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가 된 건물 위를 뒤덮고 있는 얼음층은 여러 가지 지질학적 요인을 떠올리게 했다. 일부 지역의 석조물은 빙하 표면까지 주저앉아 있었다. 고원의 안쪽에서 우리가 넘어온 고개 왼쪽의 1.5킬로미터 지점까지 넓은 길이 나 있는데, 그 자리에는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 P278
물론 우리는 지구의 연대기, 과학 이론, 인식같은 것들이 어긋나 있다는 서글픈 비애를 느꼈다. 그러나 우리는 침착하게 비행을 계속하고 세밀하게 관찰한 끝에 이제 세상 사람들에게 내보일 만한 일련의 사진을 신중하게 촬영할 수 있었다. 나의 경우에는 타고난 과학적 사고방식이 도움이 된 것 같다. - P278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제3기의 거대 도시와 비교할 때, 전설의아틀란티스와 레무리아¹⁰⁸, 코모리엄, 우줄더럼¹⁰⁹, 로마르의 올라소¹¹⁰등은 어제오늘 벌어진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 거석의 도시는 인류 이전의 불경한 속삭임으로 전해지는 벨루시아¹¹¹, 리예, 나르의 아이브¹¹², 아라비아 사막의 ‘이름 없는 도시‘ 등과 비견될 만 했다. - P279
108) 레무리아(lemuria): 인도양에 가라앉았다는 전설적인 선사 시대의 대륙. 109) 우줄더럼(Uzuldaroum); 역시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가 북방정토를 배경으로 지어낸 또 다른 가상의 도시. 110) 올라소(Olathoe): 로마르(Lomar)는 드림랜드에 등장하는 가상의 공간으로 미지의 카다스를 향한 몽환의 추적에 나온다. 올라소(Olathoe)는 「북극성」에서 로마르의 사르킨 고원에 있는 도시로 묘사됐으며, 이곳에서 차토구아를 숭배한다. 111) 벨루시아(Valusia) : 로버트 E. 하워드(Robert E. Howard)가 지어낸 가상의 대륙이자왕국. 112) 나르(Mnar): 나르는 「사나스에 찾아온 운명 The Doom That Came to Sarmath」(1919)에서 언급됐다. 현실 세계와 꿈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공간으로 흑인 유목민이 정착하고 있다. - P352
산맥은 끝이 없었고, 구릉지역 안쪽을에워싼 거석 도시도 마찬가지였다. 사방으로 80킬로미터를 비행했지만 영겁의 빙하를 뚫고 시체처럼 일어선 암석과 석조물의 미로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 P279
산맥에서 고원 안쪽으로 비행하는 동안, 도시가 무한한 것 같다는 처음 생각이 잘못임을 깨달았다. 50킬로미터쯤 비행하고 나니 기괴한 석조 건물이 뜸해졌고, 16킬로미터를 더 가자 인공물이 전혀 없는 천연의 황무지가 나타났다. 도시 너머의 강줄기는 움푹 들어간 선으로 변했다. 한편 거칠어진 지표면은 안개에 휩싸인 서쪽으로 멀어질수록 점점 더 경사가 급해졌다. - P280
완만한 비탈에도 폐허의 잔재가 뒹굴었지만, 고도를 낮추자 착륙할 만한 지역이 꽤 많이 나타났다. 캠프로 돌아갈 때를 대비해 고개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을 선택한 후, 우리는 오후 12시 30분경 평지에 무사히 착륙했다. - P280
장비들은 착륙이 가능할 경우를 대비해 지층 조사용, 혹은 동굴에서의 암석 채취용으로 준비한 것이었다. 다행히 찢어 쓸 만한 종이가 충분해서 여분의 표본 가방에 넣었는데, 복잡한 내부로 들어갈 경우 전통적인 방법대로길을 표시하는데 사용할 생각이었다. - P281
사실 그때 우리는 봉우리에 가려져 있던 어마어마한 비밀에 어느 정도 시각적으로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인류가 출현하기 전인 수백만 년전 어느 존재가 건설한 원시의 성벽 안에 실제로 발을 들여놓는다는 생각은 두려움뿐 아니라 우주적인 비정상성이라는 오싹함마저 던져 주었다. - P281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니 성벽의 두께는 1.5미터에 달하고, 내부에는 따로 구획을 한 흔적이 없는 반면 안쪽 벽면에 줄무늬 조각이나 얕은 돋을새김이 보였다. 성벽 위를 저공으로 비행할 때 예상한부분이 맞아떨어졌다. 성벽의 아래 부분이 더 있는 것 같지만, 그 위치에서는 두꺼운 얼음층과 눈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P282
정찰 비행에서 얼음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은 건물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므로, 지붕이 남아 있고 내부가 깨끗한 건물로 들어간다면 원래의 지표면으로 향하는 통로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 P282
피버디 교수가 그곳에 함께 있지 않아서 아쉬움이 들었는데, 그의 공학 지식이라면 까마득한 옛날 그처럼 거대한 석조 블록을 어떻게 다루었을지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 P282
서쪽 하늘에서 소용돌이치는 수증기와 우리들 사이에 검은색 석조물이 괴기스럽게 엉켜 있었다. 그 불가해한 윤곽은 우리의 위치가 변할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띠었다. - P282
우리가 촬영한 사진들마저 그 도시의 기괴함과 끝없는 다양성, 초자연적인 거대함과 완벽한 이국의 정취를 일부만 보여줄 뿐이다. 변칙적으로 절단된 원추형 건물을 본다면 유클리드도 할 말을 잃었으리라. 도발적으로 균형을 파괴한 계단식 단, 구근 형태로 기이하게 확대된 축대, 기묘하게 배치된 기둥, 광적인 기괴함을 드러내는 별 모양의 5각형 혹은 5개의 홈이 파인 구조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 P283
이른 오후의 낮게 걸린 붉은빛 태양이 빛을 발산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발밑에 펼쳐진 광경은 서쪽 안개에 묻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햇빛이 한순간 짙은 안개에 가려지자, 돌연한 어둠에빠져든 발밑의 세계에서 나는 차마 입으로 표현하고 싶지 않은 미묘한 위협을 느꼈다. - P283
붕괴된 석조물을 기어올라 위압감에 움츠러들고 거대한 폐허에 왜소해지는 느낌으로 마침내 미로처럼 얽혀있는 도심에 들어섰을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스스로 놀랄 만큼의 자제력을 발휘했다. 솔직히 댄포스는 과민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는데, 캠프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기분 나쁜 억측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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