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심리학과의 한 선임 관리자에게 내 계획을 얘기한 것이다. 일전에 그녀와 나는 우리가 거주하는층이 얼마나 추하고, 연구실 분위기가 얼마나 음울한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는 우리가 그런 상태를 개선해야 한다는 데합의했다고,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한다고 믿었다. - P258

(전략).
화가 친구와 나는 이미 중간 관리자의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와 완고함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이미 조금 더 비싼 플랜 B를 마련해놓았다. 나무판을 붙이는 대신 벽에 칠할 페인트를 신중히 고르고, 중간중간에 다른 색 페인트로 포인트를 주기로 하는 한편, 어울리는 카펫과 커튼을 마련했다. 내가 고른 색들을 승인받기 위해 관리자들과 계속싸웠고, 결국에는 승리했다. - P259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측은 예비 교직원들을 내 연구실로 데려오기 시작했다. 토론토대학교는 이 정도로 창조적 자유를 허용한다는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는데, 내가 보기에는 코미디 그 자체였다. 나는오랫동안 이 모든 일에 관해 생각했다. 나에 대한 저항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다. 하도 의아해서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저런 내가이 연구실에서 진행할 연구가 두려운 걸까?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어떤 중요한 이유가 있을지도 몰라.‘ - P260

결국 학자들은 잠재적 해결책을 마련했다. 그들은 붉은 페인트 한통과 맨 끝에 헝겊을 처맨 막대기로 무장하고서 지프를 타고 무리 근처로 다가갔다. 그리고 누 한 마리의 궁둥이에 붉은색 점을 찍었다.
이제 그들은 그 개체의 행동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고, 잘만 하면 누의 행동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 P260

결국 학자들은 잠재적 해결책을 마련했다. 그들은 붉은 페인트 한통과 맨 끝에 헝겊을 처맨 막대기로 무장하고서 지프를 타고 무리 근처로 다가갔다. 그리고 누 한 마리의 궁둥이에 붉은색 점을 찍었다.
이제 그들은 그 개체의 행동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고, 잘만 하면 누의 행동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이제 무리에서 구별되는 그 녀석을 근처에 항상 잠복해 있는 포식자들이 사냥했다! - P260

목을 길게 빼고 있으면 칼이 온다. 이런 속담은 여러 문화에 존재한다. 영어 속담으로는, ‘높이 자란 양귀비가 제일 먼저 낫질을 당한다‘가 있다. 일본에는 ‘튀어나온 못이 제일 먼저 망치로 얻어맞는다‘
라는 속담이 있다. 이건 중요한 관찰이고, 그만큼 보편적이다. 예술적·창조적 활동은 위험은 크고 보상 가능성은 작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높은 보상이 돌아올 가능성이 존재한다.  - P261

예술은 장식이 아니다

단순히 파격적으로 보이려고 혐오나 공포 같은 부정적인 반응을 조장하는 예술이나 추상 미술은 종종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나 또한 전통적인 미 개념을 매우 존중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반응에 어느정도 공감한다. 전통을 업신여기며 예술가인 척하는 사람이 많다는사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진정한 영감이 담긴 작품과 사기성이 농후한 작품이 불완전하게라도 구별되며, 중요하지 않은 것은 대개 우리와 멀어진다. - P262

예술은 탐험이다. 예술가는 사람들에게 보는 법을 가르친다. 예술을 접해본 사람은 대부분, 예를 들어 인상주의 작품은 누가 봐도 아름다우며 전통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은 19세기 후반에는 인상파 화가들만이 지각할 수 있었던 방식이었다. - P262

아름다움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으로 다시 우리를 인도하며, 무엇이 냉소주의를 영원히 막아주는지 상기시킨다. 아름다움은 목표로 똑바로 나아가게끔 우리에게 손짓한다. 아름다움은 더 작은 가치와더 큰 가치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사랑, 유희, 용기, 감사, 일, 친구, 진리, 우아함, 희망, 미덕, 책임 등 많은 것이 인생을 살 만하게 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으뜸은 아름다움이다.

(중략).

방 하나를 할 수 있는 한 아흠답게 꾸며보라. - P264

법칙 7

최소한 한 가지 일에 최대한
파고들고, 그 결과를 지켜보라

열과 압력의 가치


사람이 빛이 난다고 할 때의 그 빛은 고도로 집중된 의식에서 발산되는 광채를 의미한다. 인간의 의식은 많은 부분이 시각적이기 때문에 빛이 있는 낮에 주로 활동한다. (빛과 관련된) 교화된다illumined거나 계몽된다enlightened는말은 특별히 자각하고 깨닫는다는 뜻인데, 흔히 영적인 자각 또는 깨달음과 관련이 있다. - P213

열과 압력은 석탄이라는 평범한 물질을 완벽한 결정구조와 희소한 가치를 지닌 다이아몬드로 변화시킨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영혼에 작동하는 힘들은 종종 서로 어긋나고 부딪친다. - P214

여럿으로 쪼개진 집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마찬가지로 허술하게 통합된 사람은 고난에 직면할 때 마음을 다잡지 못한다. - P214

내적 통일성이 부족하면 고통이 증가하고 불안이 커지고 동기가시들고 즐거움이 사라지며, 그 결과 우유부단해지고 뭐든 확신하지못한다. 탐나는 것 열 가지를 놓고 결정을 못한다면 열 가지 모두에게 고문을 당하는 셈이다. 모순되지 않고 잘 정의된 확실한 목표가 없다면 삶을 가치 있게 해주는 긍정적인 몰입감은 먼 나라 얘기가 된다. 또한 확실한 목표는 세계를 제한하고 단순화하여 불확실 ·불안·부끄러움을 줄여주고, 스트레스가 야기하는 소모적인 심리적 요인들을 경감한다. - P215

사회적 결과도 생물적 결과 못지않게 심각하다. 잘 통합되지 않은사람은 좌절이나 실패의 아주 작은 낌새에도 과잉 반응한다. 그런 사람은 심지어 자기 자신과 타협하지 못하는데, 잠재적인 미래를 논의할 때의 불안함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즐겁지 않다. - P216

목표를 세우고 겨냥하라. 이 모든 것이 성숙하기 위한 훈련의 일부이자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기 위한 일이다. 목표가 없으면 모든 것에끌리고 흔들린다. 목표가 없으면 갈 곳이 없고, 할 일이 없으며, 인생에 가치 있는 것이 없다. 가치는 선택지에 위계를 매기고, 낮은 것을희생하고 높은 것을 바라볼 때 생겨난다. 정말로 자기 앞에 놓인 선택지를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가? - P216

최악의 결정

내가 몬트리올의 맥길대학교 대학원에서 임상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을 때 일이다. 나는 5~6년이 걸리는 이 어려운 학위 과정을 이수하는 동안 사람들의 성격이 개선되는 걸 확실히 보았다. 그들의 사회성은 향상되었고 표현은 더 명확해졌다. 목표 의식은 더 뚜렷해지고 타인과의 관계는 더 좋아졌다. 또한 바르고 계획적이면서도 삶을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 P217

후에 교수가 되어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지도했을 때도 같은 현상을 목격했다. 학부생 가운데 실험실에 살다시피 한 학생들은 부담을 회피한 학생들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았다. 그들은 연구를 열심히 보조하여 연구팀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고, 동시에 남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쪼개서 자기 공부를 했다. - P217

과연 세상에는 전념할 만한 게 있긴 할까? 지금까지 나는 이 질문에 답이 될 수 있는 무수한 상황들을 목격했다. 내가 학부생, 대학원생, 교수, 임상심리학자, 연구자, 그 밖의 다양한 임시직을 거치는 동안 갈래길은 자꾸 나타났다. 그런 갈래길은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
특히 반쯤 성숙하고 방황하고 설익은 냉소를 즐기고 의심하고 회의하고 희망을 꿈꾸는 바보들에게도 나타난다(어리석음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이제 막 성인기에 접어드는 시기에 모두가 그런 바보 같은 시절을 겪는다). - P218

이 배우자나 저 배우자, 이 친구나 저 친구, 이 직업이나 저 직업에만족하고, 심지어 행복을 느낄 수는 있다. 어떻게 보면 이걸 선택해서 얻은 만족은 다른 걸 선택해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또한 각각의 선택에는 큰 결함이 있다. - P218

 변호사로서 일을 잘하려면 언어능력이 좋아야 하고, 목수로 성공하려면 기계를 다루는 기술이 필요한 법인데, 사람과 직업의 궁합이 좋지 않은 탓에 노력해도 목표에 이르지 못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실패는 결의의 부족, 겉만 번지르르한 의미 없는 합리화, 책임 거부에서 비롯된다. 이런 실패는 좋을 게 하나 없다. - P219

직업이나 직장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대개 닻을 내리지 못하고 표류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표류를 정당화하기 위해 낭만적인 반항이나 설익은 냉소와 염세주의를 앞세운다. 또한 아방가르드 정신에 상습적으로 공감하거나 알코올의존, 약물 사용, 순간적인 만족을탐닉하면서 절망적이고 목적 없는 삶을 위로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성공하는 삶과는 거리가 멀다. - P219

훈육과 통일성

한 가지에 집중하는 훈련은 어렸을 때 시작된다. 아주 이른 나이부터 아이는 기초적인 생존 본능에 해당하는 여러 감정과 동기들을 자발적으로 질서 있게 배치해, 타인과 함께할 협동과 경쟁의 전략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 P221

사회에 받아들여질 정도로 적절한 훈련을 받은 아이는 또래 친구를 만나면서 더 심도 있는 자아 통합 과정을 겪는다.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게임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훈련한다. 아이는 다른 모든 충동보다 게임의 지시사항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그 규칙과 목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법을 배운다. - P221

적절한 기능을 수행하고 잘 통합된 자아를 가진 개인은 현재의 욕구를 미래의 필요(다른 아이들과 잘 놀 필요)와 조화시킬 줄 안다. 이렇게 해서 후기 영아기의 듣기 싫은 비명은 아동기의 다채로운 게임에 묻혀 들리지 않게 된다. 그런 발달을 통해 아이는 사회에 소속되었다는 안정감과 게임의 즐거움을 모두 만끽한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이건 ‘억압‘이 아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 P222

따라서 사회화가 잘 이루어진 아이라고 해서 공격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공격적인 심리 상태에 고도로 능숙해지는 것이다. 그런 아이는 파괴적인 충동을 집중과 인내와 절제된 경쟁심으로 변화시켜 게임에서 성공한다. - P222

약간의 의구심을 품고 지금 여기서 어떤 게임을 해야 가장 좋은지논쟁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합당하다. 하지만 모든 게임이 불필요하다고 선언하는 건 합당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어떤 도덕이 불가피한 도덕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일 수는 있지만, 도덕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 P223

일단 사회적 세계의 압력으로 다양한 하위 인격이 통합되었다면,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다. 그런 뒤 고도로 체계화된 목표, 기술, 규칙을 익혀 직업 세계라는 더 진지한 게임에 참가해야 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구애의 몸짓도 배워야 한다. 아이는 자신의 인격을 다른 사람의 인격과 통합하여 짝을 이뤄야 하고, 그 관계를 사회안에서 오랫동안 평화롭고 생산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P224

하지만 통합과 사회화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 이유는 견습 기간에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이다(아이가 게임을 하는 법과 공정한 게임을 하는 진정한 승자가 되는 법을 동시에 배우는 것처럼 말이다.) - P224

도그마와 정신

한계를 가르치는 훈육은 게임의 전제 조건이자 통일성 발달의 필수조건으로, ‘하지 말지니라 Thou Shalt Nots‘라는 금지로 보는 게 도움이 된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강조하는 규칙들이 정해지면 바람직한 행동들이 수면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규칙들을 지키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성질이나 본질을 지닌 성격이 발달한다(개인의 바람직한 성향이 발달한다). - P226

십계명은 게임이 반복될 수 있는 안정된 사회가 지켜야 할 최소규칙이다. 십계명은 「출애굽기」에 명시된 규칙이자 ‘잊을 수 없는 이야기‘의 한 부분이다. - P227

훈련을 통해 규칙을 익히고 충실히따름으로써 통합을 이루는 동안, 그 사람은 동시에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가장 높은 이상으로 인도되거나 그 이상을 모방한다. 그 ‘이상‘은
‘도덕적‘이라는 말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요소이자 모든 규칙을 선하고 정의롭고 필수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 P229

서양 문화는 유대-그리스도교에서 발원한 까닭에 이 심오한 드라마에 ‘무의식적으로‘ 기초해 있다.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는 도그마를 완벽히 숙달한 결과로서 정신이 출현한 존재를 나타낸다. 그 정신은 나중에 도그마가 될 것을 창조하는 힘이자 그런 오래된 전통을 거듭 초월하는 힘이다. - P229

한 가지를 위해 진심으로 노력한다면 당신은 변할 것이다. 또한 한때 여럿이었던 당신은 하나가 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 하나가 잘 성장했을 때 당신은 그저 희생 노력 · 집중을 통해 모양을 갖춘 훈련된 존재에 머물지 않고, 사회와 합일을 이루는 통일된 인격으로서 규율 또는 문명을 창조하고 파괴하고 변화시키는 존재가 된다. - P230

최소한 한 가지 일에 최대한 파고들고, 그 결과를 지켜보라.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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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DNA는 무엇인가

유전자에 관해 말하지 않으면서 후성유전학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물감에 관해 말하지 않으면서 그림 이야기를 하려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니 후성유전학 이야기로 더 깊이 들어가려면 그 전에 유전자에 관해 간단히라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고, 최소한 그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는 해야 한다. - P53

그 결과 오늘날의 생물학자들은 몇 가지 다른 유전자 개념 사이에서 자유롭게 오가는데, 안타깝게도 그 개념들이 서로 그렇게 잘 맞아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¹ - P52

4장DNA란 무엇인가
1 1a. Gericke, N. M., & Hagberg, M. (2010), 1는 유전자 기능 묘사에 관한 개념적 차이들Conceptual variation in the depiction ofgene function in upper secondary school textbooks, Science and Education, 19, 963-994.
1b. Griffiths, P. E., & Neumann-Held, E. M. (1999). Themany faces of the gene. BioScience, 49,656-662.
1c. Keller, E, F. (2000). (197) The century of the gene). Cambridge:Harvard University Press.
1d. Keller, E. F. (2014). From gene actionto reactive genomes. Journal of Physiology, 592, 2423-2429. - P434

20세기 전반기에 과학자들은 고전적 분자 유전자 개념dassical molecular gene concept² 이라는 것을 확립했는데, 이는 유전자가 세포핵 속에 자리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염색체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 P53

2 Griffiths & Neumann-Held, 1999 - P434

단백질은 요소들이 선형으로 배열되어 만들어지기 때문에줄처럼 긴 모양으로 보여도, 이 ‘줄‘들은 각 단백질의 종류에 따라고유한 방식으로 접히며 단백질이 접히는 이 고유의 방식은 보통서열에 따라 결정된다. 단백질이 중요한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그 결과 각 단백질은 종류마다 고유한 삼차원 형태를 띤다. - P54

각 세포의 바깥 표면을 이루는 세포막에 박혀 있는 단백질들이 있는데, 바로 이 단백질들 덕분에 세포가 서로를 인지할 수있다. - P54

내가 이 책에서 이야기할 ‘유전자‘는 이런 고전적인 분자 유전자‘이며, 이 유전자들이 맡은 일은 딱 하나, 바로 단백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단백질은 우리의 형질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분자 유전자들은 언제나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 P55

5 Griffiths & Neumann-Held, 1999, - P435

곤경에 빠진 유전자

고전적 개념의 분자 유전자란, 세포질 안에서 물리적으로단백질을 생산하는 세포소기관⁶에게 염기서열 정보를 제공하는DNA 분절이다. 하지만 이 개념의 유전자도 아직 이론상으로만 존재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고전적 분자 유전자 개념은 유용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현실을 그리 잘 포착하지 못하는 듯하다.⁷ - P56

6 Oyama, S. (1992), 전달과 구축: 유전의 단계와 문제Transmission andconstruction: Levels and the problem of heredity. In E. Tobach & G. Gremberg (Ed.)(사회적 행동 수준: 진화적 및 유전적 측면: 제3회 TC 슈메랄라 컨퍼런스에서수상한 논문: 사회적 행동의 진화와 통합적 수준 Lock of samall Besteemoon. Fullertonyand genetic aspects Award winning papers from the Third TC Schele Canisationof social behavior and integrative levels), Wichita, KS: TC, Schneida Research FundP.57.

7. 고전적 분자 유전자 개념 이전에 구상되었던 유전자 개념들과 더 최근에 구상된 개념들을 다 포함하여, 생명과학 분야의 이론가들이 구상한 다른 모든유전자 개념에 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 P435

‘유전자‘라는 단어가 얼마나 흔히 사용되는지 생각해보면, 이 단어는 분명 특정한 무언가를 의미할 것만 같다. 특히 과학적기원을 지닌 기술 용어이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유전자 개념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 P57

. 유전자라는 말을 쓸 때 내가 의미하는 바는, 단백질(또는 어떤 생물학적 기능을 수행하는 산물)을 만드는 데 쓰이는 서열 정보를 품고 있는 DNA의 분절 혹은 분절들이다. 하지만 현대 생물학자들이 ‘유전자를 이야기할 때는 어느 특정한 한가지를 의미하는 게 아니며, 유전자는 오늘날까지도 근본적으로 가설상의 개념으로 남아 있다는 점을 기억해두자. - P57

5. 심층 탐구: DNA

어떤 후보 분자가 멘델이 말한 유전 인자로 인정되려면 몇가지 속성을 갖추어야 했다. 첫째, 그 분자는 부모로부터 자녀에게전달될 수 있어야 하며, 둘째, 수정란의 세포분열로 만들어지는 두개의 ‘딸세포‘ 각각에 전달될 수 있어야 하고, 셋째, 해당 종에 적합한 특징을 갖춘 유기체가 만들어지도록 딸세포의 구조와 기능에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예컨대 인간 배아는 인간 아기로 자라나라면 인간의 심장, 뼈, 뇌 등을 발달시킬 수 있어야 한다), - P59

이번 장에서 다루는 정보는 생물학 기초 지식을 갖춘 사람에게는 전혀 새롭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들도 DNA와 그 작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입문 단계의 기초 지식을 소개하려 한다. 그런 다음 선택적 스플라이싱(접합/잘라 이음), 비부호화 DNA, 마이크로RNA와 작은핵 RNA 등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뒤의 ‘심층 탐구‘ 장들도 읽고자 하는 독자에게는 이정보가 도움이 될 것이다. - P61

꼬인 사다리, DNA의 기초

각 ‘염색체‘는 기본적으로 아주 긴 DNA 한 가닥이 돌돌 말린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큰 타래로 감겨 있던 긴 털실 한 올을 풀어서 덩어리 하나로 빽빽이 뭉쳐놓은 것 같다고나 할까. 한편
‘DNA 분자‘ 하나는 아주 긴 화학적 가닥 두 개가 서로 꼬여 있는구조인데, 이는 실 한 올도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개의 섬유가닥이 서로 휘감으며 한 가닥의 실을 이루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 P61

 영어 단어들은 철자에 따라 아주 짧은 것도 있고 긴 것도 있지만, DNA 서열의 의미를 지닌 요소들은 ‘C-A-G‘나 ‘T-A-T처럼 항상 염기 3개로만 이루어진다. 이렇게 염기 3개로 이루어진 유전부호의 단위를 코돈codon 이라고 한다. - P62

코돈이 중요한 이유는, DNA 가닥의 정보를 사용해 단백질을 만들 때, 이 가닥에 늘어선 각각의 코돈에 따라 그 코돈이 부호화하는 특정 단백질 분자가 단백질 서열에 추가되기 때문이다. 단백질도 DNA와 마찬가지로 일정 서열로 늘어선 요소들이 긴 사슬을 이루는 분자이지만, DNA가 A, C, G, T라는 염기들로 구성되는 반면 단백질은 아미노산이라는 요소들로 구성된다. - P62

 단백질을 다른 단백질과 구별하는 것이 단백질의 형태이므로, 이를테면 세로토닌이라는 단백질이 뇌에서 신경전달물질로서 기능하게 하고, 헤모글로빈이라는 단백질이 혈액 속에서 산소 운반 기능을 하게 하는 것은 그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 즉 그에 대응하는 유전자의 염기서열이다. - P63

단백질은 사실 염색체가 있는 세포핵 안이 아니라 세포질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단백질이 만들어지려면 염색체에 들어있는 서열 정보가 핵에서 나와 세포질로 이동해야 한다. - P63

일단 RNA 전사물이 세포질 속 단백질 생산 기구에 도착하면, 단백질 생산 기구는 그 서열 정보를 사용해 특정 단백질을 만드는데, 이 과정을 번역이라고 한다. 번역은 DNA에서 뽑아온정보를 세포 기구가 효과적으로 ‘읽고 그 정보를 사용하여 단백질을 만드는 과정인 셈이다. - P64

단백질을 만드는 데는 1.2퍼센트만 사용된다

방금 내가 한 설명과 직유가 괜찮았다면, 이 시스템이 마치 굉장히 똑똑한 엔지니어가 설계한 단순명료한 시스템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시스템이든 자연선택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그 시스템에는 그리 효율적이라 할 수 없는 괴상하고 특이한 면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는 게 좋다(그 이유는 13장에서 이야기할 것이다). - P64

생물학자들은 단백질을 부호화하지 않는 이런 DNA를 비부호화 DNA라고 부른다.³ 생물학자들이 비부호화 DNA의 존재를 처음 알아차리기 시작한 40년 전에는 이 물질들이 모두 아무 기능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이걸 ‘정크 DNA‘라 불렀다.⁴ - P65

3 Mattick, J. S., & Makunin, I. V. (2006). ] RNA Non-coding RNA.
Human Molecular Genetics, 15, R17-R29.

4 Ohno, S. (1972). DNA So much "junk" DNA inour genome. In H. H. Smith (Ed.), (Evolution of genetic systems).
Vol. 23. Brookhaven Symposia in Biology (pp. 366-370), New York: Gordon& Breach. - P436

마침 분자생물학자들이 비부호화 DNA의 특정 분절들을해독해냈다. 50여 년 전, 프랑스의 생물학자 프랑수아 자코브와 자크 모노가 대장균 DNA의 특정 구간이 단백질 생산을 위한 서열정보를 제공하는 데는 쓰이지 않지만 단백질 생산을 조절하는 데는 쓰인다고 보고했다.⁶ - P66

6 6a. Jacob, F., & Monod, J. (1961).
Geneticregulatory mechanisms in the synthesis of proteins. Journal of Molecular Biology, 3,
318-356.
6b. Jacob, F., Perrin, D., Sanchez, C., & Monod, J. (1960). 2: 48자(오퍼레이터)가 발현을 조절하는 유전자군Operon: A group of genes with theexpression coordinated by an operator. Comptes Rendus Hebdomadaires des Séancesde l‘Académie des Sciences, 250, 1727-1729. - P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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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청소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하라"(『12가지 인생의 법칙』 6장)라는 말로 유명해졌다. 평범한 충고였지만 내가 꽤나진지했고, 방 청소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 그 인기에한몫한 듯싶다. 그런데 나는 거의 3년 전부터 내가 일하는 방을 제대로 정돈하지 못했다(나는 그 방을 손대지 않은 상태로 놔뒀다). 그동안 나는 정치적 논쟁에 휩싸였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우편물은 산더미처럼 쌓였고, 줄곧 질병에 시달렸다.  - P235

내가 그 방에서 찍은 비디오의 정지 화면인데, 배경이 아주 엉망이다(내 꼬락서니도 그보다 썩 낫다고 말하기 어렵다). (중략). 어쨌든 내게는 문제의 방으로 돌아가 깨끗이 정리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잡동사니를 깨끗이 치우고 싶은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방을 아름답게 꾸미고 싶다는 것이다. - P236

우리는 우리 문명이 축적해온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서 예술(그리고 문학과 인문학)을 공부한다. 예술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는가? 아주 좋은 생각이며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오랫동안 고민해왔고, 이상하지만 비슷한 게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작품을 많이 남겼다. - P236

예술품을 사라. 당신에게 말을 거는 작품을 구입하라. 진정한 예술품은 당신의 삶에 파고들어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진정한 예술품은 초월자를 들여다보는 창이다. 우리는 유한하고 제한된 존재, 무지에 매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창이 필요하다. - P237

예술은 문화의 토대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심리적 통일성을 이루고,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지낼 수 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마태복음」 4장 4절)라는 말은 아주 정확한 지적이다. 우리는 아름다움으로 산다. - P237

기억과 환상

(전략).
 어른이 되고 나서는 예전과 같지 않다. 나는 페어뷰에서 9년을 살면서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보냈는데, 지금도 그곳의 거리가 고화질로 생생하게 그려진다. 반면 지금 나는 토론토에서 그 두 배가 넘는 세월을 살았지만, 우리 집 주변에 어떤 집들이 있는지 아주 막연하게만 알고 있다.
어른이 되어 이렇게 변한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나는 지금 사는 동네가 고향 집처럼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 P239

나이를 먹을수록 지각은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기억으로 대체되었다. 나는 몇몇 측면에서 더 능률적으로 바뀌었지만, 그 대가로 세계의 풍부함을 느끼는 경험이 빈약해졌다. 젊은 시절 내가 보스턴에서 계약직 교수로 일할 때, 내 아이들은 겨우 두 살과 세 살이었다. - P239

아이들은 특별한 종착지나 목적, 일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 구불구불한 동네 길을 따라갔다. 도중에 강아지 · 벌레 · 지렁이를 만나면 즐거워했으며, 임의로 만들어낸 게임을 하며 신나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긴장을 풀고 현재에 집중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 P240

 나는엄밀하고 예민하고 목표지향적이었으며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지만, 그런 효율성·성취 · 질서를 위해 많은 걸 외면해야 했다. 내 눈은더 이상 세계를 향해 있지 않았다. - P241

실제로 어떤 이들은 유년기의 황홀한 눈을 잃지 않는다. 특히 예술가들이 그렇다(그러니 예술가리라). 영국의 화가이자 판화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도 그런 사람이었다. 블레이크는 독특한 환상의 세계에 거주했으며,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말한 "물자체Ding an sich"¹ (경험을 초월하는 본체-옮긴이)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깝게 지각했다. - P243

법칙 8.

1. N. F. Stang, "Kant‘s Trnascendental Idealism,"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Winter 2018), ed. E. N. Zalta, plato stanford.edu/archives/win2018/entries/kant-transcendental-idealism. - P448

우리는 위대한 그림을 찬양한답시고 그림에 장식이 많은 사치스러운 액자를 두르지만, 사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 영광이 액자 안에서 끝나기를 바란다. 그 경계짓기,
그 테두리 때문에 우리에게 친숙한 세계는 변하지 않고 원래대로 남겨진다. 우리는 아름다움에 한계를 부과해, 그 아름다움이 밖으로 뻗어나와 익숙한 모든 것을 어지럽히는 걸 원하지 않는다. - P246

우리가 아는 땅, 우리가 모르는 땅,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땅

우리는 실제로든 관념적으로든 우리가 아는 땅에 거주한다. 하지만 그 바깥에 놓인 것을 상상해보자. 그곳에는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부분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거대한 세계가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아는 그 공간 바깥에 아무도 모르는 세계가 존재한다. - P248

집에 혼자 있다고 가정해보자. 깊은 밤, 주위는 어둡다. 이때 예기치 못한 소리가 들린다. 당신은 깜짝 놀라고, 순간 얼어붙는다. 이것이 최초의 변환이다. 미지의 소리(어떤 패턴을 가진 소리)가 얼어붙는자세로 변한 것이다. 다음으로, 심장이 빨리 뛰면서 당신은 어떤 행동을 할 준비를 한다.³ 이것이 두 번째 변환이다. - P249

3. D. C. Fowles, "Motivation Effects on Heart Rate and Electrodermal Activity:Implications for Research on Personality and Psychopathology," Journal of Researchin Personality 17 (1983):48-71. 심장은 보상에 뛰지만, 다가오는 포식자를 피하라고 손짓하는 안전이 바로 그런 보상이라고 정확히 지적했다. - P448

예술가는 홀로 변경에 서서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변환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진해서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 뒤, 거기서 한 조각을 떼어내 이미지로 변환한다. 춤으로 변환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드러난 세계를 말이 아닌 몸동작으로 표현해서 전달하는 것이다. - P250

창조적인 사람이 도시에서 하는 역할을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그들은 약간 궁핍하다. 예술가로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기 때문인데, 사실 그런 가난은 예술의 동력이 되기도한다(궁핍의 유용성을 과소평가하지 마라). 그들은 도시를 탐험하고, 한때는 좋았으나 지금은 쥐가 돌아다니고 범죄가 만연할 법한 지역을발견한다. - P250

예술가들이 혼돈을 질서로 변화시키는 그런 변경은 거칠고 위험한 곳이다. 그곳에 사는 동안 예술가는 혼돈에 빠져버릴 위험에 수시로 직면한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항상 인간이 이해하는 영역의 가장자리에 살아왔다. 예술과 사회의 관계는 꿈과 정신 활동의 관계와 동일하다. 꿈을 꾸고 있을 때 우리는 대단히 창조적이다. - P251

예술가들도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정말새로운 일을 하고 있다면, 그럴 만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고 그걸 어떻게 나타냈는지를 말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춤·음악·그림으로 표현할 필요가 사라진다. 하지만 예술가를 이끄는 것은 느낌, 패턴을 감지해내는 직관이다. - P252

일전에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위대하고 유명한 르네상스 그림들을 소장한 전시실이 있다(팔수만 있다면 그림 하나가 몇억 달러는 족히 될 것이다). 그 전시실은 신자와 무신론자 모두에게 신성한 장소, 일종의 성소였다. - P253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그 먼거리를 이동해 이곳에 와서, 작품 설명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림들을 보면서………… 다들 자기가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그 그림들 중에는 훌륭한 구도를 보여주는 걸작 <원죄 없는 잉태를 하신 성모The Virginof the Immaculate Conception>가 있었다. - P253

 어쨌든 신은 죽었는데(또는 그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럼에도 저 그림은 왜 여전히 가치 있을까? 왜 다른 그림들과 함께 이방, 이 건물, 이 도시에 있으면서 만지지도 못하게 엄격히 보호될까? 왜 이런 그림들은 값을 매길 수가 없을까? 이미 모든걸 가진 사람들은 왜 이 작품들을 탐낼까? 왜 이 그림들은 현대의성소에 이토록 조심스럽게 보관되어 있을까? 왜 전 세계 사람들은 마치 의무를 다하듯, 심지어 선망했던 일이나 필요한 일을 하듯 이곳을 방문할까?‘ - P254

방 하나

우리 부부가 사는 곳은 작은 집 두 채가 쌍둥이처럼 붙어 있는 반독립주택으로, 거실이 13제곱미터(4평) 남짓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거실을 포함해 집안 곳곳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애썼다. 거실에는 큰 그림이 몇 점 걸려 있다(2차 세계대전이나 공산주의의 승리를 주제로 한 소련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그림들이라 대중적인 취향은 아니다). - P255

 냉전시대소련의 인상주의는 독특한 개성이 있었다. 고전적인 프랑스 풍경화와 달리 대부분 거칠고 가혹한 풍경을 묘사하고 있어 캐나다 서부에서 자란 내 취향과 잘 맞았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찾는 동안 나는 감히 말하건대,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많은 그림을 접했다. - P256

비슷한 시기에 나는 대학 연구실도 아름답게 단장하려고 시도했다. 이미 공들여 꾸며놓은 연구실을 떠나야 했기에 나는 우리 집 리모델링을 도와준 화가의 도움을 받아 새 연구실을 개조하기로 했다(나는 그의 큰 그림을 여러 점 구입했고, 우리 집에도 걸어놓았다). 새 연구실은 창문이 막히고 형광등이 비추는 1970년대 공장처럼 끔찍했다. 감각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라면 30년 동안 그곳에 앉아 있느니 차라리 죽고 싶을 것이다. 노조의 의무 조항과 그에 대한 관리자들의 해석때문에 교직원이 연구실을 크게 개조하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화가 친구와 나는 대안을 만들어냈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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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우윳빛 유리창이 달린 부장의 집무실 문을 여는 순간, 레모 에르도사인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이제 모든 게 끝장이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돌이킬 방법은 없었다. - P7

직원 급여 명세서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있는 사장, 안락의자에 기댄 채 발끝으로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는 부장, 그리고 다소곳한 자세로 책상 옆에 서 있는 구알디, 그 누구도 에르도사인의 인사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이윽고 부장이 고개를 들고는 사무적인 투로 말했다.
"얼마 전에 당신이 회사 공금 600페소를 횡령했다는 고발을접수했습니다."
"정확히 600페소 7센타보입니다." - P8

"행색이 왜 그 모양이오?"
사장이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수금원 노릇을 해 가지고 얼마나 벌겠습니까?"
"그러면 빼돌린 돈으로는 뭘 했소?"
"전 돈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좋소. 그러면 그간 작성한 장부를 제출할 수 있겠소"
"원하신다면 오늘 낮까지 제출하겠습니다."
단호한 태도로 대답한 덕분에 에르도사인은 잠시나마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P8

"그럼, 나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도 수금 업무를 해도 되는지......."
"그건 안 됩니다. 갖고 있는 영수증은 모두 수아레스 씨에게넘기고, 내일 세 시까지 여기로 나오세요. 아까 말한 것들 잊지말고 말입니다."
"네・・・・・・, 모두 준비해 오겠습니다." - P9

나중에서야 그는 자기를 고발한 자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 P10

절망의 그림자

에르도사인이 회사 돈을 횡령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부르든 그따위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뇌 깊숙한 곳에 무쇠처럼 단단한 정적이 동그랗게 똬리를 틀고 있어서 ‘도둑놈‘이란 말도 그에게 별다른 충격을 주지못했던 것이다. 그저 자신의 고통과 불행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 P10

 에르도사인은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고도 어떤 범죄라도 저지를 수 있는 상황, 다시 말해서 자신의 행동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그런 시간에 대해 잘알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데 판사라고 그러한 상황을 어떻게이해할 수 있겠는가. - P10

물론 에르도사인이 공금을 더 횡령하려고 회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가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회사에 남아 있던 이유는 뭔가 특별한,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렸기때문이다. 눈앞으로 서서히 다가오던 파국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줄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하게 만들어줄 엄청난 사건을 말이다. - P11

이는 에르도사인이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처음으로 구역질이 치민 순간 떠올린 생각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사는 거지?"
에르도사인이 자주 이런 막연한 질문을 던지는 것도 따지고보면 그의 마음을 지배하던 불안감, 다시 말해 내일이 단순히오늘의 반복이 아닌 그런 삶을 왜 그토록 간절히 바랐는지 그 원인을 밝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 P11

‘난 기껏해야 남의 집 하인 정도밖에 안 될 인간이야. 있잖아, 싸구려 향수를 뿌리고 돈 많은 창녀 주변이나 얼쩡대는 그런 비굴한 놈 말이야. 그 여자의 애인이 거실 소파에서 담배를피우고 있는 동안, 방 안에서 그녀의 브래지어를 채우면서 비위나 맞추는 그런 작자‘ - P13

‘그래, 정말이지 난 평생 남의 집 하인 노릇밖엔 못 해먹을놈이야. 내 영혼에는 온통 비열한 생각만이 꽉 차 있어‘
이처럼 있는 대로 자신을 능욕하고 짓뭉개자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짜릿한 쾌감에 에르도사인은 이를 꽉 깨물었다.
또 한번은 이런 상상도 했다. 그는 평생 하느님만 섬기며 독신으로 살아온 어느 할머니의 침실에서 무거운 요강을 들고 살며시 빠져나오고 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집에 사는 부지런한사제가 자신을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을 건넨다. - P14

에르도사인은 잘 알고 있었다. 영혼을 더럽히면서까지 스스로를 능욕하고 짓밟고 있다는 것을. 그가 일부러 자신을 더럽고 추잡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어쩌면 악몽과도 같은 나락으로 떨어져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고 평생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 P14

에르도사인은 언젠가 아내가 다른 남자의 품으로 달아나리라는 것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그의 고뇌는 깊어져만 갔다.
그래서인지 처음으로 공금 20페소를 자기 주머니에 넣었을때, 그는 ‘그 일‘이 너무 쉽고, 싱겁게 끝나서 놀랐다고 했다.
돈을 훔치기 전까지만 해도 수시로 닥쳐올 양심의 가책을 이겨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에르도사인은 속으로 다짐했다. - P15

 워낙 박봉에 시달리던 터라 그 뒤로도 그는 회사 공금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의 월급은 80~100페소, 많이 받아야 120페소 정도였고, 그나마 수금하는 돈의 액수에 따라 일정하지도않았다. 이는 그가 거래처에서 수금하는 돈 100페소당 일정 비율로 정해진 수수료를 월급으로 받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그였지만 이따금 수금이 잘 되면 수중에 4000~5000페소나 있을 때도 있었다. - P16

게다가 제당 회사의 엉성한 관리 체계도 그의 공금횡령을 용이하게 해주는 데 일조했다. - P17

운명의 소용돌이

에르도사인의 삶은 분명 별난 데가 있었다. 마음속에 손바닥만한 희망이라도 생기면 그는 아이처럼 서둘러 거리로 뛰어나가곤 했다.
그리고 버스를 잡아타고 가다가 팔레르모나 벨그라노에서내려서는 생각에 잠긴 채 적막에 싸인 거리를 돌아다녔다. - P17

아, 브라질! 브라질이란 이름이 떠오르자 유치하고 단순하기만 하던 그의 꿈이 제법 구체적으로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하얗다 못해 분홍빛으로 빛나는 해변을 쪽빛 바다가 수줍은 듯 떨리는 손길로 애무하고, 하늘에는 눈부시게 타오르는 태양이 걸려 있다. 이제 그녀의 얼굴에 서려 있던 슬픔도 깨끗이 사라졌다. 교복처럼 청순한 흰색 실크 옷을 입은 그녀는 겉으로는 소녀같이 수줍게 웃고 있어도 성숙한 여인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 P18

 이미 고통에 짓눌려 무디어질 대로 무디어진 그의 판단력은 이제 완전히 마비되어 버렸다. 이성을 잃은 그는 포주 자리라도 알아볼 요량으로 미친 듯이 걸어갔다. 남의 돈에 손을 댄 자의 두려움을 그는 뼛속 깊숙이 느끼고 있었다. 한낮의 강렬한 햇빛이 해변의 초석 봉우리에 부딪히며 작렬할 때처럼 눈부신 빛을 내며 번뜩이는 그런 두려움을 말이다. - P19

그래서 그는 후덥지근한 시에스타² 시간의 눈부신 노란 햇살을 받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지저분한 사창가를 찾아 뜨거운 모자이크 보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에르도사인이 찾던 곳은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현관에는 오렌지 껍질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고, 복도의 벽에는 군데군데빗물이 샌 자국이 나있으며, 철망으로 덧댄 유리창에는 빨간색이나 초록색 천을 덮어놓은 그런 집 말이다. - P19

에르도사인은 돌연 자괴감에 휩싸였다. 영혼마저 굳어버린듯했다. 너무 가난해서 아픈 몸을 이끌고 남의 집 세탁부 노릇을 해야 했던 가련한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기 자신이 역겨워진 그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여자에게 돈을 지불하고는 도망치듯 달려 나와 버렸다. - P21

에르게타

오전 열 시경 에르도사인은 페루가와 마요가의 교차로에 이르렀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었다. 바르트는 결코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고, 이젠 감옥에 갈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몸서리가 쳐졌다.
약제사 에르게타가 카페에 앉아 있었다. - P21

천박한 행동과 권태에 찌든 모습, 에르게타의 모습은 영락없는 노예 상인이었다. 그런데 자기 쪽으로 다가오는 에르도사인을 발견하자 그의 얼굴에 아이처럼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띠며 악수를 청하는 그를 보면서 에르도사인은 잠시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 녀석의 미소에 넋을 잃은 여자들이 얼마나 될까? - P22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것처럼 황당무계한 말만 내뱉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에르도사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갑자기 희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는 에르게타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지금도 도박하나?"
"그럼. 나의 지극한 신앙심에 예수님께서도 감동하셨는지내게 룰렛 게임의 비밀을 일러주셨지." - P23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에르도사인을 쳐다보던 에르게타가왼쪽 눈을 찡긋하면서 말을 이었다.
"사실 내가 하느님을 만나고 또 여러 번 신비로운 세계에 빠져든 뒤로 쓸데없는 일을 너무 저지른 것 같아. 예를 들어 그런천한 여자와 결혼한 거라든지 말야…………."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있지?"
"글쎄・・・・・・ 인간이 본디 착하다……………. 틈만 조금 보여도 잡아먹으려 들고 미친놈 취급해 버리는 이런 세상에서 그걸 믿는다는 게......."
에르도사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 P24

"두 번 해서 5000페소나 땄는데 무슨 소리야."
"뭐 그럴 수도 있지만, 타락의 구렁텅이에서 자넬 구해 준건 그따위 룰렛의 비결이 아니라 자네 마음속에 있는 아름다운영혼이라고. 자넨 정말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예컨대곧 감옥에 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자에게 자비를 베푼다든지."
"그건 그렇지." - P25

"이해가 가. 그런데 자네의 운명은 어떤 걸까…………. 사람의운명이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거지만 왠지 자네 앞에는멋진 길이 펼쳐져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보통 사람들은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뭔가 다른 길 말이야."
"난 세계를 지배하는 황제가 될 거야, 알겠어? 일단 룰렛 게임으로 돈을 엄청나게 벌 거야, 최대한 많이. 그러고 나서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에 솔로몬 대사원을 다시 지을 거야......." - P26

"그건 안 되지. 성경의 가르침을 잊거나 게을리 하면 그런마음이 생기기 마련이야.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사장의 돈을 훔치거나 회사 돈을 횡령하지 않아. 또 하룻밤 사이에 감옥에 가야 할 딱한 처지에 놓일 일도 없을 텐데."
생각에 잠긴 에르도사인은 코를 문지르며 그에게 말했다. - P27

그때 갑자기 에르도사인은 에르게타의 팔을 잡고 울먹이며소리쳤다.
"내가 감옥에 가게 생겼어, 알겠어? 600페소 7센타보를 훔친놈이 바로 나란 말이야." - P27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성경의 말씀대로 자네에게 고난의시대가 도래한 거야 보게, 난 절름발이 창녀 이폴리타⁴와 결혼까지 했잖아. 아버지가 아들을 상대로 일어서고, 아들은 아버지를 상대로 일어서지 않았는가 말이야. 혁명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와 있어. 더군다나 자네는 남의 돈을훔친 도둑놈에다가 사기꾼 아냐? 혁명이 눈앞에 와 있는데 슬퍼할 일이 뭐 있어?"
"아무튼 내 말 좀 들어봐…………. 자네라면 나한테 600페소 정도 빌려줄 수 있지 않을까?" - P28

4) Coja. 원래는 다리를 저는 여성이라는 뜻이지만, 속어로 몸을 파는 여자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에르게타와 결혼한 이폴리타의 별명일 뿐 그녀가 절름발이라는 건 아니다. - P417

증오심

에르도사인의 삶은 끔찍하게 고통스러웠다. 그의 마음을 짓누르던 고통은 도시 상공에 난마처럼 얽혀 있는 전차 케이블을따라 지평선을 향해 끝없이 퍼져갔다. 갑자기 그는 자신의 괴로움을 발로 밟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황소의 뿔에 찔려 내장이 찢어진 말이 고통을 못 이겨 몸부림치듯, 그 역시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폐에서 피가 한 방울씩 빠져나가는 것처럼고통스러웠다. 숨 쉬기조차 힘들었다. - P29

커피를 주문한 에르도사인은 손을 이마에 댄 채 대리석 벽을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많은 돈을 도대체 어디서 구하지"
그 순간 갑자기 아내의 사촌인 그레고리오 바르수트 생각이떠올랐다.
이제 기이한 행동을 일삼는 에르게타 따윈 신경 쓸 필요가없었다. 에르도사인의 눈앞으로 그레고리오 바르트의 근엄한 모습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 P30

바르트가 그런 말을 꺼내면 에르도사인은 서둘러 부인하고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애를 썼다. 그러면 바르트는 언제나 거실의 남동쪽을 살피며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몇 시간이고 계속 지껄여댔다.
‘저기에 대체 뭐가 있기에 저토록 집요하게 쳐다보는 걸까?
그런 모습을 보면 바르트 또한 뭔가 석연치 않은 괴로움과질투심 때문에 고통받으며 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 P31

그러던 어느 날 밤, 웬일인지 엘사가 거실에 나와 있었다. 이때다 싶었던 그레고리오 바르트는 두 부부 앞에서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꺼냈다.
"내가 갑자기 미쳐서 너희 둘을 다 쏴 죽인 다음, 나도 자살해 버린다면...... 와, 생각만 해도 근사한데, 안 그래?"
그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거실의 남동쪽을 비스듬히향하고 있었다. - P31

하는 수 없이 에르도사인과 바르트는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따라 바르트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해 보였고, 좁은 이마에서 경련이 일기도 했다. 그리고 이따금 큰 손으로 구릿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곤 했다.
왜 그리도 바르수트를 미워하게 된 건지, 에르도사인 자신도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 봤을 때는 매우 비열하고 저속한 인간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가 꾸었다는 꿈 이야기를 들어보면 꼭 그런 부류의 인간 같지만은 않았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모호하면서도 이상하고 미묘한 내면세계를 가진 자 같았다. - P32

초조해진 에르도사인의 마음에 인 동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손마디를 하나하나 꺾어봤지만 되레 피로만 가중될 뿐이었다. 더군다나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해도 마치 입술에 아교라도 바른 것처럼 입이 쉽게 떨어지지가않았다. - P33

"자넨 내가 오는 게 그리도 싫어?"
어느 날인가는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옆에서 보기불안할 정도로 기분이 들떠 있었다. 마치 술에 취해 유전에 불이라도 지르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정신 사납게 식당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그는 별안간 에르도사인의 등을 툭 치며 이렇게 묻는 게 아닌가.
"이봐, 어때? 어떻게 지냈냐고? 잘 지냈어?"
그 순간 바르트의 눈에서는 묘한 광채가 번득였다. - P34

"그러면 바르트가 뭐라고 생각하겠어? 자기가 오는 게 싫어서 이런다고 여길 거 아냐. 그럴 바에는 앞으로는 오지 말라고 하는 게 더 낫지!"
사실 에르도사인이 이런 말을 내뱉은 건 자신의 비겁함을 아내에게 숨기고 싶어서였다. 바르수트를 향한 까닭 모를 증오심은 암세포처럼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바르트의 얼굴만 봐도분노가 치밀었고, 그자가 처참하게 죽길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이런 속셈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 P35

어느 날 해 질 무렵, 두 사람은 한잔하러 집을 나섰다. 주문한 술과 겨자 소스를 뿌린 감자 샐러드가 나왔다. 바르트는어디 한번 먹어볼까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쑤시개로 감자 한조각을 집어 드는가 싶더니, 사람들의 손때와 담뱃재로 새까매진 대리석 테이블 위로 샐러드를 엎어버리는 게 아닌가?  - P35

에르도사인은 바르트가 틀림없이 자신을 증오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상대에게 속마음을 너무 많이 보여 주고 나면 그사람에 대해 이유 없는 혐오감을 느끼게 되기 마련 아닌가 하지만 그건 에르도사인의 오산이었다. 바르트는 절대 그 정도로 물러설 위인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는 자기 속마음을 있는대로 드러내놓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에르도사인의 집에 들어서기만 하면 안 그래도 잔뜩 주눅이 들어 한구석에 웅크리고있는 에르도사인에게 온갖 악담을 쏟아놓곤 했다. - P36

사실 에르도사인은 바르트에게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으라고 꼬드겼다. 물론 순간적인 동정심 때문이기는 했지만,
에르도사인의 진지한 태도에 바르트도 경계심을 다소 늦추는 듯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에르도사인의 눈빛에서 새어 나오는 음흉한 미소를 본 바르트는 마음속에서 겨우 사그라져 가던 증오심이 또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 P37

발명가의 꿈

만약 누군가가 에르도사인에게 "몇 시간 후 당신은 바르수트를 죽일 계획을 꾸미게 될 거야. 게다가 부인이 집을 나가 버려도 그냥 보고만 있을걸?" 이라고 예언했다면, 에르도사인은정신 나간 놈이 지껄이는 헛소리 정도로나 여겼을 것이다.
에르도사인은 오후 내내 정처 없이 거리를 쏘다녔다. 그냥혼자 있고 싶었다. 그리고 인간들의 소리를 잊고 싶었다. 낯선도시에 가서 기차를 놓친 이방인처럼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그저 자유롭고 싶었다. - P38

에르도사인은 걸음을 멈추고 앞에 있는 저택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으리으리한 차고며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는 정원, 그리고 사자라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한 철제담장과 총안이 설치된 벽, 뭐 하나 평범한 게 없었다. 타원형의푸른 화단 사이로는 빨간 벽돌이 깔린 보도가 저택을 향해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는데, 가정교사로 보이는 한 여인이 회색모자를 쓰고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 P38

하지만 지금 그는 600페소 7센타보를 갚아야 한다. 갑자기에르게타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자네 말이 맞아....... 이 세상엔 그처럼 불행과 가난에 찌든 쓰레기들 투성이지. 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들을 좋은 길로 인도할 수 있을까? 나도 그게 고민이야. 그걸 해결하려면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다시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그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러자 마음속 어두운 곳에서 싹튼 고통이 마법에 걸린 나무처럼 순식간에 목구멍으로 치솟아 올랐다. - P39

. 가로등 불빛 아래로 희뿌옇게 일어나는 먼지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젠 ‘리미티드 아수카레르 컴퍼니(Limited AzucarerCompany)‘‘⁶ 따윈 까마득히 잊은 채 그는 쾌락의 땅을 향해 힘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까지 에르도사인은 어떻게 살아왔던가? 그때 그에게 한번 물어봐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는70킬로그램의 몸무게를 어떻게 지탱하면서 걸어 다녔던 것일까? 혹시 그는 유령이 아니었을까? - P40

6 에르도사인이 다니던 제당 회사 ‘콤파니아 아수카레라(CompaniaAzucarera)‘를 영어로 잘못 옮긴 표현. 이른바 ‘자유무역의 황금시대‘에 아르헨티나 경제의 대(對)영국 의존도가 심화되어 가던 상황을 비판적으로 드러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P417

에르도사인이 보기에 저런 커다란 저택에는 분명 ‘우울한표정의 무뚝뚝한‘ (에르도사인의 표현을 ‘내‘⁷가 그대로 옮긴 것이다.) 백만장자가 살고 있을 것 같았다. 에르도사인은 그 백만장자가 쌍안경을 이용해서 창문에 내려진 페르시아나"의 틈으로 자기를 계속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을했다.
우습게도, 그 ‘우울한 표정의 무뚝뚝한 백만장자‘ 가 만의 하나 자기를 쳐다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에르도사인은 지나가는 여자들의 뒷모습도 외면한 채 고뇌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 P40

7) 여기서 ‘나‘는 이 소설의 서술자이자 화자이다. 텍스트에서 ‘나‘는 ‘해설자‘
혹은 ‘기록자‘, ‘편집자‘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한다. 에르도사인은 이작품의 속편 『화염방사기』에서 하숙집 주인의 딸인 사팔뜨기 처녀 ‘라비스카‘를 권총으로 살해한 뒤 경찰의 추적을 피해 다니던 중, ‘나‘의 집에서 사흘 동안 은신하게 된다. ‘나‘는 에르도사인이 쫓기는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신뢰를 보내면서 그간 에르도사인이 겪었던 모든 사건과 고통,
그리고 불행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기차역까지 그를 바래다주기도 했다. (결국 에르도사인은 밤 열차 속에서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에르도사인이 마지막 사흘 동안 ‘나‘에게 했던 고백은결국 이 소설의 토대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는 ‘해설자 주‘를 통해 에르도사인의 심리 상태나 행동의 동기, 사건의주변 정황 등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 P417

에르도사인은 오랫동안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지켜본 ‘우울한 표정의 무뚝뚝한 백만장자‘ 가 언젠가 사람을 시켜 자기를 부를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 특별한 오후의 망상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 P41

에르도사인과 결혼하기 전에는 엘사도 이처럼 크고 화려한거실이 있는 집에서 살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 그런 게생각나지? 그는 회사 공금을 횡령했다. 아내가 아픈 몸을 이끌고 남의 집 빨래를 해주고 있는 이 시간에도 그는 다 떨어진 구두에 올이 풀어진 넥타이, 군데군데 얼룩이 묻은 남루한 양복차림으로 거리를 헤매고 있다. 이게 바로 그의 모습이다. 바로그 때문에 그 ‘우울한 표정의 무뚝뚝한 백만장자‘가 그를 부른것이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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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 번 건들였다는 기억만 있는 책.



법칙 6. 이데올로기를 버려라

(전략).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누구나 주춤할 것이다. 내 책이 많은 사람의 삶에서 사라진 어떤것을 다루고 있는 게 분명하다. 분명 내 책은 위대한 심리학자들과 사상가들의 생각에 빚지고 있다. 하지만 그 밖에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특별한 뭔가가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내려고두 가지 정보에 주목했다. 첫 번째 정보는 강연장에서 그리고 길거리, 비행기, 카페, 기타 공공장소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었다. - P190

이제 내가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두 번째 정보를말하고자 한다. 단서는 수많은 공개 강연에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내 강연을 계속 찾아준다는 건 특권이자 신의 선물이다. 대규모 강연은 시대정신zeitgeist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또한내 새로운 생각들이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되는지, 충분한 관심을끄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고, 그 생각들의 품질을 부분적으로나마 판단할 수 있는 시험대가 되어준다. 강연 중에 청중의 반응을 세심하게살필 때 그런 일이 일어난다. - P191

특히 나는 한 주제를 얘기할 때 모든 청중이 (정말로 예외 없이) 쥐죽은듯 조용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주제는 바로 책임이었다(법칙4 참조). 청중의 반응은 황홀했다. 정말 뜻밖의 반응이었는데, 원래 책임은 잘 팔리는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 P192

 비극과 실망으로 가득한 인생에서 우리를 지탱해줄 수 있는 의미는 고결한 짐을짊어지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우리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젊은이들은 잘못된 장소에 눈길을 주며 성장해왔다. 그로 인해 젊은이들은 취약할 대로 취약해져서, 쉬운 길에 잘 넘어가고 걸핏하면 분노의 독에 감염된다. 과연 무엇이 이런 상태를 조장했을까? 이 취약성, 이 감염성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 P193

신은 잠자고 있을 뿐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에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다. 이 말은 워낙 유명해서 오늘날 공중화장실 벽에 다음과 같은 낙서가 있을 정도다.
"신은 죽었다." - 니체
"니체는 죽었다." - 신
니체가 자아도취나 승리감에 젖어 이렇게 주장한 건 아니다 - P193

『즐거운 지식The Gay Science』에서 니체는 신을 "지금까지 세계에 존재했던 모든 것 중에 가장 정직하고 강력한 존재"로, 인간을 "살인자중의 살인자로 묘사했다. 그가 미신의 소멸을 의기양양하게 찬양하는 합리주의자였다면 이렇게 묘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니체의 선언은 완전히 절망적인 말이었다. - P194

법칙 6.

1. F. Nietzsche, The Gay Science, trans. W. Kaufmann, section 125 (New York:Vintage Books, 1880/1974), 181. - P446

먼저 니체는 일신교 사상의 목표지향적인 구조와 그것이 제시하는 의미 있는 세계 바깥으로 인생의 목적이 밀려나 불확실해짐에 따라 허무주의가 부상하여 우리의 실존을 황폐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만물을 창조한 아버지를 대신해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을 지배할 거라고 주장했다. - P194

독보적인 러시아 소설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yevsky 역시자신의 걸작 『악령 The Possessed』에서 니체와 같은 문제를 거의 동시대에 다루었다.³ - P194

3. F. Dostoevsky, The Devils (The Possessed), trans. D. Magarshack (New York:Penguin Classics, 1872/1954). - P447

니체와 도스토옙스키는 공산주의가 종교나 허무주의를 대신하는합리적이고 일관성 있고 도덕적인 대안으로서 사람들을 매료시킬테지만, 그 결과는 치명적일 거라고 예견했다. - P195

분명 니체는 새로운 물리과학이 보여주는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객관적이어서 가치는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한 듯하다. 그렇다면 허무주의와 전체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응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하고, 그에 따라 살 수 있을 만큼 강한 개인이 되는 것이다. - P196

(전략).
하지만 두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와 융은 이 개념을 수포로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의식적인 선택으로 가치를 창조할 만큼의 자아가없다는 점을 입증한 것이다. 경험의 한계, 수많은 인지 편향, 짧은 수명을 고려할 때 그 누구도 ‘무에서ex nihilo‘ 자기 자신을 창조할 천재성은 갖고 있지 않다. 우리의 본성은 너무나 자주 우리를 지배하기에바보가 아닌 이상 가치를 창조할 수 있을 만큼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통제하고 있다고 감히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 P196

또한 과학적 방법론은 분명 유용하지만 가치는 주관적인 것이므로 현실의 구성 요소가 아니라는 과학의 세계관은 결코 타당하지 않다.
계몽주의는 현실이 객관적인 것들의 배타적 영역이라는 중요한 과학적 공리를 남겼다. 그 결과 주관적인 것에 해당하는 종교적 경험은 개인의 마음속에만 머물 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 P197

우리는 나의 존재와 경험이 실재하며, 마찬가지로 타인의 존재와 경험도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존재와 경험의 기초에 생물적·신체적 토대가 있다는 생각 또한 타당하다. 실제로 정신분석학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나 동기와 감정에 초점을 두고 생물심리학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이 그렇게 가정한다.⁵ 과학자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도 그렇게 생각한다. - P198

5. 다음을 보라. J. Panksepp, Affective Neuroscience (New York: Oxford UniversityPress, 1998). - P447

 왜 우리는 종교적 경험이 이토록 공통적이고 필수적인데도 사실이 아니라고 쉽사리 가정할까? 가치를 부여하는 능력이 오랜 진화의 결과로서,
우리가 규정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바로 그 현실에 의해 선택된 기능임이 거의 확실한데도?
우리는 전체주의의 결과를 목격했다. 그들은 집단이 인생의 짐을나눠 지고,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끔찍한 세계를 달콤한 유토피아로 바꿀 수 있다고 선전했다. - P198

20세기의 또 다른 악당인 독일의 국가사회주의(나치즘) 역시 강력하고 위험한 이데올로기였다. 히틀러 신봉자들이 니체 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건 일부 사실이지만, 그 철학은 나치즘에 상당히 이상하게반영되었다. 니체는 개인의 발전을 장려했지만 나치가 한 일은 집단의 가치관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었다. - P199

거짓 우상의 치명적인 매력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나치즘을 받아들이는 건 아니지만, 오늘날 세계에는 보수주의·사회주의· 페미니즘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인종 및.
젠더 사상 포스트모더니즘·환경주의 등의 각종 ‘주의‘들을 믿는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 P200

이데올로기는 처음에는 단순하다가 진짜 유용한 이론들을 흉내내기 시작하면서 기괴할 정도로 복잡해지고, 결국에는 그 유용한 이론들을 대체한다. 이데올로기 이론가는 처음에 몇몇 추상 개념을 선택하는데, 이 개념들은 해상도가 낮아 세계를 크고 무차별적인 덩어리들로 표현한다. - P200

그처럼 중요한 문제들을 다룰 때는 개별 원인들을 신중하게 분석한 뒤에 잠재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 실행하고서, 그 효과를 조심스럽게 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설사 그렇게 했더라도 의도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 모두가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은 그만큼 어렵고 골치 아프기 때문에,
보통의 용기와 의지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 P201

이데올로기 창시자는 세계를 크고 무차별적인 조각들로 나누고,
각각의 문제점(들)을 밝히고, 그럴듯한 악당을 내세운 뒤, 이를 설명해주는 원리나 작용력 몇 가지를 만들어낸다(그 추상화된 실체들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실제로 얼마간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런 뒤에는 그 몇가지를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강조하고, 다른 중요한 (어쩌면 더 중요한) 변수들은 무시한다. - P201

(전략). 마지막으로 학파가 출현해 이 알고리듬적 환원을 선전하면 이데올로기는 학계와 일상 모두에서 지배력을 얻게 되며, 이에 따르지 않거나 비판적인 사람들은 암묵적으로나 명시적으로 악마화된다. - P202

그런 활동, 그런 게임에 기대 타락한 지식인과 무능력한 지식인들이 모두 번성한다. 이 게임에 가장 먼저 뛰어든 자들은 참가자 중 가장 영리한 사람들이다. - P202

이런 종류의 이론화 작업은 영리하지만 게으른 사람에게 특히 매력적이다. 냉소와 교만은 유용한 수단으로 쓰인다. 새로운 지지자들은 그런 이데올로기 게임에 능통해지기 위해서 경쟁 이론이나 다른 방법론, 심지어 사실 자체를 비판하는 법을 배운다.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이론에 불가해한 어휘가 딸려 있으면 더욱더 좋다. 비판자들이 그 뜻을 해독하느라 귀중한 시간을 허비할 것이기 때문이다. - P203

마르크스도 그랬다. 그는 기본적으로 계급에 기초한 경제적 관점에서 인간을 설명하고, 역사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영원한전쟁터로 설명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알고리듬에 통과시키면 어떤 것이든 척척 설명이 된다. 부자가 부유한 것은 가난한 자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가 가난한 것은 부자에게 착취당하기 때문이다. 모든 경제적 불평등은 바람직하지 않고 비생산적이며, 근본적으로 사회가 불공정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 P204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를 실천한 곳들은 모두 파국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현재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수치를 모르고 마치 중요한 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듯 그 사상에 새로운 옷을 입혀 계속 수명을 연장시키려 한다. - P204

이런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환원은 사이비 지식인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자들의 특징이다.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은 지적 차원의 근본주의자로, 고집이 세고 융통성이 없다. 그들의 독선과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에 대한 도덕적 주장은 근본주의 못지않게 뿌리 깊고 위험하다. 아니, 그보다 더할지 모른다.  - P205

(전략). 반면에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은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거나 정복할 수 없는 건 없다고 믿는다. 이데올로기 이론은 모든 과거, 모든 현재, 모든 미래를 설명한다.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은 완벽한 진리가 자기 손안에 있다고 생각한다(자기모순이 없는 근본주의자에게는 금지된 생각이다). - P205

이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일까? 자신의 이론으로 일신교를 만드는 지식인들을 조심하라.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를 하나의 변수로 설명하는 것을 경계하라.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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