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일기장에 내밀한 욕망을 고백하다
• 옮긴이의 말


『금지된 일기장』의 주인공은 발레리아 코사티다. 그녀의 나이는 마흔셋. 장성한 리카르도와 미렐라 남매의 어머니이자, 은행원인 미켈레의 아내다. 발레리아도 직장에 다닌다. - P431

소설의 초반부터 발레리아를 지배하는 정서는 피로감이다. 그녀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가족만 행복하면 자신의 희생은 충분히 보상받는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자기 최면을 건다. 발레리아는 집안일과 직장 사이에서 지쳐간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노고를 고마워하지 않는다. - P431

발레리아는 모두가 자신의 노고를 당연하게 여기는 데 지친다. 남편도, 아이들도 자기를 노인 취급한다. 미렐라는 새 코트를 사달라고 조르면서, 엄마는 늙었으니 새 옷 같은 건 필요 없지 않냐고 하고 남편은 딸의 말에 동의한다. 그들은 이제 겨우 마흔셋인 발레리아의 욕망과 여성성을 거세한다. - P432

발레리아는 자신이 결혼이라는 늪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일기를 쓰면서 처음으로 깨닫는다. 남편 미켈레는 언젠가부터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그런 애칭을 애틋하게 생각했지만, 일기를 쓰면서 발레리아의 생각이 변한다. - P432

『금지된 일기장』은 1950년대 배경이지만, 지금도 독자의 마음을 불안하고 불편하게 만든다. 특히 독자가 여성일 경우에는 그런 감정을 더욱 강하게 느낄 것이다. 무려 70년 전에 출간한 소설이지만, 『금지된 일기장』에 묘사되는 갈등은 지금도 유효하다. - P433

극 중 발레리아의 공책이 ‘금지된 일기장‘인 이유는 두 가지다. (중략). 소설의 배경인 1950년대에는 담배 가게와 문방구의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 일요일에는 담배 가게에서 담배 이외의 상품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있었다. 발레리아가 일기장을 사고 싶은 충동을 느낀 순간이 하필 일요일이어서, 일기장은 ‘금지된‘ 품목이었다.  - P433

또한 이렇게 구입한 일기장에 그때까지 자기 자신에게조차 숨기고 있던 욕망과 상실감을 털어놓았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에서 금지된 일기장이기도 하다. - P434

줌파 라히리는 "일기라는 형식을 통해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이 되고, 개인적인 문제가 세분화되고, 작가는 자신의 독자가, 독자는 자신이 읽는 글의 작가가 된다"고 했다. 일기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뒤섞는 모호하고 유연한 용기라는 것이다. 라히리는 "일기는 가장 사적인 형태의 글쓰기이지만, 『금지된 일기장』에서처럼 그 자체가 소설의 구조가 될 때 그 본질을 부정한다"
고 했다. 세스페데스는 영리하게도 일기라는 형식을 선택함으로써, 가장 내밀한 사유를 지극히 자연스럽게 공론화했다. - P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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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프롤로그


이 나라의 왕가는 모계였다.
(중략).
사위가 되는 경우는 국내 귀족이거나 다른 나라의 왕족 등으로 다양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고귀한 혈통이어야만 한다.
다만 딱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바로 용사다. - P4

누가 용사가 될지는 사전에 알 수 없었지만, 예언자라 불리는 인물에 의해 인도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언자는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예언만을 남기고 조용히 사라진다. 그 정체는 알 수 없다.
이번에는 4년 전, 국내의 한 작은 마을에 나타나 용사의 출현을 예언했다. - P5

나는 이 나라의 왕녀 알렉시아. 용사에게 바치는 포상이다. - P5

솔직히 나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물론 레온은 누가 봐도 훌륭한 인물이다. 그러나 결국 나의 혼인에 내 의지는 개입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용사가 누가 되든 나와는 상관이 없는일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면학, 검술, 승마 등에 힘쓰며 주위 사람들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왔지만, 그런데도 자신의 장래를 스스로결정하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이 나라의 공주라는 것은 저주나 다름없는 존재다. - P6

나는 무릎을 꿇고 있는 용사에게 걸어가 말했다.
"용사님, 마왕을 쓰러뜨리고 세상을 구해 주세요. 저는 당신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는 아직 열두 살이라 조금 어리지만 예뻤고, 어떻게 행동하면 상대가 기뻐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를 구해 주길 바라는 마음은 본심이지만, 귀환을 기다린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 P7

"하지만 이곳으로 돌아오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당신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해 주세요."

4년 뒤 용사는 선언한 대로 마왕을 쓰러뜨렸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 P8

-광장에서

"용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그야 물론 마왕을 쓰러뜨려 줬으니 고마운 사람이죠.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것도 다 용사님 덕분이니까요."
"검도 쓸 수 있는 데다 공격 마법이나 회복 마법도 쓸 수 있었다고 하잖아요. 대단하신 분이었겠죠. 돌아가셨다는 말에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몰라요."
(중략).
"나는 말이지, 검성이 좀 수상한 것 같아. 어쨌든 백작님이시간아? 차기 국왕 자리를 노리고 처리해 버린 거 아닐까? 용사만 없으면 왕녀님이랑 결혼하는 건 검성이라고 들었거든. 아차, 이 이야기는 비밀로 해 줘. 나중에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르니까."
"현자님과 성녀님이 소꿉친구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현자님은 성녀님을 좋아하셨던 게 아닐까요? 하지만 성녀님의 마음이 용사님을 향해 버린 거죠. 그래서 현자님이 용사님을 무심코 죽여버린 걸지도 몰라요." - P10

"평민 출신이었다잖아요. 아무래도 귀족분들이 그 부분을 안좋게 생각하신 거 아니겠어요? 돌아오면 왕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평민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게 싫으니까 누군가에게 명령해서 용사님을 죽여버린 게 아닌가 싶어요." - P11

레온의 장

"그 녀석은 친구였다."
용사 아레스와의 관계를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간결했다. - P12

레온 뮬러. 검성 레온으로서 칭송받고 있는 그는 일찍이 용사 후보의 필두이기도 했다.
"특별한 의미는 없다. 다만 그 녀석과 만나기 전까지 나에겐 친구라고 부를 만한 인간이 없었지. 나름대로 신분이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니까.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면 인간관계는 위나 아래밖에 없어. 존경하거나 존경받거나, 만난 인간을 그런 식으로 평가하게 되지. 꽤나 저질이지? 귀족이란 원래 그런 거다." - P12

-지금도 존속하고 있는 팔룸 학원은 용사 육성 기관으로 명망이 높았지만 귀족만 들어갈 수 있는 학원은 아니다. 오히려 실력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문은 열려 있다.
"지금은 그렇지...……. 당시는 달랐어. 설립 당초의 이념은 유명무실해지고 귀족 자제의 가치를 올리기 위한 기관으로 전락해 있었다. 물론 돈만 있으면 입학이 가능했으니 표면상으로는 입학에신분은 필요 없었지만, 굳이 그런 곳에 들어가려는 괴짜는 거의없었지. 강해지고 싶었다면 사설 학원에 들어가거나, 유명한 검사의 제자가 되거나, 모험가로서 경험을 쌓거나,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 P13

-첫만남은 어땠나?
"잊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지금도 꿈에 나올 정도다. 쳐다보며내던지듯 이렇게 말했지. ‘넌 용사가 될 자격이 없다‘라고."
-아레스는 뭐라고 대답했지?
"그럼에도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평민에게 말대꾸를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난 격분했지. 그 자리에서 베어버리려고 했는데, 보고 있던 교원이 뜯어말렸어. 학원 안에서 칼부림 사태가 나는 건 곤란하다면서, 교원들도 일면으로는 그 녀석을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 해도 죽이는 건 지나치다고 생각한 거겠지." - P14

"수업 모의전에서는 이기거나, 아니면 본인이 쓰러지기 직전까지 싸웠다. 자잘한 상처 정도로는 포기하지 않았어. 교원을 상대할 때도 늘 진심으로 맞섰다. 가르쳐준 내용 중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이해가 될 때까지 교원이나 동급생에게 물어댔지. 검을 휘두르는 반복 연습은 밤늦게까지 했었고."

-그 정도라면 열심히 하는 학생, 정도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용사의 일화라기엔 오히려 약하다.

"열심히 한다는 수준이 아니야. 그 녀석에게는 휴식이라는 개념이 없었어. 자유 시간을 전혀 갖지 않았지. 모든 시간을 용사가 되기 위해서만 사용했다. 그 녀석은 잠을 잔 게 아니야. 움직이는데 한계가 와서 쓰러져 있던 것뿐이지. 평민이라는 이유로 집적거리던 패거리도 금세 그 녀석에게 손을 대지 않게 됐지. 누가 보기에도 정상을 벗어난 집념이었으니까." - P15

-확실히 졸업할 때 아레스는 수석이 아니었다. 수석을 한것은 레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수석을 할 수 있었던 건 백작의 아들이라는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왕족이 있었다면 그 녀석이 수석을 차지했겠지. 뭐, 물론 난 그에 상응할 정도로 성적도 우수했지만."
레온이 씨익 웃었다. 거만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미소였다. - P16

-확실히 많은 희생자가 나온 탓에 마인의 강함이 더욱 강조되었고, 그렇기에 학생 신분으로 마인을 격퇴한 용사들의 용감함이 두드러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마인은 마인 중에서는 강하지 않은 편이었어. 그저 교활했을 뿐, 용사가 될지도 모르는 학생을 죽여서 낮은 리스크로 공적을 세우려는 속셈이었겠지. 교원들이나 기사들도 우리를 지키면서 싸우지 않았다면 조금 더 선전할 수있었을 거다." - P17

-성녀 마리아, 현자 솔론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려진 용사파티의 멤버다. 하지만 이때 그들은 아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럼 아레스는 어떻게 했나?
"그 녀석은...... 마인을 보자마자 모두에게 도망치라고 지시했다. 굳어있지 말고 흩어져서 도망가라고, 승부조차 해보지 않고 도망치라니, 겁쟁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 지시에 따른 학생들은 살아남았고, 맞서려던 녀석들은 죽었다." - P18

-처음으로 용사들의 파티가 기능한 싸움이었나?
"말만 들으면 참 쉽게 들리는데, 싸우는 와중에는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우리의 공격이 효과가 있는지 어떤지도 몰랐으니까. (중략).
나중에 알아차린 사실인데, 그 녀석은 수업 모의전 때부터 이런 전투를 상정하고 있었던 것 같아. (후략)." - P19

-목숨을 구해 줘서 친구라고 생각한 건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레온은 허공을 응시했다.
"나는 그때 ‘아, 이 녀석이야말로 용사다‘라고 생각했다. 변명하는 건 아니지만,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마인에게 가장 큰 대미지를 입힌 건 나다. 실력만을 말하자면 역시 내가 그 녀석보다는 강했어.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야. 용사에겐 당연히 힘이 필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지. 물론 신분 따윈 전혀 상관없어. 용사는 그 본연의 자세가 중요하다. - P20

-어째서, 용사는 죽었나?
"그것이 아레스라는 남자의 운명이었겠지. 그뿐이다." - P20

-fragment 1------단장 1



학원에 입학한 직후, 교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넌 용사가 될 자격이 없다."
금발에 옷차림도 체격도 좋은 청년이었다. 푸른 눈이 인상적이고 얼굴 생김새도 단정했다.
"그래도 난 용사가 되어야 해."
내가 그렇게 답하자 청년은 분노하며 허리의 검집에 손을 올렸다. - P22

그가 용사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되길 바랐다.
"레온이 용사가 되어 준다면 나는 용사가 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 P22

전사반 교원은 나이에 의한 쇠약과 부상 등으로 은퇴한 전직 기사들이 많았지만 실력은 확실했다.
귀족 계급의 반 아이들을 좀 더 편애했기에 그들이 나에게 직접 지도해 주는 일은 적었지만, 수업에서 알려주는 내용은 무척이나 도움이 되었다. 나에게 호의적인 교원은 적었어도 모르는것을 질문하면 대답해 주었다.
그 가르침을 머리에 넣어두고 학원의 교사 뒤편 등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 P23

수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인데, 내가 검을 휘두를 때 낭비되는 움직임이 많았다. 정식으로 검을 배우고 온 것이 아니니 당연하지만, 쓸데없는 동작이 많았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레온의 검은 이상적이었다. 검선이 마치 실을 자아내듯 아름다운 군더더기가 없다. - P23

한 번은 실수로 반에 검을 두고 왔는데, 그 검을 다른 반 아이가 가로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던 적이 있었다.
"너 같은 평민 따위에겐 과분한 검이야. 내가 써줄게."
반 아이는 그렇게 말했고, 주위에 있던 다른 반 아이들도 웃으며 그 말에 동의했다.
"그건 소중한 검이야. 돌려주면 안 될까?" - P24

그때 레온이 말을 걸어왔다.
"거기 있는 너, 검은 전사의 뭐라고 배웠지?"
레온은 내 검을 훔친 반 아이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네.....? 그게...... 검은, 전사의 생명이라고......."
질문을 받은 남자는 횡설수설 대답했다.
"흐음, 그럼 네 목숨은 장물이냐?"
질문을 받은 남자는 흠칫 놀랐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전 그냥 장난으로…………….‘
"넌 장난으로 목숨을 갖고 노는 전사가 될 건가?"
그 물음에, 그 남자는 잠자코 나에게 검을 돌려주었다. - P25

반면 레온은 가차 없었다.
"나는 검은 전사의 생명이라고 했다! 그것을 남에게 빼앗기는일은 전사에게 있어 치명적인 실수! 남의 검을 빼앗는 짓도 한심한 일이지만 그것을 놔두고 온 넌 더더욱 한심한 놈이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그 이후, 나는 내 검을 절대 몸에서떼지 않고 들고 다니게 되었다. - P25

"레온의 검을 본보기로 삼았어."
"그런가. 난 그렇게까지 허접하진 않지만 날 제외하면 네 자세가 제일 낫다. 뭐, 다른 녀석들이 제대로 수련하지 않아서 그런것도 있지만."
(중략).
다만 나와 레온 이외의 반 아이들이 성실하게 수업을 듣지 않았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들은 어설프게 실력을 키웠다가 마왕령으로 가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레온은 그 사실이 못마땅한 거겠지. - P26

2년 넘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검을 휘둘렀는데도 지금 수준이다. 나의 재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괜찮아. 난 용사가 되어야 하니까, 아주 조금이라도 검실력을 올려두지 않으면 안 돼."
"왜 그렇게까지 용사를 목표로 하는 거지?"
레온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우리 마을에 예언자가 나타나서 용사의 출현을 예언했으니까. 내가 하지 않으면 달리 없어." - P27

그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럼 왜 용사가 되겠다며 고집을 부린 거지? 나한테 맡기면 되잖아. 그러면 매일 혹독한 수행을 할 필요도 없었어."
(중략).
"용사라는 건 할 만한 게 아니야. 모두에게 원하지도 않는 기대를 받고, 마왕을 쓰러뜨리는 대역을 일방적으로 강요받으면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해. 게다가 실패하면 세상은 끝이야. 이 정도로 수지가 안 맞는 장사가 어딨겠어." - P27

레온은 조금 주저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어제 아버지가 그러시더군. 용사 후보를 사퇴하라고."
"왜?"
레온의 아버지는 용사가 되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전황이 상당히 안 좋아. 도저히 마왕령에 침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다. 아무리 용사라고 해도 마왕을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거다."
그렇구나. 정세가 안 좋아지면 마왕령에 들어간 용사를 지원하는 일도 어렵다. 지원이 없으면 사지로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 P27

백작인 아버지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게다가 그의 신변을 걱정해서 내린 결정이다. 레온은 도저히 그것을 배반할 수 없었다.
"내가 용사가 될 테니까 괜찮아‘
나는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반드시 마왕을 쓰러뜨리고 올게. 그러니까 괜찮아."
"나보다도 약한 네가?"
레온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P28

한동안 내 얼굴을 응시하더니 레온이 말했다.
"흥, 잘난 척은, 평민이 뭘 할 수 있다고? 역시 마왕을 쓰러뜨리는 건 나다. 너 한 명에게 모든 걸 강요하고 뒤에서 태평하게 기다리는 짓 따위 나는 못 해. 평민의 손에 세계의 명운을 맡긴다는 건 내 긍지가 허락하지 않는다. 누가 뭐래도 나는 마왕령으로간다. 반드시 말이지." - P29

"내가 용사가 되면?"
"만에 하나라도 불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레온은 거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는 내가 네 파티에 들어가 주마." - P29

-fragment 2-----단장 2


나는 어릴 때부터 주위의 기대를 받으며 자라왔다. 백작가의장남이라는 것은 그런 존재다.
우리 뮬러 가문은 왕국을 지탱해 온 기둥이자 왕국의 무의 상징이었기에 당연히 강할 수밖에 없었다. - P30

하지만 아무리 무가의 집안이라고 해도 검만 잘 쓰면 다 되는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 가문에서 가장 검 실력이 탁월했던 것은 숙부님이었지만, 차남이라는 이유로 가문을 잇지는 못했다. - P30

숙부님은 마왕군의 침략을 받고 있던 마리카국을 돕기 위해 달려갔고, 그 용맹함을 가감 없이 발휘하여 마왕군을 격퇴하였다.
다만 도착이 늦어진 탓에 마리카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만약 아버님이 즉시 결단하고 직접 출진했다면 마리카국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안타까웠다. - P31

진심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마음먹은 녀석이 없었다. 주위 인간들은 모두 자신이 싸우지 않아도 될 방법을 궁리하기 바빴다. 신분이 높아질수록 그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이보다 더 어이없는 일이 어디 있을까. 귀족이라면 더더욱 솔선수범해서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 P32

15살이 되어 팔룸 학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용사를 육성하기 위한 기관 선택받은 귀족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 오면 용사를 목표로 하는 귀족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 P32

평민은 귀족에게 보호받아야 하는 입장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귀족이 귀족으로 있을 이유가 사라진다.
(중략).
"넌 용사가 될 자격이 없어."
정신을 차려보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격? 어째서 자격이라는 것이 있단 말인가. 누가 용사가 되어도 좋지 않은가. 하지만 난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이 가짜 귀족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 - P33

왜 말리지? 너희에게는 위기감이 없는 것인가? 귀족이면서 평민에게 구원받는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인데도?
단언해도 좋다. 이 녀석은 진심으로 용사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런 녀석은 나 이외에는 본 적이 없었다. - P33

장래성이 있어 보이는 몇 명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용사를 목표로 하고 있나?"라고,
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용사는 당연히 레온 님이 되셔야죠."
아첨이 담긴 눈빛으로 그렇게 말한다. - P35

팔룸 학원은 용사를 육성하는 기관이다. 이곳에 입학한 이상 용사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도 용사를 목표로 하지 않은 채 그것을 목표로 삼은 인간을 비웃는 일만큼 꼴사나운 짓은 없을 것이다.
아레스는 내가 검에 손을 들어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 녀석은진짜였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귀족이고 이 녀석은 평민이니까. - P36

학원에서의 수업이 시작되었고 검술 모의전이 진행되자 아래스는 나에게 승부를 걸어왔다.
주위 인간들은 ‘평민 따위가 레온 님에게 상대를 청하다니 뻔뻔하다‘라면서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나는 받아들였다.
간단한 이야기다. 아레스가 나를 상대하지 않으면 달리 나를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 - P36

아마 정식으로 훈련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실전에 막 투입된 모험가나 용병의 모습에 가까웠다.
이 시점에서 대단한 기량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검을 한 손으로 늘어뜨리고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힘을 빼면 몸이 가볍고 움직임이 부드러워져서 상대의 움직임에 곧바로 대응할 수 있었다. - P37

아레스는 간격을 벌리자마자 바로 자세를 고쳤다.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혀온다.
그대로 내 공격 범위 안에 들어오기에 아래에서 베어 올리는 움직임을 취했다. 페인트였는데 보기 좋게 낚인 아레스는 과장된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것을 보고 나서 양손으로 검을 다시 잡고 위에서 내려쳐 상대의 어깨에 일격을 넣었다.
탁! 하는 둔탁한 감촉이 팔에 전해졌다. 연습용 목검이니 베이지는 않겠지만 그에 상응하는 타격은 있을 것이다. - P37

"아직도 계속할 건가?"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누른 아레스는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계속해."
좋은 대답이다. 나중에 성직자반 아이들의 딱 좋은 연습대가 될 것이다.
아레스는 두 번의 시합을 거치고 반성했는지 움직임을 줄이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 P38

그 후의 모의전에서도 아레스는 나에게 승부를 걸어왔다.
솔직히 아레스는 반에서도 약한 편이었다.
자세는 어설펐고 움직임에 낭비도 많다. 다만 실전 경험이 있는 것인지 다른 학생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 기백, 혹은 살기 같은 것은 보였다.
그렇다 보니 무슨 짓을 해 올지 알 수 없었다. 검 승부인데도 발길질을 해오질 않나, 검을 손에서 놓고 덤벼드는 일도 있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학생들 사이에서는 ‘미천한 녀석이다‘라며 비난을 받았지만, 그 녀석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무슨 짓을 해서든 이기겠다는 집념뿐이었다. - P39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아레스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하지만 그 녀석은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를 무시한 것이 아니다. 모든 시간을 실력을 향상하는 데에만 소비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있으면 교본을 다시 읽고, 넉넉한 시간이 있으면검을 휘둘렀다. 쉽게 말해 다른 인간에게 시간을 쓸 틈이 없었던것이다.
학원 수업이 모두 끝나면 그는 교사 뒤편에서 검을 휘둘렀다. - P40

얼마 지나지 않아 아레스에 관해 어떤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성직자반인 마리아 로렌을 좋아해 수차례 고백했다는 소문이었다.
‘웃기는군.‘
나는 그저 웃고 넘겼다. - P41

그리고 몇 달이 더 지나자, 이번에는 솔론 바클레이에게 마법을 배우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멍청한 녀석이라니까요. 용사가 정말로 마법을 쓸 수 있을 거라 믿다니."
반 아이들은 그렇게 말하며 그 녀석을 헐뜯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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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금술의 기본개념


A. 서론

연금술은 18세기에 이르러 점차 자가당착의 어둠에 빠져 쇠퇴했다. - P15

연금술의 내적인 붕괴는 이미 야코프 뵈메Jacob Böhme의 시대인 17세기에 활발하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때 수많은 연금술사들이 실험실을 떠났고 애매모호한 철학을 완전히 포기했다. 화학자는 연금술사와 분리되었다. - P15

관찰자가 질료에서 보고 인식했다고 믿는 것은 자신이 그 안에 투사한 것이며, 그것은 처음에는 그 자신에게 무의식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그러한 사실들의 정신적 성질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질료가 외관상으로 드러내는 특성과 의미 가능성만 보고있는 것이다. - P16

 16세기 말에 피시카quoka (물질적인 것, 신체적인 것das Physische)와 미스티카uouké(신비적인 것das Mystische)가 분리되기 시작하면서 본질적으로 보다 더 환상적인 종류의 문헌이 나타났고, 그 저자들은 ‘연금술적 변화 과정의 심적 성질을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다. - P16

B. 연금술 과정의 여러 단계

이미 알고 있듯이 연금술은 하나의 화학적 변화 과정이다. 변화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연금술은 많은 교시敎示를 내린다. 비록 연금술사두 명이 실험 과정의 좀 더 정확한 경과와 변화 단계에 대해 같은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더라도, 대부분의 연금술사들은 그 주안점에서 서로 일치했다. - P17

 헤라클레이토스 시대에 이미 언급된 원래의 색色, 자연 그대로의 색은 검게 함(흑화黒化melanosis, Schwärzung), 희게 함(백화白化, leukosis, Weißung), 노랗게 함(황화黃化, xanthosis, Gelbung), 붉게 함(적화赤化, iosis, Rötung)‘으로 분류되었다. 이러한 분류를 철학의 4분법이라 한다. 후에, 그러니까 15,
16세기에 와서 네 가지 색은 세 가지 색으로 축소되었다. - P17

연금술의 과정이 바라던 목표에 이른 적이 없고 또한 개별적인 부분에서 그 과정이 결코 전형적으로 수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계 분류상의 변화 또한 외부적인 이유로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사위일체와 삼위일체의 상징적인 의미, 그러니까 내적이고 정신적인 이유와 관계가 있다.⁴ - P18

1. 연금술의 기본 기념

4 이것은 도른Dorn (도르네우스Gerardus Dorneus)의 저서에 분명히 나와 있다. 그는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완강하게 사위일체, ‘뿔이 네 개 달린 뱀‘과 맞섰다.
『심리학과 종교Psychologie und Religion』(『기본 저작집』 4권, 82쪽 이하) 참조. - P293

검음黒化, nigredo (그림 115)은 ‘원질료原質料, prima materia (제1의 물질)‘
나 혼돈, 혹은 ‘혼돈의 덩어리massa confusa‘의 속성을 지닌 시초의 상태이며 원래부터 있었거나 원소들을 분해 (용해solutio, 분리separatio, 분할divisio, 부패putrefactio)함으로써 생긴다. 때때로 일어나듯이 처음에 분리된 상태를 전제로 한다면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합일이라는 비유(결합coniugium, 결혼matrimonium, 융합coniunctio, 교접coitus)에 따라 대극의 합일이 이루어진다. - P19

 이미 많은 사람들은 이것으로 목표가 성취된 것처럼높이 칭송하였다. 하지만 은이나 달의 상태는 태양의 상태로 더 고양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백화‘는 여명이다. 루베도rubedo [붉어짐Rötung]가 되어야 태양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붉어짐rubedo‘으로 넘어가는과정에서 황화黃化, citrinitas가 된다. 이미 언급했듯이 노랑은 후에 언급되지 않는다. - P21

C. 목표로 하는 표상들과 그 상징

변화 단계들의 순서는 연금술사 개개인이 목표로 하는 표상Zielvorstellung에 달려 있다.  - P21

‘원질료‘의 개념과 나란히 물(영원한 물aqua permanens)과 불(우리들의 불ignis noster)의 개념도 매우 중요하다. 이 두 가지 원소는 대극적이며 심지어 전형적인 대극쌍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금술사들은 물과 불이 하나임을 증언한다.⁶ ‘원질료‘처럼 물도 수많은 이름을갖는다⁷; 물은 돌의 근원적 물질이다.⁸ - P23

6 Rosarium, in Artis auriferae quam chemiam vocant, Basel, 1593, II, p.264.
‘영원한 물aqua permanens‘은 ‘불의 형태를 한 순수한 물‘이다. Riplaeus, Operaomnia chemica, p. 62: "공기의 혼Luftseele은 우리 철학의 비밀스러운 불, 신비한 우리의 기름, 우리의 물이다." Figurarum aegyptiorum[Ms.], p.6: "현자(철학자)의 물은 불이다." Musaeum hermeticum, p.653: "우리의 물에서는 불이추구된다." Aurora consurgens, I, XI장, 여섯 번째 유비 [von Franz 발행]: "세니오르Senior가 말하기를: 만일 그들이 불로 이루어진 신적인 물을 추출하려고 한다면, 물로 이루어진 불로 데워야 한다. 이때 그들은 목표에 이르기를 기대했는데, 어리석은 자의 우둔함 때문에 비밀로 하였다." Aurora, II, in Artisauriferae I, p. 212: "세니오르가 말하기를: 우리의 불은 물이다." 앞의 책, p.
227: "즉 철학자는 물을 통해서, 보통 사람들은 불을 통하여." (라틴어 원문은「전집』을 보라.)7Zosimos, in M. Berthelot, Collection des anciens alchimistes grecs, Paris,
1887/88, III, LII, 2.
8 Turba, in Artis auriferael, p. 13. Consilium coniugii, in Ars chemica, p. 121:
"돌은 생명력 넘치는 분수에서 솟아나는 물이다." - P294

 하지만 나는 ‘철학자(현자)의 물‘을 말한다. 단순한 것이든 복잡하게 합쳐진 것이든 비천한물이 아니라 메르쿠리우스의 물aqua Mercurialis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천한 메르쿠리우스는 철학자(현자)의 메르쿠리우스와는 다른 것이지만 그 둘은 철학자(현자)의 물이다. 전자의 <물>은 단순하고도 순수하다. 후자의 물은 두 가지 실체, 다시 말해광석과 단순한 물로 이루어져 있다. - P24

(전략).

물에 대한 이와 같은 역할은 불에서도 증명될 수 있다. 그 중요성이결코 적지 않은 그 밖의 개념은 변화시킬 실체들을 담은, 근본적으로는 증류기나 용광로(그림 119)와 다름없는 연금술의 그릇vas Hermetis 이다. 비록 도구에 불과하지만 그릇은 단순한 기구가 아니라 ‘원질료‘,
그리고 라피스Lapis와 고유한 관계를 맺는다. - P26

 예언녀 마리아Maria(『기본 저작집』 5권의 그림 78)는 완전한 비밀은 신비로운 그릇을 알아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릇은 하나다Unum est vas‘라는 말은 항상 강조된다.¹³ 그 그릇은 우주를 모방하여¹⁴ 완전히 둥글어야 한다.¹⁵ 그 안에서 별들이 작업이 성공하도록 영향을 끼쳐야 하기 때문이다.¹⁶ 그것은
"현자(철학자)의 아들filius philosophorum, 기적의 돌을 품고 있는 일종의
‘모체matrix‘ 내지는 ‘자궁uterus‘이다(그림 120).¹⁷ - P27

13 예를 들어 ‘어떤 원 혹은 그릇 안의 어떤 것‘(Scholia zu Hermetis TrismegistiTractatus aureus, in Bibliotheca chemica, I, p.442),
14 ・연금술의 그릇은 자연의 그릇의 전형에 따라 구성되었다. 우리는 전체 하늘과 원소들이 하나의 구형形體들을 닮았고 그 중심에 하위의 불의 열기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우리의 불을 우리의 그릇으로부터 밖으로 옮겨서 그 그릇의 둥근 바닥 중앙 아래로 옮겨야만 했다. 마치 자연의 태양처럼." (Dorneus, Physica Trismegisti, in Theatrum chemicum Britannicum,
1602, I, p. 430 "그릇은 상위와 하위를 모방하여 둥글게 만들어졌다." (Liberquartorum, in Theatrum chemicum, V, pp. 148,150) 라이첸슈타인(RichardReitzenstein, Poimandres, p.141)은 논문 Isis an Horus (Berthelot, 앞의 책, Ⅰ.
XIII, 21)에서 합당하게도 천사의 머리 위에 있는 "기적의 그릇"을 Porphyrius에 있는 Chnuphis의 머리 위의 쿠클로스 디스코에이데스Kirklas dlokoedis (원반형의 관원)와 비교하였다[그림 203]. (라틴어 원문은 『전집』을 보라.)
15 그렇기 때문에 "구 혹은 원 모양을 한 유리 집" (Epistola ad Hermannum, inTheatrum chemicum, V, p.896) "그릇(용기)vas"은 "우리가 여과기라고 부르는 둥근 구"이다. Allegoriae super librum Turbae, in Artis auriferae I, p. 144.
이미 그리스 연금술에서 이러한 사상이 등장하였다. 예를 들면 Olympiodor(Berthelot, Alchimistes Grecs, II, IV, 44,Z.17~18), "그릇vas은 하나의 오르가논쿠클리콘opyavov KUKIKóv (둥근 기구), 하나의 피알레 스파이로에이데스apaupoelong (구형의 그릇)이다. (라틴어 원문은 전집』을 보라.)16 ・우리의 그릇은 그 안에 들어 있는 물질이 천상의 물체들에 의해 지배받도록, 그렇게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천체에 의한, 눈으로 볼 수 없는 천상적 영향과 각인은 무엇보다도 작업에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Dormeus,
Congeries Paracelsicae chemiae, in Theatrum chemicum, 1602, I, p. 574) (라틴어 원문은 전집』을 보라.)17 ‘모체matrix‘로서의 ‘그릇vas‘(Riplaeus,Opera,p.23). In Turbam philosophorumexercitationes, in Artis auriferae I, p. 159; Aurora, II, in Artis auriferae I. P.
203; Consilium coniugii, in Ars chemica, p.204 등등. - P295

나는 여기서 더 이상 그릇의 수많은 동의어들을 나열하지 않겠다.
그릇의 확실한 상징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면충분하다. - P28

부는 여러 가지 상이한 작업들에 대한 상세한 목록을 작성한다. 연금술사면서 의사였고 외교관이었던 조세푸스 쿠에르케타누스JosephusQuercetanus는 프랑스와 프랑스어를 사용한 스위스 지방에서 파라켈수스Paracclsus와 비슷한 역할을 하면서, 1576년에 열두 가지 작업의 순서를 정립했다(그림 122).²¹ 열두 가지 작업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침전, 석회화 Calcinatio
2. 용해 Solutio
3. 원소 분리 Elementorum separatio
4. 결(융)합 Coniunctio
5. 부패 Putrefactio
6. 응고 Coagulatio
7. 공양 Cibatio [영양공급]
8. 승화 Sublimatio
9. 발효 Fermentatio
10. 고양 Exaltatio [혹은 순화純化]
11. 증가 Augmentatio
12. 투사 Proiectio - P28

21 Ad Iacobi Auberti Vindonis De ortu et causis metallorum contra chymicosexplicationem, in Theatrum chemicum, 1602, II, p. 198 lot. - P296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대강의 특징들에서 나타난 이러한 개념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연금술의 기본 틀이다. 근대의 화학적 지식을갖춘 우리로서는 그와 같은 것을 거의 혹은 전혀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고대와 중세에 살았던 조상들의 원전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수백가지의 처방들을 열심히 이해하려고 든다면 우리는 거기서 비교적 식별할 만한 화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들을, 작지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P30

(전략). 더욱이 그는 놀라운 실험 결과에 대해 적잖이 증명된 오랜 전통을 회고할 수 있었다.²² - P30

22 심지어 G. Meyrink (20세기)는 연금술 방법의 가능성을 믿었다. 그 자신의실험에 관한 주목할 만한 보고가 다음의 책 서문에 있다. Thomas Aquinas:Abhandlung über den Stein der Weisen, München, 1925,p.XXIX 이하. - P296

2. 연금술 작업의 정신적 특성


A. 정신적 내용의 투사

대체로 연금술의 작업Opus에서는 화학적 실험뿐만 아니라 화학 용어와 유사한 언어로 표현되는, 일종의 정신적인 과정을 다루고 있다.¹
고대인들은 화학적 과정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 P32

12. 연금술 작업의 정신적 특성에볼라 (J. Evola, La Tradizione ermetica, Bari, 1931, p. 28 이하)가 말하기를 "전근대적인 문화 주기 안에 있는 인간의 정신 상태는 이러했다. 즉, 모든 물리적지각은 동시에 정신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 정신적인 요소는 그 지각에
‘심혼을 깃들게 하고 단순한 상에 부가적으로 하나의 ‘의미‘를 주고 동시에하나의 특별하고 막강한 감정적 색조를 부여했다. 그러므로 고대 물리학은 신체적인 의미의 물질 속에 있는 물리학에 형이상학적인 실재들 측면에서 조명함으로써 동시에 신학이고 초월적인 심리학이었다: 자연과학은 동시에 하나의 정신과학이었고, 상징들의 여러 가지 의미는 하나의 유일한 지원의 다양한측면들을 파악했던 것이다." - P296

 이러한 차이에 관한 인식은 1세기에 발표된 (위爲) 데모크리토스(Pseudo-)Demokritos (데모크리토스라고 불리는 자)의 논문 「신체적인것과 ‘철학적인 것‘t puouké kai tà puouka」에 이미 표현되어 있다. (중략). 연금술사가 분명한 화학적 과정을 상징적으로만 적용하려고 한다면 왜그는 도가니와 증류기로 실험을 했겠는가? 그리고 그가 항상 그렇게확실하게 화학적 과정들을 기록하려 한다면 왜 그는 그 과정들을 식별 불가능할 때까지 신화적으로 상징화시켜 왜곡시키는가? - P32

비밀주의는 쉽사리 믿어버리는 사람들의 악용을 막을 명백한 목적을 가진 속임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연금술 전체를 이런 측면에서설명한다면 내 생각에는 다음 사실과 모순된다. 즉, 익명으로 쓰고 인쇄된 자세하고도 박식하며 양심적인 논문들이 적잖이 있다는 사실이다. - P34

투사Projektion는 엄격히 말해 결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이다. 즉, 투사는 발견된다. 나는 내가 모르는 외부적인 것 속에서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나 자신의 고유한 내면의 것, 혹은심적인 것을 발견한다. 따라서 내 생각에는 "도덕적 즉, 심리적인 만큼 육체적tam ethice quam physice"이라는 공식을 ‘상응설相應說, die Lehre derEntsprechung"에 귀착시켜 그에 "앞선 것prius" 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 - P35

그가 실제로 체험한 것은 본인의 무의식이었다. 그는 그럼으로써 자연 인식의 역사를 반복했다. 잘 알려진 대로 학문은별에서 시작되었다. 인류는 별에서 인류의 무의식의 지배적 특성들,
이른바 ‘신들Götter‘을 발견했다. - P36

(전략).

저자는 계속 말했다:

"모세가 기록한 책에서 말하기를: 육체가 해체되면 흔히 두개의 가지가 나타난다. 때로는 세 개 혹은 더 많이 생기기도 한다.
파충류의 형상이 나타날 때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머리와 모든 사지를 지닌 인간이 강단 위에 앉아 있는 것 같다."⁷

위에 소개된 두 글에서 보는 것처럼, 호겔란데의 설명도 실제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환각, 혹은 환상적 지각들이 일어났음을 증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름 아닌 무의식 내용의 투사였던 것이다. - P41

7 De Alchemiae difficultatibus, in Theatrum chemicum, 1602, I, p. 164 018[번역] 비슷한 것이 Philalethes. Introitus apertus, in Musaeum hermeticum,
p. 687: "대지는 탐욕스러운 생산력을 지니고 있어 항상 무엇인가를 생산한다: 대개 당신은 유리그릇 안에서 새 혹은 동물, 혹은 파충류를 본다고 믿는다." (라틴어 원문은 「전집』을 보라) 강단에 있는 남자는 분명 헤르메스-환상Hermes-Vision과 관련된다. 헤르메스-환상에 대해서는 고논문 SeniorisZadith filii Hamuelis Tabula Chymica, p. 1 이하(그림 128)에 나와 있다. 세니오르Senior Zadith는 10세기 아랍인 저자였다. 여기에 묘사된 노현자의 모습무릎에 비밀서를 갖고 있다 은 Poliphile의 권두화로 실렸다(기본 저작집』 5권의 그림 4). 이런 종류의 가장 오래된 환상幻 Vision은 크라테스Krates의 환상일 것이다. 크라테스의 책은 아랍어로 전해 내려오다 9세기에 지금의형태를 갖게 된 것 같다. 그러나 내용은 대부분 그리스의 전통이기 때문에 상당히 오래되었다. 베르텔로Berthelot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프랑스어 원문은 전집을 보라): "그런 다음 나는 강단 의자에 앉아 있는 인간 중에 가장아름다운 어떤 노인을 보았다. 그는 흰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 판자를 들고 있었으며 판자 위에 책 한 권이 있었다. 그 노인이 누구냐고 물으니 사람들이내게 대답하기를 그는 가장 위대한 연금술사인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Hermes Trismegistus 이며 앞에 있는 책은 인간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을 설명한 책 중의 하나다." (Chimie au moyen áge III. p.46 이하) - P297

연금술서의 저자들은 영적인 눈으로 보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때 본 것이 고유한 의미의 환상인지, 혹은 은유적인 의미에서의 환상인지는 항상 분명하지않다. 그리하여 새로운 빛Novum humen』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은 자연을 통하여 지적인 철학자들에게 그림자 속에 숨겨져있는 것들을 드러나게 하고 그림자를 그것들로부터 벗겨내는 일을 허락한다. ... 이러한 모든 것이 일어나도 평범한 사람들의 눈으로는 이것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예지적 오성의 눈과 상상력의 눈은 이것들을 진실한, 가장 진실한 관조로 파악할 수있다." - P42

9Musaeum hermeticum, p. 574 [Michael Sendivogius] - P297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 Tractatus Aristotelis』¹³에 연금술사의 심리학에 대한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뱀은 지상의 어떤 동물보다 교활하다: 피부가 아름답다는 것때문에 뱀은 순진한 얼굴을 한다. 따라서 뱀이 물속으로 잠겨들면 착각에 의해서, 말하자면 어떤 <근본적 질료materia hypostatica)를 이룬다. 그곳에서 뱀은 자기의 신체인 대지의 세력들virtutes을 모은다. 매우 목이 마르기 때문에 뱀은 취할 정도로 물을 많이 마신다. 뱀은 자신이 통합했던 자연을 철두철미하게 사라지도록 만든다. "¹⁴

뱀은 메르쿠리우스이며 그것은 ‘물‘에서 스스로 근본 실체Grundsubstanz(hypostatica)를 이루며 그것과 하나된 자연을 삼켜버린다(그림 130; 메르쿠어 분수에 빠진 태양, 태양을 삼키는 사자[그림 169] 가브리쿠스Gabricus를 자신 속에서 용해시킨 베야Beya). - P45

13 Theatrum chemicum, 1622, V, p. 884.
14 중요한 부분의 원문: "...마치 근본적 질료는 착각의 결과에 의하여 스스로 형성된 것으로 비유된다quasi Materia Hypostatica tingit se in aquam demersum perillusionem" 착각lusion은 ‘억누르다(demergere‘ 혹은 ‘형상화하다fingere‘와관계 있다. 전차가 올바른 의미를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후자의 가능성을 택하였다. - P297

환상Vision들이 연금술의 작업에 연결된다는 사실은 꿈과 꿈의 환상들Traumvisionen이 연금술의 중요한 막간극, 혹은 계시의 원천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사실을 설명해준다. - P45

B. 작업에 임하는 정신적 태도

화학 작업과 정신적인 것의 관계에 대한 약간 다른 측면은 작자 미상인 다음의 인용문에 나타나 있다. "청컨대, 영적인 눈으로 낟알을 가진 작은 밀의 성장 과정을 관찰하라. 그러면 철학자의 나무를 심을수 있다." 등²⁸ (그림 131, 135, 188, 189,221 등등). - P46

28 (라틴어 원문은 『전집』을 보라.) - P298

『현자의 장미원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니까 소금과 소금의 용해를 알고 있는 사람은 고대의 현자의 숨은 비밀을 안다. 너의 영Geist을 소금에 향하게 하라왜냐하면 오직 그(영) 안에만 (오직 그 자체에 있어서in ipsa sola,
정신mens에 관계됨) 모든 고대 철학자들의 가장 뛰어나고도 은밀한 비밀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³²

만일 비밀이 소금과 관계 있다고 한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중의 활자 오식誤植을 가정해야 할 것이다. - P47

31 In Artis auriferae Il, p. 244, Ruska (Turba.p.342)가 15세기 중엽의 전자의 장미원Rosarium philosophorums을 간행됐다.
32 ‘그러므로 소금에 관한 너의 생각이나 다른 이에 대한 생각도 아님을 인정하라. 왜냐하면, 오직 그 자체에 있어서 모든 고대 철학자들의 작문, 탁월한 예밀과 최상의 신비로움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Poneerge menten team supsalem, nec cogites de alijs. Nam in ipsa sola occultatur scientia et ancanum praecipuumsecretissimum omnium antiquorum Philosophorum." Mangetus Bibliotheca chemicaII. p.95)는 "ipsa sola‘를 가지고 있다. Rosarimom phalosophomas.secundo pars22alchemiae de lapide philosophico, 1550년 초판. 또한 1593년에도 유스럽게도 나는 필사본을 얻지 못했다. - P299

실제로 연금술사들은 그들의 작업이 인간의 심혼과 심혼의 기능과어떻든 관계가 있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위에 언급한 『장미원』의 구절은 단순한 오식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 P49

(전략).

룰리우스Lulius의 의견을 끌어들여 같은 저자가 말하기를 인간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철학을 두루 섭렵하기 전까지는 작업을 진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철학은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게 드러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돌은 속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심오한 우리의 철학에 속한다."⁴² - P51

41 De alchimiae difficultatibus, in Theatrum chemicum.p.206 - P299

끊임없이 주장되고 있는 것은 인간 오성(悟性, Versand(inems))의 중요성과 필요성이다. 그것도 이렇게 힘겨운 작업을 진행하는 데 보통의 지성 이상의 것이 필요한 때문만이 아니라, 질료도 변화시킬 일종의마력이 인간 정신에 내재한다고 가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 P53

그러나 그의 사고 과정은 이미 『플라톤의 4부작 논문Traktat der platonischen Tetralogien』라틴어로는 『플라톤의 제4서 Liber Platonis quartorum』-에서 여러 가지로 선취되었다. "실험자를 위한 지침으로 도른은 서로 상응하는 네 권의 ‘문헌들‘에 따라서 네 가지 등급을 설정했다.⁴⁹ - P53

48 Theatrum chemicum, V, p. 114 01.
49 앞의 책, p. 137. - P300

50 이 줄 앞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은 이러한 승급들Erhohungen을 원소들과 비교할수있다."(라틴어 원문은 『전집』을 보라)

51 책에 반드시 분리하고 준비해야 한다quid separetur et pracparetar"라고 나와 있다. ‘분리separatio‘ 혹은 ‘용해solutio‘는 원료가 원소들로 분해되는 것과 같다.

52 본문에서 이르기를 아니마의 찬양, 자연으로부터 자가분리, 그리고 자기 자신의 물질로부터 자기영성과 자기변환에 관한 책liber in exaltatione animac,
cun sit separatio naturae, et ingenium in conversione sua a materia sua." "아니마nina"
는 그것의 체에서 분리된다separatio, 아니마는 자기 고유의 물질 안에서 변화되어야 할 ‘내재적 ingenium‘ 특성 혹은 ‘혼Seele‘이다.

53 "이성이 실제로 진리로 이끈다."(라틴어 원문은 『전집』을 보라)
54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의 준비와 같으며, 단순에로의 자연적 회귀이다. 그리고 이 준비 작업은 최고의 진정한 지성애로 인간을 동화되게 하기 위하여 자연이 하는 것 이상으로 동물성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Est sicut praeparatio totius,
et conversio naturae ad simplexet necesse est in eo elevari ab animalitate, plus quamnatura, ut assimuletur pracparation(e) ipsis intelligentiis, altissimis veris." 그러므로지성에 주작업이 주어진다. 즉, 그것은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는 승화이다. 이단계에서는 자연Natur이 단순한 것으로 변한다. 그것은 그 특성에 맞게 영들Geister, 천사들과 영원한 이념Idee들과 동류의 것이다. 두 번째 줄에서 가장 높은 단계에 해당하는 것은 불이다. "불은 모든 원소들의 우위에 있으며 그 안에서 작용한다qui est super omnia clementa. et agit in cis." 세 번째 줄에서는 변환된 자연의 에테르 같은 영묘한therische 형태이고 네 번째 줄에서는 전 과정의 목표이다. - P300

투사로 인해 연금술사의 정신Psyche 과 비밀 및 변환의 실체, 즉 질료에 사로잡혀 있는 영Geist 사이에 무의식적 동일성이 생긴다. 그러므로『제4서』는 변환의 그릇으로 "후두골occiput" 즉, 인간의 두개골의 뒷부분(5권의 그림 75 참조)을 사용할 것을⁶⁸ 추천하였다. 왜냐하면 두개골뒤쪽에 사유와 지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림 135).⁶⁹ - P59

68 "네가 만일 외적인 작업을 적용한다면, 너는 ‘뒷머리Occiput(지성)‘만 사용해야 한다. 그러면 너는 발견할 것이다."(앞의 책, p. 124. 라틴어 원문은 『전집』을 보라) 이러한 판독은 내가 아직 아라비아 원전을 입수하지 못한 상태여서 그런 유보하에서만 유효하다.

69 "두개골은 순수하고, 인간 내부에 있는 작은 뼈이며, 사유와 오성이 살고 있는그릇(용기)이다." (위에 기술한 곳, p. 124. 라틴어 원문은 『전집』을 보라) - P301

이러한 사고 과정의 전제는 유추 Analogic의 인과적 작용이다. 즉, 정신Psyche 안에서 다양한 감관적 인지로부터 관념의 단일성과 단순성이생성되듯이, 결국 최초의 물에서 에테르적 실체인 불이 생기는데바로 이 점이 결정적인 것이거니와 단순한 유추로서가 아니라, 정신적인 상태가 질료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생성된다는 점이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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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어들


나는 헌책시장에 약하다.
헌책시장을 너무 오래 서성이다 보면 정해놓고 편두통이덮쳐와 비관적이 되고 자학적이 되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차 결국에는 자가중독 증상을 일으킨다.
(중략).
그러므로 헌책시장이 열리는 계절이 되면 나는 정해놓고우울해진다. 그래서 올해는 절대로 안 간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막판에 아무래도 가야만 하는 처지에 몰렸다. - P93

헌책시장을 방황하던 그녀가 한 권의 책을 발견하고 의욕적으로 손을 뻗는다. 그곳으로 뻗어 오는 또 하나의 손. 그녀가 얼굴을 들면 그곳에 내가 서 있다. 나는 신사적으로 그책을 그녀에게 양보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녀는 예의바르게 감사 인사를 할 것이다. - P94

아무리 생각해도 나무랄 데 없이 깔끔한 계획이었다. 계획의 단계 단계가 실로 행운유수와도 같이 아주 자연스럽게이어진다. 일이 성취되는 날에는 우리는 어김없이 이렇게이야기할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때 그 책에 함께 손을 뻗은것이 우리의 시작이었어"라고.
한없이 달려 나가는 상상 속의 로맨틱 엔진을 멈출 수가없어서 결국 나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나머지 코피를 내뿜었다. - P95

교토, 시모가모 신사의 참배로.
나이 먹은 녹나무와 팽나무가 줄줄이 서 있는 다다즈 숲을 널찍한 참배로가 가로지르고 있다. 마침 오봉 휴가에 해당되는 때, 매미 소리가 줄기차게 쏟아졌다.
펄럭펄럭 나부끼는 짙은 남빛 깃발에는 ‘시모가모 납량 헌책축제‘라고 쓰여 있었다. - P96

(전략).
부아가 나서 달마오뚝이같이 볼떼기를 부풀렸건만 끝없이이어지는 책의 바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책들은 말한다.
"우리를 읽고 조금은 똑똑해지는 게 어때, 친구?" 하지만나는 이제 책이라면 넌덜머리가 났다.
헌책시장의 신이여, 나에게 책 속의 지식이 아니라 현실의 윤택함부터 달라.
지식은 그런 뒤에 줘도 된다. - P97

한 헌책방 앞에서 손에 든 문고본을 찬찬히 읽고 있는 자그마한 여성의 뒷모습. 여름에 맞춰 짧게 자른 검은 머리가 반들반들 윤이 난다. 그녀가 클럽 후배가 된 이후로 자진해서 그녀의 뒤를 따르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 지어언 몇 달, 이미 나는 그녀의 뒷모습에 관한 한 세계적 권위자라 할 만하다. 그런 내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다. 그녀다! - P98

. 나는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혀를 차면서 사랑의 길을 방해한 그 아이를 매정하게 노려보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쯤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중략). 내려다보니 소년이 먹던 소프트 아이스크림의 잔해가 내 셔츠에 찰싹 들러붙었지않은가.
"이런, 빌어먹을,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으르렁댔다. "끈적끈적하잖아."
"불평하기 전에 먼저 나한테 사과하는 게 순서 아니겠는가" 소년은 모래를 털며 느닷없이 어른처럼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P99

그녀는 손에 든 문고본을 아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책읽는 모습이 매력적인 건 그 책에 폭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에 푹 빠진 아가씨는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가. - P100

삼가 해설을 해드리자면 그때 내가 정신없이 읽던 책은제럴드 더렐의 『새와 짐승과 친척들』이었습니다. - P100

남북으로 뻗은 승마장에 양쪽으로 수많은 헌책방이 늘어서서 저마다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당겼습니다. 오른쪽 헌책방에서 "여기 재미있는 게 있어" 하고 부르면 왼쪽 헌책방에서 "여기 것이 더 재미있어" 하고 부릅니다. 처음엔 맛있는 물에 유혹당하는 비와호 수로의 반딧불이처럼 우물쭈물하다가 결국은 그래 내가 몽땅 다 봐주마, 하고 헌책시장에빠져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만난 것이 『새와 짐승과 친척들』이었습니다. - P101

더구나 내가 중학생 때부터 갖고 싶었던 책이 백 엔짜리동전 한 개라니! 지갑에 대한 신뢰에 일말의 그림자가 드리운 우리들에게는 감사하기 이를 데 없는 일입니다. 비바, ‘비기너스 럭‘(초보자의 행운-옮긴이). - P102

"히구치 씨, 오래간만이에요." 나는 머리를 숙였습니다.
히구치 씨는 싱글벙글했습니다.
"그날 밤 이후로 처음이군. 잘 지냈어? 여전히 잘 마시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요. 하지만 술 마실 기회는 별로없었어요."
"그럼 이번에 한잔하러 가야겠네. 하누키도 보고 싶어 해."
"하누키 씨는 오늘 안 오셨나요?"
"그 사람은 헌책을 안 좋아해. 다 헐어빠진 물건을 왜 돈내고 수집하느냐고." - P103

"아무리 히구치 씨가 사주시다뇨......"
"그렇지? 내가 남한테 사주는 일은 사반세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긴 하지만, 오늘은 괜찮아. 아무튼 수확이있었으니까."
히구치 씨는 의기양양하게 책 몇 권을 보여주었습니다. - P104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실망.
"아는 사람이 이 책을 갖고 싶다고 했거든. 그에게 비싼값으로 팔아 치울 거야. 게다가 오늘은 달리 또 돈을 벌 건수가 있어. 그러니 마음 놓고 날 따라와." - P104

히구치 씨는 책을 보자기에 싸서는 앞장서 걸었습니다.
"글쎄 말이야, 그냥 종이 다발에 잉크가 스민 것뿐인데이렇게 비싼 돈을 내고 사겠다니." 그는 감탄한 듯 말했습니다. "정말로 책이란 고마운 물건이야." - P105

(전략).
"어린 건 어쩔 수 없다니까!"
나는 웃어젖혔다.
"망중한忙中閑이 있고, 한중망閑中忙이 있는 법이야. 너 같은아이야 내가 그냥 어슬렁거리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내 두뇌는 지금 어지러울 정도로 바삐 움직이는 중이야. 너야 꼬맹이니까 단지 고요한 태풍의 눈만 보고 그러겠지만이 형님의 정신은 사실 거대한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있느니라."
"거짓말쟁이. 방금 생각해낸 말이지?" - P107

"검은 머리를 짧게 자른 자그마한 사람이지? 피부는 하얗고."
(중략).
 "어이, 어떻게 그걸 알지?"
"나랑 부딪혔을 때 가게 앞에 있던 여자를 부끄러운 줄도모르고 열렬히 쳐다보고 있었잖아. 그걸 보고도 모른다면바보지." - P108

"그런 신기한 일들은 모두 신이 관장하는 거야."
히구치 씨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습니다. "헌책시장의신이 뭔지 아니?"
"아뇨, 아뇨, 처음 듣는데요."
(중략).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신을 우습게 여긴 수집가의 서고에 쌓인 책들이 어느 날홀연히 사라지는 거지. 헌책시장의 신이 서고의 책을 몽땅 가져가는 거야." - P110

나는 우리 집에 남몰래 모아놓은 책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헌책시장의 신에게 기도를 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허둥지둥 합장을 하고 "나무나무!"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내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만능 기도인데, 그림책을 읽던 어린 시절부터 애용해왔습니다. - P111

그녀의 뒷모습에 관한 한 세계적 권위자임을 자부하는 내가 그 본령을 발휘할 수 없는 건 오로지 내 뒤에 딱 달라붙어 따라오는 소년 때문이다. 이건 세상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마음에 드는 검은 머리의 아가씨를 부득불 쫓아갈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명백한 침해였다.
내가 그녀에 대한 검색 능력을 발휘하려고 하면 소년은그 비위에 거슬리는 말투로 "오, 마음속의 사람을 찾는구나" 하고 실없는 소리를 해댔다. - P113

소년은 내 셔츠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어떤 책을 찾는데?"
"성가시구나. 엄청나게 딱딱한 책이야. 꼬맹이들은 몰라."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나 『논리철학논고』 같은, 사람들이 지레 겁먹는 덕에대접받는 책들 말이야?"
"차라, 투, 스트라 같은 말을 혀도 안 깨물고 잘도 말하는군." - P113

나는 몇 만 권은 되어 보이는 엄청난 양의 책등을 바라보며 내 인생에 영광의 새 지평을 열어줄 하늘이 내린 책이 이중 어딘가에 묻혀 있을 거라는 낯익은 망상에 시달렸다. 책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넌 나조차도 읽지 않았잖느냐.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이 엉터리꽈당아." "나같이 뼈대 있는 책을읽어서 네 영혼을 좀 성장시켜봐." "나를 읽기만 하면 넌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다. 지식, 재능, 근성, 기백, 품격, 카리스마, 체력, 건강, 윤기 있는 피부. 그리고 주지육림(호사스런 술잔치를 이르는 말-옮긴이)도 네가 바라는 대로될 것이다. 뭐? 주지는 필요 없다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 우선 나를 읽어라."
"무리하지 않는게 좋아, 형님."
(중략).
"더 재미있어 보이는 책이 얼마든지 있잖아.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 라구." - P115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읽은 책을 모두 순서대로 책꽂이에 꽂아보고 싶다. 누군가가 그렇게 쓴 걸 읽은 적이 있어.
너는 그런 생각 한적 없니?"
히구치 씨가 걸으며 말했습니다. "난 책을 잘 읽지 않으니까 꽂아봤자 뻔하고." - P116

나는 라타타탐Ra ta ta tam이라는 말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그래, 라타타탐!
(중략).
『라타타탐-꼬마 기관차의 신기한 이야기』는 마티어스라는 남자아이가 만든 작고 새하얀 기관차가 여행을 나선 마티어스를 따라다니며 신기한 모험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 P117

"어쩌다 잃어버린 걸까요!" 나는 신음했습니다.
그렇게 좋아해놓고는 그 뒤로 내 인생에서 만난 수많은 다른 책에 눈길을 빼앗겨 그만 잊어버리고 지낸 거예요. 이름까지 써놓았는데! 이 바람둥이! 파렴치한!
(중략).
"○○서점" "○○서점, 본부까지 오십시오" 하는 확성기소리가 나른한 헌책시장의 공기를 갈랐습니다. - P118

나는 멍하니 있다가 걸어오던 양복 입은 노인에게 들이받혔다. 화가 나서 그를 쫓았는데, 그는 뛰다시피 하여 수상쩍은 한 헌책방 안으로 들어갔다. (중략).
내가 좁은 입구에서 안을 들여다보려는데, 소년이 "거긴난 싫어"라고 했다.
"형님, 거긴 그만두는게 좋아. 봐, 구텁텁한 냄새가 나잖아." - P118

단순히 두 개의 통로로 이루어졌나 했더니 계산대 오른쪽으로 뻗은 또 다른 통로가 있었다.
대부분의 헌책방은 그냥 텐트 주위에 책꽂이를 늘어놓는게 고작인데 이 가게는 책꽂이로 건축물 같은 구조를 만들어놓았다. 계산대보다 더 안쪽, 책꽂이 사이로 난 통로 위로는 베니어판을 걸쳐서 천장을 만들었다. - P120

이미 오후 3시가 지난 시각입니다. 날이 조금 흐리고 무더워졌습니다.
그림책 코너에서는 그리운 그림책들을 많이 찾았지만 『라타타탐』은 없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그림책을 헌책방에 팔아버릴 사람이 있을 리 없지 하고 생각하니 그걸 잃어버린 나 자신이 자꾸만 더 한심스러워졌습니다. - P121

. 귀여운 소년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누나, 뭘 찾아요?"
잘 보니 아까 선배의 옷자락을 잡고 걷던 아이였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예뻤습니다. 주위에 선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아까 선배의 동생이라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나 봅니다. - P121

그리하여 나는 소년과 함께 『라타타탐』을 찾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역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풀죽어했더니히구치 씨가 "아직 방법은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헌책방에 수색을 의뢰하면 돼. 가비서방의 주인한테 부탁해보자."
"찾을 수 있을까요?"
"분명 필사적으로 찾아줄 테니까 기대해봐." - P122

나는 함께 책을 찾느라 애쓴 소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하려고 고개를 돌렸으나 소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어쩐지 환상 속의 소년 같았습니다. - P123

조금 전보다는 편한 마음으로 책꽂이 사이를 걷는데 또그 소년이 나타났다.
"아이답게 그림책 코너도 돌고 왔어. 당신도 갔으면 좋았을걸. 당신이 그리는 사람이 거기 있었거든."
"뭐?"
"『라타타탐』이란 책을 찾던데."
"아니, 그 수엔 안 넘어가." 내가 말했다. "뭐야, 괴상망측한 제목하고는 그런 책이 어딨냐?" - P123

곁에는 소년이 앉았다. 그는 종잇조각 다발을 손에 하나가득 들고 만지작거렸다. 하나하나에 가격과 서점 이름이쓰여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헌책에 붙었던 가격표인 듯했다.
"어이, 무슨 짓이니. 헌책방 아저씨한테 혼나."
"신경 쓰지 말게나. 훗날 이게 도움이 될 테니." - P125

그녀의 모습은 안 보였지만 몇몇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선 신경이 쓰인 건 옆 평상에 앉은 기모노 차림의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기모노도 눈에 띄는데 양산을 받쳐 들고단정히 앉아 『오다 사쿠노스케 전집』을 탐독하는 것이 수상쩍었다. 그 모습이 이곳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지 어떤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 P126

평상 곁에는 키가 작은 대학생이 홀로 서 있었다. 사각의검은 테 안경을 낀 얼굴 역시 사각이며 발 옆에 둔 무거워보이는 두랄루민 케이스도 사각이었다. 철두철미하게 사각을 만드는 것이 그의 신조인가 보았다. 기묘하게도 그는 오로지 전철 시각표를 읽는 데 몰두했다.
나는 머리가 멍해지면서 공상에 빠져들었다. - P127

"악랄한 수집가의 손에서 고서를 해방한다."
히구치 씨가 그렇게 선언하자 가비서방 주인은 "그럴듯하군" 하고 캐득캐득 웃었습니다. - P127

"아가씨,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소리를 진짜로 받아들여서는 안 돼."
주인이 말했습니다. "헌책시장의 신이라니, 쯧쯧."
"수집가 분들이 매월 초가 되면 헌책을 바치고 대연회를연다고 하던데요?" 하고 말한 나.
"그게 사실이라면 흥미롭군."
주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웃었습니다. "어이 히구치 씨,
자네도 참, 적당히 하라고. 사람을 놀리면 안 되지." - P128

주인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보온병에서 차를 따라 꿀꺽 마셨습니다.
"수집가의 손에서 해방하다니, 수집가 입장에서 보자면쓸데없는 참견 좀 작작해라. 그거지. 한 번 더 뜻밖의 행운을 잡을 수 있는 거니까 우리에게야 고마운 이야기지만하지만 오늘의 일괄 경매 모임에 신이 개입한다면 큰일인데...."
"내가 신이라면 지금쯤이면 이백 씨에게 천벌을 내릴 때가 됐어." - P129

주인이 설명해준 바에 따르면 오늘 이 헌책시장의 한쪽구석에서 개인적인 경매 모임이 열린답니다. 주최자는 이백씨라는데, 나도 한 번 대작을 했던 분입니다. 겉보기에는 부드러운 할아버지지만 엄청난 부자이며 또한 피도 눈물도 없는 극악무도한 고리대금업자라고 합니다. - P130

헌책방 주인들은 그 비밀 모임에 참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히구치 씨가 가비서방의 밀명을 받아 대신 참가할 모양이었습니다. 히구치 씨가 말한 ‘돈벌 건수‘란 게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 비밀 모임에서는 어떤 걸 하는데요?"
주인은 한쪽 뺨을 일그러뜨리며 웃었습니다. - P131

"무슨 일이 있을지는 아무도 몰라. 이백 씨가 내는 시험을 통과하는 사람은 원하는 책을 가질 수 있어. 하지만 손쉬운 시험은 아니야. 도전자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시험 앞에서 자존심이고 뭐고 다 잃고 납작 엎드리게 될 거야. 이백씨는 그 광경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는 거지." - P131

"저기, 형님."
소년이 갑자기 작은 소리로 말하며 가느다란 팔을 들어보이지 않는 요요를 당겨 올렸다 놓았다 하는 듯한 몸짓을했다.
"아버지가 옛날에 나한테 말했어. 이렇게 한 권의 책을들어 올리면 헌책시장이 마치 커다란 성처럼 공중에 떠오를거라고. 책은 모두 이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거야. - P133

"처음에 형님은 『셜록 홈즈 전집』을 봤어. 저자인 코난 도일은 SF라 할 『잃어버린 세계를 썼는데 그건 프랑스 작가쥘 베른의 영향을 받은 거였어. 그 베른이 『아드리아 해의 복수』를 쓴 건 알렉산더 뒤마를 존경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일본에서 번안한 것이 《요로즈초호》(?朝?, 근대의 진보적 일간지-옮긴이)‘ 주간을 했던 구로이와 루이코인데, 그는 『메이지 바벨탑』이라는 소설에서 작중 인물로 등장해, 그 소설을 쓴 야마다 후타로가 『전중파 암시장 일기』 속에서 ‘우작‘이라는 단 한마디 말로 참수시킨 소설이 『귀화』인데 그걸 쓴 것이 요코미조 세이시. 그는 젊은 날 잡지 <신청년>의 편집장이었는데 그와 손을 잡고 <신청년>의 편집에 관여한 편집자가 안드로노스의 후예를 쓴 와타나베 온. 그는 업무상 방문한 고베에서타고 있던 자동차가 전철과 충돌하여 죽게 되지. 그 죽음을「춘한」이라는 글로 추도한 것이 와타나베에게서 원고를 의뢰받았던 다니자키 준이치로. 그 다니자키를 잡지에서 비판해 문학 논쟁을 전개한 것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인데 아쿠타가와는 논쟁 몇 개월 후에 자살을 해. 그 자살 전후의 모습을 모티브로 우치다 켄이 『중산모자』를 썼고 그 우치다의 글을 칭찬한 것이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가 스물두 살때 만나서 나는 당신이 싫다‘ 하고 맞대놓고 말한 상대가다자이 오사무 다자이는 자살하기 일 년 전에 한 남자를 위해 추도문을 써서 ‘너는 잘했다‘라고 했어. 다자이에게서 추도사를 받은 남자는 결핵으로 죽은 오다 사쿠노스케야.
봐봐, 저기 그의 전집을 읽는 사람이 있어." - P134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응. 그래서 오늘 내가 여기 온 거야. 나한테는 아버지의책을 이 바다에 돌려줄 사명이 있어."
소년은 비가 그쳐가는 하늘을 가리켰다.
"악랄한 수집가의 손에서 고서들을 해방한다. 나는 헌책시장의 신이다." - P135

소년이 또 헌책 한 권에서 가격표를 떼며 중얼거렸다.
"아, 너 또 그런 나쁜 짓을!"
"놔둬."
"어떻게 놔두냐, 이 바보야."
그런 말을 주고받는데 콧수염을 기른 헌책방 주인이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달려왔다.  - P136

"이게 무슨 소리야? 당신, 이 아이한테 무슨 짓을 했어?"
"네? 아무 짓도 안 했는데요."
"이 애가 당신이 시켜서 했다잖아."
헌책방 주인은 내 팔을 잡았다. "똑바로 이야기 안 하면 경찰을 부를 거야."
"모른다니까요, 농담 말아요."
"그야 농담이면 곤란하지." - P137

그때 먼발치에서 이 소란을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좀 뚱뚱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그 사람, 아는 사람인데요......" 했다.
"아아, 치토세 씨군요. 거참." 헌책방 주인이 머리를 숙였다.
"그 사람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아이가 질이 나빠요. 아까도 비슷한 짓을 해서 소란을 일으키는 걸 봤어요." - P138

치토세야의 젊은 주인은 내 팔에 손을 대더니, "보답을해달라는 것 같아서 좀 그렇지만, 부탁할 게 있어" 하고 말했다.
"좋은 일이 있거든. 여기서 만난 것도 무슨 인연이겠지." - P139

침침하고 조용했다. 통로 끝의 계산대 앞에서 비밀스러워보이는 옆의 통로로 들어서려는데 기모노 차림의 여성이 갑자기 발을 멈췄다.
"죄송합니다. 전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어요."
"엉? 그래요?"
검은 테 안경의 헌책방 주인이 말했다. "잘 생각했어요.
당신 같은 분은 여기서 돌아가는 편이 좋아요."
"여기까지 온 김에, 라기엔 좀 그렇지만, 이걸 이백 씨한테 좀 전해주세요." - P142

드디어 그 통로가 끝나고 2층쯤 되는 높이까지 이어지는계단이 정면에 나타났다. 계단을 올라가니 중후한 철문이다. 램프가 그 옆에서 오도카니 불을 밝히고 있는 것이 쓸쓸한 거리의 모퉁이를 생각나게 했다. 문 옆에는 나무 팻말이매달렸는데 거기에 "이백"이라고 요세문자로 쓰여 있었다.
헌책방 주인이 벨을 눌렀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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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할 하틀리

나는 자라면서 그렇게 열심히 만화책을 읽진 않았다. 신문에 실리는 일간 연재만화에 크게 사로잡혔던 기억도 없다. 하지만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말풍선 안의 내용을 읽기보다 특정한 만화의 그림체를 따라 그려보려고 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던 것을 기억한다. 『피너츠』도 분명히 읽었을 것이다. - P11

『피너츠 완전판 1965~1966』을 위한 서문을 쓰지 않겠느냐는 청탁을 받았을 때, 나는 기억을 되새기는 데 참고할 수 있도록 1970년대 초중반연재분을 받아볼 수 있겠냐고 요청했다. - P11

 등장인물들 또한 찰스 슐츠가 실제로 활동하던 세계에 대한 자각을 통해 만들어졌음을 느낄 수 있다. 『피너츠」』연재분을 완독하고 나서,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아이들과 어른들에 대한 영속적인 통찰과 인상밖에 받지 못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것도나름대로 나쁘진 않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로서는 이 작품을 단순히그렇게 읽을 수 없다. 이 아이들은 미국인이며, 그들의 언행은 명백히만화의 네모 칸 바로 바깥에서 돌아가고 있던 세상의 산물이다. - P12

 하지만 거기엔 한편 짜증스러움, 당시의 사회 문제(이 경우, 1970년대에는 아직 새로운 화두였던 페미니즘의 일상적 적용)를 따라잡으려는 슐츠의 노력과 그에 따른 피로감이 드러나 있었을지도 모른다(나 역시 당시에 친구들과 절박하게 논쟁했던 것을 기억한다. 새 담임선생님 성함 앞에 ‘미스Miss‘를 붙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 만들어진 호칭인 ‘미즈Ms.‘를 붙여야 할 것인가, 하지만 결국 ‘미즈‘도 기존 용어의 축약일 뿐 아닌가 하는 문제로 말이다). - P12

. 그는 독보적인 감수성을 지녔으며 공손하지만 인간들이 흔히 보이는 약점을 묘사할 때면 타협하지 않고, 관습적 지혜라는 것은 대부분 공허하다는 점을 차분히 드러내 보이며, 이따금씩 나로서는 오직 ‘부조리 사실주의‘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뭔가를 구현해낸다. 나 스스로 훔쳐내어 15년 혹은 16년 후에 직접 써먹고 말리라 다짐하게 되는 그 무언가를. - P12

나는 영화감독이다. 내가 만드는 영화들은 흔히 우습다. 우울하다, 생각을 자극한다, 시적이다, 편협하다,
스타일리시하다, 혹은 단순히 끔찍하다고 평가된다.
사람은 분류당하며 사는 데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 P12

왜냐면 나는 분명 어릴 적에 이미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과 그 실제 의미는 다르다는 걸, 적어도 두 가지가 정확히 일치하진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선의 때문에 그리할 때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는 괴로운 주제를 피해가는 방법을 익힌다. - P13

그리고 이제 나는 열서너 살 무렵 찰리 브라운의 세계와 규칙적이고 일상적으로 접촉했던 것이 나의 유머 감각과 인생관, 이야기꾼으로서의 성향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지 생각해본다. 『피너츠』 세계의 친구들은 당시 내 일상의 일부였고 매일 현관 계단의 신문 속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존 레넌과 오노 요코에 대한 온갖 비난들, 워터게이트 사건이나 닉슨의 중국 여행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 P13

『피너츠』가 내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정확하게 서술하기란 어렵다. 아무도 내게 이 만화가 재미있는 이유를 설명해줄 필요가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피너츠』를 읽고 웃었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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