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모르게 해주의 두 손이 가볍게 들렸다. 가늘게 눈을뜨자 거리의 흰 가로등 빛이 마치 무대 위 조명처럼 느껴졌다. 해주는 성큼 발을 내디뎠다. - P68
그날 해주는 얻고 잃은 것이 하나씩 있었다. 얻은 것은 노래하는 아경과 자유롭게 춤을 추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잃은게 있다면 그날 어딘가에 부딪쳐 골절이 된 엄지발가락 때문에 한동안 무용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 P69
공연 시작 시간보다 다소 늦게 도착한 해주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이미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스툴 의자나 긴 벤치 의자에 앉은 채로 빽빽이 들어차있었다. - P70
얼굴이 달아오른 해주가 뒤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계좌번호 알려줘." 어쩔까 하고 순간 망설인 해주였지만, 지금 자존심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 해주는 계좌번호를 적어 톡으로 보냈다. "보냈어." - P72
더듬더듬 찾아간 미술관에서 해주는 한 할아버지의 얼굴모습이 세대별로 연대기처럼 그려진 그림들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 P75
아빠의 얼굴을 보지 않고 지낸 지 벌써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당장 시급한 월세를 생각하면 아빠에게 연락해 도움을 청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지만 그도 잠시뿐, 해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P75
어렸을 적 춤을 처음 가르쳐준 건 아빠였다. - P76
아빠가 전에 없이 크게 화를 낸 건 그렇게 어렵게 해온 무용을 포기하겠다고 했을 때였다. 대학에서 현대 무용을 전공한 해주가 그 길을 포기하고 스트리트 댄서로 춤을 추며 살고 싶다고 했던 바로 그때 - P77
아빠가 실망 어린 눈초리로 해주를 바라보며 크게 한숨을내쉬었다.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대신." "네 "대신?" "아빠는 너 못 본다." 어쩌면 잔인하게까지 느껴지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다해주는 펜을 내려놓았다. - P80
(전략). 당장 행사나 백댄서 일자리가 있는지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려보고 안 되면 알바 자리라도 급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어 나가려는데 휴대전화 액정에뜬 은행 입금 메시지가 해주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입금액: 1,000,000원입금자 : 권아경‘ - P81
단 하루의 전시
초록색 나뭇잎들 사이로 간간이 붉은색 단풍이 엿보이기시작한 가을이었다. 언제든 그만둘 마음으로 출근하는 거야그대로였지만, 호수는 어느덧 다른 곳과는 사뭇 다른 부암동의 정취와 숲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공기만은 좋다고 생각했다. - P82
"나 같은 노인도 여기 취직하자마자 진작 그만두고 싶었는데 그게 벌써 이 년이 넘었어. 잘 버텨봐, 호수 청년." 방황하던 호수의 마음을 짐작하기라도 했는지 할머니가눈을 찡긋했다. "・・・・・・고맙습니다." 호수가 쑥스러워하자 할머니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냐, 아냐. 나도 항상 밝은 호수 청년 덕에 기분이 좋아. 아 이렇게 산밖에 없는 동네에 호수가 생겼잖아." - P83
"혹시 작가님은 어떤 분이세요?" 무슨 질문이든 하지 못할 대답이란 없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오 실장이 금세 얼굴을 붉히며 허공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 그야..... 회사 차원에서 관련 있다는 것만 알고 나도뭐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해. 아니, 그게 궁금해?" - P85
"아, 그래? 다행이네. 이상하다 하는 사람은 없고?" "네. 아직까진 특별히 없어요." 오 실장이 안심한 표정을 짓는 사이 미술관 출입구로 한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관람객이려니 했는데 일행이 모여 있는 쪽으로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검은 볼캡을 깊이 눌러쓰고 오버사이즈 후드 집업과 오버사이즈 팬츠를 매치해 입은차림이었다. - P86
"아, 원래는 안 그래요. 오늘은 해주 님 사연으로 완성된 작품이 조금 특별하게 하루만 전시되는 거라서요." "맞아요. 그래서 오늘 꼭 작품을 보셔야 합니다." 앞서 걷던 호수가 뒤돌아보며 다미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는 전시관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 P87
"전 오래 가족과 떨어져 지냈어요. 가족들은 제가 미술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부모님은 인생을 잘 살아가는 방법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세요. 저도 그렇게 살아가길 바라시고요. 하지만 그런 부모님의 기대로부터 저를 얼마나 잘라냈는지 모르겠어요. 아무 도움이나 지원 없이 스스로 고립되었다고 느낄 만큼요. 그것 때문에 부모님과 사이가 벌어진 건 속상한 일이긴 하죠......." 말끝을 흐리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다미가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런 일만 있는 건 또 아니니까요. 나름 좋은 점도 있고." - P89
발밑에 빗물이 차고 빗줄기가 얼굴을 때리는 와중에도 움직임 없이 서 있던 호수가 빗속으로 발걸음을 떼자 어깨 위로 빗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 P92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니까요
전시실에 들어간 해주는 당황한 낯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작품이라고 보일 만한 건 없었고 빈 액자만이 벽면에 걸려 있었다. - P93
성미가 강퍅하기만 했던 아빠가 몇 년 새 헐렁해진 바지만큼이나 힘 빠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꿈속에서만 가끔 어른거렸던 아빠였다. 가끔 떠올리고도 바로 솟구치는 원망으로 북북 지워버리곤 하던 아빠가 정작 앞에 나타나자 해주는 복잡한 심경으로 인해 일말의 반가움조차 표현하기가 어색해졌다. "아빠는 웃는 표정 짓기 힘들어하잖아." - P95
해주는 갑작스럽게 관심을 보이는 아빠가 의아하고 부담스러워지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어떤 춤을 추는지 보고나 싶었어. 너무 과격한동작 때문에 다치기라도 하는 건 아닌지 아빠도 내심 걱정되었으니까. 네가 엄지발가락 골절된 게 무용 때문이 아니었다는 걸 아빠가 모르는 줄 알았니?" - P97
아빠에게 춤을 계속해보라는 얘기를 들을 줄도, 들을 마음도 없었던 해주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지만 꾹 참았다. 단지 그 말만으로 아빠와 과거에 겪었던 상처와 불화가 말끔히 해소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P98
"그런가. 사고 이후로는 아예 음악을 듣지 않아서 잘 몰라. 그냥 좋았어." 휴대폰 속 플레이리스트를 손으로 넘겨보던 해주가 그중한 곡을 골라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 P100
해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중년에게는 어울릴법하지 않은 어딘가 어색한 모습이었지만, 아빠의 동작은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 P101
"아빠. 진짜 웃는 아빠 같다." "내가 웃는 모습이 보여?" "응, 조금." 해주는 아빠의 환한 웃음을 선명하게 마주 보았다. "나는 아빠가 늘 화난 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어." "웃는 아빠입니다, 오늘은." - P105
"그건 어디서 난거야?" 하고 아빠에게 묻는 순간이었다. "선해주." 별안간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였다.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해주야." - P103
"맞아 미술관에서 너의 사연을 어떻게 작품으로 표현할지고민하다 내게 연락을 준 거래. 아버님과의 어떤 연결고리를찾고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버님이 운영하시는 식당을 알려드렸어. 만나 뵈면 좋을 것 같다고 내가 제안하기도 했고. 허락도 없이 미안해." - P104
아빠는 그저 해주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해주는 아빠의 얼굴 구석구석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그 얼굴 너머로아빠가 웃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 P106
미술관을 나와 아경과 함께 걷는 내내 해주의 마음에 못내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돈 보내준 거 봤어. 바로 갚을게. 고마워." 돈 때문에 아경 야속하게 만들었을 걸 생각하자 해주는미안해졌다. - P106
해주는 아이 버스킹하던 놀이터에서 처음 만난 때를 떠올렸다. 간밤의 들뜬 기운과 개운한 땀이 온통 해주를 뒤덮고 있던 그때, 아경은 해주에게 늘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 P108
"사랑해." 아경이 나지막이 해주의 말을 따라 하며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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