요. 별로 안 아파요." - P69

오방도사가 뭐가 생각났는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입을열었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다만, 널 처음 만났을 때 네가 수검술을익힌 줄 알고 깜짝 놀랐었지." - P69

오방도사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쫙 깔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네 녀석은 분명····."
건방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나 무술에 천부적인 자질을타고 났다. 뭐 그런 말을 하려는 걸까?
"이미 금이 가 있었던 벽돌을 깬 게 분명해!"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던 건방이에게 찬물이 확 끼얹어졌다. - P70

건방이도 지지 않고 말대답을 했다.
"나도 사부처럼 못 가르치는 스승은 처음이거든요? 사부 때문에 내 천재성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거라고요."
"으이구, 그놈의 건방만 하늘을 찔러 가지고는…………. 그래도 가르치기는 그놈이 재미났었는데"
평상시처럼 건방이를 타박하던 오방도사가 문득 묘한 말을했다.
"그놈이요?" - P71

이런 미련하기가 곰 같은 놈, 하는 얼굴로 오방도사가 말을덧붙였다.
"상대를 맨손으로 만들란 말이다."
복잡했던 건방이의 머릿속이 단번에 맑아졌다. 역시 사부는사부였다. - P71

안방에서 오방도사의 시조 읊는 소리가 들려왔다. 건방이는 미리 냉동실에 넣어 두었던 캔 식혜를 꺼냈다. 흔들어 보니 사그락사그락 얼음 소리가 들렸다.
"오, 퍼펙트!"
건방이는 대접에 식혜를 담아 안방으로 갔다. - P72

"사부, 식혜"
건방이의 말을 못 들었는지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던 오방도사가 평소와 달리 꽤 심각한 표정이었다.


·다이아몬드가 사라진 시각, 전시장에는 백 명이 넘는 어린이 관광객이 몰려 대혼잡을 이루었습니다. 경찰에서는 도꼬마리가 아이로 변장할 수 있을 정도로 몸집이 작을 가능성이있다고 발표했습니다. - P73

7. 한밤의 무술 대결


건방이가 학교 강당 뒤편에 있는 공터에 도착한 시각은 밤12시 정각이었다. 초아는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짙은 선홍색 무사복을 차려입은 초아는 꼭 영화에 나오는 여검객처럼보였다. - P75

‘상대의 검으로 큰 원을 그린다고 생각해라. 칼에 맞기 싫으면 그 원에서 멀찍이 떨어져 아니면 원의 정중앙으로 파고들어가든지 모 아니면 도, 둘 중 하나야‘


오방도사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그래, 모 아니면 도야!‘
건방이 갑자기 초아의 뒤편을 바라보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 선생님!" - P76

뒤늦게야 건방이에게 속은 것을 안 초아가 서둘러 칼을 휘두르려 했지만 건방이가 한발 빨랐다. 건방이는 초아의 오른쪽손목을 꽉 붙드는 동시에 손에 수석술의 기운을 씌웠다.
"이 이거 안 놔?"
초아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용을 썼지만 돌처럼 굳어진 건방이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P77

"야! 내 검 당장 안 내놔?"
초아는 씩씩대며 발을 굴렀다.
"괜히 돌려줬다가 또 칼에 맞으라고?"
건방이는 칼날을 매만지며 초아더러 들으란 듯이 혼잣말을했다.
"오, 제법 값나가 보이는데? 고물상에 팔면 얼마나 주려나?" - P79

건방이는 지붕 위로 훌쩍 뛰어오르며 킥킥 웃었다.
"우리가 같은 반인 걸 아직 모르는 모양이네. 히히, 애간장 좀타게 일주일쯤 갖고 있다가 돌려줘야겠다."
집으로 돌아온 건방이는 연검을 창고에 아무렇게나 던져 둔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방도사는 깊이 잠들었는지 건방이가나갔다 들어왔는데도 기척이 없었다. - P80

다음 날은 토요일이었다.
오방도사와 건방이는 모처럼 함께 외출했다. 행선지는 점박이 약재상.
(중략).
오방도사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점잖게 인사를 받았다. 먹는것만 밝히는 푼수 도사가 밖에만 나오면 위엄이 철철 넘치는원로 고수로 탈바꿈했다. 건방이는 오방도사의 이런 이중생활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제자님도 안녕하시고?"
"아, 네. 안녕하세요." - P81

누가 보면 평범한 동네 약재상인 줄 알겠지만, 사실 이건 다 위장이었다. 이곳에서 거래되는 진짜 품목은 가게 깊숙한 곳에모두 숨겨져 있다. - P81

"이걸 좀 처분하려고요."
건방이는 보자기에 둘둘 말아 온 신통풀 뭉치를 내밀었다. 점박이 아저씨는 반색을 하며 두 손으로 신통풀을 받아 들었다.
"아휴, 요즘은 신통풀을 찾는 사람만 많고 들어오는 물량은그에 반에도 못 미쳐서 큰일입니다. 짝퉁 신통풀까지 나돌아 다닌다니까요." - P82

점박이 아저씨는 돋보기를 꺼내 신통풀을 꼼꼼히 살펴보며대답했다.
"이 동네일이야, 늘 그렇죠 뭐. 도꼬마리 얘기는 아시죠? 들리는 소문에 도꼬마리가 전설의 ‘팔팔동자(八八童子)라는 말이있어요. 워낙에 신출귀몰한 데다 아이처럼 몸집이 작다는 말도있고 하니까요."
"팔팔동자가 뭐예요?"
건방이가 눈을 말똥말똥 뜨며 물었다. 점박이 아저씨는 ‘그것도 모르시오?‘ 하는 얼굴로 조근조근 설명해 주었다. - P83

킁킁거리며 천하장사의 냄새를 맡던 점박이 아저씨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참! 아침에 설화당주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녀갔어요.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설화당주 막내 제자의 검을 훔쳐 갔다고하네요. 누군지 몰라도 그놈은 이제 끝난 거죠."
점박이 아저씨는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오방도사도
‘허, 그런 일이?‘라는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맞장구를 쳤다. - P83

"아까 그놈의 인상착의를 그린 초상화를 한 장 두고 갔는데, 그게 어디 있더라?"
점박이 아저씨는 서랍장을 뒤적여 돌돌 말린 종이 한 장을꺼냈다.
"아! 여기 있네요."
건방이는 점박이 아저씨가 건네준 종이를 펴 보고 기절할 만큼 놀랐다. 그 종이에는 야구 모자를 꾹 눌러써서 코와 입만 보이는 소년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 P84

오방도사는 할 말을 잃었는지 푹푹 한숨만 쉬었다.
"설화당주가 그렇게 세요?
사부도 못 이길 정도로?"
건방이는 스승의 눈치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 P85

"내가 누구냐?권법의 일인자 오방도사가 아니냐? 사실 나도 설화당주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에잇! 모르겠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걱정 마라 제자야"
건방이는 오방도사의 장담과는 달리 앞으로의 일이 매우 걱정되었다. - P86

8. 오라버니, 아니세요?

(전략).
건방이는 요즘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다. 초아의 사부가 엄청난 검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건방이는 학교에서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돌아다녔다. 화장실에 갈 때도 보호색을 띈 나뭇잎 벌레처럼 언제나 아이들 사이에 끼어서 다녔다. - P88

건방이는 학교에서 절대로 모자를 쓰지 않았다. 혹시라도 자신이 머니맨이라는 걸 알아보는 사람이 생기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는 당황해서 서둘러 모자를 벗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런!‘
막 교실로 들어오던 초아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 P89

다음 날,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건방이는 대문에 웬편지가 꽂혀 있는 걸 발견했다. 편지 겉봉에는 붓글씨로 ‘오방도사 귀하‘라고만 쓰여 있었다.
건방이에게 건네받은 편지를 뜯어 본 오방도사는 끙끙 앓으며 자리에 드러누웠다.
"아이고 내가 제명에 못 살지, 못 살아! 바보 같은 제자 놈때문에......." - P90

내용은 정중했지만 속뜻은 분명했다.
"윽, 한판 뜨자는 거네." - P91

"너무 일찍 왔나?"
건방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설화당주와 초아의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여자랑 만날 때는 원래 십 분 일찍 나오는 게 예의야"
티끌 하나 없는 흰색 명주에 검은 옷깃을 덧댄 학창의를 입은 오방도사는 오늘따라 멀쑥해 보였다. - P91

"이놈아! 지긴 누가 져? 너는 이 스승이 100대 1로 싸워서 이긴 적이 있다는 얘기도 못 들어 봤느냐?"
(중략).
"뻥이라니! 이 스승을 뭘로 보고. 한때는 나도 암흑가를 주름잡고 살던 시절이 있었더니라 돌아가신 스승님의 유언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신통풀이나 캐며 살진 않았을 게다. 싸움박질은 그만하고 수련이나 하면서 조용히 살라고 하셨지" - P92

"그동안 얼마나 심려가 크셨습니까? 이 몸의 제자가 아둔하여 벌인 일이니 너그러운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방도사는 건방이의 머리도 함께 찍어 누르면서 조그맣게소곤거렸다.
(중략).
"이 녀석아! 안 싸우고 이기는 게 제일 센 거야!" - P93

"호, 혹시..... 꽃님 소저?"
갑자기 오방도사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오방도사의 눈은 너울 속에서 드러난 설화당주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설화당주도 오방도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크게 놀란 얼굴이 되었다.
"아니..... 방이 오라버니 아니세요?" - P94

"이렇게 살아서... 소저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소저는예전 모습 그대로구려."
설화당주가 열아홉 소녀처럼 얼굴을 붉혔다.
"오라버니야말로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건방이와 초아는 하도 기가 막혀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P94

9. 가면을 쓴 아이들

(전략).
어젯밤, 결국 날밤을 새 버렸다. 이십년 만에 재회한 오방도사와 설화당주는 체육관 근처의 벤치에 앉아 새벽이 밝아 올 때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니까 일이 어떻게 된 거였냐면, 설화당주와 오방도사는 서로 죽은 줄 착각하고 이름도 바꾼 채 수련에만 몰두하여 각각 권법과 검법의 고수가 되었고 운명의 재회를 하게 되었다. 뭐 대충 그랬다. - P97

건방이와 초아의 눈이 딱 마주쳤다. 초아가 눈에 쌍심지를켜고 건방이를 노려보았다. 복수할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다가그게 틀어지자 심사가 단단히 꼬인 것 같았다.
더욱이 설화당주는 전후 사정을 알고 도리어 초아를 꾸짖었다.
"우리 초아가 먼저 시작한 줄도 모르고………… 미안하구나늘그막에 들인 제자라 너무 오냐오냐해서 버릇이 없단다. 건방이라고 했지? 다친 데는 괜찮으나?" - P97

그리고 오늘 아침 집을 나설 때, 오방도사가 신신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자야, 그 초아란 애한테 무조건 잘못했다 빌고 화해하거라. 뭐? 이유? 그 애가 꽃님 소저 제자라는데 무슨 이유가 더필요하단 말이냐! 앞으로는 초아한테 잘해! 안 그러면 이번 금강산에 갈 때 떼어 놓고 갈 테다."
건방이는 어쨌거나 초아랑 화해하기로 마음먹었다. - P98

갑자기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뭔가 싶어 돌아보니 뒷문 쪽에앉은 호길이가 건방이를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엥? 왜 저러지?‘
건방이는 당황해서 자신이 호길이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일을 했는지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건방이는짐작조차 안 갔다.
하기야 둔해 빠진 건방이는 초아가 전학 온 첫날부터 호길이의 태도가 이상해졌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 P99

"어머, 네가 그렇게 태권도를 잘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호길이 정도는 일 분 안에 이길 수 있다니 믿기 어려운걸?"
초아는 말하는 도중 호길이에게 슬쩍 시선을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호길이의 얼굴이 단숨에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뭐? 내가 언제......"
건방이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뒤늦게야 도끼눈을뜨고 있는 호길이를 보고 상황 파악이 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내가 저 백여우 함정에 걸려들었구나!‘ - P10

"그럼 나랑 맞짱 한번 뜨든가."
건방이는 좋은 말로 호길이를 진정시키려고 일단 자리에서일어섰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도 있으니까.
하지만 건방이의 웃음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 버렸다.
"지금 비웃냐?"
호길이는 일그러진 얼굴로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렸다. 건방이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피했다. 오랜 수련으로 몸에 익은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 P101

‘어쩔 수 없겠어. 그냥 맞아주는 수밖에건방이는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호길이가 다시 주먹을 날렸다.
"으억"
건방이는 배를 움켜쥐고 최대한 과장하며 나가떨어지는 시늉을 했다. 보기에는 심하게 넘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바닥에 닿는 순간, 낙법을 살짝 응용해서 실제로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 P102

"우아, 책장이 찌그러졌어!"
"건방아, 너 괜찮아? 피 안 나?"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건방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거 골치 아프게 됐네.‘ 건방이의 의도와는 달리 상황이 점점 더 난처해졌다.
그때 누군가 건방이를 부축해 일으켰다.
"다행이다. 저게 원래 찌그러져 있었기에 망정이지, 정말 큰일날 뻔했어" - P103

건방이가 자신의 소매를 눈여겨보는 걸 느꼈는지 면상이가 부축했던 손을 휙 떼어 냈다. 그러고는 호길이를 향해 말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폭력을 쓴 건 잘못된 거야 건방이에게 사과해"
면상이의 말에 호길이는 몸을 흠칫 떨더니 건방이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미, 미안하다.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 - P104

10. 숨겨진 과거


"제자야, 꽃님 저 집에 좀 다녀와야겠다."
"거긴 왜요?"
건방이는 뜨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서찰을 전하고 오너라 - P106

오방도사가 그려 준 약도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샌가 부자들이 사는 동네로 들어섰다. 건방이는 설화당주의 집을 보고 입이 쩍 벌어졌다.
"우아아, 청와대가 따로 없네." - P107

"다시는 제자를 들이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설화당주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실은 전에 오라버니가 제자로 삼은 아이가 있었단다"
"네?"
뜻밖의 말에 건방이는 눈을 크게 떴다. 설화당주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 P108

"벌써 이십 년 전의 일이란다. 너보다 한두 살 많은 사내아이였는데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알 정도로 영민해서 방이 오라버니가 무척 아꼈단다. 그런데 그 아이가 어쩌다 변면술(變面術)이라는 잡술(雜術, 사람을 속이는 간사한 술법)에 빠지게 되면서......."
"
"변면술이요?"
"그래. 얼굴 형태를 바꿔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술법이란다. 그 아이는 변면술을 이용해 좀도둑질까지 했어.
방이 오라버니의 노여움은 말도 못할 정도였지. 그만큼 믿고 사랑한 제자였으니까" - P109

"건방아, 너는 어쩌다 방이 오라버니의 제자가 되었느냐?"
건방이는 설화당주에게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일, 보육원에 가기 전 비밀의 집에서 오방도사를 처음 만난 일, 그리고 수습 제자를 거쳐 오방도사와 함께 살게 된 사연까지 모두 다.
사실 그 얘기는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설화당주 앞에서는 거침없이 술술 나왔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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