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
우윳빛 유리창이 달린 부장의 집무실 문을 여는 순간, 레모 에르도사인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이제 모든 게 끝장이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돌이킬 방법은 없었다. - P7
직원 급여 명세서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있는 사장, 안락의자에 기댄 채 발끝으로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는 부장, 그리고 다소곳한 자세로 책상 옆에 서 있는 구알디, 그 누구도 에르도사인의 인사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이윽고 부장이 고개를 들고는 사무적인 투로 말했다. "얼마 전에 당신이 회사 공금 600페소를 횡령했다는 고발을접수했습니다." "정확히 600페소 7센타보입니다." - P8
"행색이 왜 그 모양이오?" 사장이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수금원 노릇을 해 가지고 얼마나 벌겠습니까?" "그러면 빼돌린 돈으로는 뭘 했소?" "전 돈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좋소. 그러면 그간 작성한 장부를 제출할 수 있겠소" "원하신다면 오늘 낮까지 제출하겠습니다." 단호한 태도로 대답한 덕분에 에르도사인은 잠시나마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P8
"그럼, 나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도 수금 업무를 해도 되는지......." "그건 안 됩니다. 갖고 있는 영수증은 모두 수아레스 씨에게넘기고, 내일 세 시까지 여기로 나오세요. 아까 말한 것들 잊지말고 말입니다." "네・・・・・・, 모두 준비해 오겠습니다." - P9
나중에서야 그는 자기를 고발한 자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 P10
절망의 그림자
에르도사인이 회사 돈을 횡령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부르든 그따위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뇌 깊숙한 곳에 무쇠처럼 단단한 정적이 동그랗게 똬리를 틀고 있어서 ‘도둑놈‘이란 말도 그에게 별다른 충격을 주지못했던 것이다. 그저 자신의 고통과 불행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 P10
에르도사인은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고도 어떤 범죄라도 저지를 수 있는 상황, 다시 말해서 자신의 행동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그런 시간에 대해 잘알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데 판사라고 그러한 상황을 어떻게이해할 수 있겠는가. - P10
물론 에르도사인이 공금을 더 횡령하려고 회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가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회사에 남아 있던 이유는 뭔가 특별한,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렸기때문이다. 눈앞으로 서서히 다가오던 파국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줄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하게 만들어줄 엄청난 사건을 말이다. - P11
이는 에르도사인이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처음으로 구역질이 치민 순간 떠올린 생각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사는 거지?" 에르도사인이 자주 이런 막연한 질문을 던지는 것도 따지고보면 그의 마음을 지배하던 불안감, 다시 말해 내일이 단순히오늘의 반복이 아닌 그런 삶을 왜 그토록 간절히 바랐는지 그 원인을 밝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 P11
‘난 기껏해야 남의 집 하인 정도밖에 안 될 인간이야. 있잖아, 싸구려 향수를 뿌리고 돈 많은 창녀 주변이나 얼쩡대는 그런 비굴한 놈 말이야. 그 여자의 애인이 거실 소파에서 담배를피우고 있는 동안, 방 안에서 그녀의 브래지어를 채우면서 비위나 맞추는 그런 작자‘ - P13
‘그래, 정말이지 난 평생 남의 집 하인 노릇밖엔 못 해먹을놈이야. 내 영혼에는 온통 비열한 생각만이 꽉 차 있어‘ 이처럼 있는 대로 자신을 능욕하고 짓뭉개자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짜릿한 쾌감에 에르도사인은 이를 꽉 깨물었다. 또 한번은 이런 상상도 했다. 그는 평생 하느님만 섬기며 독신으로 살아온 어느 할머니의 침실에서 무거운 요강을 들고 살며시 빠져나오고 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집에 사는 부지런한사제가 자신을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을 건넨다. - P14
에르도사인은 잘 알고 있었다. 영혼을 더럽히면서까지 스스로를 능욕하고 짓밟고 있다는 것을. 그가 일부러 자신을 더럽고 추잡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어쩌면 악몽과도 같은 나락으로 떨어져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고 평생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 P14
에르도사인은 언젠가 아내가 다른 남자의 품으로 달아나리라는 것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그의 고뇌는 깊어져만 갔다. 그래서인지 처음으로 공금 20페소를 자기 주머니에 넣었을때, 그는 ‘그 일‘이 너무 쉽고, 싱겁게 끝나서 놀랐다고 했다. 돈을 훔치기 전까지만 해도 수시로 닥쳐올 양심의 가책을 이겨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에르도사인은 속으로 다짐했다. - P15
워낙 박봉에 시달리던 터라 그 뒤로도 그는 회사 공금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의 월급은 80~100페소, 많이 받아야 120페소 정도였고, 그나마 수금하는 돈의 액수에 따라 일정하지도않았다. 이는 그가 거래처에서 수금하는 돈 100페소당 일정 비율로 정해진 수수료를 월급으로 받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그였지만 이따금 수금이 잘 되면 수중에 4000~5000페소나 있을 때도 있었다. - P16
게다가 제당 회사의 엉성한 관리 체계도 그의 공금횡령을 용이하게 해주는 데 일조했다. - P17
운명의 소용돌이
에르도사인의 삶은 분명 별난 데가 있었다. 마음속에 손바닥만한 희망이라도 생기면 그는 아이처럼 서둘러 거리로 뛰어나가곤 했다. 그리고 버스를 잡아타고 가다가 팔레르모나 벨그라노에서내려서는 생각에 잠긴 채 적막에 싸인 거리를 돌아다녔다. - P17
아, 브라질! 브라질이란 이름이 떠오르자 유치하고 단순하기만 하던 그의 꿈이 제법 구체적으로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하얗다 못해 분홍빛으로 빛나는 해변을 쪽빛 바다가 수줍은 듯 떨리는 손길로 애무하고, 하늘에는 눈부시게 타오르는 태양이 걸려 있다. 이제 그녀의 얼굴에 서려 있던 슬픔도 깨끗이 사라졌다. 교복처럼 청순한 흰색 실크 옷을 입은 그녀는 겉으로는 소녀같이 수줍게 웃고 있어도 성숙한 여인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 P18
이미 고통에 짓눌려 무디어질 대로 무디어진 그의 판단력은 이제 완전히 마비되어 버렸다. 이성을 잃은 그는 포주 자리라도 알아볼 요량으로 미친 듯이 걸어갔다. 남의 돈에 손을 댄 자의 두려움을 그는 뼛속 깊숙이 느끼고 있었다. 한낮의 강렬한 햇빛이 해변의 초석 봉우리에 부딪히며 작렬할 때처럼 눈부신 빛을 내며 번뜩이는 그런 두려움을 말이다. - P19
그래서 그는 후덥지근한 시에스타² 시간의 눈부신 노란 햇살을 받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지저분한 사창가를 찾아 뜨거운 모자이크 보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에르도사인이 찾던 곳은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현관에는 오렌지 껍질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고, 복도의 벽에는 군데군데빗물이 샌 자국이 나있으며, 철망으로 덧댄 유리창에는 빨간색이나 초록색 천을 덮어놓은 그런 집 말이다. - P19
에르도사인은 돌연 자괴감에 휩싸였다. 영혼마저 굳어버린듯했다. 너무 가난해서 아픈 몸을 이끌고 남의 집 세탁부 노릇을 해야 했던 가련한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기 자신이 역겨워진 그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여자에게 돈을 지불하고는 도망치듯 달려 나와 버렸다. - P21
에르게타
오전 열 시경 에르도사인은 페루가와 마요가의 교차로에 이르렀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었다. 바르트는 결코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고, 이젠 감옥에 갈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몸서리가 쳐졌다. 약제사 에르게타가 카페에 앉아 있었다. - P21
천박한 행동과 권태에 찌든 모습, 에르게타의 모습은 영락없는 노예 상인이었다. 그런데 자기 쪽으로 다가오는 에르도사인을 발견하자 그의 얼굴에 아이처럼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띠며 악수를 청하는 그를 보면서 에르도사인은 잠시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 녀석의 미소에 넋을 잃은 여자들이 얼마나 될까? - P22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것처럼 황당무계한 말만 내뱉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에르도사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갑자기 희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는 에르게타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지금도 도박하나?" "그럼. 나의 지극한 신앙심에 예수님께서도 감동하셨는지내게 룰렛 게임의 비밀을 일러주셨지." - P23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에르도사인을 쳐다보던 에르게타가왼쪽 눈을 찡긋하면서 말을 이었다. "사실 내가 하느님을 만나고 또 여러 번 신비로운 세계에 빠져든 뒤로 쓸데없는 일을 너무 저지른 것 같아. 예를 들어 그런천한 여자와 결혼한 거라든지 말야…………."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있지?" "글쎄・・・・・・ 인간이 본디 착하다……………. 틈만 조금 보여도 잡아먹으려 들고 미친놈 취급해 버리는 이런 세상에서 그걸 믿는다는 게......." 에르도사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 P24
"두 번 해서 5000페소나 땄는데 무슨 소리야." "뭐 그럴 수도 있지만, 타락의 구렁텅이에서 자넬 구해 준건 그따위 룰렛의 비결이 아니라 자네 마음속에 있는 아름다운영혼이라고. 자넨 정말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예컨대곧 감옥에 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자에게 자비를 베푼다든지." "그건 그렇지." - P25
"이해가 가. 그런데 자네의 운명은 어떤 걸까…………. 사람의운명이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거지만 왠지 자네 앞에는멋진 길이 펼쳐져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보통 사람들은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뭔가 다른 길 말이야." "난 세계를 지배하는 황제가 될 거야, 알겠어? 일단 룰렛 게임으로 돈을 엄청나게 벌 거야, 최대한 많이. 그러고 나서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에 솔로몬 대사원을 다시 지을 거야......." - P26
"그건 안 되지. 성경의 가르침을 잊거나 게을리 하면 그런마음이 생기기 마련이야.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사장의 돈을 훔치거나 회사 돈을 횡령하지 않아. 또 하룻밤 사이에 감옥에 가야 할 딱한 처지에 놓일 일도 없을 텐데." 생각에 잠긴 에르도사인은 코를 문지르며 그에게 말했다. - P27
그때 갑자기 에르도사인은 에르게타의 팔을 잡고 울먹이며소리쳤다. "내가 감옥에 가게 생겼어, 알겠어? 600페소 7센타보를 훔친놈이 바로 나란 말이야." - P27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성경의 말씀대로 자네에게 고난의시대가 도래한 거야 보게, 난 절름발이 창녀 이폴리타⁴와 결혼까지 했잖아. 아버지가 아들을 상대로 일어서고, 아들은 아버지를 상대로 일어서지 않았는가 말이야. 혁명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와 있어. 더군다나 자네는 남의 돈을훔친 도둑놈에다가 사기꾼 아냐? 혁명이 눈앞에 와 있는데 슬퍼할 일이 뭐 있어?" "아무튼 내 말 좀 들어봐…………. 자네라면 나한테 600페소 정도 빌려줄 수 있지 않을까?" - P28
4) Coja. 원래는 다리를 저는 여성이라는 뜻이지만, 속어로 몸을 파는 여자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에르게타와 결혼한 이폴리타의 별명일 뿐 그녀가 절름발이라는 건 아니다. - P417
증오심
에르도사인의 삶은 끔찍하게 고통스러웠다. 그의 마음을 짓누르던 고통은 도시 상공에 난마처럼 얽혀 있는 전차 케이블을따라 지평선을 향해 끝없이 퍼져갔다. 갑자기 그는 자신의 괴로움을 발로 밟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황소의 뿔에 찔려 내장이 찢어진 말이 고통을 못 이겨 몸부림치듯, 그 역시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폐에서 피가 한 방울씩 빠져나가는 것처럼고통스러웠다. 숨 쉬기조차 힘들었다. - P29
커피를 주문한 에르도사인은 손을 이마에 댄 채 대리석 벽을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많은 돈을 도대체 어디서 구하지" 그 순간 갑자기 아내의 사촌인 그레고리오 바르수트 생각이떠올랐다. 이제 기이한 행동을 일삼는 에르게타 따윈 신경 쓸 필요가없었다. 에르도사인의 눈앞으로 그레고리오 바르트의 근엄한 모습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 P30
바르트가 그런 말을 꺼내면 에르도사인은 서둘러 부인하고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애를 썼다. 그러면 바르트는 언제나 거실의 남동쪽을 살피며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몇 시간이고 계속 지껄여댔다. ‘저기에 대체 뭐가 있기에 저토록 집요하게 쳐다보는 걸까? 그런 모습을 보면 바르트 또한 뭔가 석연치 않은 괴로움과질투심 때문에 고통받으며 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 P31
그러던 어느 날 밤, 웬일인지 엘사가 거실에 나와 있었다. 이때다 싶었던 그레고리오 바르트는 두 부부 앞에서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꺼냈다. "내가 갑자기 미쳐서 너희 둘을 다 쏴 죽인 다음, 나도 자살해 버린다면...... 와, 생각만 해도 근사한데, 안 그래?" 그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거실의 남동쪽을 비스듬히향하고 있었다. - P31
하는 수 없이 에르도사인과 바르트는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따라 바르트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해 보였고, 좁은 이마에서 경련이 일기도 했다. 그리고 이따금 큰 손으로 구릿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곤 했다. 왜 그리도 바르수트를 미워하게 된 건지, 에르도사인 자신도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 봤을 때는 매우 비열하고 저속한 인간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가 꾸었다는 꿈 이야기를 들어보면 꼭 그런 부류의 인간 같지만은 않았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모호하면서도 이상하고 미묘한 내면세계를 가진 자 같았다. - P32
초조해진 에르도사인의 마음에 인 동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손마디를 하나하나 꺾어봤지만 되레 피로만 가중될 뿐이었다. 더군다나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해도 마치 입술에 아교라도 바른 것처럼 입이 쉽게 떨어지지가않았다. - P33
"자넨 내가 오는 게 그리도 싫어?" 어느 날인가는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옆에서 보기불안할 정도로 기분이 들떠 있었다. 마치 술에 취해 유전에 불이라도 지르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정신 사납게 식당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그는 별안간 에르도사인의 등을 툭 치며 이렇게 묻는 게 아닌가. "이봐, 어때? 어떻게 지냈냐고? 잘 지냈어?" 그 순간 바르트의 눈에서는 묘한 광채가 번득였다. - P34
"그러면 바르트가 뭐라고 생각하겠어? 자기가 오는 게 싫어서 이런다고 여길 거 아냐. 그럴 바에는 앞으로는 오지 말라고 하는 게 더 낫지!" 사실 에르도사인이 이런 말을 내뱉은 건 자신의 비겁함을 아내에게 숨기고 싶어서였다. 바르수트를 향한 까닭 모를 증오심은 암세포처럼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바르트의 얼굴만 봐도분노가 치밀었고, 그자가 처참하게 죽길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이런 속셈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 P35
어느 날 해 질 무렵, 두 사람은 한잔하러 집을 나섰다. 주문한 술과 겨자 소스를 뿌린 감자 샐러드가 나왔다. 바르트는어디 한번 먹어볼까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쑤시개로 감자 한조각을 집어 드는가 싶더니, 사람들의 손때와 담뱃재로 새까매진 대리석 테이블 위로 샐러드를 엎어버리는 게 아닌가? - P35
에르도사인은 바르트가 틀림없이 자신을 증오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상대에게 속마음을 너무 많이 보여 주고 나면 그사람에 대해 이유 없는 혐오감을 느끼게 되기 마련 아닌가 하지만 그건 에르도사인의 오산이었다. 바르트는 절대 그 정도로 물러설 위인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는 자기 속마음을 있는대로 드러내놓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에르도사인의 집에 들어서기만 하면 안 그래도 잔뜩 주눅이 들어 한구석에 웅크리고있는 에르도사인에게 온갖 악담을 쏟아놓곤 했다. - P36
사실 에르도사인은 바르트에게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으라고 꼬드겼다. 물론 순간적인 동정심 때문이기는 했지만, 에르도사인의 진지한 태도에 바르트도 경계심을 다소 늦추는 듯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에르도사인의 눈빛에서 새어 나오는 음흉한 미소를 본 바르트는 마음속에서 겨우 사그라져 가던 증오심이 또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 P37
발명가의 꿈
만약 누군가가 에르도사인에게 "몇 시간 후 당신은 바르수트를 죽일 계획을 꾸미게 될 거야. 게다가 부인이 집을 나가 버려도 그냥 보고만 있을걸?" 이라고 예언했다면, 에르도사인은정신 나간 놈이 지껄이는 헛소리 정도로나 여겼을 것이다. 에르도사인은 오후 내내 정처 없이 거리를 쏘다녔다. 그냥혼자 있고 싶었다. 그리고 인간들의 소리를 잊고 싶었다. 낯선도시에 가서 기차를 놓친 이방인처럼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그저 자유롭고 싶었다. - P38
에르도사인은 걸음을 멈추고 앞에 있는 저택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으리으리한 차고며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는 정원, 그리고 사자라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한 철제담장과 총안이 설치된 벽, 뭐 하나 평범한 게 없었다. 타원형의푸른 화단 사이로는 빨간 벽돌이 깔린 보도가 저택을 향해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는데, 가정교사로 보이는 한 여인이 회색모자를 쓰고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 P38
하지만 지금 그는 600페소 7센타보를 갚아야 한다. 갑자기에르게타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자네 말이 맞아....... 이 세상엔 그처럼 불행과 가난에 찌든 쓰레기들 투성이지. 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들을 좋은 길로 인도할 수 있을까? 나도 그게 고민이야. 그걸 해결하려면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다시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그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러자 마음속 어두운 곳에서 싹튼 고통이 마법에 걸린 나무처럼 순식간에 목구멍으로 치솟아 올랐다. - P39
. 가로등 불빛 아래로 희뿌옇게 일어나는 먼지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젠 ‘리미티드 아수카레르 컴퍼니(Limited AzucarerCompany)‘‘⁶ 따윈 까마득히 잊은 채 그는 쾌락의 땅을 향해 힘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까지 에르도사인은 어떻게 살아왔던가? 그때 그에게 한번 물어봐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는70킬로그램의 몸무게를 어떻게 지탱하면서 걸어 다녔던 것일까? 혹시 그는 유령이 아니었을까? - P40
6 에르도사인이 다니던 제당 회사 ‘콤파니아 아수카레라(CompaniaAzucarera)‘를 영어로 잘못 옮긴 표현. 이른바 ‘자유무역의 황금시대‘에 아르헨티나 경제의 대(對)영국 의존도가 심화되어 가던 상황을 비판적으로 드러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P417
에르도사인이 보기에 저런 커다란 저택에는 분명 ‘우울한표정의 무뚝뚝한‘ (에르도사인의 표현을 ‘내‘⁷가 그대로 옮긴 것이다.) 백만장자가 살고 있을 것 같았다. 에르도사인은 그 백만장자가 쌍안경을 이용해서 창문에 내려진 페르시아나"의 틈으로 자기를 계속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을했다. 우습게도, 그 ‘우울한 표정의 무뚝뚝한 백만장자‘ 가 만의 하나 자기를 쳐다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에르도사인은 지나가는 여자들의 뒷모습도 외면한 채 고뇌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 P40
7) 여기서 ‘나‘는 이 소설의 서술자이자 화자이다. 텍스트에서 ‘나‘는 ‘해설자‘ 혹은 ‘기록자‘, ‘편집자‘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한다. 에르도사인은 이작품의 속편 『화염방사기』에서 하숙집 주인의 딸인 사팔뜨기 처녀 ‘라비스카‘를 권총으로 살해한 뒤 경찰의 추적을 피해 다니던 중, ‘나‘의 집에서 사흘 동안 은신하게 된다. ‘나‘는 에르도사인이 쫓기는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신뢰를 보내면서 그간 에르도사인이 겪었던 모든 사건과 고통, 그리고 불행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기차역까지 그를 바래다주기도 했다. (결국 에르도사인은 밤 열차 속에서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에르도사인이 마지막 사흘 동안 ‘나‘에게 했던 고백은결국 이 소설의 토대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는 ‘해설자 주‘를 통해 에르도사인의 심리 상태나 행동의 동기, 사건의주변 정황 등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 P417
에르도사인은 오랫동안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지켜본 ‘우울한 표정의 무뚝뚝한 백만장자‘ 가 언젠가 사람을 시켜 자기를 부를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 특별한 오후의 망상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 P41
에르도사인과 결혼하기 전에는 엘사도 이처럼 크고 화려한거실이 있는 집에서 살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 그런 게생각나지? 그는 회사 공금을 횡령했다. 아내가 아픈 몸을 이끌고 남의 집 빨래를 해주고 있는 이 시간에도 그는 다 떨어진 구두에 올이 풀어진 넥타이, 군데군데 얼룩이 묻은 남루한 양복차림으로 거리를 헤매고 있다. 이게 바로 그의 모습이다. 바로그 때문에 그 ‘우울한 표정의 무뚝뚝한 백만장자‘가 그를 부른것이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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