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이 징크스
호수는 어제와 다르게 더 차게 느껴지는 아침 공기를 맡으며 부암동 길을 올랐다. - P110
떨어져 지내던 부녀가 미술관 전시를 계기로 다시 마주하고, 아경 씨와 해주 씨가 우정을 돈독히 다질 수 있게 된것에 호수는 작은 보람과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퇴근 무렵내내 기분이 좋아 보이던 오 실장이 다미와 호수에게 저녁을 같이할 것을 제안했는데, 문제는 따라나선 그 저녁 자리에서 호수가 지나치게 술을 많이 마셔버렸다는 점이었다. - P111
저녁을 먹으러 간 해물찜 식당에서 오 실장은 미술에 관심이 조금씩 생긴다면 입문서로 읽어봐도 좋다며 책 한 권을 추천했는데, 그때 이미 호수는 빈속에 소주를 여러 잔 마시고 조금은 취해 있던 데다가 주위가 시끄러워 그의 말을 잘알아듣지 못했다. - P111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호수 씨.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 (중략). "아아, 미술관 공구리 친다고요?" - P112
그러고 오 실장은 시들한 표정이 되어 "이제 그만 정리하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호수의 주사가 거기서 그쳤다고 해도 괜찮았을 것이었다. - P113
아무도 미처 우산을 가져온 이가 없었기에, 오 실장이 "갑자기 웬 비야. 이거 낭패네. 그냥 각자 알아서가고 내일 봅시다" 하며 손짓한 후 서둘러 빗속으로 먼저 뛰쳐나갔다. 오 실장의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다 뭔가 짠한 마음이 된 호수가 뒤이어 뛰쳐나간 게 잘못이었다. - P113
호수는 맹렬하게 오 실장을 향해 달려 나갔다. "우산 쓰고 가셔야죠!" 한참 앞에서 가방으로 머리를 가린 채 종종걸음으로 걷던오 실장이 호수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 P113
빗물이 알알이 가득 들어차 보이지 않는 안경 너머 오 실장의 눈빛을 보았어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어쩌면 호수도 더 빨리 눈치챘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중략), 뒤를 쫓아왔는지 다미가 그 앞에 숨을 헉헉거리며서 있었다. "그거 우산 아니에요, 호수 씨." - P114
"손 연구원, 이분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거 같은데 잘 좀택시 태워 보내요" 하고 혀를 차며 뒤돌아선 오 실장이 어차피 젖은 머리며 몸을 가방으로 더 가릴 태세도 없이 걸어 나갔다. - P114
"나는 곰브리치를 생선이라고 아는 자네가 어째서 이 미술관에 와 있는지 도통 모르겠는데 말이야." 오 실장이 뒤끝이 없다는 다미의 말이야말로 근거 없는 얘기였다고 생각하며 호수는 완전히 기운을 잃은 모습으로 책상 한편에 상체를 기댔다. - P116
"뭐라도 먹어야 속이 풀리죠. 해장엔 감도 좋대요." "아, 이런 감사합니다. 근데, 그거 아세요? 감이 잠들면 감자 되는 거요." "술덜깨셨구나. 가요." 표정 변화 없이 다미가 말하며 걸어 나갔고, 무색한 표정으로 호수가 그 뒤를 따랐다. - P117
"뭔가를 먼저 긍정해버리면 꼭 잘 안 되는 징크스가 있으시대요. 긍정이 징크스라나. 아마 그것 때문에 아니지, 아니지, 그런 말투를 습관처럼 쓰고 있는 건 아닐까요?" (중량). 오 실장은 매사 신중하고 확실해질 때까지는 그 어떤 일에도 의심하고 회의하는 사람이었다. - P118
"가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치고 나올 때가 있어요. 그런데이렇게 버리고 나면 괜찮아요." "기운내세요." 웃는 낯으로 건네는 말이었지만 호수의 가슴은 왠지 모를공허함이 가득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는 다미의 말에 전염된 것처럼 곧바로 자기도 누군가를 좋아하게 돼버린 것 같았다. - P120
걸어 도착한 미술관 앞에는 제법 덩치가 큰 세 명의 남자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중 담배를 피우던 한 남자가 호수와 다미를 알아보고는 대뜸 외쳤다. "저기, 이봐." - P121
"네, 저희 미술관 작품은 현재 누구에게도 판매하지 않고있습니다." "허, 씨, 얘들아, 그림 판매를 안, 하, 신, 단, 다." 남자 뒤쪽에 있던 남자들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누구마음대로 판매를 안 하는데?" "누구 마음대로라뇨." - P122
"선생님, 그게 아니라, 전시된 작품 작가님이 그림을 팔기를 원치 않아 하셔서요. 공익적 목적으로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고 자유롭게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기를 바라시거든요." - P122
남자가 막무가내로 성질을 내던 그때 미술관 출입문 안쪽에서 굵고 엄숙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야, 득열이. 너 지금 뭐 하냐." (중략). "그러든 말든 그게 너랑 뭔 상관인데? 야 쪽팔리게 하지말고 어서 가가." - P123
"야, 니들은 뭘 알고 미술관에 데려와야 할 거 아냐. 여기미술 작품 한 작품만 전시하는 거 알았어, 몰랐어?" 금니 남자가 종전의 남자 어깨를 밀쳐내며 돌아서게 했다. "한 작품만요? 그건 몰랐는데요." - P124
티격태격하며 걸어 나가던 큰 덩치의 남자들이 웬만큼 멀어지자 호수가 한숨을 몰아 내쉬며 말했다. "휴, 깜짝 놀랐네요. 근데 좀 조폭들 같아 보이지 않아요? 여긴 어쩐 일일까요?" "그러게요. 낯선 분들이네요." - P124
새삼 다미가 자신보다 당차고 겁도 없다는사실을 되새김하며 그 자리에서 남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호수는, 그중 한 명이 살짝 고개를 틀어 뒤를 돌아보자 출입구 너머로 얼른 몸을 감추고는 본관을 향해 내달렸다. - P125
흔적을 지워주세요
요즘 대오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은 건달도 이젠 주먹이 아니라 머리를 써야 한다는 말이었다. 주먹을 쓰면 언제든 수사기관에 쫓길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머리를 잘 쓰면 주먹을 사용하지 않고도 용이하게 큰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 P126
이전처럼 유흥업소를 보호해준다는 명목으로 보호비를 받거나 각종 재개발과 철거 혹은 이권 개입 같은 것으로 돈을 버는 것도 쉽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자 측의 증거수집이나 신고로 처벌받는 일이 더 많아진 탓이었다. - P127
처음 조직을 꾸렸던 큰형님이 부암동 주택으로 집을 옮겼다는 소식을 들은 대오는 마침 찾아뵙고 결심을 밝힐 생각이었다. 걸리는게 있다면 오래 조직 생활을 함께해온 이들이었다. - P127
"나도 내 눈에는 쓰레기만 보여서 쓰레기 좀 치워야겠네." 난데없이 할머니가 빗자루를 들더니 대오를 향해 휘적휘적 휘둘렀다. - P129
"어서 전시관에 들어가봐요. 미술관에 왔으면 그림을 봐야지 덩치에 맞지 않게 기껏 비닐봉지한테 놀란 걸로 화풀이야." "아니 근데, 이 할머니가..…………." "아 장난이라니까. 농담도 못 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버럭 하는 할머니의 기백에 움찔한건 대오였다. 요즘 따라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일이 늘어간다고 생각하며 대오는 차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았다. - P130
전시실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대오는 이 미술관에 전시되는 작품이 한 점뿐이라는 걸 알았다. - P130
뭔가에 멱살을 잡혀 끌려가듯 대오가 사연의 방으로 들어간 건 그때였다. 뭐라도 고백하고 싶은 심정으로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대오는 이내 결심한 듯 펜을 들어 뭔가를 써가기 시작했다. - P131
미술관에서 작품을 구매할 수 없다는 말에 대오와 일행은 하는 수 없이 큰형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 P133
"전, 반댑니다. 큰형님." 가만있던 득열이 몸을 앞으로 기울여 큰형님을 보며 말했다. "갑자기 이렇게 조직을 해산하게 되면 생계도 생계지만, 조직 생활을 계속 원하는 애들까지내팽개치라는 얘기지 않습니까?" "득열아, 그 얘기는..." "말이 나와서 얘긴데, 형님한테도 많이 서운합니다. 이런식으로 조직을 내치려고 하시는 게요." - P134
그쯤 되자 큰형님이 나서 둘 사이를 중재하며 말을 돌렸다. "많이 줄어서 열댓 명 정도 되죠. 새로 조직원을 뽑으려고해도 들어오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야죠. (중략). 이래저래시대도 좀 많이 변하는 추세고...... 야, 득열아 우리 막내가 몇 살이지?" "여기 영택이가 우리 막내잖습니까?" - P1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