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와중에 우에마쓰 가즈미와 만났다. 그리고 엄청난 계획, 어쩌면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도박을 제안받은 것이다. 나나에의 이야기를 들은 우에마쓰 가즈미는 말했다. "그 심정을 알 것도 같아요. 부모에게 버림받는 것도힘들지만, 속박당하는 것도 힘들군요." - P115
우에마쓰 가즈미가 택한 건 음독자살이었다. 나나에의 집에서 그녀의 옷을 입고 지문을 실컷 남긴 뒤 음독했다. 시신 옆에는 ‘사는 데 지쳤어요. 죄송합니다. 스에나가나나에‘라고 적은 유서를 남겼다. 나나에가 직접 쓴유서니 필적감정을 해도 의심을 사지는 않을 것이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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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다케우치가 찾아올 거란 건 예상하고 계셨습니까?" 다케시가 물었다. "가즈미 씨는 언젠가 그가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하지만 몇십 년 동안 안 보고 살았으니 가짜인 줄은 절대 모를 거라고도 했죠. (후략)." - P119
"아까 본인에게도 말했지만 반년 전의 빈집털이는그 남자 짓이었을 겁니다. 그때 진단서를 봤겠죠. 그걸로 중병에 걸린 걸 알고 계획을 변경한 게 아닐까요." - P120
"맞아. 하지만 가즈미 씨는 죽지 않았지. 죽기는커녕쌩쌩하게 부활했어. 그래서 가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나타나 협박한 거죠." "이제 안 오겠지?" "그건 모르지만 손쓸 방도가 없겠지. 스에나가 씨가사실을 고백하지 않는 한은." - P121
"어머님 일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스에나가 씨의 어머님이잖아요.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계실 텐데. 그건 어머님에게 너무 잔인하지 않나요. 그래도 팬찮으세요?" 스에나가 나나에는 불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역시 피하고 싶은 부분이었나. "어리석은 질문이군." - P122
"물론 어머니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에요." 온화한 목소리였다. "말씀대로 잔인한 짓이죠. 하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전 어머니에게서 멀어져야 했어요. 저를 위해서도, 어머니를 위해서도요. 앞으로 어머니는 고생이많겠죠. 하지만 도움을 드릴 수는 있을 거예요. 딸로서는 아닐지라도." - P123
위기의 여자
하와이의 별장을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라고 기요카와가 말을 꺼낸 건, 택시를 타고 2차 자리로 향하던 길이었다. - P127
"마음은 그러고 싶죠. 하지만 별장이란 가만히 둬도이게 들거든요." 기요카와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었다. "고민이 되죠." - P128
"술을 정하기 위해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해도 되겠습니까?" 기요카와가 나미를 보며 물었다. "별장 말입니다." "네, 듣고 싶어요. 하지만 그 얘기랑 술이 무슨 상관이있다는 거죠?" - P130
"별장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들었어요. 콘도미니엄과 단독주택요. 기요카와씨 별장은 어느 쪽인가요?" "단독주택입니다. (후략)." - P130
"대충 찍은 거라 별로 잘 나온 사진은 아니지만 이런느낌입니다." 도로에 인접한 건물을 대각선 방향에서 찍은 사진이화면에 떴다. 직사각형의 하얀 이층집이었는데 길에서현관까지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건물을 둘러싼 화단이 푸르렀다. - P131
"이런 질문,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별장은 얼마쯤 하나요?" 나미의 물음에 기요카와는 겸연쩍게 웃었다. "하하, 직설적인 질문이네요." - P132
200만엔일 리는 없었다. 그러면 200만 달러인가. 일본 엔으로 얼마인지 계산하자 심장이 뛰었다. 2억 엔 이상이다. 달칵. 작은 소리가 났다. 앞을 보니 카운터에 칵테일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잘게 부순 얼음에 투명한 파란액체가 담겨 있다. 거기에 파인애플을 올리고 얇은 빨대두 개를 꽂았다. - P133
"몰라요 술에 빨대라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커플이 동시에 마시라고 꽂아놓은 건가요?" 기요카와는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 그런 사람도 있죠. 아쉽게도 아닙니다. 이건 스터링(Stirring) 스트로라고 크러시드 아이스를 섞는 데 씁니다. 그러면 얼음이 녹아도 맛이 항상 균등해지죠." - P134
"말씀 나누시는 중에 죄송합니다. 안주가 필요하실것 같아서." 마스터는 메뉴를 들고 물었다. (중략). 마스터는 메뉴를 기요카와 앞으로 옮겼다. "희귀한 견과류나 치즈도 준비돼 있습니다만." - P135
"히로오(広尾)에 사신다고 하셨죠? 맨션인가요?" "네." "자가인가요?" 기요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월세입니다. 같은 곳에 오래 사는게 성미에 안 맞아서 몇 년 살다 집을 옮기거든요. 그러니 월세가 더 편하죠 매매하면 팔리지 않을 경우에 귀찮아지잖아요. 그렇다고 가격을 내려서 내놓기도 싫고." - P136
"괜찮으시다면 오늘 밤 권해드리고 싶은 칵테일이 있는데요." 마스터의 말에 기요카와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렇게 하죠. 추천 메뉴가 있으면 그걸 마시는 게 제일좋죠." "알겠습니다." - P137
갈색 빛깔의 액체를 바라본 뒤 나미는 한 모금 마셨다. 산뜻한 오렌지 향이 코를 간질였다. "맛있다." 나미의 감상에 기요카와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아한 맛이네요." - P138
"이것저것 다 합니다. 그중 하나는 유행을 예측하는일이죠.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조합해 다음에 어떤붐이 어떤 타이밍에 일어날지 찾는 거죠. 패션업계만이 아니라 생활용품 회사도 저희 고객입니다...." - P139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 어디까지 얘기했죠?" "유행을 예측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계신다고. 그밖에는 어떤 사업을 하십니까?" - P139
기요카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심호흡을 반복했다. "이상하네. 마스터・・・・・・ 화장실이 어디죠?" "안내해드리죠." 마스터가 카운터에서 나와 기요카와를 화장실로 안내했다. 화장실은 출입문 바로 옆에 있었지만 문이 잘보이지 않았다. - P140
"결혼 앱입니까? 아니면 결혼 사이트?" (중략). "손님은 꽤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지신 여성분인것 같군요. 상대의 재산 상태를 세세하게 파악하고 계셨죠. 그것도 에둘러 물어보는 게 아니라 대담하게요. 비난하는 건 아닙니다. 좋은 자세라 칭찬하는 겁니다. 평생이 달린 문제니 점잔 뺄 필요는 없죠." - P141
그러자 마스터는 어느샌가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그리고 나미에게 화면을 내밀었다. 화면 속사진을 보고 헉 숨을 삼켰다. 아까 기요카와가 보여준 하와이 별장이었다. "어떻게 그 사진을 갖고 있죠...?"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알아챘다. "그 스마트폰, 마스터 게 아니죠? 그 사람 스마트폰이죠? 화장실에 안내해주는 척하면서 슬쩍한 거예요?" - P142
"자세히 보십시오. 광각렌즈로 찍은 사진입니다. 그런데 이 스마트폰 카메라에는 광각으로 찍는 기능이 없어요. (중략). 제 추리는 이렇습니다. 이 사진은 그분이 찍은게 아니라 어느 부동산 회사가 올린 매물 정보를 따로저장한 거겠죠. 부동산업자들은 보통 매물을 광각렌즈 카메라로 촬영하니까." - P143
"그렇다고 봐야겠죠. 하지만 다른 곳이 아니라 하와이에 별장이 있다고 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일 겁니다." - P143
"저 남성분은 지난주에 처음 저희 가게를 찾으셨습니다. 주문은 블루하와이 한 잔만 하셨고요. 다 마신 뒤 바로 일어나셨죠.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오늘, 여성과 함께 찾아와 블루 하와이를 주문했습니다. 그러니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분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더니 역시 예상대로더군요." - P144
"그분이 스터링 스트로 얘기를 했죠. 목적은 잡다한지식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빨대를 건드리며 손님칵테일에 뭔가를 넣는 것이었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하얀가루를 넣는게 보이더군요." - P144
"비열한 남자들이 성범죄에 악용하는 걸 방지하기위해 요즘 수면 유도제는 물에 녹으면 파랗게 변색되도록 개량됐습니다. 하지만 원래 파란 빛깔을 띤 음료라면 섞어도 알아채기 어렵죠. (후략)." - P145
나라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곯아떨어진 기요카와를 노려왔다. 수면제를 먹여 쓰러뜨린 뒤에는 어떡할작정이었을까. 근처 호텔 같은데 데려가 옷을 벗기고, 그다음은? 당연히 나체 사진만 찍고 끝내지는 않았을것이다. - P146
나미는 마스터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 사람은 대체정체가뭐지? "손님도 다 드시면 그만 가보십시오. 도쿄도에서 영업시간 단축 요청이 내려왔습니다. 오늘 밤은 여기서마감해야겠군요 계산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일행분께받을 테니까요. 그럼 편안한 밤을. 다음에는 멋진 남성과 함께 찾아주시기를 빌겠습니다." - P148
환상의 여자
1
(전략). 도모야는 지금 색소폰 주자의 뒤에서 우드 베이스를연주하고 있었다. 곡에 취한 듯 몸을 흔들며, 이따금 유즈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 P151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유즈키는 택시에서 내려바로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발밑에 ‘TRAPHAND‘라고새겨진 블록이 놓여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검은 문이 보였다. 아무런 표시도 없는 문이었다. - P152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카토 씨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 가미오가 물었다. "뭐 하나 마실게요. 뒷정리하는 데도 시간이 걸릴 테고, 일단 집에 갔다가 다시 나온다고 했으니까." - P154
둥근 안경의 남자는 미안하다는 듯 말없이 유즈키에게 고개를 숙였다. 카드 결제를 마친 가미오가 영수증을 남자에게 건넸다. 영수증을 받으며 남자가 말했다. "아까 그 얘기 말인데, 역시 기일에는 안 올거냐?" - P155
가미오가 부른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유즈키는 두 손을 꼭 모으고 도모야가 많이 다치지 않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침대에서 눈을 뜨고 있기를 신에게 빌었다. - P160
"악기를 차로 운반하다 오토바이에 치였다고 합니다. 머리를 다쳐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병원으로 이송됐다는군요. 데이토 대학 병원입니다." 가미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제대로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형님입니다. 서로 생활에 간섭하지 않기로 했는데, 이따금 시골에서 올라오죠. 동생이 고독사라도 하면 귀찮아진다 생각하는 건지 드시죠." 가미오는 그렇게 말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옅은 붉은빛 액체에 체리와 레몬이 올라가 있었다. 한 모금 마시자새콤달콤한 맛과 적절한 쓴맛이 혀 위로 번졌다.
"재즈클럽 연락처는 아십니까?" 가미오가 물었다. "오늘 티켓에 적혀 있을 것 같아요." 유즈키는 가방에서 티켓을 꺼냈다. "잠깐 보겠습니다."
유즈키는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좀 늦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어?‘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도모야는 금방 답장을 줄 터였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메시지는 ‘읽음‘으로 바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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