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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그러면 이번 질문은 대답하지 않아도 돼. 백해나를 좋아했니? 릴리만큼은 아니더라도, 확실히 결론 내릴 수 없더라도… 속으로만 생각해봐."

(개, 말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신경 관계망의 더 넓은 부분이 반응하는데, 두 질문에서 공통으로 보였던 패턴이 다시 나타난다. 여기에는 부연 설명이 없지만 시청자는 그 의미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도하는 프로그램을 조작해 초기화 화면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잘못 설치된 프로그램을 지우듯이, 아무 망설임도 없이 초기화 명령을 내린 다음 정면을 바라본다.) - P165

도하

"인공지능 설계가 인간의 오만인지 아닌지는, 그리고 인공지능이 설계되는 방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주제로 떠드는 사람은 아주 많고, 여러분에게도제각기 의견이 있을 테니까요. 다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싶습니다 인간이 완전히 설계되거나 수정될 수 없다는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삶으로부터 결핍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건, 한편으로는 타인의 해결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건 사실 고통스러운한계가 아닐까요?"

(초기화 게이지가 100퍼센트에 달하자 알림창이 뜬다. 도하는 확인 버튼을 누르고, 프로그램을 종료한 뒤, 워크스테이션을 짐리해 협회 가방에 넣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카메라를 향해 다가온다. - P167

"미인가 인공지능이 걱정만큼 많진 않을 거예요. 쉬운작업이 아니거든요. 설계를 마친 신경 관계망을 범용 칩셋에서 실행 가능한 형태로 만들려면 건전성 검사를 포함한포팅 과정을 거쳐야 해요. (후략)." - P168

"우회하는 방법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박사가 단호하게 말허리를 잘랐다.
"그런가요? 보안 취약점을 미리 말해줘야 협회도 빨리대처할 텐데요." - P169

"면허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기대하지는 않으려고요. 그래도 어쨌든, 면허가 박탈당하더라도 수많은 사람 앞에서 떠드는 값으로는 충분하다고봐요. 흔한 기회가 아니니까요." - P170

"그래요, 편집 방향을 스스로 정할 기회는 흔치 않죠. 문제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늘어놓는 것과, 마음에 드는 반응이 돌아오는 건 완전히 별개라는 거죠. 다큐멘터리 반응이 많이 갈릴 거예요. 사람들이 누굴 제일 많이 욕하려나. 아무래도 나일 것 같은데. 탓할 상대가 하나쯤은 필요한데, 죽은 사람을 들먹이기엔 미안하니까." - P170

"때마침 우리 개는 기억도 날아갔으니까,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고요. 내가 위험한 약을 구한 다음 가루로 갈아서백해나가 술을 마실 때 몰래 섞었다고, 처음부터 죽을 줄알고 있었다고, 백해나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것처럼 개를 들고나온 게 그 증거라고, 설계사도 공범이고, 개도 공범이고, 그래서 아예 초기화해버린 거라고, 그런데 백해나는 평소에도 그렇게 살았으니까 날 의심할 수는 없을 거라고, 신나서 떠들 사람이 한 명쯤 있겠죠." - P171

03

개와 소녀


쿠키 영상 촬영이 끝나자 릴리는 그 대목을 편집하지 말라는 언질을 남기고 떠났다. (후략). 자극적인 내용이 들어갈수록 쿠키 영상의 결제율이 올라갈 테니 배급사에는 기쁜 제안이었다. - P175

"거짓말이지. 릴리도 농담이라고 했잖아."
무엇보다도 필론 독살이 그토록 쉬운 일이었더라면 나는 설계사 면허를 따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다. 어지간히 많이 먹은 게 아니라면 중간에 깨어나서 속에 든 걸 모두 게워내게 되고, 단번에 혼수상태에 빠질 만한 양은 들키지 않고 술에 섞을 수가 없다. - P177

"그 사람, 저녁에 만났다면서? 낮에 워크스테이션으로뭐 했어?"
"무슨 소리야?"
"가윤 씨. 그 사람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들고 나갔다고했잖아. 6시 넘어서 만났으면, 그전까지는 어디 있었던 거야?"
(중략).
"누가 그랬는데?"
"아까, 박사가." - P178

이제 나는 상황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이미지들 사이를 부유하고 있다. 중력을 무시하듯 솟아 올라가는 마천루들, 각각의 마천루 난간 위에 줄지어 선 인간들, 인간들이 차례차례 떨어지고 16차 선로를 질주하던 자동차들의 프레임은 예리한 날이 되어 몸을 토막 내고 보닛이 우그러지고 전면부 카메라가 피로 물든 자동차들이 서로 충돌한다. - P179

이 노력과 갈망에 액면 이상의 가치가 있길 바란다. 최소한 죽음보다 현명한 선택이었으면 한다. 그런데도 이따금 실수를 저지른다. 이를 너무 악물어서 턱이 아프고 눈앞이 깜빡거리는데 지금 당장 필요했던 질문이 정신의 어스레한 부분을 꿰뚫고 들어온다.
"지금 이게 재밌지? 재밌어서 미칠 것 같지?" - P181

정신은 물리적인 것에 얽매여 있다. 어긋난 뇌에는 훌륭한 영혼이 깃들지 못하며 금속의 마음을 좌우하는 것은 칩셋의 성능이자 신경 관계망의 설계다. 그것이 내가 평생으로부터 얻은 교훈이다. 다양함에 우열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설계상의 오류가 사소하므로 그러는 것이다. - P180

나는 아마도 웃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확실히 웃고 있다.
나는 잇새로 질질 흐르는 웃음을 그러모은다. 아니라고, 사무소 고객을 만났는데 밝히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 P181

변명하고 싶지 않으므로 나는 솔직히 받아들인다. 긴정적 끝에 동생도 솔직해지기를 내가 그 새벽에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제야 겨우 고개를 돌려 동생을 마주 보자 거기에 두 눈이 있다. 고양이가 죽은 날처럼 아무런 기대가 없이 어두운 눈, 동생이 내게 내리라고 말한다. (중략). 여기까지 택시를 부르는 비용이 얼마지? 사무소까지 가는 비용은? 그나저나 아직은 기회가 남아 있다.
"내리라니까." - P182

. 하지만 나는 릴리에게 어떤 약이든 준 적이 없고 백해나를 죽인 것은 백해나 자신이니까, 존재의 증거는 댈 수 있어도 부재의 증거는 댈 수 없으니까 길게 덧붙일 변명도 없다.  - P183

코앞에 있는 문이 들썩거리다가 멈춘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 조수석 방향으로부터 돌아 나온 동생이 망연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살덩어리를 뱉으며 정말로 아니라고 중얼거리고(다행히 나는 충분히 불쌍한 처지기 때문에 연기할 필요가 없다) 동생은 내가 바보라고 말한다(그런지도 모르겠다). - P185

내 입이 다시 한 차례, 고해하듯 피를 쏟아내고 동생의흰 손마저 피로 엉망이다 - P185

백해나의 죽음에 대해서라면 나도 박사도 릴리도 개도조금씩 거짓말을 했다.
동생이 알고 있는 것 외에도 세 차례의 만남이 있었다. - P186

하나, 3년 전의 초봄, 스무 살의 릴리는 첫 만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내 사무소로 걸어 들어왔다. - P186

"오랜만이에요. 백해나한테 감금당한 줄 알았는데요."
"뉴스는 보고 살았군요?"
"아뇨, 그런데 카페에 갔더니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역시나. 그나저나 3년 만에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거예요?" - P187

이건 집단상담에 익숙한 상담사나 법무법인을 찾아가야할 문제였고, 릴리에게는 충분한 수임료가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개가 미인가 인공지능인 덕분에 출로가 틀어막힌 상태였다. - P188

"음. 어차피 복사본을 만드는 건 쉽지 않아요.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죠. 복사본을 만들 때도 등록을 거치는데, 그쪽 보안 취약점이 최근에 막혔거든요. 초기 파일은 남아 있지만 지금의 개와는 차이가 있을 테고요. 그거라도 보내줄까요?"
릴리는 얼어붙은 듯 나를 바라보았고, 개와 시선을 마주쳤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안 돼요." - P188

"고급스러운 아파트든 단독주택이든 간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라는 이야기죠. 개를 데리고 무작정 도망쳐 나오더라도 갈 곳은 있어야 하니까요. 떨어져 지내다 보면 감정의 골이 메워질 수도 있고요."
"그런 다음에는요?"
"다음은 나중에 가서 생각해볼 일이죠. 지금은 뭐랄까.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 같아요." - P189

"혹시 말만 그렇게 해두고 사본을 만들려는 건 아니겠죠?
만약 그렇다면 ・・・ 생각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생각을 하면 막을 방법은 있고?"
나는 일부러 농담을 던진 다음 개의 표정 변화를 즐겼다.
인간형 몸체에 설치되었거나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복제본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지금의 개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 P190

"이것부터 묻자. 백해나를 좋아해볼 마음은 없어?"
"릴리를 그렇게 대하는 사람은 싫어요. 악의가 있든 없든, 백해나가 외롭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그 애가 이 소리를 들으면 슬퍼할 텐데. 협박 때문에 시작된 관계라 해도, 너희한테는 은인이고 말이야." - P191

백해나는 그해 여름이 끝나기 전에 죽었다. 약물중독이었다. 나는 그게 잘못된 생활 습관의 종착지인지, 아니면개의 태도와 연관이 있었을지 의문을 품었지만 릴리가 다시 사무소에 찾아오는 일은 없었으므로 금방 잊어버렸다. - P192

릴리는 개는 물론이고 박사와도 상의를 마친 상태였다.
잠적을 했을지라도 인맥이 아예 끊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개와 릴리는 다큐멘터리에 나가 죽음의 전말을 밝힐 예정이었고 제작 지원과 배급은 박사의 몫이었다. - P193

전개를 설명하는 릴리는 무언가를 되돌려놓으려는 것처럼 보였고 무언가를 앙갚음하려는 듯도 했다.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는 동안 흘러간 대사건들을 곱씹었다. - P194

출연을 결정하는 데에는 긴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내가 요구할 만한 부분도 하나 있었다. 동생이 방송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고, 그 애의 커리어에 선물을 안겨주고 싶다고 말하자 박사와 릴리는 기꺼이 승낙했다. - P195

사무소에서 다큐멘터리의 도입부에 들어갈 장면을 찍은다음 동생의 차를 타고 바닷가를 떠났다. 당분간 동생의 집에 머무르며 스튜디오로 출퇴근하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협회 수리소에 들른 것도 기억 추출인으로서의 역할 때문이었다. - P195

대기실에서 5시간을 기다려서 장비를 돌려받은 다음 동생에게 이제 들어가겠다며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동생의 답장과 동시에 릴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 P196

그리고 솔직히 이 시간에 이런 식으로 통보를 내리는 건달가운 상황이 아니다. 전직 슈퍼스타와 대기업 회장님이라 남을 부려 먹는 일이 익숙한 건지. 나는 살짝 으르렁댔고 은근한 협박도 섞었다. - P198

세 번째 만남. 시영과의 만남과 가윤과의 약속 사이에놓인 빈 시간, 나는 경제특구 외곽의 무인공장에 불려 나와있었다. 도심에서 그리 멀지는 않지만 오가는 사람이 거의없는 곳이었고, 근무자라고는 방범용 산업기계뿐이었다. 건물 전체가 박사의 통제를 받고 있는지 경로에 맞추어 문이 스스로 열렸다. - P199

"그러니까, 노이즈를 넣어야 할 대목이・・・ 어떤 내용이죠?"
"직접 봐요."
릴리는 그 말을 툭 던진 다음 일어나서 접견실 바깥으로향했다. 자신은 결코 보고 싶지 않다는 투였다. 박사가 직접 기억을 지울 수 있을 텐데도 구태여 나를 여기까지 부른 것은 기억의 내용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조금 더 뚜렷해졌다. - P200

"백해나가 그때까지 한 소리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었어요. 저는 화를 내지도 않았고 욕을 퍼붓지도 않았어요. 사소한 이야기였어요. 백해나가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 알지만, 설명도 할 수 있지만, 말 몇 마디 들었다고 죽는 건 수긍이 안 가요. 릴리가 무서워하는 것도요. 가끔은 그날 일때문에 마음이 아프지만, 그건 릴리가 저를 꺼리기 때문이지 백해나한테 미안한 감정을 느껴서는 아니에요. 후회한적 없어요." - P201

몸이 떨리고 있었다. 눈물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도같았다. 나는 개의 등줄기에 손을 얹은 채 내가 모르는 세상 어딘가에는 플라스틱과 금속과 단백질이 자연스레 뒤섞이고 화학물질과 전류가 하나 되어 흐르는 과학 법칙이 있으리라고, 그러니까 개와 나의 영혼이 이 순간에 공명하고 있다는 것도 진실일 거라고 믿어보았다. - P203



"믿고 싶은 걸 믿으려 하는군요. 전 이제 처음으로 거짓말을 멈춘 건데. 물론 당신이 저한테 의지했던 건 알고있어요. 알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거짓말을 한 거고요."
(비슷한 대화가 몇 차례 더 오간다. 길고 고통스러운 침묵.) - P206

백해나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 P206



"당신은 소리 지르고 화내고 두려워하는 것 외에는 모르고 살아갈 사람이죠."

(백해나, 개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그만 내던진다. 시야가 뒤흔들리다가 기울어진 채 정지하고, 곧바로 올바른 위치와 각도를 되찾는다. 개는 똑바로 선 채 백해나를 올려다본다. 여전히 단조롭고 친절한 목소리.)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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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은 도덕과 법이 작동하는 방식을 혼동한다. 옳고 그름을 가르는 기준이, 타인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명백한 규칙들로 이루어진 체크리스트라고 여기는 것이다. - P115

 타인을 이용해서는 안 되고, 서커스 무대에 장애인을 내보내서 구경거리로 만드는 건 역겨운 일인데, 공짜 상담을 미끼로 정서불안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수억 명의 안방에 던져주는 건 왜 용인되는 걸까? - P116

어쨌거나 도덕적 직관은 가끔 규범과 충돌한다. 그리고 괴리에 엄밀한 원칙을 들이대면서 남들의 기분을 해치는사람은 친구를 잃어버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명확한 체계 속에서 살아간다고 믿으며 상대가 자신과 같은태도를 보이길 기대한다. - P116

도하

"달리 말하면, 이런 난제를 해결하는 능력이야말로 설계사 업무의 핵심입니다. 인공지능에게 올바른 행동과 적절한 행동의 차이를 알려주고, 상황에 어울리는 감정을불어넣죠. 그 감정이 다시 행동 원리를 구성하고요. 이점을 깊이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게 되는 상황에 대한 공포를 예로 들겠습니다. 아끼는 사람이 죽거나, 나 자신이 죽거나 하는 경우 말이에요." - P120

큰 틀이 주어졌을 뿐이지 각본이 확정된 장면은 아니었다. 적당히 말하면 알아서 편집한다기에 평소 생각을 즉흥적으로 떠들어댔을 뿐이다. - P124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전, 박사 때문에 언짢은 일을겪긴 했지만 면전에서 따질 마음은 없었다. 지금은 점수를따놓으면 윤리위원회에 회부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더 컸다.  - P124

"도하 씨, 반갑습니다. 인터뷰룸 밖에서 인사드리는 건오랜만이군요. 저번엔 실례했어요."
박사가 익숙한 태도로 악수를 건넸다. 나는 손을 맞잡고가죽 장갑 아래의 기계 뼈대를 느꼈다.
"실례라뇨, 당연한 일을 한 거죠. 여하간 반갑습니다."
"촬영분은 잘 봤어요. 꽤 떠들썩해질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협회에서 좋아하지는 않을 텐데."
"미인가 인공지능만으로도 이미 문제가 크죠." - P125

"윤리위원회에 불려 나갈 준비는 하고 계십니까?"
"어지간하면 면허 박탈 처분이겠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시는군요. 면허가 아쉽진 않으신가요?" - P126

"나는 겸양과 거절을 구분하지 않는 편입니다. 괜찮겠어요?" - P128

"청문회에 나가면 정치인들은 건전성 검사를 요구합니다. 내가 충분히 도덕적이며 순종적이라는 증거를 가져오라는 겁니다. 인간 기업가들은 절대 듣지 않을 소리죠. 게다가 나는 내부적으로도 충분한 체계를 갖춰놓은 상태예요. 하나의 결정에 네 종류의 윤리 판단기가 동시에 작용하고, 그 판단기 각각은 서로에 의해 감시받고 있습니다. 이구조는 협회의 검증을 거쳐서 청문회 자료로 제출됐고요. 그런데도 다들 의심을 거두지 않습니다." - P129

"그래서 나는 설계사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합니다. 대칭적이죠. 나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기계였고, 당신들은 기계를 만드는 인간이니까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도움이 되는 관점을 얻어가게 됩니다."
"제가 박사님께 도움이 될지 모르겠는데요." - P130

"인간의 마음은 사후적으로 만들어진다던데요. 일단 중동적으로 저질러놓은 다음 거기에 의미를 가져다 붙이는거라고요.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에너지는 그중에서도 제일모호한 것이고요. 허상을 이해하려 애쓸 필요가 있을까요." - P132

"상상력은 좋은 도구입니다. 상담사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해요. 인간의 뇌는 수식 단위로 분해할 방법이 없거든요.
내담자들은 거짓말을 하거나 기억력이 나쁘거나 자기 본위로 판단하고요. 거기에 비하면, 나는 도하 씨에게 아주 쉬운 질문을 하는 겁니다." - P133

감정 데이터와 신경 패턴은 사람의 뇌에 전극을 꽂아 추출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상품을 만들기 어렵다. 길거리에지나다니는 사람을 아무나 데리고 와서 옷을 벗겨낸 다음그걸 맞춤복이랍시고 팔아먹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 P133

나는 뇌설계사들이 기쁨과 분노의 경로를 조율하는 세계를 상상하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설계사는 평론가가아니라 엔지니어니까 결과물을 성공과 실패로 나눌 수밖에 없다고. - P134

"적어도 박사님이 처음에 말씀하신 경우엔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 같은데요. 릴리의 열성 팬이 단지 외로워서 드론테러를 저지른 건 아닐 테니까요. (후략)." - P136

"감정과 사유가 몸에 좌우된다는 건, 뇌가 그다지 섬세하지 않다는 건 교양서에도 종종 나오는 내용이죠. 고통과쾌락이 이어져 있다는 것도요. 사람들이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지만, 다들 한번 읽고 충격을 받은 다음 잊어버려요. 자신에게 복잡하고 고결한 영혼이 있다고 믿으려 하죠." - P137

장광설을 듣는 동안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진단명이하나쯤 있으리라 짐작하는 투였다. 나는 환자가 맞지만 보건소 바깥에서까지 그런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다.  - P138

"버추얼 아이돌은 서브컬처로만 남아 있지만 이모지 박사라는 캐릭터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 차이를 알아내는 게 중요하죠. (후략)." - P139

콘크리트 덩어리 속의 컴퓨터에게 산책은 무슨 의미일까. 카메라에 인식된 정보와 GPS 좌표를 통해 단말 기기의경로를 설정하는 작업? 박사의 신경 관계망이 그 작업에어떤 감정적 보상을 주는지 묻고 싶어진다. - P142

문명이 아무리 발전해도 치유되지 않는 병이 있다. 자식에게 깔끔하게 정돈된 자연을 보여주고 감탄사를 기대하는건 모범적인 부모의 고질병이다. 정돈되지 않은 땅에서 고대의 성채를 발견하고 얻을 것 없는 모험을 하려는 건 아이들의 고질병이다.  - P143

"크고 작은 사건이 그 후로도 몇 개 더 있었어요. 남을괴롭히거나, 혼자서라도 위험한 짓을 벌이거나, 부모님은아니라고 믿으려 했는데 동생만 혼자 눈치가 빨라서 고생을 많이 했죠. 어릴 때는 저도 꽤.. 똑똑했거든요. 그러다가 열네 살쯤, 집에 난리가 나서 상담을 시작했어요. 약도먹고요. 약을 먹었더니 놀랍게도 문제가 거의 사라지더군요. 조금이라도 일찍 병원에 가야 했는데, 제가 어렸죠." - P147

물론 박사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분명한 것은 샛노란 머리에 그려진 미소뿐이다. 관측되지 않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라고들하고, 어떤 의문은 의문으로만 남겨 두는 게 가장 아름답다. 우리는 조용히 산책로를 마저 걸어 원점으로 돌아왔다. - P148

백해나의 사인은 약물중독이었고, 그 애가 혼자 사는 집에서 죽어갈 때 나는 침대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영화를봤을 수도 있고, 아무 일도 없었던 날의 저녁에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 없다. 어쨌거나 나는 살인죄로 기소당하진 않을 사람이다. - P149

고양이를 죽였을 때 아버지는 내 변명을 믿어주었지만동생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둘만 남은 뒤에야 갑자기두 문장을 툭 던지고 달아났다. 그냥 하고 싶어서 한 거잖아. 거짓말하지 마. - P150

사실 약을 아예 안 먹고 지내던 시절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 P151

한쪽 손으로 동생의 가슴팍을 짓누른 채 울대뼈 바로 밑에 칼날을 가져다 댄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멈추고 추락을 택하는 듯한 홀가분함이 나를 가득 채우는 찰나 동생이 눈을 뜬다. - P151

씻고 자리에 누운 다음에도 나는 긴장과 기쁨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잠을 몇 시간이나 잤는지 모를 노릇이다. 가까스로 눈을 붙였다가 깨어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출근 준비를 마쳤다.
"어제 방에 들어왔어?"
"아니."
힐문이 이어지기를 기대했지만 동생은 이모지 박사 이야기로 주제를 돌렸다. 나는 깊은 안도와 미묘한 상실감을동시에 느끼면서, 백해나의 죽음을 곱씹어 보았다. - P153



"백해나한테도 나름대로 도와줄 이유가 많았을 거예요.
남의 소송에 참견하는 건 재미있는 일이고, 옛날 생각도났을 테고, 무엇보다도 릴리와 얽히는 건 누구에게나 이득이니까요. 그런 이유 중에 뭐가 제일 컸는지는 모르겠어요." - P153



"릴리가 저를 데리고 막무가내로 집을 나왔다가 돌아가는 일이 몇 번쯤 있었죠. 백해나는 사과를 하거나 화를냈고요. 뭔가 선물을 해주기도 했는데.. 문제는 릴리한테도 돈이 충분히 많았다는 거였죠. 그런 거로는 해결될일이 아니었어요." - P158

도하

"다시 떠올려봐. 백해나가 릴리한테 뭐라고 했지?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카메라가 워크스테이션에 연결된 모니터를 비춘다. 신경 관계망의 우상단에서 집중적인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전문적인 인상을 주는‘ 기억 추출 절차를 8초가량의 쇼트로 삽입한다. 해당 쇼트 이후에 이어지는 영상은 여전히 노이즈로 왜곡되어 있다. 개는 모니터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어트린다.) - P160

릴리

"부담감이 너무 심해서, 오히려 모든 걸 포기해버리는 일이 종종 생기잖아요. 제가 그랬어요. 당장에라도 기자들의 연락을 받고 카메라 앞에 서야 할 것 같았는데,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적어도 그 사람들이 원하는 이야기는 해주고 싶지 않았죠."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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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6장 우리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것들

국가, 종교, 문화, 가족, 혹은 그 외의 어떤 형태이든 사회적집단이 같은 집단 내의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를 통해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 P151

(전략).
여러분은 아마 오래 생각하지 않고 이러한 결정을 내렸을것이다. 비용과 편익을 따졌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작위적 결정이라고 느껴진다. - P152

이러한 동조는 몇 가지 이유로 흥미롭다. 그중 일부는 학습(어떤 열매가 안전한지, 어디로 강을 건널지, 또는 어느 식당이 좋은지)에 관한 것이고, 다른 측면은 집단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심지어는 처벌을 피하기 위한 욕구(2장에서 살펴보았으며, 다음 장에서 다시 논의할 것이다)에 대한 것이다. - P153

집단의 동조 : 석화림 국립 공원의 사례

규범을 준수하는 것은 종종 이로우며, 대부분의 사회는 법을 지키거나 재산권과 공유 재산에 대한 기여도를 존중하는 등의 규범을 준수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마을에서 살아남기 어렵고, 도시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 P153

한편, 여러분이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사회적 규범을필요로 한다. 기원전 2000년 메소포타미아에서 화폐가 출현한 이후로(이 당시에는 창고에 저장한 곡식에 대한 영수증 정도의 의미였다), 마치 돈이 가치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규범이 존재해왔다. - P154

물론 우리는 화폐가 없는 유토피아적 미래에 살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돈을 이용해 아주 손쉽게 거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은 돈(금속, 종이, 플라스틱 카드 또는 은행 데이터베이스 숫자)이 가치 있다는 공통된 망상에 의존한다. - P155

물론 모든 규범이 동일하지는 않다. 어떤 규범은 집단 응집을 형성하고 긍정적인 행동을 끌어내지만, 어떤 규범은 우리와 우리의 환경에 해를 끼칠 수 있다. - P157

연구원들은 공원과 협력하여 이 빈번한 절도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를 연구했다. 그들은 하루 중 각기 다른 시간, 각기 다른 장소에 다른 표지판을 붙였다. 연구진은 두 시간마다 전략적으로 배치된(그리고 훔치기 쉬운) 석화목 조각이 도난당했는지를확인한 뒤 표지판을 바꾸었다. (중략). 전자의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숲이 소중하며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방문객들은 이 메시지를 훔치는 행동이 규범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석화목을 훔쳤고, 그 결과 자연이 영구적으로 훼손되었다. - P158

이에 답하기 위한 실험이 한 투자은행에서 이루어졌다. 이 은행에서는 전국적인 모금 활동의 일환으로 아직 자선 단체에 기부하지 않은 은행원들에게 기부를 요청했다. 일부 직원에게는 영국 내 근로자의 7.5퍼센트가 이미 기부를 했습니다‘라고 알렸는데, 이를 읽은 직원들은 근로자의 92.5퍼센트가 기부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사전에 예상한 바와 같이, 이메일에 이 문구를 추가한 것은 기부 확률을 높이지 못했다. - P159

. 이것은 군집herding이라고 알려진 현상으로, 1992년 경제학자 아브히지트 바네르지Abhijit Banerjee가 처음으로 공식화했다. 사회적 규범에 따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워서, 우리는 어떤 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믿을 이유가 없을 때조차도 누군가의 희미한 흔적을 따른다. - P162

감추어진 규범 : 세금 납부율을 높이는 비결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 때조차 동조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사실 솔로몬 애쉬 Solomon Asch의 유명한 동조 실험은 마이클이 16살때 심리학에서 배운 첫 번째 연구였다. - P162

이를 위한 일부 실마리는 우리 대부분이 종종 어떤 것이 규범인지를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가 따를 수 있는 많은 행동은 감추어져 있으며, 이는 이러한 행동들의 발생 빈도를 과대 또는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 P163

사회적 집단의 규범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는것은 진정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 P164

처음으로 사회적 규범의 힘을 정부 차원의 좋은 용도로 사용하도록 한 사람 중 하나는 현재 BIT 북아메리카의 이사인 마이클 홀즈워스 Michael Hallsworth였다
(중략).. 신고서를 제출하고 체납세를 내거나 미납에 관한 결과를 받아들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상당히 딱딱한 편지의 본문은 그대로 두었지만, 앞부분에 한 문장이 추가되었다.

열명 중 아홉 명은 기한 안에 세금을 납부합니다.

이 메시지는 소수의 사람만 아직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세금을 제때 내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을 명확히하고(이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경우), 또한 중요한 것으로(이를 알지만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경우) 만든다. - P165

‘여러분의 거주 지역‘을 추가한 것은 사회적 규범의 영향을약간 증가시켰으나, 통계적으로 유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여러분의 부채에 대한 개인적인 메시지와 결합되었을 때효과는 더 컸고, ‘여러분의 거주 지역‘을 추가한 것만으로도 납세율이 2퍼센트 증가했다.

(중략).

이러한 효과는 미미한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모두 더해지면 매년 2억 파운드(2억 7,000만 달러)가 넘는다. - P166

이 점은 로버트 치알디니 Robert Cialdini의 체인 호텔 실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애리조나대학교 치알디니 교수와 그의 동료들은 체인 호텔과 협력하여 호텔 재정을 절약하고 환경 보호에 동참하기 위해 수건의 재사용을 늘리고자 했다. 그들은 투숙객들에게 대부분의 손님들이 수건을 재사용한다고 알리는 것이 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도덕적인 메시지에 비해 재사용률을 34퍼센트 증가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 P167

예를 들어 코스타리카 국립 공원의 직원들은 ‘일반적인 기부‘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가장 일반적인 기부액은 2/5/10달러입니다.

이 짧은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지배적인 사회적 규범에 대한감을 주었다. 이전에는 방문객들이 그들이 생각한 기부액이 적절한지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지만, 이제는 그들이 따를 수있는 액수가 주어졌기 때문에 결정이 훨씬 쉬워졌다.  - P168

 첫째, 규범은 바뀔 수 있으며, 둘째, 사회적 집단의 규범이 변함에 따라 우리는 아주 빠르게 이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 P168

규범의 변화 : 온라인과 조직 내부로 들어가기

온라인 환경에서 규범이 바뀔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관찰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 P169

(전략). 이는 경제학자들이 ‘하방경직성(sticky downwards,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당연히 내려가야 하는 가격이 어떠한 이유로 내려가지 않는 것)‘이라고 부르는 현상으로 보인다. 아마도 우리가 나쁜 행동에 대한 처벌을 두려워하는 경향 때문에 기준을 높이는것이 낮추는 것보다 쉽다는 것이다. - P170

조직 내부의 변화 또한 살펴보자. 관리자들도 사회적 규범을 활용할 수 있을까? - P171

신중하게 사용되는 사회적 규범은 사회 환경에 강력한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사용량을 줄이게 하거나 조세 회피자들이 세금을 내도록하고, 대학생들이 술을 덜 마시도록 하는 것처럼 말이다. - P175

또한, 우리는 사회적 규범이 사회적 선택 구조의 나머지 부분에 어떻게 들어맞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P176

III 8장 선택의 유도와 확산

우리는 사람들이 그들과 같은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의 기대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사회적 규범 또는 사회적 신호에서 비롯된다. - P211

(전략). 하지만 사회적 집단은정적이지도, 영원하지도 않다. (중략).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적확산(social diffusion, 정보의 확산이 사회적 집단을 통해 이루어지는것)‘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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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먼의 후퇴

터먼이 1937년에 쓴 스탠퍼드-비네 테스트의 개정판은 얼핏 보면 같은 저자의 것으로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1916년의 초판과는 사뭇 다르다. 그러나 이미 시대가 바뀌었고, 감정적인 애국주의나 우생학이라는 지적 유행은 대공황이라는 수렁에 깊이 빠졌다. 1916년에 터먼은 성인의 정신연령을 16세로 정했다. 테스트를 위한 그보다 나이 많은 남학생의 무작위 표본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P321

터먼은 명시적으로 과거의 결론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그 결론을 침묵의 베일로 덮었다. 몇 가지 신중한 발언 이외에는 유전성에 대해 한마디도 들을 수 없다. - P321

IQ 시대의 도래에서 이민제한법 통과까지

심리학의 급성장

로버트 M. 여크스는 1915년, 갓 마흔을 넘을 무렵 실의에 빠졌다. 그는 1902년 이래 하버드 대학의 교수였고 뛰어난 조직가였으며 자신의 분야를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달변의 선전가였다. 그러나 아직 심리학은, 과학이기는 해도 ‘부드러운(soft)‘ 과학이라는 세간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 P322

여크스를 비롯한 동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엄밀함(rigor)을 숫자와 정량화를 다루는 과학과 등치시켰다. 여크스는 풍부하고 객관적인 수치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유망한 원천이 이제 갓 태어난 지능 테스트라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 P323

그러나 지능 테스트는 충분치 못한 지원과 그 자체의 내적 모순으로난관에 봉착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지능검사가 거의 훈련받지 않은 비전문가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실시되었고, 그에 따른 어처구니없는 결과로이 기획 전체가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 P323

두 번째 이유는 적절하게 적용될 때에는 가용한 여러 척도가 현저하게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 P324

전쟁은 항상 숨겨진 동기를 가진 군대의 추종자들을 만들게 마련이다. 대부분은 단순한 건달이나 폭리를 취하는 상인들이지만, 그중에는 좀더 야심찬 이상을 품은 사람들도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동원령이 가까워지자 여크스는 과학의 역사를 추진시킨 ‘빅 아이디어(big idea)‘ 중 하나를 떠올렸다. 심리학자들이 신병 전원에게 지능 테스트를 실시하도록 육군을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 P324

여크스는 육군지능 테스트 문항을 작성하기 위해 미국 정신측정학(psychometric) 분야의 주요 유전적 결정론자들을 모두 소집했다. - P324

나는 육군이 그 테스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훈련도 받지 않고 장교 계급장을 단 건방진 애송이 심리학자들이 초청도 받지 않고 들이닥쳐서 지능검사를 하기 위한(설령 그 검사가가능하다 하더라도) 장소로 건물을 징발하고, 많은 신병들을 한 시간 동안 조사한 다음 여러 군사적 임무에 어떤 사람이 적절한지 판단하는 장교의 전통적 권한을 침해한다면, 직업 장교들이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325

그러나 이 테스트는 일부 분야, 특히 장교훈련을 결정하는 심사위원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전쟁이 시작될 무렵, 육군과 주방위군에는 9천명의 장교가 있었다. 종전(終戰)까지 20만 명의 장교가 임관했고, 그중 3분의 2가 바로 이 테스트가 이루어진 훈련소에서 군대 생활을 시작했다. 일부 부대에서는 C 이하의 성적을 받은 사람은 장교훈련 대상에서제외되기도 했다. - P326

*여크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거둔 업적에도 불구하고 군심리학(military psychology)이 정당한 존경을 받지 못했다고 평생 동안 불평을 늘어놓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도 늙은 여크스는 여전히 투덜거리면서, 나치스가 지능검사의 올바른 사용과 군 인사(人事)에 지능 테스트를 장려하는 측면에서 미국을 능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독일인은 군심리학의 발전에서 훨씬 앞서고 있다. (・・・・・・) 나치스는 군의 역사에서 아무도 필적할 수 없는 업적을 달성했다. ・・・・・・) 독일에서 실행되고 있는 일은 우리 육군에서 1917~1918년에 시행했던 심리학적·인사적 활동의 논리적 연속이다(Yerkes, 1941, p.209)." - P326

육군지능 테스트의 결과

지능 테스트의 주된 영향은 육군이 개인들의 IQ 점수를 무기력하게 활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크스의 통계결과를 요약한 보고서에 수반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전에서 비롯되었다(Yerkes, 1921, pp.553~875). 후일 유명한 심리학자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여크스의 부관(그리고 육군 대위)이었던 E. G. 보링(E. G. Boring)은 파일에서 6만 명의 사례를 뽑아 1920년대에 강경한 유전적 결정론을 퍼뜨린 자료를 만들었다. - P327

보링이 수집한 숫자들의 바다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fact)‘이 수면 위로 부상했고, 그 사실은 이들 테스트의 근원이 잊혀진 후에도 오랫동안 미국의 사회정책에 계속 영향을 주었다.
1. 미국 백인 성인의 평균 정신연령은 놀랍게도 노둔보다 약간 높은13세에 불과했다. 과거에 터먼은 표준을 16세로 설정했다.
(중략).
만약 정신연령 13.08세가 백인 평균이고, 8~12세의 정신연령이 노둔이라면 미국 국민의 거의 절반이 노둔인 셈이다. 여크스는 이렇게 결론지었다(1921, p.791). "현재의 정의에 따른다면, 노둔자를 모두 몰아내기란 전혀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백인의 37퍼센트, 흑인의 89퍼센트가 13세 이하이기 때문이다." - P329

2. 유럽 이민자는 출신국에 따라 등급을 부여할 수 있다. 많은 나라의 평균적인 사람들이 노둔자이다. - P329

3. 흑인의 정신연령은 10.41세로 척도에서 맨 아래이다. 일부 부대에서는 분석을 좀더, 그리고 명백하게 인종차별적 방향으로 진전시키려고 시도했다. 캠프 리(Camp Lee)에서는 흑인들이 피부색의 농도에 따라 세집단으로 나뉘어졌으며, 검은 빛이 옅은 집단이 더 높은 점수를 얻었다(p.531). - P329

 정치적 이유로 신념에 의해 병역을 기피한 사람들 중에서, A등급을 받은사람은 59퍼센트였다. 심지어는 명백한 명령불복종자도 평균보다 훨씬높은 점수를 받았다(p.803). 그러나 그밖의 결과는 그들의 편견을 뒷받침해주었다.  - P330

그러나 800쪽에 달하는 논문 중에서 그는 환경적 영향의 역할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테스트는 이 장(章)의 앞부분에서 설명했듯이, 미국의 저명한 유전적 결정론자들을 모두 망라한 위원회에 의해 작성되었다. 테스트는 선천적 지능을 측정하도록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틀 속에서 측정이 이루어졌다. 결국 악순환의 고리는 단절될 수 없었다. - P331

육군지능 테스트에 대한 비판

테스트 내용

알파 테스트는 8개, 베타 테스트는 7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졌다. 각각의 소요시간은 한 시간 이내이며, 대규모 집단을 대상으로 실시할 수 있다. - P332

이 친숙한 문항들은 특별히 문화적 편향에 빠져 있다는 식의 비난을전혀 받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다. 물론 그 문항들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테스트한다. 그러나 이 능력은 유전적 능력이라기보다 교육의 결과이다. - P333

테스트 시간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다음 50명이 문 밖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고 실제로 신병들이 모든 문제를 풀고 답을 쓰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알파 테스트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실이 설명되었지만, 베타 테스트의 경우에는 설명되지 않았다. 여크스는 왜 그렇게 많은 신병들이 그처럼 많은 설문에서 0점을 받았는지 의아해했다(이것은 테스트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가장 뚜렷한 증거이다. 353~357쪽을 참조하라). - P334

불충분한 조건들

여크스의 규칙은 엄격하고 까다로운 것이었다. - P335

여크스의 검사관들과 정규 장교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빚어졌다. 커스터 캠프의 주임 검사관은 이렇게 불평했다(p.111). "이 문제에 대한 일반 장교들의 무관심은 그들의 무지와 같은 수준이다." 여크스는 검사관들에게 자제와 화해를 촉구했다(p.155) - P336

게다가 부대간의 비일관성 이상의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끈질기게 지속된 로지스틱 곡선의 어려움이 흑인과 이민자들의 평균점수를 크게 저하시키는 체계적인 편향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알파 테스트만을 받았고, 그 결과 점수는 0점이나 그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선천적으로 우둔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문맹인데도 여크스의 프로토콜에 따라 베타 테스트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 P338

이러한 체계적인 편향이 크스가 요약한 통계수치를 사용한 보링의 실험에 영향을 준 것은 명백하다. - P339

의심스럽고 편향된 진행방식-하버드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


학자들은 종종 자신이 일차자료로 삼는 문서기록이 실제 경험을 부족하고 불완전한 정도로만 보여준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상당부분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직접 맛보아야 한다 - P340

사실 나는 그 실험을 시작하기 전부터 내적인 모순과 선입관 때문에여크스가 그 결과에서 이끌어내려고 했던 유전적 결정론의 결론이 완전히 무효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보링도 만년에 이러한 결론이 "앞뒤가 바뀐 것"이라고 말했다(1962년 인터뷰, Kevles, 1968에서 인용). - P341

베타 테스트 검사관의 설명을 극도로 제한시킨 것은 베타 테스트 대상자가 우둔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여크스의 잘못된 견해를 반영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많은 숫자의 베타 테스트 대상자들은 영어를구사할 수 없는 최근 이민자들이었기 때문에 지시는 가능한 한 그림이나 몸짓을 통해 전달되어야 했다. (중략). 그러나 베타 테스트에서는 가장 중요한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다. - P342

 쉬울 것 같지만, 테스트에는 90개의 문항이 있어서 2분 동안 완료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숫자를 쓸 수없는 사람들은 두 개의 기호 조합이 낯설게 느껴지기 때문에 이번에도 역시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 P346

요약하자면, 많은 신병들이 시험관을 보거나 들을 수 없었다. 일부는지금까지 한 번도 시험을 본 적이 없거나, 심지어 난생 처음 연필을 쥐어본 사람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시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 P350

테스트의 불합리성은 요약된 통계결과에 잘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스와 보링은 그 통계를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모노그래프는각 설문별로 득점의 빈도 분포를 싣고 있다. 여크스는 선천적 지능이 정규분포에 따른다고(중간에 해당하는 점수가 하나의 최빈값을 갖는 ‘표준‘
패턴이고, 빈도는 최빈값에서 양쪽 방향으로 멀어짐에 따라 대칭적으로 감소한다) 믿었기 때문에 각각의 테스트 점수도 마찬가지로 정규분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 P351

테스트의 불합리성은 요약된 통계결과에 잘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크스와 보링은 그 통계를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모노그래프는 각 설문별로 득점의 빈도 분포를 싣고 있다. 여크스는 선천적 지능이 정규분포에 따른다고(중간에 해당하는 점수가 하나의 최빈값을 갖는 ‘표준‘ 패턴이고, 빈도는 최빈값에서 양쪽 방향으로 멀어짐에 따라 대칭적으로 감소한다) 믿었기 때문에 각각의 테스트 점수도 마찬가지로 정규분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 P351

두 개의 최빈값을 갖는 분포를 상식적으로 해석하면, 신병들이 테스트에 대해 두 가지 다른 반응을 나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P351

통계학자들은 복수(複數)의 최빈값을 가진 분포를 의심하도록 훈련받는다. 대개 이런 분포는 그 체계의 불균질성을 나타낸다. - P352

 여크스는 복수의 최빈값이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자신의 테스트가 지능이라는 단일한 실체를 측정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품었어야 했다. - P353

요약된 통계수치 속이기-0점 처리 문제


베타 테스트가 0점과 제2최빈값이라는 돌부리에 채여 비틀거렸다면, 알파 테스트도 같은 이유로 돌이킬 수 없는 재앙에 직면했다. 광범위하고 철저한 실패였다. 0 최빈값은 베타 테스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지만 중앙값의 제1최빈값의 높이에 도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P353

다시 한 번 0점이 많은 사실을 상식적으로 해석하면, 상당수의 사람들이 테스트 방식에 관한 지시를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으로, 이것은 테스트 결과 자체가 무효임을 시사한다. - P354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보링은 최종 통계자료에서 0점인 사람들을 제거하거나 신병들이 테스트 방식을 이해했다면대부분 어느 정도 점수를 얻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토대로 0점을 보정(補正)하는 결정을 내렸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 방향으로 0점을 수정했다. 상당수의 0점을 마이너스 영역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보링은 모든 결과를 무효로 처리하는 유전적 결정론의 가설에서 출발했다. - P356

이 방법에 의해, 여크스의 기본적 절차에 포함된 결함에 다른 편향들이 부가되어 한층 강화되었다. 0점은 지능과 무관한 일련의 이유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보여주었다. 여크스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가 집단 테스트에서 0점을 받았던 사람들도 개인 테스트나 그와 유사한 테스트에서는 혼란이나 불안감이 감소하면서 거의 전원이 그보다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었음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 P357

처리된 통계값의 조작 환경과의 명백한 상관관계를 비켜가다

여크스의 모노그래프는 ‘지능 테스트‘의 성적과 환경의 상관관계를 탐구하려는 사람에게는 귀중한 정보의 보고이다.  - P357

그의 모노그래프에는 사소한 사례가 한두 페이지씩 분산되어 실려 있다. 여크스는 모두 네 개의 범주로 평균점수와 십이지장충 감염 사이에서 강한 상관관계를 찾아냈다. - P358

여크스는 주요 패턴 중에서 학교교육을 받은 기간과 지능 사이의 관련성을 발견했다. 그는 테스트 점수와 교육년수(年數) 사이에서 0.75의 상관계수를 산출했다. 알파 테스트에서 평균점 이하를 얻는 348명 중 대학(치과대학 학생으로)에 진학한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 P359

그는 흑인이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선천적으로 낮은 지능에 기인한 학습 혐오를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인종차별(공식적으로는 금지되었지만 당시 일반적으로 횡행하던)이나 흑인 학교의 열악한 상황, 그리고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아이들도 일을 해야 하는 경제적 압박 등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 P360

여크스의 모노그래프에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했을 수도 있는(만약 그가 유연한 자세로 연구에 임했다면) 자료가 도표로 작성되어 있지만, 그 자료는 이용되지 않았다. - P361

 대부분의 라틴계와 슬라브계는 최근에 이민했기 때문에 영어를 거의 또는 전혀 구사할수 없었다. 독일계 이민의 전성기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났다. 하지만 여크스의 프로토콜에 의하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 P361

또 하나의 상관관계는 훨씬 큰 혼란을 야기했다. 여크스는 외국 출신신병의 테스트 평균점수가 미국 체재 기간이 길수록 상승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P362

육군지능 테스트는 환경적으로 불리한 조건이 수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들이 지적 능력을 발달시킬 기회를 박탈했음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에 사회개혁의 동력을 제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P363

터먼, 고더드, 여크스 등의 유전적 결정론자들의 선입관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지 못할 정도로 맹목적이었다! - P364

여크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우선 그 수치를 잘못된것으로 간주하고 무의미한 값이 나온 결함의 원인을 자신의 방법론 속에서 찾는 것이었다. - P365

두 번째 선택은 그 수치를 인정하고 어정쩡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이 두 번째 전략을 선택했다.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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