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모르게 해주의 두 손이 가볍게 들렸다. 가늘게 눈을뜨자 거리의 흰 가로등 빛이 마치 무대 위 조명처럼 느껴졌다. 해주는 성큼 발을 내디뎠다.  - P68

그날 해주는 얻고 잃은 것이 하나씩 있었다. 얻은 것은 노래하는 아경과 자유롭게 춤을 추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잃은게 있다면 그날 어딘가에 부딪쳐 골절이 된 엄지발가락 때문에 한동안 무용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 P69

공연 시작 시간보다 다소 늦게 도착한 해주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이미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스툴 의자나 긴 벤치 의자에 앉은 채로 빽빽이 들어차있었다. - P70

얼굴이 달아오른 해주가 뒤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계좌번호 알려줘."
어쩔까 하고 순간 망설인 해주였지만, 지금 자존심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 해주는 계좌번호를 적어 톡으로 보냈다.
"보냈어." - P72

더듬더듬 찾아간 미술관에서 해주는 한 할아버지의 얼굴모습이 세대별로 연대기처럼 그려진 그림들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 P75

아빠의 얼굴을 보지 않고 지낸 지 벌써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당장 시급한 월세를 생각하면 아빠에게 연락해 도움을 청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지만 그도 잠시뿐, 해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P75

어렸을 적 춤을 처음 가르쳐준 건 아빠였다. - P76

아빠가 전에 없이 크게 화를 낸 건 그렇게 어렵게 해온 무용을 포기하겠다고 했을 때였다. 대학에서 현대 무용을 전공한 해주가 그 길을 포기하고 스트리트 댄서로 춤을 추며 살고 싶다고 했던 바로 그때 - P77

아빠가 실망 어린 눈초리로 해주를 바라보며 크게 한숨을내쉬었다.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대신."
"네
"대신?"
"아빠는 너 못 본다."
어쩌면 잔인하게까지 느껴지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다해주는 펜을 내려놓았다. - P80

(전략). 당장 행사나 백댄서 일자리가 있는지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려보고 안 되면 알바 자리라도 급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어 나가려는데 휴대전화 액정에뜬 은행 입금 메시지가 해주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입금액: 1,000,000원입금자 : 권아경‘ - P81

단 하루의 전시


초록색 나뭇잎들 사이로 간간이 붉은색 단풍이 엿보이기시작한 가을이었다. 언제든 그만둘 마음으로 출근하는 거야그대로였지만, 호수는 어느덧 다른 곳과는 사뭇 다른 부암동의 정취와 숲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공기만은 좋다고 생각했다. - P82

"나 같은 노인도 여기 취직하자마자 진작 그만두고 싶었는데 그게 벌써 이 년이 넘었어. 잘 버텨봐, 호수 청년."
방황하던 호수의 마음을 짐작하기라도 했는지 할머니가눈을 찡긋했다.
"・・・・・・고맙습니다."
호수가 쑥스러워하자 할머니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냐, 아냐. 나도 항상 밝은 호수 청년 덕에 기분이 좋아.
아 이렇게 산밖에 없는 동네에 호수가 생겼잖아." - P83

"혹시 작가님은 어떤 분이세요?"
무슨 질문이든 하지 못할 대답이란 없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오 실장이 금세 얼굴을 붉히며 허공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 그야..... 회사 차원에서 관련 있다는 것만 알고 나도뭐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해. 아니, 그게 궁금해?" - P85

"아, 그래? 다행이네. 이상하다 하는 사람은 없고?"
"네. 아직까진 특별히 없어요."
오 실장이 안심한 표정을 짓는 사이 미술관 출입구로 한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관람객이려니 했는데 일행이 모여 있는 쪽으로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검은 볼캡을 깊이 눌러쓰고 오버사이즈 후드 집업과 오버사이즈 팬츠를 매치해 입은차림이었다. - P86

"아, 원래는 안 그래요. 오늘은 해주 님 사연으로 완성된 작품이 조금 특별하게 하루만 전시되는 거라서요."
"맞아요. 그래서 오늘 꼭 작품을 보셔야 합니다."
앞서 걷던 호수가 뒤돌아보며 다미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는 전시관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 P87

"전 오래 가족과 떨어져 지냈어요. 가족들은 제가 미술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부모님은 인생을 잘 살아가는 방법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세요. 저도 그렇게 살아가길 바라시고요. 하지만 그런 부모님의 기대로부터 저를 얼마나 잘라냈는지 모르겠어요. 아무 도움이나 지원 없이 스스로 고립되었다고 느낄 만큼요. 그것 때문에 부모님과 사이가 벌어진 건 속상한 일이긴 하죠......." 말끝을 흐리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다미가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런 일만 있는 건 또 아니니까요. 나름 좋은 점도 있고." - P89

발밑에 빗물이 차고 빗줄기가 얼굴을 때리는 와중에도 움직임 없이 서 있던 호수가 빗속으로 발걸음을 떼자 어깨 위로 빗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 P92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니까요

전시실에 들어간 해주는 당황한 낯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작품이라고 보일 만한 건 없었고 빈 액자만이 벽면에 걸려 있었다. - P93

성미가 강퍅하기만 했던 아빠가 몇 년 새 헐렁해진 바지만큼이나 힘 빠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꿈속에서만 가끔 어른거렸던 아빠였다. 가끔 떠올리고도 바로 솟구치는 원망으로 북북 지워버리곤 하던 아빠가 정작 앞에 나타나자 해주는 복잡한 심경으로 인해 일말의 반가움조차 표현하기가 어색해졌다.
"아빠는 웃는 표정 짓기 힘들어하잖아." - P95

해주는 갑작스럽게 관심을 보이는 아빠가 의아하고 부담스러워지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어떤 춤을 추는지 보고나 싶었어. 너무 과격한동작 때문에 다치기라도 하는 건 아닌지 아빠도 내심 걱정되었으니까. 네가 엄지발가락 골절된 게 무용 때문이 아니었다는 걸 아빠가 모르는 줄 알았니?" - P97

아빠에게 춤을 계속해보라는 얘기를 들을 줄도, 들을 마음도 없었던 해주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지만 꾹 참았다. 단지 그 말만으로 아빠와 과거에 겪었던 상처와 불화가 말끔히 해소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P98

"그런가. 사고 이후로는 아예 음악을 듣지 않아서 잘 몰라. 그냥 좋았어."
휴대폰 속 플레이리스트를 손으로 넘겨보던 해주가 그중한 곡을 골라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 P100

해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중년에게는 어울릴법하지 않은 어딘가 어색한 모습이었지만, 아빠의 동작은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 P101

"아빠. 진짜 웃는 아빠 같다."
"내가 웃는 모습이 보여?"
"응, 조금."
해주는 아빠의 환한 웃음을 선명하게 마주 보았다.
"나는 아빠가 늘 화난 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어."
"웃는 아빠입니다, 오늘은." - P105

"그건 어디서 난거야?" 하고 아빠에게 묻는 순간이었다.
"선해주."
별안간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였다.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해주야." - P103

"맞아 미술관에서 너의 사연을 어떻게 작품으로 표현할지고민하다 내게 연락을 준 거래. 아버님과의 어떤 연결고리를찾고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버님이 운영하시는 식당을 알려드렸어. 만나 뵈면 좋을 것 같다고 내가 제안하기도 했고. 허락도 없이 미안해." - P104

아빠는 그저 해주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해주는 아빠의 얼굴 구석구석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그 얼굴 너머로아빠가 웃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 P106

미술관을 나와 아경과 함께 걷는 내내 해주의 마음에 못내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돈 보내준 거 봤어. 바로 갚을게. 고마워."
돈 때문에 아경 야속하게 만들었을 걸 생각하자 해주는미안해졌다. - P106

해주는 아이 버스킹하던 놀이터에서 처음 만난 때를 떠올렸다. 간밤의 들뜬 기운과 개운한 땀이 온통 해주를 뒤덮고 있던 그때, 아경은 해주에게 늘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 P108

"사랑해."
아경이 나지막이 해주의 말을 따라 하며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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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부


01

내 나이 열다섯이던 해에 나는 간염에 걸렸다. 나의 병은 그해 가을에 시작되어 다음 해 봄에 끝났다. 묵은해의 날이 점점더 추워지고 어두워질수록 나의 몸은 자꾸만 약해져갔다. - P6

나의 첫 바깥나들이는 블루멘 가에서 반호프 가까지 가는것이었다. 세기 전환기에 지어진 블루멘 가의 어느 육중한 건물 3층에 우리 집이 있었다. - P6

바로 그때 그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의 손길은 조금 거칠었다. 그녀는 내 팔을 잡고는 어두컴컴한 현관을 지나 안마당으로 나를 이끌었다. 건물 위쪽의 창문과 창문들 사이로 팽팽하게 잡아맨 빨랫줄에는 빨래들이 널려 있었다. 마당에는 목재가 쌓여 있었다. - P7

(전략).
그날 어머니는 의사를 불러왔고, 의사는 간염이라는 진단을내렸다. 그 후 어느 날 나는 어머니에게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만약에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그 여자 집을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 P8

02

반호프 가의 그 건물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그 건물이 언제, 왜 헐렸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서 살았다. 그 자리에 새로 들어선 것은 70년대 혹은 80년대에 지은듯한 5층짜리 건물로 지붕 밑에 다락방이 하나 있고 돌출창이나 발코니 없이 매끈하게 밝은색으로 회칠이 되어 있다. - P9

나는 이미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 건물을 알고 있었다. 그건물은 옆으로 늘어서 있는 다른 건물들을 압도했다. - P10

나이를 먹은 뒤에는 꿈속에서 수시로 그 건물을 보았다. 언제나 비슷한 꿈들이었다. 그것은 단 한 가지 꿈과 테마가 변형된 것들이었다. - P10

우선은 분명히 어느 도시의 건물들틈에 서 있어야 할 게 넓은 들판에 덩그러니 서 있는 것만 이상할 따름이다. 다음 순간 나는 그 건물을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이제 나는 더욱더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그 건물을 보았던 장소가 기억나는 순간 나는 차를 돌려 그 건물을 향해 돌아간다. - P11

나는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길을 건너 건물 입구를 향해 걸어간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 P12

03

나는 그 여자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 P13

건물 안에는 석고 세공품도 거울도 폭이 좁은 양탄자도 없었다. 건물 정면의 화려함과는 다른, 계단실이 원래 간직했을 법한 소박한 아름다움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계단의빨간 페인트는 사람들의 잦은 발길 때문에 가운데 부분만 일렬로 벗겨졌고, 계단을 따라 어깨 높이로 붙어 있던 초록색 문양의 리놀늄도 닳아 없어졌으며, 난간의 살이 떨어져나간 자리에는 끈이 묶여 있었다. 어디선가 세제 냄새가 났다. - P13

그 집에는 화장대와 테이블, 의자 네 개 안락의자 그리고 석탄 난로를 갖춘 작고 비좁은 거실도 하나 있었다. 거실은 겨울에도 전혀 불을 때지 않았으며 여름에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 P14

04

"잠깐 기다려" 내가 일어나서 가려고 하자 그녀가 말했다.
"나도 나가야 해. 같이 좀 걷자."
나는 현관에서 기다렸다. 그녀는 부엌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 P16

그녀는 나의 시선을 느꼈다. 나머지 스타킹을 잡으려다 말고 문 쪽으로 몸을 돌려 내 눈을 쳐다보았다. 그때 그녀의 눈빛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놀란 눈빛이었을까, 무언가를 묻는 듯했을까, 다 안다는 표정이었을까, 나무라는 눈빛이었을까. - P17

몇 년 뒤 나는 내가 단순히 그녀의 몸매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몸놀림 때문에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 P18

비록 내가 지금에 와서는 그것을 깨닫고 이렇게 이야기까지하지만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도 무엇이 나를 그토록 흥분시키는지에 대해 생각만 하면 늘 다시금 흥분되었다.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나는 그 우연한 조우를 다시 기억 속으로 불러들였다. - P19

05

일주일 뒤 나는 다시 그녀의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일주일 내내 나는 그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나를 만족시키고 나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 P20

바깥세상, 즉 마당이나 정원 또는 길거리에서 보내는 자유 시간의 세계는 아주 희미한 소리가 되어 병실로 들어올 뿐이다. 병실 안에는 환자가 읽고 있는 이야기와 형상들의 세계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 P20

그런데 환자의 병이 나으면 이 모든 것은 끝나고 만다. 하지만 병이 아주 오랫동안 계속된 상태라면, 병실은 외부 세계에 대해 방수 처리되고 이제 병이 거의 나아 전혀 열이 나지 않는 환자라 하더라도 미로 속에서 헤맨다. - P21

그 당시 슈미츠 부인을 찾아가려는 용기가 어디에서 솟아났는지 모르겠다. 말하자면 그동안 받아온 도덕 교육에 스스로가 반항을 한 것일까? 음탕한 눈길이 욕망을 실제로 채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쁘고, 적극적인 상상이 상상을 직접 행동으로옮기는 것이나 다름없다면,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직접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 P22

나는 당시 그렇게 아전인수 격으로 생각하면서 나의 음탕한생각을 기이한 도덕적 계산으로 정당화시키고 양심의 가책을 침묵시켰다. - P22

06

그녀는 집에 없었다. 건물의 현관문이 조금 열려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계단을 올라가 초인종을 누른 후 기다렸다. 나는 초인종을 다시 한 번 눌렀다. 집 안의 문들은 열려 있었다. - P24

슈미츠 부인이었다. 한 손에는 석탄 양동이를 다른 손에는조개탄 그릇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제복 차림이었다. 재킷과치마로 된 제복이었다. 그녀가 전차의 차장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층계참에 다다를 때까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 P25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집에서도 지하실에서 석탄을 날라온 적이 있었고 또 그때마다 별문제가 없었다. 물론 우리 집에서는 석탄이 그렇게 높이 쌓여 있지는 않았다. - P26

석탄 산더미가 진정되고 나서야 나는 석탄 더미에서 빠져나와 두 번째 양동이를 채웠다. 그러고는 빗자루를 하나 찾아내 지하실 입구까지 굴러가 있는 석탄 조각들을 판자 칸막이 안으로 쓸어 넣고 문을 잠근 다음 양동이 두 개를 들고 위로 올라왔다. - P26

나는 머뭇거리다가 스웨터와 셔츠를 벗고 다시 엉거주춤 서있었다. 물은 금방 차올라 욕조가 거의 가득 찼다.
"신발 신고 바지까지 입은 채로 목욕을 할 거니? 쳐다보지않을게, 꼬마야."
하지만 내가 수도꼭지를 잠그고 팬티까지 다 벗고 났을 때, 그녀는 나를 찬찬히 훑어보고 있었다. - P27

"샴푸로 머리도 감아 큰 타월을 금방 갖다 줄 테니까."
그녀는 옷장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는 부엌에서 나갔다.
나는 몸을 씻었다. 욕조의 물은 더러워졌다. 나는 물을 새로 받으며 쏟아지는 물줄기로 머리와 얼굴을 깨끗하게 헹구었다.
나는 그대로 누운 채 목욕물 데우는 난로가 부글부글 끓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 P28

나는 두려웠다. 서로의 몸을 더듬는 것이, 키스가, 그리고 내가 혹시 그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내가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 P29

07


그날 밤 나는 그녀에게 흠뻑 빠졌다. 나는 깊이 잠들지 못했고 그녀를 그리워하며 그녀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녀를 어루만지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베개나 침대보를 움켜잡고 있음을 깨닫곤 했다. 격렬한 키스 때문인지 입술이 아팠다. - P30

그녀가 나와 함께 잤다는 사실에 대한 대가를 치르느라 그녀에게 흠뻑 빠진 것일까? - P30

마찬가지로, 그때까지는 나의 마음속에 아무런 이름도 갖고있지 않던 그 여자 역시 그날 오후에 내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다음 날부터 다시 학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 P31

"왜 그렇게 늦었니? 엄마가 너 때문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아버지의 목소리는 걱정스럽기보다는 화난 듯이 들렸다. - P32

아주 어렸을 적에 형과 나는 늘 치고받고 싸웠으며 그 후로는 말로 싸움을 벌였다. 나보다 세 살 위인 형은 이 두 가지 면에서 언제나 나를 앞섰다. 언젠가부터 나는 형의 말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형의 공격적인 시도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 후로 형은 기껏해야 불평을 늘어놓는 것으로 그쳤다. - P33

나는 가끔 그의 가족인 우리가 그에겐 가축과 같은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다. - P34

아버지는 나를 건너보았다.
"저 내일부터 다시 학교에 나갈래요.‘ 너 네 입으로 그렇게말했지, 그렇지 않니?"
"그래요."
아버지에겐, 내가 어머니가 아닌 그에게 그것을 물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또 내가 다시 학교에 나가야 할지 어떤지 잘 모르겠다고 우물쭈물하지 않은 점이 눈에 띈 것 같았다. - P35

08

다음 며칠 동안 그 여자는 새벽 근무조였다. 그녀는 낮 열두시에 집에 돌아왔고, 나는 그녀의 집 앞 층계참에서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 날마다 마지막 수업을 빼먹었다. - P36

나는 차라리 샤워를 생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저분한 것을 끔찍하게 싫어해 아침마다 샤워를 했다. - P36

"이름이 뭐예요?"
나는 7일인가 8일 째 되는 날에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중략).
그녀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이름이 뭐냐고요!"
"그건 왜 알려고 그러니?" - P38

"내 이름은 미하엘 베르크예요."
"미하엘, 미하엘, 미하엘." 그녀는 내 이름을 음미했다. "내꼬마의 이름은 미하엘이고, 대학생......."
"고등학생이에요."
"・・・・・・고등학생이고, 나이는, 열일곱 살?"
나는 그녀가 내게 덧붙여준 두 살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 P39

그녀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으로 제대로나눈 대화였다.
"고등학교 1학년. 병이 나서 지난 몇 달 동안 공부를 거의 못했어요. 1학년을 마치려면 앞으로 멍청할 정도로 공부만 해야할 거예요. 난 지금 이 시간에 학교에 있어야 해요."
나는 그녀에게 내가 수업을 빼먹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 P40

 그녀는 이불을 홱 젖혔다. "당장 내 침대에서 나가그리고 공부를 하지 않으려면 다시는 찾아오지마. 네가 하는공부가 멍청하다고? 멍청하다고? 차표를 팔고 개찰하는 일이어떤 건지 알기나 하니?"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벌거벗은 채로 부엌에 서서 갑자기차장이 되었다.  - P40

"미안해요. 내가 해야 할 일을 할게요.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앞으로 6주 뒤면 1학년이 끝나거든요. 한번 해볼게요. 하지만 당신을 다시 못 보게 된다면 해낼 수 없을 거예요. 나는......."
나는 처음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녀의 말이 분명 맞았다. - P41

09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나는 왜 이리 슬픈 걸까? 잃어버린 행복때문일까? 나는 그 후로 몇 주 동안 행복했다. - P42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 시절의 내 모습이 보인다. 나는 돌아가신 어느 부유한 친척 아저씨가 유품으로 남겨 나한테까지돌아온 우아한 양복 몇 벌을 입고 다녔다. - P43

바로 이것이 나를 슬프게 했을까? 당시 나의 가슴을 가득채웠던, 생에서 결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끌어냈던 그 열의와신념 때문인가? 지금도 나는 가끔 아이들과 십대들의 얼굴에서 그 당시의 나에게서와 똑같은 열의와 신념을 발견한다. - P44

"꼬마야, 넌 정말 별걸 다 알려고 드는구나?"
장래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녀와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릴 생각은 아니었다.  - P45

그런 생각과 제안이 내게 전혀 수치스럽게 여겨지지 않았다는 게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어머니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나는 독방을 얻으려고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 P46

지금의 내가 서른여섯 살 난 여자를 본다면 나는 그 여자를 젊다고 여길 것이다. - P46

책 읽어주는 일 때문이었다. 우리의 첫 대화가 있던 날 한나는 내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키케로의 연설문 그리고 물고기와 바다를 상대로 한 노인의 싸움에 대한 헤밍웨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P48

나는 그녀가 나를 샤워실과 침대로 이끌기전반 시간가량 그녀에게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어주어야 했다. 이제는 나도 샤워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올때 함께 가져온 욕망은 책을 읽어주다 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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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어떤 경우를 거쳐 태어난것일까? - P151

공준5 두 직선이 한 직선과 만날 때, 같은 쪽에 있는 내각의 합이 2직각보다 작으면 이들 두 직선을 연장할 때 2직각보다 작은 내각을 이루는 쪽에서 반드시 만난다. - P151

이 유클리드의 다섯 번째 공준을 알기 쉽게 바꾸어 표현한 것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스코틀랜드의 수학자 플레이 페어(1748~1819)가 말한 다음의 평행선 공리이다.


[평행선 공리] 평면 위에서 주어진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 주어진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하나밖에 없다. - P152

또, 다음의 공리도 유클리드의 제5번째 공준을 바꿔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 동일 평면상에 있어서 그 사이의 거리가 항상 일정한 두 직선이 존재한다.
2. 닮음이지만, 합동이 아닌 한쌍의 삼각형이 존재한다.
3. 사각형에서, 세 개의 내각이 직각이라면 네 번째 내각도 직각이다.
4. 내각의 합이 2직각인 적어도 한개의 삼각형이 존재한다. - P153

한편, 유클리드 이후 2000년간이나 수학자들은 다른 공리와 공준을 사용하여 유클리드의 제5번째 공준을 증명하려고 노력해왔지만, 여기에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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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욕지기‘는 구역감 같은 것이다. 욕설이 아니다.




"그 사진이 조작된 사진이라는 건 알아. 어떻게 합성한 거예요?"
"얼굴 사진만 있으면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 우에마쓰 고키치 씨의 사진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으니까." - P57

"당시에 우에마쓰 씨도 비슷한 옷을 갖고 있던 건 아니고요?"
"이런 새빨간 재킷을? 말해두지만 이 옷은 올해 나온제품이야. 설령 빨간 재킷을 가지고 있더라도, 디자인이 다르다는 걸 알아채지 않을까?" - P58

"이건 합성사진이지만, 이 중에 진짜가 하나 있어. 배경인 집이지. 얼마 전 요코하마 야마테초에 가서 우에마쓰 부부의 옛집을 보고 왔지. 그때 촬영한 거야. 그뿐아니라 동네를 돌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지." - P59

하하하, 다케시는 건조한 웃음을 흘렸다.
"역시 안 통하는군. 우에마쓰 씨는 친오빠와 만나는걸 싫어했어. 그래서 뭔가 도움이 될 수 없을까 해서.
까놓고 말하자면 부자에게 빚을 하나 만들어놓으려던거지." - P59

"형사인 척이라..."
삼촌의 특기였다. 이러다 진짜 형사한테 걸려서 잡혀가는 건 아닌지 마요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나저나이 수상쩍은 겉모습을 보고도 왜 다들 형사라는 말을믿는 걸까. - P60

"대체 무슨 질문이래요?"
"이상하지? 하지만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는 사람이한둘이 아니었어. 그 얘길 듣고 우에마쓰 가즈미 씨의오빠는 아무래도 그녀를 가짜 혹은 대역일 거라 의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후략)." - P61

청산유수로 말을 쏟아내는 다케시를 마요는 뚫어져라바라봤다.
(중략).
"아니, 그 정도 정보로 용케도 거기까지 추리했다 싶어서 감탄했죠."
"이 정도가 무슨 추리라고 머리를 조금 쓰면 누구든떠올릴 법한 생각이지 널 기준으로 생각하지 마라." - P62

다케시는 스마트폰을 조작해 마요 앞에 놓았다. 화면에는 카운터에 앉아 있는 우에마쓰 가즈미의 모습이담겨 있었다. (중략).
"아마 맞는 것 같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다지 자신 있는태도는 아니었어. 그 정도로 평소 왕래가 없었던 거지." - P63

"일단 그 사람에 대해 조사해야지. 신변 조사,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난 형사 흉내 자신 없는데."
"누가 그런 짓을 하래. 아까 최강의 무기를 받았잖아."
다케시는 마요의 가방을 가리켰다. - P64

5

(전략).
비좁은 현관에서 운동화를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벽의 스위치를 눌러 실내에 불을 켰다. 곧바로 눈에 들어온건 벽 쪽에 쌓여 있는 종이 박스였다. 2, 3단으로 쌓여 있는 박스에는 내용물을 적어놓은 라벨이 붙어 있었다. ‘고키치(서재)‘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 P65

"괜찮은 집이네." 뒤에서 다케시가 말했다. "역에서도 가깝고, 집세는 얼마래?"
마요가실내를 다시 돌아보며 대답했다.
"삼십 제곱미터, 지은지 이십 년 된 집이고 십칠만쯤 하겠네요." - P66

서류 보관함의 작은 서랍을 살펴보던 다케시가 "오.
열자마자 하나 건졌네." 하고 여권을 꺼냈다. "발급 연도는 팔 년 전이야. 홍콩에 갔었네. 연상의 남편과 신혼여행을 떠났던 걸지도 모르겠군. 어때?" 펼친 페이지를 마요에게 내밀었다. - P68

다케시는 ‘우에마쓰 가즈미‘라고 자필로 쓴서명란을 가리켰다. "리모델링 관련해 서명을 받은 서류 있지? 지금 갖고 있어?"
"아, 있을 거예요." - P69

"그래. 나도 필적 위조엔 자신이 있는 편이라 아는데,
자연스럽게 썼는데 이렇게까지 비슷하단 건, 손재주가꽤 좋다는 뜻이겠지. 연습도 상당히 했을 테고." - P70

"종이 박스를 잘 봐. 제일 위에 있는 박스 라벨에는 ‘증권, 증명서류‘, ‘교우관계‘, ‘추억의 물건‘이라고 적혀 있어. 모두 프라이버시에 관련된 물건이지. 게다가 자세히보면 종이박스는 새것인데 테이프를 한 번 뜯은 흔적이 있지. (후략)." - P70

"도중에 관둘거면 처음부터 말을 말든가. 이 말이 하고 싶은 거지. 가짜가 진짜 우에마쓰 씨를 죽인 게 아니냐고, 그리고 본인인 척 막대한 유산을 가로챘다고."
정답이었다. - P72

다케시는 몸을 돌려 종이 박스를 들여다봤다.
"하지만 삼촌의 가설에 따르면 우에마쓰 씨는 우리가 짐을 뒤져볼 걸 예상하고 있었다면서요. 그렇다면만일 가짜라고 해도 그 증거가 될 만할 걸 여기 두지는않았겠죠. 아까 여권을 봐요. 절대로 의심받지 않을 거란 자신이 있으니까 일부러 금방 눈에 띄는 곳에 넣어놨을지도 몰라." - P73

테이프를 뜯어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스크랩북과 파일이 들어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끈 건 앨범이었다.
꺼내보니 상당히 오래된 것 같았다. - P74

마요는 사진 속에 부자연스러운 것이 섞여 있다는사실을 알아챘다. (중략) 비슷한 사진이 몇 장더 있었다.
(중략).
"이 사진, 이상하지 않아요?"
앨범을 보여주며 이상한 점을 설명했다.
다케시는 그 사진을 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 P75

다케시는 턱에 손을 올리고 ‘추억의 물건‘ 박스 속을들여다봤다. 손을 넣어 뭔가를 꺼냈다. 사진 액자였다. - P76

"그 사람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그제야 다케시가 말문을 열었다. "적어도 우리가 그 다케우치라는 남자에게 협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 P76

6

우에마쓰 가즈미를 욕실 관련 쇼룸으로 안내한 건 다케우치와 만난지 이레째 되던 날이었다. 마요는 서둘러새 집을 구하고 있으니 이삼일 더 기다려달라고 했다.
"괜찮아요, 호텔 생활을 만끽하고 있으니, 그보다 에비스 집은 가봤어요?" - P77

하지만 마요와 우에마쓰 가즈미가 안쪽 좌석에 앉으려던 순간, 힘차게 출입문이 열렸다. (중략). 다케우치였다.
"드디어 찾았군. 지금까지 대체 어디 숨어 있던 거야?"
다케우치는 우에마쓰 가즈미를 노려보며 말했다.
"실례지만 아직 오픈전입니다." - P78

 다케우치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더니 카운터의 의자에 앉았다. "실은 거래를 제안하러 왔어."
"거래? 무슨 거래?"
"툴툴거리지 말고 일단 앉아 봐. 그렇게 서 있으면 차분하게 얘기할 수 없잖아." - P79

"친자 확인 검사?"
"참 편리한 시대가 됐어. DNA를 조사해달라고 감정회사에 의뢰하면 친자인지 아닌지 판정을 해준다니." - P79

"설명이 필요해? 이걸로 당신과 아버지의 친자관계를 알아보자는 소리야. 말해두지만 내가 아니라 아버지 뜻이야."
"치매라면서?" - P80

"왜 거절하지? 당신이 진짜 가즈미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을 텐데 걱정 안 해도 조작 같은 건 안 해. 아버지 샘플을 채취할 때는 당신도 동석하든지. 그 후에 당신 샘플을 채취해 그 자리에서 보내자고."
"거절할게요." - P80

"뭐지? 당신은 상관없잖아. 아직 영업 전이라면서, 가만히 좀 있어."
"그럴 순 없죠. 가즈미 씨는 죽은 친구의 부인이신데.
생트집을 잡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뭐가 생트집이라는 거지?" - P81

가즈미의 집에서 찾은 사진 액자였다. 사진 속에 있는건 소녀 시절의 우에마쓰 가즈미와 그녀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좋은 사진이다 싶어서 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뒷판이벗겨졌습니다. 일부러 벗긴 건 아니고요. 신경이 쓰여서 읽어봤는데..." - P82

우에마쓰 가즈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특별한 감정을 곱씹고 있는 것 같았다.
"가즈미 씨, 심정은 이해합니다. 어머님의 비밀을 감추고 싶겠죠. 하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이 사람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도 말하는 게 어떻습니까?"
"뭐야." 다케우치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를 하려고?" - P83

다케우치는 스마트폰 화면을 우에마쓰 가즈미에게들이밀며 말했다. 서류 같은 것을 찍은 사진이었다.
"진단서야 우에마쓰 가즈미는 일 년도 더 전에 췌장암선고를 받았지. 그런 사람이 지금 이렇게 생생하다고?"
우에마쓰 가즈미는 입술을 축이더니 말했다.
"췌장암 환자는 다 죽으란 법이라도 있대?" - P85

버럭 성을 내는 다케우치에게 다케시가 말했다.
"이 가게에는 방범 카메라가 설치돼 있어, 지금까지당신 행동은 모두 촬영돼 있다고 아까 사진을 찢었지?
재물문서손괴죄에 해당하지. 유죄가 인정되면 최소 오년 이하의 징역이야. 신고할까?" - P86

"하는 김에 반년 전 가즈미 씨의 자택에 빈집털이가침입했던 것도 경찰에 말해야겠군. 당시 수사에서 채취한 지문과 대조해보는 건 물론, 여러모로 조사해줄테지. 당신이 좋아하는 DNA검사도 해줄 것 같은데?
아까 당당하게 내보이던 진단서 사진도 어쩌면 좋은 증거가 될지도 모르고 말이야." - P87

"그 사진은 복사본입니다."
"뭐라고요?"
우에마쓰 가즈미가 고개를 들었다.
"진짜 사진은 여기 있습니다."
다케시는 그렇게 말하며 사진을 든 손을 올렸다. 소녀와 어머니의 사진 액자에 들어 있던 사진과 같은 것이었다. - P88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당신과 우에마쓰 가즈미 씨말입니다. 이만큼 교묘한 바꿔치기는 본인과 대역이서로 힘을 합치지 않으면 불가능하죠. 제 생각에는 우에마쓰 씨가 제안한 일 같군요. 당신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요. 아닙니까?"
우에마쓰 가즈미의 대역은 잠시 침묵한 뒤에 체념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 P90

"우에마쓰 씨는 중학교 일학년 겨울에 오빠의 반 친구 여러 명에게 험한 일을 당했어요. 그놈들이 이렇게말했다더군요. 네 오빠가 돈을 받아 챙겼으니, 시키는대로 하라고
"어떻게 그런 짓을......."
욕지기가 올라올 것 같은 이야기를 듣고 마요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 P92

"사진 뒷면에 메시지가 적혀 있다는 이야기는 가즈미 씨에게 들은 적이 없어서, 아까는 당황했어요. 하지만 위조된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죠."
"순간적인 대처 능력이 뛰어나시더군요. 괜찮으시다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만." 다케시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 P93

조금 전까지 우에마쓰 가즈미였던 여성은 체념한 듯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본명을 밝혔다.
스에나가 나나에라고 했다. - P94

7

(전략).
나나에는 진심으로 말했다. 추천한 책에 고객이 만족한다니, 서점 직원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그래서 스에나가 씨한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요.
근무 끝난 뒤에 시간 괜찮으세요?"
"인사라뇨.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 P97

오후 8시 20분경, 나나에는 주차장에 갔다. 폐점 시각은 이미 지났기에 차는 한 대밖에 없었다. 우에마쓰가즈미는 그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P98

"서점에서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 믿기지가 않았어요. 기적이라고 생각했죠. 죄송하지만, 당신에 대해 이것저것 조사를 했어요.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확신했기에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죠." - P99

눈앞에 있는 우에마쓰 가즈미는 나나에와 무척이나비슷한 생김새였다. 물론 세세한 차이는 있었다.  - P100

우에마쓰 가즈미는 나나에에게 다가와 가발을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 잘 정돈한 뒤 거울 쪽을 보게 했다.
(중략).
"닮았네요. 살은 제가 더 쪘지만."
"그렇게 차이 나진 않아요. 예전에는 저도 당신 체형과 비슷했어요. 나이는 어떻게 돼요?" - P101

"당신한테 부탁하고 싶은 건, 다름이 아니라………… 내대역을 맡아줬으면 해요."
우에마쓰 가즈미가 말했다. "저는 지금 요코하마의 단독주택에서 혼자 살고 있어요. 하지만 사정이 있어서계속 살 수는 없고요. 하지만 남들한테는 계속 사는 것처럼 보여야 할 이유가 있어요. 그래서 내 대신 당신이그 집에 살아줬으면 해요. (후략)." - P102

"이런 이야기, 너무 수상하죠? 나는 당신을 잘 알지만, 당신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그러면 이렇게 하지 않을래요? 우리 집에 한번 와줘요. 그러면모두 말할 수 있고, 납득도 갈 거예요."
"저를 잘 아신다고요?"
"말했잖아요, 조사했다고." - P103

이틀 뒤, 우에마쓰 가즈미가 가르쳐준 주소를 찾아요코하마의 야마테초에 있는 그녀의 집을 찾았다. 근처 사람들이 얼굴을 못 보게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기에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 P104

(전략).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치료를 계속했지만 아마 어려울 거예요. 내 몸이라알 수 있어요. 앞으로 오래는 못 살 거예요."
우에마쓰 가즈미는 태연자약한 어조로 말했다.  - P105

"오히려 마음에 걸리는 건, 내가 죽은 뒤의 일이에요.
솔직히 말해 유산의 행방이죠. 왜냐면 나에게 법정 상속인이 없는 게 아니거든요." - P105

"그래서 나는 못 죽어요. 죽어도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아요. 적어도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는. 유언으로 오빠를 상속인에서 제외시킬 수는 있지만, 아버지는 유류분 청구를 할 수 있으니까." - P106

우에마쓰 가즈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냐니요...... 좋지 않은 일이니까요."
"말했잖아요. 어차피 몇 년 못 살아요. 마지막에는 괴로워하며 숨을 거두겠죠. 그럴 바에야 스스로 납득할 수있는 시점에 죽고 싶어요. 걱정 말아요. 절대로 신원이밝혀지지 않는 방법을 택할 작정이니까. 어디 먼 곳에가서 죽거나…………"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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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부암동

은은하고 어쩌면 희망차기까지 한 아침 햇살이 몸 구석구석에 닿았지만, 호수는 그런 기운이 무색하게 잔뜩 상기된표정이었다. 가쁜 숨을 고르며 호수는 부암동 주민센터 부근언덕길을 터덜터덜 걸어 올랐다. - P7

모든 게 다 심드렁하게만 여겨지는 마음을 뒤로하고 호수는 발길을 재촉했다. 매일 이렇게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숨을고르며 언덕길을 오를 걸 생각하니, 차라리 아예 출근을 하지 말아버릴걸 하는 후회가 찾아들기도 했다. - P8

‘랑데부 미술관‘
그래도 늦지 않고 제시간에 도착한 것만큼은 다행이었다. - P8

(전략).
계속되는 낙방 끝에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한 기업의사회 재단 사내 아나운서직에 지원해 2차 면접까지 갔지만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애초에 딱히 마음이 가는 곳이 아니었기에 별다른 기대를 품고 있지 않았으면서도, 그래도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호수는 크게 좌절했다. - P9

"오늘 첫 출근이시죠. 반갑습니다. 저는 학예연구원 손다미라고 해요."
여자가 손에 든 명함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갸름한 얼굴에 큰 눈망울, 야무져 보이는 입매, 긴 머리를 뒤로 한데 묶은, 언뜻 봐도 다부진 인상의 여자였다. - P11

"아, 아, 그 친구구먼."
다미가 문을 열고 나왔던 사무 공간에서 한 중년 남자가모습을 드러내며 호수를 향해 손짓했다.
"미술관 오영균 학예실장님이세요."
옆에서 속삭이듯 건네는 다미의 말에 호수는 얼른 허리를굽혔다. - P11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은 저희뿐인가요?"
호기심에 물은 말이었는데 순식간에 오 실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상황엔 이것도 많아" 하고 오 실장이 중얼거리듯 말하는 바람에 무안해진 호수가 몸을 외틀었다.
"......그런데 원래는 아나운서직에 지원했었다죠?" - P12

곧바로 실망한 눈초리로 허공에 손을 내젓던 오 실장이 뒤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아니, 채용에서 떨어뜨린 사람을 뭐하러 미술관으로 보내는 거야. 나 참 이해를 못 하겠네. 여기가 만만한 거야 뭐야." - P13

"성격이 좀 급하세요."
금세 사무 공간 안으로 들어가버린 실장을 지켜보며 다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장님 말에 크게 신경 쓰지 말아요. 뒤끝은 없어서 저러다 말아요." - P13

건물을 올려다보며 호수가 물었다.
"전시관이 원래는 여러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일부만 사용하고 있어요."
"일부만요?"
"네, 지금은 단 하나의 작품만 전시하는 공간이니까요." - P14

"그럼, 어떤 그림을 전시하는 건가요?"
속 타는 마음과 다르게 짐짓 미소를 지으며 호수가 다미에게 물었다.
"관람객들의 사연을 받은 이후에 저희 미술관 소속 작가님이 그중 하나의 사연을 선정하시거든요. 그 사연을 바탕으로 작품이 만들어지고, 완성된 후 이곳에 전시하고 있어요. 말하자면 오직 한 사람의 이야기로 완성된 하나의 작품만을 전시하는 곳이에요." - P15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도 딱히 전시관의 그림을 보고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뭘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 P16

발끝에 매달린 것

(전략).

서름한 얼굴로 전시관 바깥으로 나온 호수가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다미 씨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몸이 조금 굽은 듯 보이는 청소부 할머니가 그 자리에서 전시관 유리를 닦고 있었다.
"새로 출근한 직원분이신가 봐요?"
(중략).
"참 여유가 있어 보이는 얼굴이네."
"......네?"
"요즘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여유가 없어 보이잖아요. 그런데 새로 오신 분은 아주 여유가 있어 보이네요." - P27

"요즘 사람들 아니다 싶으면 쉽게 뒤돌아서기도 하잖아요. 너무 조급해하고 또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게 이해가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청소부 할머니는 한 차례 유리창에 분무액을 분사한 다음 다시 호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말했다. "그런데 새로 오신 분은 안 그럴 거 같아." - P28

보이지 않는 젊음


춘호는 요즘 들어 도통 사는 낙이 사라져가는 느낌이었다. - P30

빌라 윗집에 젊은 신혼부부가 이사 온 건 불과 삼 개월 전의 일이었다. 전에 윗집에 살던 이들은 춘호와 엇비슷한 나이대의 노부부였다. 있는 듯 없는 듯 살던 그들 부부가 이사가고 나서 찾아온 변화가 그는 당혹스럽기만 했다. - P31

(전략).
춘호는 여자의 말을 더는 듣지 않고 인터폰을 끊었다. 하여간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자기 할 말을 다 해 피곤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P31

윗집에서 일어나는 소음은 다양했다. 춘호는 윗집 사람들이 걸을 때 나는 발망치 소리로 그들의 이동 경로를 환히 들여다볼 수 있었고, 새벽에 울리는 알람음에 그들의 기상 시간과 출근 시간을 짐작할 수 있었으며, 뛰어다니는 소리로그 아이가 얼마나 활달한 성향을 지녔는지 보지 않고도 알수 있을 지경이었다.  - P32

한 번은 윗집의 젊은 부부 내외가 아이와 함께 찾아왔지만, 춘호는 인터폰 화면으로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 기척을 내거나 문을 열지 않았다. 어차피 혼자 살아가는 생이라고 여긴 지 오래였다. - P33

안녕하세요, 301호입니다.
저희 때문에 많이 불편하셨던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이가 뛰거나 할 때마다 소음이 일어나는 걸 저희도 인지하면서 그러지 않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후략).

춘호는 그날 밤 다시 과일 바구니를 가져다 윗집 현관에걸어놓았다. - P33

 매트를 깔았다고는 했지만, 그 때문에 아이가 더 마음껏 뛰는지 소리가 전보다더 쿵쿵 울리는 듯했다. 상황이 그쯤 되자 춘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보복하듯 위층 천장을 마대자루로 마구 두드려댔다.  - P34

그날 춘호가 어느 젊은 커플을 마주친 건, 여느 때처럼 북악산 산책길 쪽으로 걸어 오르던 참이었다. - P35

"혹시, 어르신, 백사실 계곡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하죠?" 하고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물어왔다. (중략).
"아, 그럼 아까 거기서 꺾었어야지 왜 여기까지 올라왔어!"
꾸짖듯 말을 뱉고 나서 춘호는 갈래길에서 한가롭게 셀카를 찍고 서로 웃던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꼴시면서도한편으로는 정답고 생기 있게 보이던 그들의 모습이. - P36

아래쪽으로 멀어져가는 커플을 한동안 혀를 차며 바라보다 오르막을 향해 막 돌아서려는 순간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무엇인가가 빛에 번득이며 춘호의 눈을 찔렀다. - P37

미술관에서 누구라도 사연을 써서 신청하면 선정해 작품으로 만든다는 설명이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내 사연이 작품이 된다고……………?" 리플릿에서 여전히 호기심 어린 눈길을 떼지 못하며 춘호는 언젠가 한번 이곳에 들러봐야겠다고 다짐했다. - P37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싶은 그였지만, 가슴 답답한 무엇인가를 어디에든 털어놓고 싶은 욕망만큼은 절실했다. - P38

작고 소담스러운 탁자 앞에 앉아 춘호는 종이와 펜을 집어들었다. (중략).

‘한글자는 쓰고 나가야지. 이제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춘호는 자기 안의 감정을 억누르며 버텼다.  - P39

미술관을 나오자 밖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분명히 미술관안으로 들어설 때만 해도 진초록과 노르스름한 빛이 섞인 나뭇잎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느새 불그스름해진 듯했다.  - P40

안녕하세요, 김춘호 관람객님. 저희는 랑데부 미술관입니다. ‘오직 한 사람의 이야기로 꾸며진 단 하나의 작품‘ 전시에 사연이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저희 미술관은 김춘호 님께서 신청해주신 사연을 바탕으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할 계획입니다. 이와 관련해 요청할 사항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후략). - P41

춘호는 수납장에 넣어놓은 채 수년 동안 펼쳐본 적 없던앨범을 꺼내 펼쳐놓았다. 아내와 사별하고 나서는 단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지난날의 기억. 무의미하다고까지 여겼던 지나온 시간들이었다.  - P42

다정한 눈빛으로 말해요


(전략).
호수가 질문을 마치기도 전에 다미가 갑 티슈에서 티슈 몇장을 집어 들었다.
"전시실에서 어떤 분이 울고 계셔서 가실 때 우리 미술관책자하고 같이 드리려고요. 그냥 방문 기념 굿즈 드리는 것처럼요." - P43

"그분, 사연 신청자분이신가 봐요."
"아...... 그래서." 다미가 손에 든 물티슈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다시 호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거 드릴 건데, 같이가실래요?" - P44

전시실 앞에서 살짝 안을 들여다보자 과연 김춘호 씨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진을 전달하러 찾아왔을 때와 다르지 않은 복장이었다. - P45

전시실 앞에서 살짝 안을 들여다보자 과연 김춘호 씨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진을 전달하러 찾아왔을 때와 다르지 않은 복장이었다. - P45

 그림들 밑에 전체를 아우르는 또 하나의 제목이 굵은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Title: 눈빛


그러고 보니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외적인 모습은 많이변화했지만, 어딘가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한결같다는 느낌이었다. - P46

(전략).

방명록에 적어놓은 다른 사람들의 글을 차례로 훑다 호수는 김춘호 씨가 남긴 듯한 글을 발견했다. 삐뚤빼뚤한 글씨체의 아이와 엄마가 차례대로 적어놓은 글에 그가 답장처럼써 내려간 것이었다. - P49

"되게 마음이 여리신 분 같았어요."
다가선 기척을 느꼈는지 여전히 김춘호 씨의 모습을 바라다보던 다미 씨가 중얼거렸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 P51

"처음에는 당신 얼굴이 그려진 그림들과 작가의 말을 보곤 눈시울이 실룩였는데, 방명록을 열어본 후에 그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셨대요. 거기 또 그런 글이 있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참 다정한 눈빛이라는 말이요. 그 글이 사별한 부인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할아버지에게 한 말을 생각나게 했대요." - P52

"혹시 오늘, 점심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점심거리를 챙겨오지 않은 호수는 "그냥 간단히 먹으려고요" 하고 가볍게 웃어 보였다. 미술관에서는 직원들끼리 점심을 같이 먹는 법이 없었다. 출근한 첫날부터 호수는 점심시간은 각자 알아서 보내는 시간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53

위로의 맛

호수와 다미는 미술관을 나와 털레털레 길을 걷기 시작했다. (중략).
"부암동은 전에 와본 적 없으세요?"
"네, 저는 처음 와봤어요. 서울 살면서 이런 동네가 있는 줄몰랐거든요." - P56

"여긴 너무 좀 조용하지 않아요?"
호수가 떠보듯 다미에게 물었다.
"전 그래서 좋은데요."
"......그건 그렇긴 한데."
약간 무안해진 호수는 마음에도 없는 호응을 했다. - P57

"여기 손맛 좋다고 소문난 식당인데, 국밥 괜찮으세요?"
"전 좋아하죠. 그런데 이런 취향이셨어요? 저는 연구원님이 점심은 거르거나 샐러드 같은 걸로 때우시는 줄 알았어요."
"가끔 먹긴 해요" 하며 다미가 희미하게 웃었다. - P58

"저희 미술관 출근한지 얼마 안 된 분이세요."
다미가 호수에게 눈길을 건네며 대답했다.
"아, 그러셔?" 하며 고개를 돌아보는 아주머니에게 호수는꾸벅 고개를 숙였다. "인상 참 좋네. 앞으로 자주 와요. 여기식당 이름도 정배식당이잖아요. 정이 배가 되는 식당."
아주머니의 말에 다미와 호수는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 P59

다미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녀의 낯빛이 창백해져 호수는 혹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사적인 일을 서로 묻고 답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P60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 요기를 하고 들어오시는 것 같긴해요. 딱히 어울려서 같이 밥을 먹고 이런 건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아서 앞으로도 식사 같이할 일은 별로 없을 거예요."
다미가 알아두는 게 좋을 거라는 듯 말하는 사이 아주머니가 차르륵차르륵 밀차를 밀며 다가왔다. - P60

"아주머니, 손이요, 손!"
호수가 느닷없이 목청을 돋운 건 뚝배기를 쥔 아주머니의엄지손가락이 국밥 안에 반쯤 빠져 있는 걸 보고 나서였다.
(중략).
호수는 자기 앞에 놓인 국밥 그릇을 가만히 바라보다 다미에게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아까 여기 손맛이 좋다는 얘기가 이 손맛은 아니었죠?" - P61

"그래도 한번 먹어보세요. 뭐랄까, 위로의 맛이라고 할까요. 전 마음이 좀 안 좋으면 여기 와서 국밥 먹곤 하거든요."
다미의 말에도 젓가락으로 반찬을 깔짝거리기만 하던 호수는 마지못해 국밥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뭉클한 훈훈함이 속을 채웠고 몸에 열기가 돌았다. - P62

궁금한 마음에 호수가 묻자, 다미가 답했다.
"작가님이 사연 선정을 하셨다는데 작업을 위해서 뭘 좀찾아야 한다나 봐요."
"뭘 좀 찾아요?"
"그건 내일 출근하신 후에 얘기하자 하시네요." - P63

투명하고 반짝이는 몸짓으로


편집숍에서 산 물건을 결제하려던 해주는 점원에게서 카드 잔액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듣고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있었다.
이번 달 대학 및 지역 축제와 공연 준비를 위해 고가의 의상과 신발을 카드 할부로 사들였던 것을 순간 떠올렸고, 카드 단기 대출금 결제일 역시 하필 오늘이었다는 걸 뒤늦게생각해냈다. - P65

도로 카드를 내밀며 점원이 물었다.
"네, 없어요. 죄송해요."
해주는 고개를 떨군 채 빈손으로 편집숍을 빠져나왔다. 곧내야 할 보험료와 전기세 생각에 해주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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