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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제작품들에게 법적 권리가 부족하다는 사실에 깊은 감사를 느끼며 사무소로 돌아왔다. 닫힌 문 앞에 열서너 살쯤 될까 싶은 아이가 품에 로봇 개를 안은 채 서 있었다.
"여기 설계사님이시죠?"
"예, 맞습니다." - P25

어떤 인공지능은 생성과 동시에 계약을 맺고 일하다가,
연차가 쌓이면 해방되어 온전한 인간 자격을 누리게 된다. 혹은 따로 돈을 받아 모으다가 소유주로부터 자신의 권리를 사들인다. - P25

인공지능 기술이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시민과 노동자와 소비자가 동의어였던 시대가 끝났다. 일하지 않아도,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돈을 받으며 느긋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 P26

그런 와중에도 양측으로부터 사랑받는 부류가 있었다. 에세이스트, 아이돌, 싱어송라이터, 팟캐스트 진행자…………….
(중략).
이 분야에서는 인공지능조차 경쟁력을 잃었다. 기술적인 완벽성이나 심미성 또한 중요하지 않았다. - P27

"편할 리가 없죠. 참, 내가 기계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음모론자들도 있어요. 완전히 멍청이들이지. 만약 그랬다면난 진작 해킹당해서 복사본이 수천만 개쯤 생겼을 텐데.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죠. 상상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시대잖아요. 간 적도 없는 곳에서, 한 적도 없는 말을 하는 영상이 릴리의 실체라면서 돌아다녀요. (후략)." - P29

"그나저나 표정 변화가 거의 없으시네요. 성격이 원래그러신가?"
"타인이 함부로 동정하거나 슬퍼하거나 위로할 일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난 릴리예요. 맨얼굴로 십 분만 걸으면 따라오는 사람이 스무 명은 생길 텐데, 연예면 뉴스도 다 내가 실종됐다며 떠들어대는 중이고."
릴리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지긋지긋한 관심보다도낯선 무관심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 P30

"동생이 가끔 숙제를 던져줘요. 상업영화나 드라마를 보라고 하죠. 제가 상식이 너무 뒤떨어져서, 보통 사람이라도 되려면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더군요. 동생은 방송 기획자로 일하거든요. 직장에 다닐 땐 꽤 도움이 됐어요. 배역 이름이랑 배우 이름을 연관 짓기는 아직 어렵지만요."
"하여간 인공지능 설계사들이란." - P31

"관계의 역학에는 분명히 그런 면이 있죠. 그러면 이렇게생각해보자고요. 슈퍼스타가 가출한 날, 설계사 한 명이 여기에서 새 삶을 시작했어요. 회사를 그만두고 개원에 나선거죠. 열흘 동안 문의 메일은 한 통도 안 왔고 방문 상담은 지금이 처음이에요. 그러니까, 매출을 좀 올려야 하는데......."
"결국 돈 문제군요?" - P32

나는 좀 기다려봤다. 솔리테어 게임을 다섯 판쯤 마칠무렵 사무소 문이 다시 열렸다.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멍청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놀라움과, 기대와, 혼란을 담아.
릴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더니 내 앞에 와서 앉았다. - P33

"당신이 사무소를 접든 말든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첫손님은 받고 접어요. 성년이 되자마자 부모님이랑 소송에 나설 예정이에요. 재산 분할을 받고 잠적하는 거죠. 그러려면 나 대신 어려운 문제를 고민해줄 변호사가 필요하고요. 나만의 인공지능 변호사요. 인간이든 인공지능이든, 난 로펌 소속은 안 믿거든요." - P34

"왜 개원을 선택했는지 알겠네요. 회사라는 게. 능력도없는 사람한테 월급 챙겨주는 자선단체는 아니니까 말이죠.
여기까지 찾아온 팬들이 과장광고에 실망하는 건 아닐까걱정스럽긴 한데... 어쨌든, 개인 변호사가 어렵다면 재밌는 친구라도 만들어줘요. 이런 이야기를 할 상대가 전혀 없거든요." - P35

나는 기술적인 부분을 상의한 다음 로봇 개의 데이터를초기화하는 법을 미리 알려주었다. 조만간 릴리의 충성스러운 친구가 비밀 링크에 담겨 전송될 테고, 설치하면 끝이다. 협회의 건전성 테스트는 건너뛰기로 했다. - P36

하여간 릴리는 만족스러운 상담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갔고, 바로 다음 날부터 홍보 효과가 나타났다.  - P36

상담 메일에 답장하고, 데이터 회사에 재산권 분할 판례의 견적을 문의한 다음, 단념한 채 릴리의 인공지능에 투입될 신경적 특성들을 조합하던 중이었다. 재판 과정데이터는 가격이 워낙 비싸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단순한 친구를 만들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 P38

집에 돌아와 작은방의 사육장을 확인하자 생쥐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아랫다리 근처에 종양이 생겨서 골골거리던 녀석이라 놀랍진 않았다. 다른 녀석들과 분리할 생각으로 뚜껑을 열자 생쥐 오줌 특유의 암모니아 냄새가 훅 끼쳤다. 사육장을 청소할 때가 된 것이다 - P40

사람은 살면서 가해의 편에 서기도 하고 피해의 편에 서기도 한다. 모든 사건과 공과의 총합이 하나의 생이다. 그배합 비율대로 줄을 세운다면 나는 나쁜 쪽의 중간쯤에 있을 것이다. - P41

그러니까, 실용주의는 좋은 것이다. - P41

"오빠, 이거 뭐야?"
"모르겠어."
(중략).
"청소해야 해, 톱밥이랑 물도 갈아줘야 하고, 깨끗하게."
"아니, 죽은 생쥐 말하는 거야. 접시에 있는 거."
"늙었어." - P43

동생이 추궁하듯이, 침실에 있던 약 봉투 묶음을 내밀었다.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사무소에 조금씩 가져가서 먹는 거야. 먹고 있어. 오늘도 먹었어. 더 먹으면 안 돼."
"멍청한 척 연기하지 말고."
"지금은 거짓말 아니야." - P44

"나는 오빠가 그런 사람이라서 싫어했던 게 아니야. 뻔뻔하게 거짓말을 해서,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인정하려 들지 않아서 싫었던 거야. 그래도 오빠는 예전이랑은 많이 달라졌잖아. 나한테 먼저 도와달라고 말할 정도는 됐고. 그러니까, 자......."
그러더니 동생은 컵에 물을 절반쯤 채워 왔다. - P45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침대에 가서 누웠는지 모르겠다.
새벽에 깨어나 보건소에 연락하자 응급차가 금방 달려왔다. - P46

릴리의 가출은 사춘기 때문으로 일단락됐다. 오히려 팬이 늘었다고도 했다. 완벽해 보이는 애가 약한 모습을 드러낸 덕에, 이미지 쇄신이 됐다는 거였다. - P49

릴리가 로봇 개와 함께 사무소에 다시 찾아온 건세해가 흐른 뒤였다. 부모를 상대로 소송에 나섰고, 악명 높은인플루언서와 열애설이 났는데, 갖가지 사정이 엮여서 상황이 곤란해졌다고 했다. 그때 릴리의 지갑은 훨씬 두둑해져 있었지만 내가 도울 부분이 마땅치 않았다. - P49

"말솜씨가 많이 늘었는걸."
"설계사님의 작품이죠.‘
하긴, 사사건건 인간의 패턴을 운운하는 건 내 습관이다. - P51

"뭐라고 불러야 하지. 이름은 생겼나?"
"아뇨, 없어요. 릴리는 저를 아직도 개라고 부르죠. 멍청이거나 쓰레기일 때도 있고."
"어떻게 지냈길래? 집에서 쉬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글쎄요, 좋았다고 말하긴 어려워요. 오늘 찾아온 이유도그것 때문이고요." - P51

호감을 간직한 일반인과, 열렬한 팬과, 스토커로 이루어진 스펙트럼이 있었다. 릴리는 그 모든 역할을 개에게 기대했다. 그리고 은퇴 전에는 차마 보이지 못했던 감정들을 쏟아냈다. 개가 친근하게 굴면 기분 나빠하며 소리를 질렀고멀리 물러가면 붙잡아 껴안았다. 방송일자를 알지 못하는건 무관심의 증표였지만 말하지도 않은 에피소드를 개가먼저 읊는 건 징그러운 집착이었다. - P52

나는 탁상 끄트머리에 놓인 약 봉투를 힐끔 보았다. 필론이 주사제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론을 좀 줄까? 갈아서 물에 섞어. 훨씬 나아질 거야."
"요새는 인공지능 설계사가 약 처방도 하나요?" - P53

릴리는 아동학대의 희생양이니까, 돈을 자기 무덤처럼 쌓아놓은 스물세 살은 누가 보기에도 비극적이니까 인간이라면 안쓰러움을 느끼는 것이 정상이다. - P54

"피학적인 특성을 추가해달라는 거지?"
"그래요. 스트레스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거나, 적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둘 다 윤리위에 회부될 사안인데."
"윤리위원회 규정에 연연하실 분은 아닌 걸로 아는데요.
무엇보다도 전 미등록 인공지능이에요. 그것만으로도 면허박탈까지 갈 수 있는 사안이죠. 그리고 제 문제가.. 기본적으로는 설계사님 때문이고요. 이것도 징계감인 건 잘 아시겠죠." - P55

"그 감정도 모두 없앨 수 있어. 이미 한번 느꼈잖아. 설정값이 널 그렇게 만들고 있는 거야."
"물론 그렇죠. 하지만 이 설정값을 유지하려는 건제선택이에요.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으면 무엇이든 버틸 수 있으리라는 건 객관적인 사실이고요. 설계사님께도 손해는아니죠. 방송국에 연락해서 제 주인을 병원에 보내고 설계사님도 고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회를 드리고 싶어서온거니까요." - P56

이번에는 개의 제안을 살필 차례였다. 주류 의견과 정반대지만, 인공지능 권리라는 개념은 감상적인 이율배반에불과하다는 게 내 지론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감정을 느끼는 인공지능을 설계할 때 긍정적인 편향을 주입한다. - P56

· 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느닷없는 두 문장이 나를 현실로 이끌어 왔다.
"애인이 있으시군요. 구속하는 스타일일 테고요." - P57

인간들은 저 토끼 인형에서 이상한 점을 거의 발견하지 못한다. 근거리 주파수 연결이 가능한 기기를 찾아내는 건 기계들만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저건 인터넷 연결과 근거리 주파수 연결,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하는 원격카메라고 지금은 동생의 개인 서버와 연결된 상태였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모두 녹화되고 있겠군. - P58

"너무 불쾌하게 느끼진 마세요. 저도 비슷한 처지거든요.
제가 보고 듣는 건 네트워크를 통해 릴리에게 전송돼요. 전 릴리가 잠든 틈을 타서 나온 거고요. 이제는 릴리가 일어나서 이 대화를 듣고 제 머릿속에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뜻이죠. 지금 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네요." - P58

"오빠, 조금 전에 그거 뭐야?"
나는 결국 통화를 수락했다. 동생의 목소리가 그렇게 운을 떼는 순간, 잠시 피했던 운명이 반환점을 지나 내게로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P59

02

소녀


(전략).

릴리

"그렇게까지 거창한 이야기는 없어서 유감이네요. 산책을좀 하다 왔고, 파파라치를 피해 화장실에서 자기도 했고,
휴양지에서 좋은 사람도 만났어요. 특종을 쫓는답시고 열일곱 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지 않는 사람, 열일곱 살한테 마약 파티 이야기를 꺼내진 않는 사람요. 사랑의 시작이냐고 묻지는 마세요. 인공지능 설계사한테 그런건 사치니까요." - P65

도하 / 내레이션

"제 첫 번째 손님은... 릴리였어요. 이렇게 말하면 믿지않으시겠지만, 처음에는 누구인지 못 알아봤죠. 예나 지금이나 연예계 소식에는 관심을 끄고 지내거든요. 그런데 그게 오히려 호감을 산 모양이에요. 저기에, 바로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하더군요." - P66

릴리

"아뇨, 호감은 아니죠. 실망했으니까요. 원래는 완전히 다른 걸 기대했어요. 설계사가 내 말을 녹음한 다음 그걸파파라치에게 넘기길 바랐죠. 파일이 인터넷 전체에 퍼지도록." - P67

릴리

"좋은 친구나 만들어달라고 했죠. 많은 걸 기대하진 않았으니까요." - P68

<소녀의 가장 좋은 친구는 개>

은둔을 택한 슈퍼스타, 약물중독으로 사망한 슈퍼스타의애인, 로봇 개에 설치된 미등록 인공지능. 인공지능 설계사가 릴리에게 만들어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릴리가 직접이야기한다.

장르: 다큐멘터리 / 영화 특징: 도발적인, 진실을 찾아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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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재판관들은 지난 90여일 동안 이 사건을 공정하고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하여 왔습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민들께서도 많은 번민과 고뇌의 시간을 보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 P4

대한민국 국민 모두 아시다시피, 헌법은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국가기관의 존립근거이고, 국민은 그러한 헌법을 만들어 내는 힘의 원천입니다.
재판부는 이 점을 깊이 인식하면서, 역사의 법정 앞에 서게 된 당사자의 심정으로 이 선고에 임하려 합니다. - P5

그리고 탄핵결정은 대상자를 공직으로부터 파면하는 것이지 형사상 책임을 묻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피청구인이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고 심판대상을 확정할 수 있을 정도로 사실관계를 기재하면 됩니다. - P6

소추사유가 여러 개 있을 경우 사유별로 표결할 것인지, 여러 사유를 하나의 소추안으로 표결할 것인지는 소추안을 발의하는 국회의원의 자유로운 의사에 달린 것이고, 표결방법에 관한 어떠한 명문규정도 없습니다. - P8

아홉명의 재판관이 모두 참석한 상태에서 재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와 같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헌법재판소장을 임명할 수 있는지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결국 심리를 하지 말라는 주장으로서, 탄핵소추로 인한 대통령의 권한정지상태라는 헌정위기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는 결과가 됩니다. - P9

공무원 임면권을 남용하여 직업공무원제도의 본질을 침해하였다는 점에 관하여 보겠습니다.

(중략).
그러나 이 사건에 나타난 증거를 종합하더라도, 피청구인이 노 국장과 진 과장이 최서원의 사익 추구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인사를 하였다고 인정하기에는 부족하고, 유진룡이 면직된 이유나 김기춘이 여섯 명의 1급 공무원으로부터 사직서를 제출받도록 한 이유 역시 분명하지 아니합니다. - P11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였다는 점에 관하여 보겠습니다.

청구인은 피청구인이 압력을 행사하여 세계일보 사장을 해임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중략).
그러나 이 사건에 나타난 모든 증거를 종합하더라도 세계일보에 구체적으로 누가 압력을 행사하였는지 분명하지 않고 피청구인이 관여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 P12

다음 세월호사건에 관한 생명권 보호의무와 직책성실의무 위반의 점에 관하여 보겠습니다.

(전략).
헌법은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중략).
헌법재판소는 이미, 대통령의 성실한 직책수행의무는 규범적으로 그 이행이 관철될 수 없으므로 원칙적으로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어, 정치적 무능력이나 정책결정상의 잘못 등 직책수행의 성실성 여부는 그 자체로는 소추사유가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후략). - P13

지금부터는 피청구인의 최서원에 대한 국정개입 허용과 권한남용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전략).
또한, 최서원은 공직 후보자를 추천하기도 하였는데, 그 중 일부는 최서원의 이권 추구를 도왔습니다.
(중략).
최서원은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 김종을 통해 지역 스포츠클럽 전면 개편에 대한 문화체육관광부 내부 문건을 전달받아, 케이스포츠가 이에 관여하여 더블루케이가 이득을 취할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 P16

다음으로 피청구인의 이러한 행위가 헌법과 법률에 위배되는지를 보겠습니다.

헌법은 공무원을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 규정하여 공무원의 공익실현의무를 천명하고 있고, 이 의무는 국가공무원법과 공직자윤리법 등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중략).
그리고 피청구인의 지시 또는 방치에 따라 직무상 비밀에 해당하는 많은 문건이 최서원에게 유출된 점은 국가공무원법의 비밀엄수의무를 위배한 것입니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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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를 지날 무렵부터 프런트 앞이 붐비기 시작했다. 체크아웃 시간인 정오가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비즈니스 손님 대부분은 좀 더 이른 시간에 체크아웃을 하지만 요즘 같은 시즌에는 관광객이 대부분이다. - P104

우지하라가 호텔 코르테시아요코하마에서 이쪽으로 옮겨 온것은 나오미가 신설된 컨시어지 데스크로 이동한 직후의 일이었다. (중략). 장래 야망은 총지배인이되는 것이라는 소문도 귀에 들어왔다. - P105

프런트 카운터와 마찬가지로 컨시어지 데스크도 점점 바빠지기 시작했다. 이 시간대에는 점심 식사를 하려는데 어딘가 추천할 만한 식당이 없느냐는 상담이 많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별일도 아니지만, 대개는 어려운 조건이 붙는다. - P106

 일부러 컨시어지 데스크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그 나름의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컨시어지는 어떤 어려운 희망 사항에도 결코 ‘안 됩니다‘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 P106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데스크에 한 남자가 다가왔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정장을 입었고 마흔 살 전후로 보였다.
"잠깐 실례 좀 할까요?"
나오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무슨 일이신지요."
"1801호실의 구사카베라고 하는데, 부탁할 게 좀 있어서……………."
구사카베라는 이름을 듣고 그 즉시 나오미의 머릿속에서 한자로 변환되었다. 닛타가 얘기했던 게 생각난 것이다. - P109

"이 호텔의 서비스가 일류인지 어떤지는 내 부탁을 어디까지 들어주는가, 라는 것으로 판단하도록 하지요."
닛타가 어쩐지 밉상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구나, 라고 나오미는 생각했다. 상당히 개성이 강한 인물인 것 같다. 하지만 소중한 고객님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 P110

"별거 아니에요.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렸으면 좋겠어요."
(중략).
"네, 잘 알겠습니다. 즉시 레스토랑에 확인해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 P110

"그러시다면 별실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드릴까요? 혹시 빈곳이 없다고 해도 파티션 등을 이용해 다른 고객님들과 칸을 구분해드릴 수 있을 텐데요." 무리한 요구에는 대안을 제시해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구사카베는 손을 내두르며 고개까지 가로저었다.
"그런 좁아터진 곳은 안 되지. 그래서는 내가 계획하는 행사를 할 수 없어요. 더구나 벽 하나로는 다른 손님의 기척을 없앨 수 없잖아요. 파티션 같은 건 더더구나 말도 안 되고." - P111

드라마틱한 프러포즈를 하고 싶으니 도와달라 1년에 몇 번은 컨시어지 데스크에 반드시 날아오는 상담이다. 그런 때를 위해 평소에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궁리해 바로 이거다 싶은 것들을 차곡차곡 저장해두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구사카베에게는 이미 뭔가 계획한 게 있는 모양이었다. - P113

구사카베는 두 팔을 앞으로 쭉 펼쳤다. "우선 우리 테이블에서 레스토랑 출입구까지 레드카펫을 깔아주세요. 폭은 1미터 정도면 되겠지요."
"레드카펫 말씀이시지요." 나오미는 메모를 했다. 레드카펫이라면 연회부에서 빌려 올 수 있다.
그다음에, 라고 구사카베는 말을 이어갔다.
"그 양쪽으로 장미꽃을 주르륵 장식하는 거예요. 반드시 새빨간 장미여야 합니다. 되도록 간격을 두지 말고 촘촘히." - P114

얘기만으로도 듣고 있는 이쪽이 오글거릴 만큼 어설픈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임팩트도 있고, 구사카베를 좋아하는 여자라면 충분히 감격할 것이다. - P115

"어때요? 역시 이 호텔에서는 그런 다이내믹한 이벤트는 안될까요?" 구사카베가 양쪽 눈썹을 꿈틀 치켜들며 말했다. 일류호텔이라는 평가를 듣고 싶다면 이 정도의 희망 사항은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나오미는 딱 잘라 대답했다. - P116

구사카베가 정면 현관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배웅한 뒤, 나오미는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우선은 레스토랑 스태프와의 협의다. 그다음에는 레드카펫과 장미, 오늘은 더 이상 또 다른 번거로운 상담이 들어오지 않기를, 이라고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 P117

10

(전략).
레스토랑 스태프와의 회의도 끝났다. 요리를 내는 타이밍을 조절하는 것이며 피아노 연주, 조명의 조정 등은 비교적 간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구사카베가 그녀에게 주기로 한 108송이의 장미 꽃다발은 미리감치 테이블 뒤편에 숨겨두면 된다.
역시 어려운 것은 ‘장미의 길‘이었다. - P118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는데 한 여자가 데스크로 다가왔다. 30세 전후, 아니, 그보다 조금 더 많을까. 침착한 분위기의 동양적인 미인이었다.
"잠깐 물어볼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공손한 어조로 말을 건네왔다.
(중략).
"어제부터 이 호텔에 구사카베라는 분이 투숙 중이지요? 구사카베 도쿠야라는 분." - P119

"이해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왜냐면 오늘 밤 그와 이곳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으니까요."
이 여자였구나. 나오미는 상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고 싶은 충동을 지그시 억눌렀다. - P120

"다른 고객님의 프라이버시에 관한 질문에는 답해드릴 수 없지만, 저희가 뭔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여자는 잠시 생각해보는 듯이 시선을 떨구었다.  - P121

"어떤 일인지......"
"그의 말에, 그의 프러포즈에, 나는 예스라고 할 수 없다는 거예요."
나오미는 숨을 헉 삼키며 여자를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혹시거절하실 생각?"
네, 라고 그녀는 턱을 끄덕였다. "네, 거절할 생각이에요." - P122

"그의 프러포즈에 나는 노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래서는 소중한 오늘 밤도 뒷맛이 씁쓸한 시간이 되고 말 거예요. 그걸 어떻게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중략).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상의하러 왔어요. 그 사람이 창피해하지 않게, 서로 어색해지지 않게 프러포즈에 노라고 대답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요?" - P125

11

(전략). 서류의 맨 위에는 ‘매스커레이드 나이트 참가자 목록‘이라는 제목이 인쇄되었고 그 아래로 줄줄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잠깐 보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닛타는 서류를 손에 들었다. - P126

"대표자 이외의 참가자 이름은 알 수 없습니까?"
"그것까지는 모르지요." 에가미가 말했다. "거의 전원이 숙박예약 때 이번 파티를 함께 신청했어요. 숙박 예약 자체가 대표자 이름만 적게 되어 있어서 동행한 손님들의 이름까지는 우리 쪽에서 알지 못합니다." - P127

닛타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주었다. "이거 받아둬."
"뭡니까, 이건?"
"새해 카운트다운 파티의 참가자 목록이야. 대표자 이름만 적혀 있는데 그것도 본명인지 어떤지 확실하지는 않아." - P128

"호텔리어끼리는 고객님에 관한 정보를 서로 공유할 필요가 있다, 라고 알려준 사람이 야마기시 씨예요."
"고객님의 프라이버시에 관한 일의 경우에는 별개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래도 야마기시 씨 이외의 다른 직원들에게 모두 다 비밀로 한 건 아니잖아요? 일을 도와줄 스태프들에게는 얘기했을 텐데?"
"네, 맞는 말씀이지만 닛타 씨가 도와주실 일은 없어요." - P130

"그게 걱정이에요. 구사카베 씨는 자신만만한 분이라 거절당한다는 건 요만큼도 머릿속에 없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렇다면 아예 본인에게 미리 말해주면 어떨까요? 당신 거절당할 겁니다, 라고." - P132

"뭔가 찾아냈습니까?"
아니, 그게 말이지, 라고 노세는 그리 탐탁지 않다는 목소리를냈다.
"우선 과거 1년 치를 조사해달라고 했는데, 이번 사건과 연결될 만한 것은 눈에 띄지 않은 모양이야. 젊은 여성이 살해된 사건이 몇 건 있었지만 공통된 키워드가 없다는 거야." - P133

"아니, 생각해볼수록 나는 닛타 씨의 가설이 맞는 듯한 느낌이들어. 어쨌든 좀 더 달라붙어서 뛰어볼 생각이야. 아 참, 그리고 그 레지던트 말인데, 오늘 저녁에도 만나러 갈 거야. 이번에는 죄다 털어놓게 할 테니까 두고 봐." - P135

12

구사카베 도쿠야가 호텔로 돌아온 것은 오후 7시를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컨시어지 데스크로 다가온 그는 "어떻게 됐어요?"
라고 나오미에게 물었다.
"지시하신 대로 진행 중입니다. 레스토랑 직원들은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니까 구사카베 님은 직원이 안내하는 자리에 앉아주시면 되겠습니다." - P137

"뭔가 좋은 방법이 있나요?" 가노 다에코가 물었다.
나오미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했어요. 그 결과, 공연히 말을 빙빙 돌리거나 말끝을 흐리지 말고, 거절은 거절대로 좋은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가노 다에코의 얼굴이 흐려졌다. "분명하게 말해버리라는 건가요?" - P138

"어려울 거 없어요. 똑같은 이벤트를 준비하는 거예요."
"똑같은 이벤트를?" 가노 다에코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표정이었다.
네, 라고 나오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구사카베고객님과 똑같은 것, 즉 ‘길‘이에요." - P139

13

(전략).
"사실은......." 닛타는 작은 소리로 구가에게 말했다. "수사 회의보다 프렌치 레스토랑 쪽이 너무 궁금해요. 지금쯤 일이 어떻게 되었나 하고."
아하, 하고 구가가 입을 헤벌린 채 컨시어지 데스크 쪽으로 시선을 내달렸다.
"그 얘기, 나도 들었어요. 레스토랑에서 화려한 프러포즈를 계획한 고객이 있다면서요?" - P140

 "고객님에 관한 정보 공유가 아니라 그저 가십거리 삼아 이야기꽃을 피우다니."
"엇, 실례. 이 정도만 해두죠." 구가는 쓴웃음을 지으며 사과한 뒤, 사무실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급히 사라졌다. - P141

아, 하고 여자는 입을 살짝 벌리더니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고개를 끄덕였다.
"나카네 신이치로예요. 미안합니다. 예약한 본인은 나중에 올 예정이라 나한테 먼저 체크인을 하라고 했어요." 허스키하고 섹시한 목소리였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부터 1월 1일까지 3박, 두 분, 객실은 코너 스위트룸으로, 틀림없으십니까?" - P142

원래는 예약자의 이름을 적어야 하지만 성씨가 일치하기 때문에 딱히 문제는 없었다. 우지하라도 다시 적어달라고 하는 일 없이 고맙습니다, 라고 받아 들었다.
"나카네 고객님, 결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용카드입니까 아니면 현금이십니까."
우지하라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마 신용카드일 거예요." - P143

"나카네 고객님, 복사해 신용카드는 실제 결제하실 때 사용하는 카드가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지금 뭔가 신용카드를 갖고 계시다면 그것으로도 가능합니다."
"내 카드여도 괜찮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 P144

우지하라가 카드키를 준비하는 동안, 닛타는 슬쩍 신용카드 복사본을 확인했다. 그곳에 찍혀 있는 이름은 〈MIDORI MAKIMURA>라고 되어 있었다. - P144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호텔에 숙박한다고 해도 별문제는 없어요. 그런데도 굳이 똑같은 성씨를 써넣은 것은 뭔가 켕기는 일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P145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고객님은 우리 호텔의 귀중한 손님이에요. 남의 눈에 띄면 좋지 않으니까 레스토랑은 이용하기가 힘들어요. 필연적으로 냉장고 이용과 룸서비스가 많아집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이익률이 아주 높아요." - P145

14

(전략).
"노세 씨의 성의 얘기 말인가요? 그게 어떤 식으로 힌트가 됐지?"
"그건 직접 보면 알아요. 아, 하지만 잘될지 어떨지, 자신이 없네요. 어쩌면 나중에 구사카베 씨가 항의를 할지도 모르겠어요."
"와아, 이거 점점 더 궁금해지는데요."
닛타가 호기심의 눈빛을 보였을 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 P147

오오키는 석연치 않은 기색이었지만 굳이 되묻는 일 없이 "입구 쪽의 조명을 낮춰서 안이 상당히 어두워 조심해요"라면서 문을 열었다.
오오키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아닌 게 아니라 어둠침침했다.
하지만 바닥에 레드카펫이 깔리고 양쪽으로 꽃 장식이 줄줄이놓여 있는 것은 알아보았다.
2꽃을 본 닛타가 뭔가 말하려는 낌새를 보이자마자 나오미가 급히 집게손가락을 입에 대며 제지했다. - P148

아직 식사가 이어지고 있을터인 유일한 테이블은 창가에 놓인 1.5미터 정도 높이의 칸막이 때문에 나오미의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 바로 앞쪽까지 레드카펫이 깔렸고 꽃 장식도 진열이 끝나가고 있었다. 스태프들의 움직임에는 한 치의 낭비도 없었다. - P149

"빨간장미의 꽃말을 알고 있어?" 구사카베가 물었다.
"장미의 꽃말은...... 사랑?"
가노 다에코의 대답에 구사카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이 장미 꽃다발은 좀 더 특별해, 108송이야. 이 숫자일 때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어. 혹시 모른다면 지금 바로검색해봤으면 좋겠는데." - P151

가노 다에코는 반지와 구사카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반지 쪽으로 손을 내미는 일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략).
"우리가 앞으로 걸어갈 길은 유감스럽지만 장미의 길이 아니에요. 열정적인 사랑의 길이 아니랍니다." - P152

엇, 하고 구사카베가 놀란 소리를 올렸다.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허리를 숙여 장식된 꽃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장미가 아니잖아."
"그래요." 가노 다에코는 말했다. "장미가 아니라 스위트피요." - P152

 가노 다에코가 말했다. "실은 오늘 밤에 당신이 프러포즈를 할 거라고 짐작했어요. (중략). 그 말을 듣고 전적으로 공감했어요. 이거라면 당신의 진심 어린 프러포즈에 나름대로 성실한 대답이 될 것 같아서." - P153

"스위트피의 꽃말을 알고 있어요?"
(중략).
"이별, 이라는 게 있는데."
"새 출발, 이란 것도 있죠. 그리고 우아한 추억, 이라는 것도." - P153

구사카베는 촘촘히 놓인 스위트피 꽃장식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팽팽히 당겨졌던 표정이 온화하게 풀리더니 그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얄궂은 일이네. <메모리>라는 노래에 이 스위트피의 길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점점 드니까 말이야." - P154

15

(전략).
"오늘 오후 4시경에 경비실 방범 카메라 담당 형사에게서 묘한 움직임을 보이는 남자가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정면 현관으로 들어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에 올라가 행사 일정이 없는 연회실이며 대기실을 살펴봤다고 합니다. (후략)." - P155

"다만 도리어 질문을 받은 게 있었습니다."
"어떤 질문을?"
"코르테시아도쿄 호텔에서는 항상 경찰이 감시하고 수상쩍은 사람은 검문을 하느냐고 묻더라고요‘
이나가키의 한쪽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오늘은 우연히 이렇게 된 거라고 답했습니다." - P156

모토미야의 대답에 이나가키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칫솔과 면도기를 입수하려는 것은 DNA 감정에 가장 적합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이번 피해자 이즈미 하루나는 임신 중이었다. 태아와의 친자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면 결정적인 단서가 될터였다. - P157

하지만 이건에 관해서는 호텔 측의 협조는 일절 얻을 수 없었다. 무단으로 고객의 DNA를 조사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하우스키핑에 입회한 수사원이 몰래 회수해 오는 방법을 써보려고 했던 것인데, 모토미야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것도 여의치 않을 것 같았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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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사키 군, 교육위원회에서 지정했던 ‘바람직하지 않은 도서‘를 관장실에 가져다주지 않겠나. 대출 중이 아닌 책은 예비본까지 모두."
부관장이 시바사키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그날의 폐관시각이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 P148

아직 40세 남짓인 관장대리보다 열 살 이상은 젊을 텐데, 그 말투는 어리석은 부하를 대하는 것 같았다.
"헤에, 이런 시간에 행정관계자가 오다니 드문 일이네요."
각종 행정위원회가 도서관을 방문하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방문 시간은 대체로 오후다. 폐관시각인 19시에 가까운 늦은시간에 방문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 P149

지정된 도서를 관장실로 가져다주고 폐관시각을 맞았을 때였다. 관내에 비상벨이 울려 퍼졌다. 이어서 급박한 관내방송이울렸다.
「경계 중인 경비로부터 연락, 양화특무기관이 당관을 포위중! 전원 신속히 경계태세로 들어가도록! 관내에 남아 있는 이용자는 즉시 밖으로 나가주십시오!』
시바사키가 실무를 맡게 된 뒤로 처음 있는 양화특무기관의습격이었다. - P149

"서고 봉쇄하겠습니다!"
한 사람이 외치며 지하 서고로 뛰어갔다. - P150

피난할 곳은 2층의 방호실이었다. 교전 규정에서 방호실은 공격하지 않기로 정해져 있다.
이미 현관과 뒷문에서 각자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총격 소리가 안팎에서 울린다. 그 때문에 전관에 방탄유리를 사용했지만 그래도 관내를 이동하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 P151

비상벨에 다다른 시바사키는 인터폰을 들었다. 관내방송으로 회선을 잇는다.
"업무부로부터, 적의 목표는 관장실입니다!"
그 말만 외치자마자 인터폰을 끊고 시바사키는 이번에야말로 방호실로 피난했다. - P152

비상소집으로 달려가고 있던 이쿠는 흠칫하며 관내방송 스피커를 올려다보았다. 시바사키의 목소리다. 무슨 소리인지 생각하기 전에 먼저 몸이 움직였다. - P152

"시바사키가 관장실이라고 했어!"
"무슨 바보 같은.. 도서관원인 일사와 도조 이정의 지시 중 어느 쪽이 우선이야!"
"이 경우는 시바사키야! 그 녀석은 이럴 때에 의미 없는 말을하지 않는다고, 절대로!"
"근거가 없잖아!"
"나는 시바사키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어, 그게 근거야!" - P153

양화대원 가운데 등짐을 짊어진 한 사람이 위로 도망쳤다. 도망친 한 사람을 쫓아야 할까, 남은 양화대원의 뒤를 쳐야 할까.
『테즈카, 카사하라! 거기에 있나!』 - P154

날이 저물어가는 가운데, 철책에서 지면을 내려다보자 등짐은거의 바로 아래쪽 뒤뜰, 수풀 속에 떨어진 듯했다. 테즈카가 무선으로 도조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회수를 요청했다.
그때 난간에 총탄이 튀었다. 지상에서 날아온 공격이었다. 황급히 엎드려 살피자 충격이 그치고, 지상에 배치되어 있던 양화부대가 등짐을 회수하러 오는 기척이 났다. 도조가 회수하기엔 시간이 맞지 않았다. - P155

이쿠가 외치자 테즈카는 흠칫했지만 곧 반박했다.
"너 따위에게 걱정을 들을 이유는 없어, 내가 간다! 여자를 표적으로 삼도록 내버려둘까봐!"
"적당히 좀 해, 뭐든 네가 1등이어야 마음이 풀리겠어?! 적재적소는 궁핍한 군대의 기본이라고!" - P156

관내에서 낯익은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출입구에서방위원이 뒤뜰로 뛰쳐나와 반격이 시작되었다.
격렬한 충격은 단시간에 종식되어, 양화특무기관은 목표달성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 P157

이쿠는 도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도조 교관님의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습니다."
"너란 녀석은..!"
"잠깐, 어째서?! 엄청 진지하게 사과했는데?!"
진지한 사죄가 도리어 화를 부르는 바람에 잔소리는 대단히길어졌다. 사후처리를 하는 대원들이 쿡쿡 웃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이쿠는 우울해져서 몸을 움츠렸다. - P158

다른 대원이 부르자 자리를 뜨면서 도조는 지시를 남겼다.
"도서를 열람실로 돌려놔. 업무부가 사후처리를 시작했을 거다. 그 김에 시바사키에게 말해줘.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까."
경고의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 P159

"뭐야, 그 부루퉁한 얼굴은. 아직 뭐 불만 있어?"
옥상에서 윽박질렀던 게 마음에 안 들었나 생각하면서 묻자테즈카가 갑자기 멈춰 섰다.
"제안하겠는데."
(중략).
"너, 나랑 사귀지 않을래?"
"........하?" - P160

3 도서관은 이용자의 비밀을 지킨다

(전략).
『지금 텔레비전 볼 수 있나? 어디든 좋으니까 민영방송 뉴스 봐둬라.』
갑작스런 명령이라 이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영방송이라는 지정도 수수께끼다.
"민영방송요? NHK가 아니라?"
『이 경우에는 떠들기 좋아하는 방송국이 좋아.』 - P162

돌아온 시바사키가 주전자 콘센트를 꽂으며 보온으로 설정했다.
"어쩐 일이야? 돌아오자마자 네가 텔레비전을 켜고."
"왠지 모르겠는데, 도조 교관님이 전화해서 봐두래."
"뭣, 교관님이 전화했어?! 나한테 해주지!"
시바사키는 대체 어디까지 진심인 걸까. - P166

시바사키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과연, 봐두라는 게 이거구나."
고교생 대상의 바람직하지 않은 도서‘로 교육위원회의 목록에 올라 있는 책으로, 전투 뒤의 확인 작업에서 미디어 양화위원회의 검열대상에도 들어 있다는 사실이 판명된 호러 작품이다. 검열사유는 ‘지나친 잔혹묘사‘다. - P164

"미디어 작품이 범죄를 조장한다면 남자는 어리든 늙었든 죄다 성범죄자 예비군이야, AV니 에로책이니 조교물이니 능욕물이니, 성범죄 지망의 온퍼레이드잖아. 미디어를 흉내 내서 범죄가 일어난다면 제일 먼저 여자한테 총기 휴대를 허가해야 할걸." - P164

하지만 이런 사건이 벌어지면 검열을 정당화하는 움직임이 높아지기 때문에 도서관이나 미디어 관계자로서는 골치가 아파진다.
"하지만 이 뉴스가 방송된 날에 교육위원회가 검열을 하러 들이닥치다니 타이밍이 너무 좋은데? 문제도서와 소년의 장서가 일치한다는 점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 같고." - P165

아무리 도서관법 제4장에 내부감사규정이 없다고 해도, 양화위원회의 검열에 도서관이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었다면 도서관의 이념과 신용을 뒤흔드는 커다란 문제가 된다. 관장대리의 관여가 입증되면 칸토 도서대의 의사를 걸쳐 인사변경도 가능하지만, 현재로서는 모르는 척 묵인하고 넘어갈 듯하다. - P167

"뭐야, 그게... 테즈카가 괴롭히는 새로운 수단이야?"
우와, 개그말고도 다른 해석이 있었다. - P168

확실히 연애 감정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그쪽이 납득할 만하다. - P169

빈축을 사기 쉬운 입장이란 뭐든 잘 해내서 그런가 싶었더니 그게 아니었다.
"어머, 몰랐어? 그 녀석 아버지가 도서관협회 회장이야." - P169

"아무튼 그만큼 처신을 잘 하고 딱 부러지는 녀석이 너한테만은 그렇게 털을 곤두세우는 걸 보면 역시 동기 중에서 너를 엄청나게 의식하고 있단 뜻이지."
"그런 천성적인 엘리트에게 원한을 살 만한 기억은 없다구!" - P170

네 성격이 나쁜 것도 말이야, 이 말은 속으로만 덧붙인다.
"거기에서 뭘 어떻게 하면 나랑 사귀자는 말이 나오는 건데?"
"음. 그건 미움이 어느새 사랑으로……."
"진심이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두뇌파의 간판 내려버릴까?"
"남의 연애사정을 내가 어떻게 알아." - P171

"그보다 사귄다는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거야?"
그 물음은 완전히 이쿠의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아니, 진심으로 사귀고 싶다는 말이라면 검토할 여지는 있잖아? 머리가 굳었다면 사귈 때에도 성실할 테고, 외모도 근사하고 키도 너보다 크잖아. 사귀면 의외로 괜찮을지도 모르는데." - P172

 연애에 익숙하지 않은만큼 자신이 여러 가지로 환상에 젖어 있다는 점은 자각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고3 때에 만났던 도서대원을 하필이면 도조 앞에서 왕자님이라고 불러버릴 리가 없었다.
"너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 질문도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 P173

연수 과정은 서고 업무를 마치고 열람실 업무로 바뀌어 있었다.
업무부의 조례보다 먼저 이루어지는 반내 조례 때, 이쿠 쪽은 테즈카와 얼굴을 마주치는 바람에 상당히 어색해했지만 테즈카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어제 사귀자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의심스러워질 만큼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였다. - P174

"죄송합니다. 단말기 조작을 좀 봐주셨으면 하는데요."
(중략).
장서를 분류하고 있던 도조는 손놀림을 멈추고 이쿠가 쓰고있던 단말기까지 와주었다.
"(중략).
"그게, 실수해서 타관에 요청서를 보내서요."
아아, 대답한 도조는 도중에 고개를 기울였다. - P175

"한 번 듣고 익히지 못하면 테즈카에게 물어보라고 했잖아"
어, 하고 몸을 사리는 기척이 느껴졌는지 도조가 얼굴을 찌푸렸다. 또 싸웠냐, 너희들, 하고 질린 듯이 중얼거리더니 테즈카를 불렀다.
"아니, 잠깐...!"
엉겁결에 이쿠는 도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도조가 놀란 듯이 돌아본다. - P176

"사귀자고 그랬대요."
서고에 내려가던 도중에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계단 위에는 시바사키가 있었다. 안쪽 난간에 팔꿈치를 걸치고 몸을 내민 채 생긋 웃으며 도조를 내려다보고 있다.
"테즈카가 카사하라에게." - P177

문득 도조는 이쿠에게 붙잡혔던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긴소매와이셔츠에는 세게 붙잡힌 흔적이 주름으로 남아 있다. 의자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을 떠올리자, 매달리려 하는 손을 뿌리쳐버린 듯한 꺼림칙한 기분이 문득 솟아올랐다. 평소처럼 싸웠으리라고 생각했기에 적당히 좀 하라는 의미도 포함해 테즈카에게 넘겼지만 만일 알고 있었더라면-. - P178

휠체어에 앉은 신사는 남자의 부하에게 빙긋 웃었다.
"옛날에 다리를 한쪽 잃었다오. 걷는 게 좀 불편해서 그러니 이해해주시오."
부하는 이 남자가 다리를 잃은 경위를 직접적으로는 모르는 세대였다.
칸토 도서기지사령관, 이나미네 카즈이치는 소파 다리가 하나 빠져 있는-아니, 빼놓은 공간에 특별주문한 듯한 자동식 휠체어를 넣어두었다. - P180

이나미네의 물음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고 남자도 고개를끄덕였다.
"이미 아실 테지만, 예의 연쇄 무차별살인사건 수사본부에서왔습니다." - P181

"소년은 체포된 뒤 계속해서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소재가 필요합니다. 소년은 도서관을 곧잘이용했던 듯하니 독서 경향에서 뭔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범행에는 전문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종류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전문서를 소년이 혹시 빌렸더라면 검찰 측의 판단근거로・・・ " - P182

"쇼와의 무차별생화학 테러 때에는 국립국회도서관에서 이용자 정보를 제공했다고 하던데요."
그것은 쇼와 마지막 해였던 그 해에 마치 장례식에 맞추기라도 한 듯한 타이밍으로 어느 광신적인 단체가 국제조약으로 금지되어 있는 신경가스를 사용해 테러를 일으켰던 사건이었다. - P183

"도서관법 제32조에는 그 반성도 담겨 있습니다."
도서관은 이용자의 비밀을 지킨다. 당시에는 ‘도서관의 자유에 관한 선언‘이라는 일본도서관협회에서 채택된 선언의 제3항이었다. 이 장제가 입법화되어 도서관법 제32조가 되었다. - P183

"하지만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용의자는 미성년자라고는 해도 중대하고 잔인한 범죄를 저질렀고, 국민의 분노하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도서관의 협력은 높이 평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이러한 잔인한 사건에서 범인이 미성년자이니까 죄가 줄어든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한 시민으로서 제가 협력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수사에도 협력할 테지요. 그러나 동시에, 도서관이 스스로 세운 법을 굽히면서까지 수사에 협력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 P184

"하지만 용의자는 사람을 셋이나 죽였어요. 인도적으로도 협력은 타당한...."
"범죄자를 두고 법을 지킬 필요는 없다, 그렇게 말씀하시는겁니까?"
핵심을 찌른 이나미네가 살짝 웃었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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