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평등
들어가며
한 집단이 스스로 통치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집단 구성원들이 모두 동등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몇몇 특성traits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더 선호되어서는 안 된다. - P137
그럼에도 평등에 대한 정의는 ① 모든 구성원이 실질적으로 평등한 참여의 기회를 가져야 하며, ② 그들이 [의사 결정과정에] 참여할 경우, 그들의 선호가 동등한 비중을 차지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실질적으로 평등한 기회‘라는 말과 ‘~할 권리‘ the right to라는 말은 다르다. 나는 권리라는 단어가 다소 공허하다고 생각한다. - P137
이렇게 정의할 경우, 평등과 익명성은 같지 않다.* 익명성은,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이 그 어떤 특성(그들이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특성을포함해)에 의해서도 시민이라는 지위 면에서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부유한 사람‘ 또는 ‘잘생긴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는 있지만, 부유한 시민 또는 잘생긴 시민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본 것처럼, 사회적 선택이론은 평등과 익명성을, 때로는 이른바 대칭성 symmetry까지도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이 조건을 세 가지 다른 말로표현한다는 점은 이 조건이 얼마나 모호한지를 보여 준다. 메이는 이 조건을 "대칭성"이라 부르고 이렇게 말한다. "이 두 번째 조건 [대칭성]은 [집단적 의사 결정의]결과와 관련해 모든 개인의 영향력이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이조건을 익명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 좀 더 흔한 명칭은 평등이다" (May 1952, 681, 강조는 메이). 레이는 익명성과 평등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라고 했다(Rae 1969, 42, 각주 8). 그는 다른 논문에서 이 조건을 "대칭성"이라 불렀다(Rae1975, 1271). 달은 익명성과 평등을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Dahl 1989,139). - P138
민주주의에서 시민은 평등하지 않다. 다만 익명일 뿐이다. 민주주의의 계보에는 평등이 아로새겨져 있지만 평등은 민주주의의 특징일 수 없고 그렇지도 않다. - P138
이런 특성은 부, 나이, 성별과같은 몇 가지 지표를 통해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지표들을 기준으로선거권을 제한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규범을 위반하지 않는다는 식이다. 이 주장의 논리를 반박하긴 어렵지만, [여기에서 전제하는] 가정들은 의문스러우며 실제로도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 P139
민주주의는 정치혁명이지 사회혁명은 아니었다. 게다가 거의 보편적으로 공유되었던 기대- 이 같은 기대는 누군가에게는 공포였고, 누군가에게는 희망이었다-와 달리, 민주주의는 다양한, 때로는 상당히 거대한 경제적 불평등과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민주주의는 대부분의 자원이 시장에서분배되는 경제 체계 안에서 작동하며, 시장은 끊임없이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 P139
계보: 귀족 지배와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역사적 지평에 재등장했을까? 민주주의는 그 지지자와 적대자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 P140
팔머는 기념비적인 연구서에서 근대 시기에 출현한 민주주의를 다뤘다.* 그래서 이 현상에 대해서는 팔머의 연구를 간략히 요약하는 것 으로 충분하다.
+[옮긴이] 팔머는 [법적으로] 구성된 기구constituted bodies라는 개념으로 1760년대유럽과 아메리카에 있던 다양한 유형의 의회, 평의회, 행정협의회를 포괄해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대부분 중세에 기원을 두는 이 기구들은 추상적인 ‘시민‘이 아닌 집단 구성원으로서의 권리와 자유를 가졌고, 상위의 권력은 물론 하위의 대중적 압력으로부터 이를 지키고자 했다. 이 기구들은 한편으로 여타 사회 구성원들을체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 구성원 자격을 개방하고, 권한과 대표의기초를 변화시켜 스스로를 재구성함으로써 민주주의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Palmer1959, 2장 참고). - P140
(전략) 군주정에 대항하는 운동으로민주주의가 등장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18세기 말 ‘민주주의‘는 출생 신분을 기준으로 정치적 지위를구별하는 법적 방식에 대항하는 구호였다. 민주주의자는 귀족 또는 귀족 지배에 저항하는 자였다. - P141
(전략). 그러므로 1794년 한젊은 영국인은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민주주의자라고 불리는이상한 계급의 일원이다. 내가 스스로 민주주의자라고 표현한 까닭은, 세습에 따른 구별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특권 질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⁴ 매디슨은 「페더럴리스트」 39번 논설[국역본, 297쪽]에서 이렇게 썼다. "이체제의 공화제적 성격을 보여 주는 추가적 증거가 요구된다면, ・・・ [신분으로서의] 귀족이라는 칭호를 완전히 금지한 데서 가장 결정적인 증거를찾을 수 있을 것이다. - P142
4 Palmer (1964, 10). - P343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수수께끼가 있다. 비록 민주주의자들이 귀족지배(그것이 원래 의미대로 정부 체계 [귀족정]를 가리키는 것이든, 법적 신분 지위를가리키는 것이든간에)에 맞서 싸웠지만, 이 투쟁이 그 외의 다양한 사회적구별의 철폐로 귀결될 필요는 없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구별이 다른 구별로 바뀔 수도 있었다 - P142
피에르 로장발롱은 이렇게 주장한다. "모든 사람이 법에 종속되며, 완전한 시민임을 요구하는, 평등의 명령은 모든 사람을 저마다의 독특한 결정 요소들을 배제한 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들 사이의 모든 차이와 구별은 저 멀리에 치워 둬야 한다."⁹ 그렇다면 평등의 명령은 어디서 기원했을까? - P144
9 Rosanvallon (2004, 121). - P343
모든 이의 지지를 얻는 데 이보다 더 잘 계산된 수법은 없었다.¹⁰ "몇몇 사실이 이 가설을 지지한다. 폴란드의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는1794년 러시아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농민을 끌어들이기 위해 애매모호한 약속을 했다. 프랑스 제헌의회 의원들은 파리에 사는 보통 사람들의인기를 얻기 위해 그들에게 영합했던 것으로 악명 높았다. - P144
10 Finer (1934, 85). - P343
이미 로크의 『통치에 관한 두 번째 논고』에서 "모든 인간이 어떤 다른 인간의 의지나 권위에 종속되지 않은 채 자신의 자연적 자유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¹¹라는 원리가 등장한다. 사람들이 논리에 따라 행동한다거나 논리적 모순을 참을 수 없어 행동한다는 이론을 우리가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 P145
11 Locke (1988[1689-90] 국역본, [73쪽]). - P343
민주주의자들이 모든 구별에 맞서 대항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민주주의적 주체의 유일한 속성은, 그들이 아무런 속성도 보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시민은 단순히 특성 없는 존재without qualities 다.*
+파스퀴노는 홉스가 종교적 차별을 다루면서 이런 개념을 도입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종류의 [종교] 갈등에 직면했을 때, 홉스는 정치적 질서가 중첩적 합의over-lapping consensus와 특성 없는 사회라는 도시의 구조에 기초한다고 생각했다" (Pas-quino 1996, 31). - P145
민주주의와 평등
민주주의의 계보에 평등주의가 아로새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도 민주주의의 특징은 평등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파스퀴노는 이렇게 경고한다. "말의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 ‘특성 없는 사회‘societywithout qualities는 구성원이 평등한 사회가 아니다. 단지 특권층이 법적·제도적 지위를 갖지 않고, [공식적으로] 승인되지도 않는 사회일 뿐이다."¹³ - P146
13 Pasquino (1998, 149, 150).
[프랑스] 인권선언으로 되돌아가 보자. 인권선언의 출발점은 인류의선천적인 평등이다. 민주주의의 평등은 자연적 평등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선재하는 평등이라는 개념의 함의는 불확실하다. 카를 슈미트가 지적하듯이, "모든 인간이 인간이라는 사실로부터 윤리, 종교, 정치, 경제에 관한 어떤 구체적인 사항도 연역해 낼 수 없다."¹⁴ - P146
그러므로 몽테스키외는 이렇게 주장했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평등한 상태를 유지할지 모른다. 사회는 그들을 불평등하게 만든다. 법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는 평등한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¹⁶ - P147
16 Montesquieu (1995 [1748], 261 [국역본, 137쪽]). - P343
그러나 사회가 반드시 인간을 불평등하게 만드는가? 로장발롱에 따르면 1814년 이후 프랑스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은 현대적인 평등 사회라는 의미로 널리 쓰였다.¹⁷ 고대 그리스나 로마공화정과 관련된 정치체제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 P147
17 Rosanvallon (1995, 149). - P343
현대사회가 반드시 더 평등해질 것인지는 복잡한 문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가 자생적으로 진화해 정치적 평등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모든 이가 기대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 P147
민주주의자들은 베이츠²¹가 정치적 평등에 대한 소박한 개념화라고부른 것을 신봉했다. 정치적 평등에 대한 소박한 개념화는, 민주주의 제도가 시민들에게 정치적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동등한 절차적 기회(혹은 결과에 대한 평등한 권력)를 제공해야 한다는 요구다. - P148
21 Beitz (1989, 4). - P343
카를 슈미트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지배층과 피지배층, 통치자와 피통치자, 명령하는 사람과 복종하는 사람의 동일성"을 의미한다.²² 문제는 통치 능력 자체가 정치적 구별을 만들어 내지 않느냐는 것이다. 즉, 정치 계급 말이다. - P149
22 Schmitt (1993, 372). - P343
(전략). 그래서 민주주의자들은 대표의 임기를 짧게 하고 (뉴저지주의 6개월처럼) 재임횟수를 제한하며, 대표자가 자신의 봉급을 결정하는 권한을 제한하고, 이들을 불신임할 수 있는 절차 등에 집착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은 일시적인 처방에 불과했다. 대표자와 피대표자 사이의 구별은 대의제에 내재할 수밖에 없다. 즉, 의회에 앉아 있는사람은 대표자이지 인민이 아니다. - P149
물론 통치할 능력이 출생 신분의 차이와 연결된 것은 아니며, 이 점에서선거는 (18세기적인 의미에서 ‘귀족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선거는 더 나은사람을 선택하는 방법이다. 마냉이 여러 자료를 통해 보여 주듯, 선거는능력에 따른 자연 귀족natural aristocracy*의 지배를 인정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여겨졌다. 실제로도 그랬다.
* [옮긴이] 여기서 ‘자연적‘ natural이라는 의미는,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부여된 특권에 따른 것, 또는 세습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즉, 법적으로 정의된 특권이 아니라, 부, 지위 또는 재능에 의해 사회적 우월성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자연귀족을 형성한다. - P150
게다가 대표되기 위해 인민은 반드시 조직되어야만 한다. 조직화에는 지속적인 기구, 봉급을 받는 관료, 프로파간다 장치가 필요하다. 따라서 로베르트 미헬스²⁵가 한탄했듯이 소수의 활동가들만이 의원, 당관료, 기관지 편집자가 된다. - P150
25 Michles (1962, 270 [국악본,383, 384쪽]). - P343
대의제의 창설자들이 평등이라는 용어를썼다면, 이는 다른 무언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면, 사회적인 차이를 잊어버리겠다는 것, 즉 익명성이라 불러야 할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 P151
선거권 제한은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위배하는가?
익명성을 약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선거권 제한이다. - P152
몽테스키외가 선거권 제한을 어떻게 정당화했는지 살펴보자.²⁷ - P151
일반적인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① 대표자는 모든사람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② 모든 사람의 최선의 이익이 무엇인지 판단하려면 이성이 필요하다. ③ 이성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결정 요인이 있다. 그것은 생계를 위해 노동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로부터 나오는] ‘사심 없음‘disinterest), 또는 누군가에게 고용되지 않거나다른 이에게 의존하면 안 된다는 것(‘경제적 자립‘independence)이다. - P152
또한 단지 외양상의 평등만 위배한다는 주장은 다음의 세단계로 펼쳐진다. ① 최선의 공동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고려한다는 뜻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대표된다.
+콩도르세는 이렇게까지 주장한다. "입법의 모든 측면에서 유산층과 무산층의 이해관계는 같다. 단지 유산층이 민법과 세법에서 더 큰 이해관계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유산층이 전체 사회 이익의 수탁자이자 수호자가 되는 것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 (Condorcet 1986[1788], 212). - P152
② 구분되어야 할 유일한 특성은 공동선을 인식하고 추구하는 능력이다. ③ 이와 같은 능력의 획득이 금지되는 사람은 없으며, 따라서 선거권은 잠재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 P153
마지막 두 가지가 핵심이다. 사회적 지위의 법적 구별은 오직 통치능력의 지표로서만 유효하며, 인민이 통치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고 그것이 적절하게 표시되는 것을 막는 그 어떤 장벽도 없다는 것이다. - P153
납세자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방식을 옹호하는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정치적 불평등은 사회적조건의 불평등에 의해 정당화되지만, 이때 그 어떤 법도 사회적 지위가올라가는 것을 막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치적 불평등은 보편주의라는 규범을 위배하지 않는다. - P154
종교에 따른 정치적 권리의 제한 역시 때로는 보편주의적인 언어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대체로 이성이 아니라 공통 가치에 호소했다. 루소와 칸트부터 존 스튜어트 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는 공통적인 이해관계, 규범, 가치에 근거할 때에만 정치체가 제대로 작동한다고 믿었다. - P155
여성에 대한 선거권 제한은 가장 어려운 이슈였다. 비록 초기에 여성선거권을 지지한 사람들은 이성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배분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는 했지만, 주류의 입장은 여성에게 선거권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여성은 아동과 마찬가지로 자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만의 고유한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 P155
하지만 왜 여성은 일부 남성과 같은 방식으로 자립적이지 못했는가? 여성이 재산을 가질 수 없는 곳에서 여성은 법적으로 선거권 자격을 얻을 수 없었다. 이는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재산을 소유할 수 있고 실제로 소유한 곳에서, 재산 소유가 [여성이 정치적 권리를 가질 자격의] 충분한 지표가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 P156
슘페터는 어떤 [선거권의] 구분이든 그것이 받아들여진다면, 그런 구분의 근거가 되는 원칙 또한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말로 중요한것은 이것이다. 이와 같은 주제들에 대한 해당 사회의 적절한 견해들을감안한다면 경제적 지위, 종교, 성별을 이유로 한 [선거권] 자격 박탈은우리 모두가 민주주의와 양립한다고 여기는 자격 박탈과 같은 부류에 포함된다는 것이다."³⁸ - P157
38 Schumpeter (1942, 244[347쪽]). - P343
분석적으로 말하자면, 다음 조건이 충족될 때 불평등은 자치에 위배되지 않는다. ① [집단적 의사 결정에서 배제된 이들의 선호가 집단적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권리가 있는 이의 선호와 같을 때, ② 결정을 내리도록 선택된 사람들이 결정할 분명한 자격을 가질 때. - P157
베이츠가 지적했듯이,³⁹ 이상적인 선호가 없거나 그런 선호를 발전시킬 조건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기꺼이 동의한다면, 선거권 제한이나 가중 투표제가 공정하지 않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 방법은 1857년에 이미 존 스튜어트 밀이 옹호했던 것이기도 하다. 또한 모든 사람이 그런선호를 획득할 수 있거나, 그런 선호를 획득할 조건을 얻을 수 있다면, 선거권을 제한하거나 표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것이 불평등하기는 해도 보편주의적인 용어로 정당화할 수 있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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