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면서 가즈마는 카운터 너머로 시선을 내달렸다. 요코와 똑같은 소매 달린 앞치마 차림의 여자가 서 있었다. (중략).
아버지는 저 두 사람을 보려고 찾아왔었다. 33년 전에 자신이 범한 살인 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남편과 부친을 잃은 두 사람을. - P204

생맥주를 내왔을 때 아메미야가 요리를 주문했다. 닭 날개, 된장어묵 등의 아이치현 향토 요리를 선택해주었다.
(중략). 잔을 맞부딪치고 하이볼을 입에머금었다.
무심코 카운터 쪽을 보다가 가즈마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사바 오리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 P205

우연히 시선이 마주친 건가. 아니면 그 전부터 그녀가 가즈마를 보고 있었던 건가. - P205

23

(전략).
"어제 검찰청에 가서 담당 검사를 만나고 왔어요." 사쿠마가 말했다. "공판 전 정리 수속은 별문제 없이 잘 진행되는 모양이에요. 그리고 피해자 참여에 관련해 변호인 측에서 피고인이 크게 반성한다는 것을 유족분들께 확인드릴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들어왔어요." - P206

3일 전에 사쿠마에게서 받은 자료였다. 검사가 갖고 있던 증거 등의 기록을 등사한 것이다. 범행에 이른 동기, 범행의 구체적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중략).
그 기록을 통해 미레이와 아야코는 마침내 이번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은 천만뜻밖의 것이었다. 무엇보다 까마득한 옛날의 살인사건에서부터 일이 시작된 것이다. (중략). 구라키다쓰로는 자신이 그 사건의 진범이었다고 자백했다고 한다.  - P207

실은 서류를 읽어본 뒤에 두 사람이 똑같은 느낌을 가졌던 것이다.
(중략).
"이건 남편 얘기가 아닌 것 같아요." 아야코가 말했다.
(중략).
"그러니까 그게……." 아야코는 파일을 펼쳐 해당 페이지를 가리켰다. "속죄하는 방식에 찬성할 수 없다. 진실을 밝혀야 한다, 라고말했다는 부분이에요. 아무래도 이건 남편답지 않은 얘기예요." - P207

옆에서 미레이가 말을 끼웠다. "아버지에게 이런 사고방식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그런 식으로 무턱대고 정의를 내세우는 사고방식, 이건 전혀 우리 아버지답지 않아요. 물론 사망한 뒤에야 유산을 증여한다는 속죄 방법은 제 생각에도 만만한 짓이에요. 진심으로 사죄할 마음이 있다면 모든 것을 고백해야 한다, 라는 게 정론이겠죠. 하지만 그걸 못하는 게 인간이라는 거, 아버지는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었어요. 이런 식으로 구라키라는 사람을 몰아붙였다는 건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어요." - P208

"검사에 의하면, 변호인은 사실관계를 놓고 다툴 생각은 없는 모양이에요. 쟁점은 아마 계획성이 될 거예요. (후략)."
하지만, 이라고 사쿠마는 미레이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이어갔다.
"방금 그 말씀을 들어보니, 당일의 시라이시 씨의 태도 이전에 구라키 피고인의 상담에 대한 반응 자체가 시라이시 씨답지 않다, 라는 얘기인 것 같네요." - P209

"하지만 편지 얘기도 이상해요." 미레이는 말했다. "편지로도 몇 번이나 아버지가 추궁을 했다고 나와 있던데요." - P209

"검사도 그게 미심쩍다는 얘기는 했었어요. 심리적으로 코너에 몰린 것을 강조하려고 자의적으로 지어낸 얘기인지도 모른다고. 다만 그 편지가 증거로 제출될 리는 없기 때문에 따로 문제 삼을 생각은없다고 했습니다." - P210

"누명을 쓰고 자살한 사람의 유족에게 사죄하려는 건 나름대로올바른 감정이겠죠. 게다가 고생스럽게 찾아내 일부러 아이치현에서 정기적으로 상경했었다니, 웬만한 마음가짐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근데 그만큼 남을 배려해줄 줄 아는 사람이 어째서 이런 살인을 저질렀는지…………. 충동적인 것이라면 그렇다 쳐도 이번 일은 계획적이었잖아요. 정말 어떤 사람인지 종잡을 수가 없어요." - P211

 사쿠마는 말했다. "유족인 아사바 씨 모녀 말인데, 딸 오리에 씨가 마흔 살 전후의 나이에 독신이에요. 구라키 피고인이 연애 감정을 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죠." - P211

미레이의 물음에 사쿠마는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갑작스럽게 그런 말을 들어봤자 실감이 안 난다. 구라키 씨는 우리에게는 항상 좋은 손님이었고 정말 잘해주셨다는 마음밖에 없다, 라고 아사바 요코 씨가 대답했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검사는 아사바 씨 모녀를 법정에 불러낼 마음이 싹 사라졌대요. 검찰 측에 도움이 안 되는 증인은 부를 필요가 없으니까요." - P212

23

(전략).
즉각 근처 서점에서 《주간세보》를 사 들고 카페에 들어가 읽기시작했다.
꽤 큰 기사였다. 제목은 ‘공소시효 만료, 처벌할 수 없는 살인자들의 그 후‘라는 것이었다. 작성자는 난바라라는 프리랜서 기자였다. - P214

그 다음 기사는 문단을 바꾸어 이어진다.
‘살인죄의 공소시효는 2010년 4월 27일에 폐지되었다. 하지만 이 개정법률은 그 시점에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된 사건까지는 대상에 포함하지 않는다. 즉 1995년 이전에 살인을 저질러 공소시효가 만료된 범인들은 일반인과 똑같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사례로는, 범행일이 1995년 4월 28일이라면 앞으로 범인을 체포해 처벌할 수 있지만 그 전날인 27일의 살인자라면 영구히 처벌할 수 없다. 이런 부조리한 일을 과연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거기까지 읽고, 이걸 들고 나섰구나, 라고 고다이는 당황스러웠다. - P215

그다음에는 공소시효가 만료된 과거의 살인 사건에 대해 취재한 내용이 등장했다. (중략). 취재에 응한 유족이 있었는지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뒤에 ‘공소시효 만료로 범인을 처벌할 수 없는 다른 한편에는 여전히 고통 속에 살아가는 유족이 존재한다. 그들의 깊은 상처에 공소시효따위는 없는 것이다‘라고 역설하고 있었다. - P216

‘(전략).
이번에 그 유족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했지만 "조용히 지내게해달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러나 진범 대신 억울한 누명을 쓰고오랜 세월 동안 범죄자 가족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온갖 고통을겪어왔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후략).‘ - P217

"예전 직장 동료에게서 얘기를 들었다던데요."
"그런 모양이지. 구라키의 과거 사건이 살인 범죄라고 추측했다면 기사에도 나온 것처럼 1995년 이전이라는 얘기잖아. 그렇게 시기를 잡고 당시에 구라키와 교류했던 사람을 훑어봤겠지. 그것도 까다로운 작업이었을 텐데 이 프리랜서 기자, 대단한 행동파인 것 같아." - P218

흥, 하고 고다이는 코웃음을 쳤다. 사마리
"상식적으로 피의자 가족이 이런 취재를 받겠냐고, 대부분 노코멘트지."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재판에 유리해진다면, 이라고 생각한 거 아닐까요?" - P219

"범인이 잡혔는데도 이래저래 꼬리를 길게 끄는 사건이군요." 나카마치가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살인 사건은 항상 그래. 그렇다고 우리까지 질질 끌려다니다가는형사 노릇은 못 해. 이제는 입 다물고 재판의 향방을 지켜보는 것밖에 없어."고다이는 비어버린 나카마치의 유리잔에 맥주를 따라주면서 말했다. - P220

(전랴기.
가자, 라면서 고다이가 발길을 돌리려고 했을 때, 빌딩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나이는 50세 이전인 것 같았다. 약간 퉁퉁하고 키는 그리 크지 않다. 각진 얼굴에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나카마치가 고다이의 귓가에 입을 바짝 댔다. "저 사람, 구라키의 변호인이에요."
(중략)
"그래? 근데 무슨 볼일이 있어서 여기에……………."
우연일 리는 없다. - P221

소매 달린 앞치마 차림의 아사바 요코가 달려와 "아이구, 미안한데 마지막 주문이 ・・・・・・"라고 얘기한 참에 말과 발을 동시에 멈췄다.
고다이의 얼굴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마지막 주문이 11시였지요? 그거면 됩니다." 고다이는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테이블석 쪽에 두 팀의 손님이 남아 있었다. "가능하면 카운터석으로 부탁합니다." - P222

고다이는 테이블석 쪽을 살펴보았다. 손님 두 팀이 각자 얘기로 흥이 올라서, 당연한 일이지만 카운터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조금 전에 이 건물에서 호리베 변호인이 나오는 걸 봤는데요." 고다이는 오리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P223

"우리 가게를 감시했어요?" 오리에가 물었다. 이고다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감시를 하겠습니까, 이제 그럴 이유도 없는데 그냥 지나가다 우연히 봤어요. 그래서 잠깐 들러보기로 한 거고."
오리에는 요코를 돌아보았다. 형사의 말을 믿어도 될지, 눈으로 상의하는 것이리라. - P224

"편지를 들고 오셨어요." 도마에 몸을 숙인 채 오리에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편지?"
"구라키 씨한테서 받은 편지를 전해주러."
"아, 그런 거였군요."
구치소에서 외부에 편지 우송도 가능하지만, 변호사가 대신 전해주는 경우도 많다. - P224

• "고다이 형사님은 다 알고 있었지? 구라키 씨가 히가시오카자키사건의 진범이라는 거. 그걸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우리 얘기를 들으러 왔었던 거야. 어때, 그렇지?"
"위에서 그렇게 지시가 내려왔거든요." 변명 같은 말투가 되는 것을 고다이는 자각했다. - P225

"그렇다고 구라키 씨가 미웠느냐 하면 그건 솔직히 잘 모르겠어. 우리한테는 정말로 잘해줬고, 참 좋은 사람이었어. 아니, 지금도 난 그렇게 생각해. 모두 다 뭔가 말 못 할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겠지. 본바탕이 악한 인간이었으면 누명 쓰고 자살한 사람과 그 가족을 그렇게까지 걱정했겠어? 우리 찾아내는 것도 엄청 힘들었을 텐데? 검사님은 내가 구라키 씨 욕이라도 해줬으면 하는 눈치입니다만." - P225

기사에는 ‘조용히 지내게 해달라‘라고 적혀 있었는데, 실제와는뉘앙스가 크게 다르다.
"구라키 씨가 이 식당 단골이었던 것을 그 기자도 아는 눈치였습
"니까?"
"글쎄, 그건 물어보질 않아서 모르겠네. 근데 알았다면 훨씬 더 철썩 들러붙었을걸."
그건 그렇다고 고다이도 동의했다.  - P226

"충격받고 식당 문 닫은 건 아닌지, 이상한 소문에 손님이 끊긴 건아닌지, 구라키 씨가 이래저래 걱정을 했던 모양이야."
(중략).
"그래서 내가 그 변호인한테 말했어, 구라키 씨에게 이렇게 전해달라고, 우리는 괜찮으니까 부디 건강 조심하고 제대로 죄 갚음을 하시라고."
그렇게 말하는 요코의 얼굴을 보면서 고다이는 흠칫했다. - P227

남자는 고다이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조용히 옆의 테이블석에앉았다.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곧장 스마트폰을 꺼내 들여다보고있었다.
고다이 씨, 라고 요코가 말했다. "오늘 고마웠어. 다음에 또 오셔잘 살펴 가."
아무것도 묻지 말고 얼른 돌아가라, 라는 뜻이라고 눈치를 챘다. - P228

28

(전략).
거실 테이블을 끼고 마주 앉자 "우선 문의하셨던 것부터 얘기하지요"라면서 호리베는 가방에서 《주간세보》를 꺼냈다. "아까 오후에 편집부 쪽에 전화를 했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흠, 하고 호리베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턱을 끄덕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정정 기사는 낼 수 없다는군요." - P229

"난바라라는 기자의 휴대용 녹음기. 거기에 가즈마 씨와의 대화를녹음했다는군요. 편집부로서도 대충 지어낸 기사라면 실을 수 없고, 가해자 가족의 발언에 틀린 부분이 있으면 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녹음 내용으로 팩트 체크를 했다는 모양이에요."
"거기에 내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고요? 이런 식으로 얘기했다는?" - P230

"......짐작되는 게 있는 모양이군요." 호리베가 딱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건 유도질문에 걸려들어 튀어나온 말이지 제 진의는아니었어요." - P230

"그게 인터넷일 경우에는 어떻게 하지요? SNS로 해명하면 될까요?"
가즈마의 질문에 호리베는 눈이 둥그레져 아니, 아니, 라고 손을내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될 뿐이에요.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최상의 방책입니다. 재판에도 도움이 될 게 하나도 없으니까." - P231

그렇다면 법적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야마가미는 말했다.
"변호인과 상의해서 출판사에 항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곧바로 호리베에게 연락했다.
"알겠습니다. 기사를 확인해보고 출판사에 항의하도록 하지요." - P232

호리베는 고개를 크게 좌우로 흔들었다.
"영업시간 중이라서 여유 있게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두 분 다 구라키 씨의 건강을 몹시 걱정하고 있고,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 편이 되어줄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우리 편?" - P233

호리베는 슬쩍 몸을 내밀며 말했다.
"아니, 누명을 쓴 것 자체는 구라키 씨와는 관계가 없어요. 어디까지나 경찰의 실수였습니다. 구라키 씨가 자수할 기회를 놓친 것도 그 탓이라고 할 수 있죠. 혹시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를 봤나요?" - P234

"지난번 그거, 아버지에게 물어보셨는지……………."
"그거, 라면?"
"히가시오카자키 사건에 대한 거요. 가족에게 평생 숨길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언젠가는 털어놓을 생각이었는지, 아버지에게 물어봐주십사고 부탁드렸었는데요."
"아, 그거?" 호리베는 금테 안경을 손끝으로 쓰윽 올렸다. "구라키씨 본인에게 확인했어요. 대답은 이렇습니다. 밝힐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비밀은 무덤까지 갖고 갈 생각이었다……………." - P235

"아버지는 아직도 나를 만날 마음은 없는 거네요"
"계속 설득하고 있는데, 마주할 면목이 없다. 인연을 끊어도 좋다. 오히려 끊어주기를 바란다, 라는 말만 되풀이하시는군요."
가즈마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피잉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 P236

그러면 나는 이만, 이라면서 호리베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변호인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호리베는 입을 딱 다물고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더니, 팔을 내밀어 가즈마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은 그저 오로지 견디는 것뿐입니다." - P237

25

약속 장소는 아카사카 호텔의 라운지였다. 약속 시간보다 10분쯤 일찍 도착했다. 상대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점원이 인원수를 물어서 두 명입니다, 라고 미레이는 대답했다. "되도록 구석 자리가 좋은데요."
(중략).
스마트폰에서 마음에 걸리는 뉴스를 발견한 것은 오늘 아침 이른시간이었다. 《주간세보》의 기사에 대한 논평으로 인터넷에 비난 댓글 쇄도, 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방송에서 논객으로 활약하는한 시사평론가가 이번에 발매된 《주간세보》의 ‘공소시효 만료, 처벌할 수 없는 살인자들의 그 후‘라는 기사에 대한 논평을 SNS에 올리자 그 내용을 비난하는 의견이 쇄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P239

《주간세보》의 기사는 미레이도 봤었다. 난바라라는 기자 이름도기억났다. (중략).
하지만 기사를 읽고 석연치 않은 느낌이었다.  - P239

유일하게 시선을 끈 것은 구라키 아들의 발언이었다. 아버지의 과거 사건에 대한 처벌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싶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가족으로서 당연한, 그야말로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 P240

시사평론가의 그 글을 읽고 비난이 쇄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웃기는 법 제도 덕분에 처벌을 면한 살인범을 옹호하는 것이냐, 유족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라, 라는 비판이 속속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 P240

"하지만 그 기사를 본 사람들은 아버지의 행동이 이러니저러니, 자기들 마음대로 상상하고 판단하겠죠. 시사평론가가 SNS에 올린 글에 비난이 쇄도한다고 해도 저는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았어요."
사쿠마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한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 P242

담당 검사는 넓은 이마와 높은 코가 특징적인 인물이었다. (중략).
직접 느낀 대로 얘기하는 게 좋다, 라고 사전에 사쿠마가 알려주었기 때문에 미레이는 수사 기록의 등사본을 살펴보고 가졌던 의문, 즉 시라이시 겐스케의 언동으로 알려진 부분이 전혀 아버지답지 않다고 느낀 것 등을 이마하시에게 솔직히 말해보았다. - P242

"아뇨, 말투 같은 게 아니라 애초에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대응할리 없다는 거예요. 공소시효가 만료된 사람의 과거를 추궁했다느니 폭로하려고 했다느니, 저는 그게 무슨 얘긴지 전혀 납득이 안 돼요"
흐음, 하고 이마하시는 신음 소리를 냈다. - P243

"그게 거짓말일 수도 있다고요."
"그건 그렇죠. 하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에요." - P244

"아니, 달라지지 않아요. 과정이 어찌 됐든 공소시효가 만료된 과거의 살인을 깜빡 털어놓은 것을 후회하고 입막음을 하기 위해 살해했다, 라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후략)."
이해하셨습니까, 라고 이마하시가 물었다. - P245

"아사바 씨 모녀에 관한 건 어때요? 피고인을 그리 미워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요."
"그 모녀를 증인으로 부를 예정은 없습니다. 어쩌면 변호인 측에서 희망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모녀가 법정에서 어떤 증언을 하건 구라키 피고인이 과거 사건을 반성한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후략)."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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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를 끝내고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려는 순간, 메일 도착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도 아메미야가 보내준 것이었다.
‘아픈 건 아닌지 걱정이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그리고 SNS는 중단하는 게 좋을 거 같다. 단 한 줄도 읽지 마. 인터넷 세상에 내 편은 없어. 단 한 명도계정 삭제를 추천한다.‘
스마트폰을 손에 든 채 가즈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의 고마운 - P180

19



오전 10시에서 2분이 지났을 때, 자동문이 열리고 백발의 마른 남자가 로비로 들어섰다. 고가의 블루종을 입고 있었다.
시라이시 미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웃는 얼굴을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 P180

<메디닉스 재팬〉은 회원제 종합의료기관이다. - P181

곁에 둔 가방에서 작은 진동음이 울렸다. 미레이는 스마트폰을 꺼내 고객들에게 보이지 않게 데스크 밑에서 화면을 확인했다. SNS메시지를 보내온 것은 어머니 아야코였다.
‘오늘 저녁에 사쿠마 선생님이 집에 오시기로 했어. 19시쯤.‘
알았어요. 라고 즉시 답장을 보냈다. 스마트폰을 가방에 챙겨 넣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등을 꼿꼿이 폈다. - P182

(전략).
아무나 들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라는 것은 개인정보를 다루는 업무이기 때문이다. 인선에 무엇보다 중요한 점이 ‘신용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물론 이 경우, 신용할 수 있는 사람은 미레이 자신이 아니라 시라이시 겐스케 변호사였다. 그럴 만큼 믿음을 쌓아온 아버지를 미레이도 존경하고 있었다. - P183

아버지가 스키를 취미로 하고 있어서 미레이도 어린 시절에는 거의 해마다 데려가곤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스키를 타지 않았고 가족이 함께 간 적도 없었다. 그래서 눈이 얼마나 내리든 거의 아무 관심도 없었다.
"별로 안 내리지 않을까. 온난화 영향도 있고." 그렇게 무심히 대답했던 게 기억난다. 게다가 아버지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 P184

그날 저녁 때 미레이가 집에 돌아가자 어머니 아야코가 이상하다.
이상하다. 라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는데 호출음만 울릴 뿐 연결이 안 된다고 했다.
"스마트폰을 어딘가에 놔두고 잊어버린 거 아냐? 휴대전화 쪽으로 걸어보는 게 어때?" - P184

뭔가 착오이기를 빌었지만 그 바람은 경찰서 안치실에서  무너져내렸다. 평안, 이라고 할 만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은 그 전날 아침에 스키장의 눈을 걱정하던 내 아버지가 틀림없었다. - P185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일입니까, 라고 안치실까지 안내해준 경관에게 연달아 물었지만 난처한 듯한 얼굴로, 현재 수사 중입니다, 라는 대답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 P186

고다이는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접했을 때의 일을 확인한 뒤, 최근에 평소와 다른 점은 없었는지 등을 물었다. 하지만 미레이에게는 짐작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 P186

다만 피고인을 변호하는 입장이라서 피해자 측 사람에게서 원한을 사는 일도 있었던 게 아니냐, 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미레이가 반론에 나섰다. - P187

미레이와 아야코는 서로 마주 보았다. 이 집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장소고 아버지의 입을 통해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했다.
형사들은 돌아갔다. 그 등짝에 ‘수확 없음‘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 P187

고다이의 목적은 구라키의 진술 일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중략).
그런 얘기를 시라이시 겐스케에게서 들은 적이 있느냐고 고다이는 물었다.
여기에서도 미레이는 아야코와 얼굴을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시라이시가 혼자 야구장까지 경기를 보러 갔다는 것 자체가 뜻밖이었다. - P188

(전략).
기사를 읽고 아연했다. 이런 어이없는 이유가 범행 동기란 말인가.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이유를 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기가 어이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마음에 걸린 것은 ‘직접 모든 것을 밝히는 것이 진정성 있는 태도라는 말을 듣고‘라는 부분이었다. - P189

"네 아버지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지? 네 아버지는 상대가 절박해질 만큼 궁지에 몰아넣을 분이 아니잖니." 그렇게 말하고 아야코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 기사만으로는 모르겠다. 실제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얘기를 들어보지 않고서는 섣불리 판단할수 없어." - P190

아야코에 의하면, 만일 그 제도를 이용한다면 모치즈키가 지원 담당자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유족이 재판에 참여한다고해도 법률에 무지한 일반인이 복잡한 절차 등을 직접 처리한다는건 무리한 얘기다. - P191

살해 동기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뒤로 취재 요청이 거의 매일같이 들어왔다. 며칠 전에도 난바라라고 이름을 밝힌 프리랜서 기자가 집까지 찾아와 잠깐이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끈덕지게 졸랐다고 한다.
"시라이시 겐스케 씨는 공소시효 만료로 면죄부가 주어지는 건아니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은데요, 그런 견해를 뒷받침할 만한 일은없었습니까?" 현관 앞에서 그런 식으로 물었다는 것이다. - P191

20


오후 7시 정각에 인터폰 차임벨이 울렸다. 아야코가 수화기를 들고 "네, 들어오세요"라고 답했다. (중랴).
잠시 뒤 문이 열리고 아야코의 뒤를 따라 자그마한 몸집의 여자가 나타났다. 짧은 머리에 큼직한 검은 테 안경을 썼다. 30대 중반으로 보이지만 조금 더 많은지도 모른다. - P192

"의사 가족이라고 모두 의학을 잘 아는 것은 아니죠. 게다가 비교적 새로운 제도라서 변호사 중에도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요." 명쾌한 어조로 사쿠마는 말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피해자나 유족이 내부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라는 것이겠지요." - P193

"이를테면 어떤 것을 정하면 될까요?" 미레이가 물었다.
"우선 양형이에요. 검찰 측도 나름대로 구형을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피해자 참여인도 구형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 구형이 검찰 측과 달라도 되나요?"
"네, 가능합니다. 살인 사건의 경우……." 사쿠마는 잠시 머뭇거리는 표정을 보이다가 말을 이어갔다. "검찰의 구형과는 상관없이 유족이 극형을 원하는 일도 드물지 않습니다." - P194

"신청서를 제출하면 재판소에서 회답이 올 거예요. 이번 사건의경우에는 허가가 나지 않는 일은 없을 겁니다. 거기서부터 모든 게시작됩니다. 아, 공판 전 정리 수속은 알고 계세요?"
"그것도 조금 공부했어요." 아야코가 말했다. "재판 전의 준비 말이지요?" - P195

"네. 피해자 참여제도라는 게 생겼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아마 아버지도 그런 일은 하신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러실 거예요. 변호사 중에서도 특이한 케이스니까요. 무엇보다재판 때 검찰 측 자리에 앉게 됩니다. 근데 저는 사실 그쪽이 더 익숙해요." - P196

21

벽쪽 자리에 나란히 앉은 두 여고생의 움직임이 가즈마는 아까부터 자꾸 마음에 걸렸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둘이 뭔가 속닥거리고 있다. 그녀들의 시선이 이따금 자신에게로 향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P197

하지만 누군가 실제로 말을 걸어온 것도 아니다. "당신, 구라키 용의자의 아들이지?"라고 느닷없이 캐묻는 사람 따위, 없었다.
그런데도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 - P198

친구의 말에 가즈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말만으로도 고맙다만, 항상 바빠서 쩔쩔매는 너한테 그런 부탁은못 하겠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경우야." 그런데, 라고 가즈마는 말을 이었다. "회사 쪽은 어때, 요즘 시끌시끌하지 않아?"
아메미야는 종이컵을 손에 들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도 않아. 회사 안에서 사건 얘기는 금지사항이야. 한동안 언론 쪽 인간들이 회사 현관 앞에서 어슬렁거렸는데 요새는 그것도안 보이더라고. 포기한 모양이야."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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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현재 인공지능, 특히 AGI에 대해서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특히 실리콘밸리 빅테크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시나리오입니다. 바로 인공지능이 AGI에 도달하는 순간 우리 인간이 멍청해서 풀지못했던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 P10

그래서 AGI를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 하고, AGI를 향하는길에 걸림돌, 특히 국가 규제 같은 것들을 다 없애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요지입니다. - P10

AGI가 인간에게 가져다줄 장기적 혜택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단기적 사회, 경제, 정치적 문제에 너무 집중해서는 안 된다는 이런 주장을 보통 효과적 가속주의 EffectiAccelerationism (e/acc)라고도 부릅니다. - P11

(전략). 대부분 계속 인공지능한테 쫓겨 다니고, 또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막 기도를 하기 시작하더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두 번째 시나리오입니다. - P11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시점은, AGI가 아직 완전히 모습을드러내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극히 짧은 ‘골든아워‘ 일지도 모릅니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고, 논의는이미 실존적 위기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 P12

AGI를 향해 전 세계가 서로 앞다투어 달려가는 이 시점에우리에게는 마지막 선택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낙관도 무조건적인 비관도 아닌 바로 현실적인 준비입니다. - P13

2장

생성형 AI의 출현

(전략).
그런데 지난 5년 동안 언어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생성형AI‘ 라는 두 번째 혁신이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언어 문제가 해결되니까 나머지 문제들도 덩달아 해결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 P58

 바로 엔비디아NVIDIA 입니다. 엔비디아는 병렬 처리를 아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새로운 반도체구조, GPU를 제안했습니다.  - P58

덕분에 이런 기술을 가속기 accelerator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이게 신의 한 수였습니다. - P59

언어는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연구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별별 방법을 다 생각했습니다. 개중에는 RNN, LSTM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풀고 싶었던 건 이것입니다.  - P60

기존에 시간축 데이터를 분석할 때는 러시아 수학자 마르코프 Andrey Markov가 제안한 마르코프 가설을 많이 썼습니다. 어떤 가설이냐면 지금 이 순간, 어느 특정 시점의 데이터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직전의 데이터라는 가설입니다. - P62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언어를 예로 들어볼까요? 단어 30개로 구성된 긴 문장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30번째 단어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게 정말 29번째 단어일까요?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 P62

이 말은 뭐냐하면, 언어는 시간축 데이터인데, 인과관계가선형이 아니라 뒤죽박죽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보니 마르코프 가설로는 도저히 분석이 안 됐던 것이지요. - P63

결국 문제는 이것입니다. 긴 문장의 맨 마지막 단어가 무엇으로부터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 그게 뒤죽박죽이라는 것이지요. - P64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했지요. 그래서 인공지능으로 인간의 언어 문제를 풀고자 했던 과학자들이 오래된 언어학논문들을 찾아봤습니다. 1957년에 퍼스John Rupert Firth라는 영국 언어학자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도대체 의미라는게뭘까?" 그가 제안한 아이디어는, 단어의 의미가 근처에 있는 단어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 P65

예를 들어 귀여운 고양이‘ 같은 조합은 자주 발견할 수 있지만, ‘공부 잘하는 고양이‘는 거의 없습니다. 반대로 ‘교수‘라는 단어를 보면 어떨까요? 저는 평생 ‘귀여운 교수‘라는표현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확률이 거의 0에 수렴할 겁니다. - P66

그럼 우리가 하는 건 뭘까요? 단어의 문맥을 보자는 겁니다. 이게 새로운 접근 방법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단어라고 했지만, 사실 인간 언어의 단위는 단어가 아니라 더 잘게 쪼갤 수 있습니다. 토큰token이라는 단위로 쪼갤 수 있지요. - P66

이런식으로 모든 단어를 임베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음에는 뭘 했을까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언어에서 문장은 여러 단어로 이루어져 길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문장 내에서는 단어들이 서로 뒤죽박죽으로 영향을 줍니다. - P68

 이제 단어의 순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단어가 등장하는 주변 단어들, 그러니까 ‘문맥‘이라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 P69

이 방법을 집중 스코어 attention score라고 부릅니다. 문장이 있으면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그걸 계산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계산 방법이 있고, 이를 제대로 표현하기 시작한 게 트랜스포머 알고리즘Transformer Algorithm 입니다. - P69

문제는 데이터가 많으면
해결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렇게 언어를학습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예제, 데이터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작가의 문장만 학습시키면 그 작가의 스타일만 배우게 되니까 보편적인 언어 사용 패턴을 학습하지 못하겠지요. - P70

(전략). 이걸 컨텍스트길이 context length라고 하는데, 이게 가장 중요한 파라미터 중 하나입니다. 컨텍스트 길이가 길수록 더 많은 걸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기 챗GPT는 앞뒤 100~200개 단어를 봤지만, 최신 모델들은 앞뒤 1,000만개 단어를 보고 이해합니다. - P71

이런 집중 스코어 관계를 학습한 걸 우리는 거대 언어 모델 Large Language Model(LIM)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P71

참고로 말하자면 지금 AI 시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된 엔비디아에는 큰 리스크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 AI 연구에서엄청난 양의 고성능 GPU가 필요한 이유는 트랜스포머 알고리즘이 너무 비효율적이라 계산량이 천문학적이기 때문입니다. - P72

하지만 일단 지금은 엔비디아가 거의 독점하고 있습니다. 2등은 AMD, 3등은 인텔인데, 인텔은 기술력이 없고 AMD는 하드웨어 기술력이 꽤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엔비디아가 GPU를 만들면서 CUDA라는 소프트웨어 환경을 같이 만들어 놨다는 사실입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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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다가가는 료스케의 모습을 백미러로 보았는지 택시뒷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고난 출구에서 나카스로 가려면 구 해안도로를 가로질러 미타테바시(御楯橋)를 지나야 한다. - P53

역 앞에는 아직 항만 관계자들로 북적거리던 시절의 자취가 밴 선술집이 늘어서 있고, 좁다란골목에는 언제부터인가 부쩍 늘어난 한국 뷰티숍들이 넘쳐난다. - P53

료스케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그런 가게에 가본 적이 없다. 한 번 들어가면 두 번 다시 나오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 P53

뒤돌아보며 묻는 료스케에게 마리는 코트 주머니에서 손도빼지 않은 채 "저거, 옥(玉) 녹차!"라며 턱으로 가리켰다.
"어떤 거??
"거기 그거."
코트 주머니 안에 따끈한 캔 하나만 넣었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온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있잖아, 전부터 궁금했는데……… 료스케는 아직 못 잊는 사람이 있지? - P55

료스케는 시선을 피하며 주머니에서 캔커피를 꺼냈다.
"으음, 료스케는 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사귀는 거야?" - P55

"료스케는 왜 자기 얘길 안 해? 설마 할 얘기가 하나도 없는건 아니겠지? 25년이나 살았으면서…………. 혹시 어제 태어나서 추억할게 아예 없는 거야?" - P56

료스케는 얼굴을 들여다보는 마리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물론 아무 생각도 없는 건 아니다. (중략). 특별히 대단한 걸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마음에 품고있거나 생각한 일들을 적확하게 표현할 일본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렇다고 영어나 프랑스어를 할 수도 없으니, 자신은 과연 무엇으로 사고해야 하는걸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 P57

료스케는 미소 짓던 뺨 근육을 무리하게 원상태로 되돌리며말했다.
"료스케는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과 사귀었다면서"
"어?
"미안, 유코한테 들었어. 아마도 유코는 오스기에게 들었겠지만." - P58

"유코 커플은 서로 뭐든 숨김없이 얘기하잖아."
변명처럼 들리는 마리의 말에 료스케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은 얘기였어?"
"아니, 뭐 특별히…" - P59

"어떤 여자였는데? 같이 살았다면서"
"뭐, 그냥 평범했어. 평범한 여자."
"평범하다니?"
"……평범한 게 평범한 거지."
"료스케, 그분 좋아했어?" - P59

료스케는 오전에 마닐라에서 온 화물을 정리하는 작업에 쫓겨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창고로 돌아온 시각은 오후 2시 30분이 지나서였다. - P60

자기에게 맞는 다른 일을 알지 못하는 료스케는 다카하시 씨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마닐라에서 대만에서, 멀리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보낸 화물들이 매일같이 이곳 시나가와 부두 창고로 밀려들어온다. 스트래들캐리어로 또는 컨테이너째 화물을 육지로 들어 옮기고난 후에는 포크리프트로 분류한다. - P61

짧은 복도를 지나 사무실로 들어서자 한층 더 따뜻한 공기가온몸을 휘감았다.
"오호, 니기타! 때마침 잘 왔네."
노다(野田) 주임이 형식뿐인 접수창고 테이블 너머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풍선껌을 입에 물고 서 있었다.
"이분들이 여기를 좀 견학하고 싶어하시거든." - P62

료스케가 조금 곤란한 듯 중얼거리자 "정말로 부두 주변을 잠깐 동안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라고 이번에는 키가 크고 볼이 홀쭉한 여성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이분들, 소설가래."
노다 주임은 그렇게 말하며 혀로 풍선껌을 쭉 내밀었다.
"소설가?"
"아니, 이쪽이 소설가고, 난 담당을 맡은 편집자예요." - P63

다시 사무실 계단을 내려와 맞은편으로 오다이바가 건너다 보이는 부두 끝에 서자, 도쿄만을 거쳐 온 차가운 바람이 뺨이 아플 정도로 세차게 휘몰아쳤다. 입을 벌릴 수 없을 정도로 차디찬 바람이 얼어붙은 귀를 두드리며 작은 마찰음을 일으켰다.
"거 봐, 내 말이 맞았죠?"
"거봐,
"정말 얇은 코트로는 걸어 다닐 수도 없었겠네요." - P64

두 사람 뒤쪽에서 줄곧 등을 웅크리고 서 있던 료스케는 타이밍을 살피다 "저어 대충 이 주변이 국내화물을 취급하는 창고이고, 건너편이 해외에서 들어오는 화물 전용입니다만……………." - P65

료스케는 자기 뒤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사무실에서 걸어 나올 때부터 줄곧 ‘레인보우브리지‘ 쪽만 바라보았던 두 사람은 해외화물 전용 창고 안벽에 정박해 있는 필리핀 화물선을 미처 보지 못했던 것 같다. - P65

"저어, 어떤 소설을 쓰기 위한 취재인가요?"
(중략).
"연애소설이에요."
입술을 떨며 그렇게 대답한 사람은 소설가였다.
"연애소설" - P65

"여기가 소설의 무대가 되는 건가요?"
작은 목소리로 묻는 료스케의 말은 곧바로 강풍에 밀려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무대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여기서 일하는 남자가 나오니까."
아오야마가 여전히 입술을 떨어대며 대답했다. - P66

"우와, 저건 또 뭐야?"
료스케가 대답을 하자마자 아오야마가 갑자기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의 손가락이 컨테이너 집적장을 가리켰다.
"정말, 저건 뭐지? 어머나, 움직인다 움직여…………. 밑에 차바퀴가 붙어 있네."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이치이도 료스케의 몸 뒤로 바람을 피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 P67

료스케 역시 가끔 시시한 질문을 두 사람에게 던졌다. "언제쯤 그 소설이 완성되죠?" "소설가는 하루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지내나요?"라는 등의 질문이었다.
그럭저럭 부두 견학을 끝내고, 료스케는 컨테이너용 트레일러 출구인 바깥문까지 두 사람을 배웅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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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좁은 공항 카페를 나온 료스케와 ‘로코‘는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모노레일 탑승장으로 향했다. 료스케는 하마마쓰초까지 가는 티켓 2장을 사서 그중 1장을 ‘로코‘에게 건넸다. - P26

문이 닫히면서 아주 짧은 순간 차체가 위로 붕 떠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P26

"정말 이대로 갈 거예요"
료스케가 유리창에 비친 ‘료코‘를 보며 물었다.
"미안, 내일 아침 일찍 서둘러야 해서……………."
그 순간, 유리창 너머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지만 ‘로코‘는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그렇게 말했다.
"내가 맘에 드는 스타일이 아닌 거죠?" - P27

"아무튼 좀 이상하잖아요. 이대로 하마마쓰초에서 바이바이할 거면 뭣 때문에......."
"그럼 뭐? 료스케는 단지 그것 때문에 나온 거란 얘기예요?
"어?
"지금,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잖아요."
"그건 그쪽도 똑같을 것 아닙니까?" - P28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의 모습이 캄캄한 터널을 통과하는 모노레일 차창에 희미하게 비쳤다.
(중략).
그때 갑자기 시야가 밝아졌다. 긴 터널을 빠져나온 모노레일 차창 밖으로 조명이 환하게 밝혀진 아름다운 공항 풍경이 펼쳐졌다. (중략).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 광경 쪽으로 시선을 빼앗긴 료스케의눈길을 좇아 ‘로코‘ 도 등 뒤를 돌아다봤다. - P29

"그건 그렇고 처음 모노레일을 타본 감상은 어때요? 물론 올 때도 탔겠죠?"
한참 동안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 P30

"이미 올 때 탔었죠"
대답이 없는 ‘료코‘ 에게 료스케는 재차 그렇게 물었다. - P30

료스케는 그녀의 뜻밖의 대답에 매우 당황했다.
"난 올 때 탔는 줄 알았는데 왜 안 탔어요?"
"그냥・・・・・・ 돌아갈 땐 같이 탈 수 있으니까."
‘료코‘는 너무나 당연한 일인 양 그렇게 대답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 P31

"그러니까, 지금 처음 타보는 거라든가 뭐 그런......."
"말하면 뭐가 달라지나요?"
"뭐가 달라진다기보다・・・・・・ 보통 그런 경우 얘길 하지 않나요? 예를 들면 표를 살 때 ‘와아, 난생처음이야‘ 라는 식의…………….
흔히들 그런 말을 하는 건데."
"그런 말을 누가 해요. 료스케는 세이부이케부쿠로(西武池袋)선을 처음 탄다고 표사는 곳에서 ‘우와‘라고 기뻐하나요?" - P31

"그래도・・・・・・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모노레일을 타보고 싶어서 약속장소를 하네다공항으로 정했던 거 아닌가요?"
(중략).
"그러니까, 이게 처음이라고 말하면 나도 뭐랄까 조금은 더 즐겁게 해주려고 할 거 아니냔 말이죠."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 P32

모노레일이 아파트에 가장 근접했다고 생각한 순간, 그 불빛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저건 오기 그림자예요."
"네?"
"오스기, 내 옆방에 사는 동료."
불빛 아래서 움직이는 오스기의 그림자는 창가에 널어둔 빨래를 걷는 듯했다. - P36

이별을 아쉬워하듯 스쳐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다보며
‘로코‘ 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거기 살아요. 벌써 5년째죠."
"좋겠다!"
"뭐가요?"
"으음, 자기가 어디 사는지 그렇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도 있으니까. 그건 행복한 일이잖아요." - P37

시나가와 부두

네 귀퉁이에 수증기가 어린 유리창 너머로 첫눈이 흩날렸다. 쌓일 정도의 눈은 아니었지만 거리의 소음을 빨아들이기에는충분한 하얀 눈이었다. 가게 안의 난방 탓인지, 아니면 김치찌개를 먹어서 그런지 후끈 달아오른 몸 구석구석이 아까부터 견딜 수 없을 만큼 가려웠다. - P41

예전에 ‘차이를 아는 남자‘ 라는 카피가 붙은 인스턴트커피 광고가 텔레비전에 나왔다. 그 광고를 보며 "어떻게 하면 차이를 아는 남자가 될 수 있을까?"라고, 아리미 선생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선생님은 교복 차림으로 소파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앉아 있는 료스케에게 과일주스 팩을 휙 던져주며 "하나가 아니라 둘을 알면 되겠지." 라고 말하며 웃었다. - P42

아리미 선생님은 영어담당 교사였다. 료스케는 고등학교를졸업하자마자 그녀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빨리 돈을 모아 누군가와 같이 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부모님에게 불만이 있었던 건 아니다. - P43

양말도 벗지 않고 침대로 들어가려는 료스케에게 아리미 선생님은 늘 답답해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럴 때 료스케가 뭐라고 대꾸를 하면 반드시 말다툼이 되곤 했다.
"잠깐만 자고 일어날 거야. 조금만 자고 나서 제대로 목욕할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 매일 아침까지 그냥 자버리잖아." - P44

"둘이서 같이 약속했으면서..
선생님은 애처롭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료스케는 침대 위에서 거칠게 몸을 뒤척이고는 줄곧 선 채 자기를 내려다보는 그녀로부터 등을 돌려버렸다. - P45

료스케는 오스기의 여자친구인 유코의 소개로 처음 마리를 만났고, 어느새 2개월가량이 지났다. 물론 둘이서만 데이트를 한 적도 있지만, 아무래도 이렇게 오스기나 유코와 함께 넷이서 만나는 쪽이 료스케에게는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 P47

평상시처럼 또다시 유코와 오스기의 입씨름이 시작될 것 같았는지, 기다리다 지쳤다는 듯 마리가 "자, 밖에 내리는 눈을 위하여 건배!"라고 말하며 서둘러 잔을 부딪쳤다. - P48

료스케는 분명 자신이 마리라는 여자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를 싫어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쪽이 쉬울 것 같은 어딘가 뒤틀린 감정이었다. - P49

(전략).
"아그네스 창(일본 연예인)처럼 일본식 영어로 불러줄 거야?"
"뭐야, 일본식 영어라는 게."
"그 왜, 료스케의 형편없는 영어 말이야."
유코를 끌고 가는 오스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리가 "어떡해, 갈까?"라며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됐어, 내버려둬."라고 대답한 료스케는 "자그럼, 먼저 가 있을게!"라고, 멀어져가는 두 사람 등을 향해 외쳤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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