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월급 들어오는 통장에 그간 모인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정도인가 싶어 영수는 되물었다. (중략). 게다가 그 계좌에는 꽤 큰 돈이 있었다. 복제인간 하나 뚝딱 살 만한 돈이었다. - P25
마지막에는 브로커가 물었다. (중략). "복제인간이 자신이 복제인간인 걸 알게 하나 아님 모르게 하나, 그걸 묻는 겁니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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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브로커가 알려준 모텔로 가서 이틀을 잤다. 그리고 월요일, 영수는 집근처로 찾아갔다. 영수는 매일 바라봤던 해볼 만한 나무 뒤에 숨어, 그가, 혹은, 내가, 아니, 네가, 출근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 P28
‘일주일만, 딱 일주일만 놀고, 그러고 깨끗하게 죽자‘ 드디어 영수가 바라던 대로 되었다. 늘 바랐지만 실제로는 한 번도 되어본 적 없는, 무책임, 무쓸모, 심지어 무존재의 존재. - P29
영수는 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마냥 성실하게 놀았다. 근무 시간에 사무실에 가기도 했다. 들어가진 않고 사무실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서 보란 듯 놀았다. - P30
떠나기 전에 복제인간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왔었다. 영수는 메모지에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그리고 이걸, ‘이걸 어디다 두지? 꼭 볼 수 있는 데 둬야 하는데? - P31
영수와 똑 닮은 복제인간은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영수만 사라지면 되었다. - P32
인체 자연발화야말로 영수가 바라는 것이었지만, 그건 아직까지도 어떻게 일어나는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가능한지, 영수 인체가 자연발화가 되는 인체인지 알 수도 없어서 불가능. - P33
자살이 자유로울 경우, 영수가 자살했다는 게 밝혀져도 그만인 경우.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지금은 복제인간이 남았다. 자살하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남은 가족에게 피해 없이 자살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한 거 아닌가? - P34
5
다행히 모텔에는 욕조가 있었다. 영수는 약국을 돌며 염산을 사 모았다. 또 다른 약국들을 돌며 수면유도제를 사 모았다. - P35
그럼 영수의 근무자, 영수의 복제인간이 박영수의 인생 앞으로도 잘 살 거고, ‘너는 죽지 마라, 조바심 내던 엄마도 평화를 찾게 되겠지.‘ 영수는 의자에 앉았다. 조심스럽게 수면제들을 손에 모았다. 수면제 몇 개를 놓쳤다. 잡으려다가 미끄러질 뻔했다. 염산이 가득한 욕조에 떨어진 수면제 몇 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P36
영수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 너머에서 말했다. "자살하려고 했어." (중략). "그쪽 말고, 니 복제인간." - P37
"복제인간이 지 인간 닮은 게 불량인거냐고?" - P38
전혀 신나면 안 될 상황인데 영수는 자신도 모르게 약간 신이나서, "혹시, 모니터에 목매달아서인가요? 그러니까・・・・・・ 22번 모니터?" "맞아. 22번." ‘소름, 정말 나랑 똑같은 건가? - P38
"나는 삼십 년을 버텼는데, 걔는 어떻게 일주일 만에 그러냐구요." "너랑 다른게 있나 보지." "다르면 그게 복제인간이냐?" 영수는 욱하는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반말을 했다. - P39
"그렇지 않지. 넌 그냥 준비한 대로 죽어. 그럼 그냥 남은 가족들 중 세 명이니 죄 좀 나눠 지고." ‘그게 되는 나였으면 이런 고생을 했을까? 가족이고 뭐고 누구에게든 민폐는 질색입니다. - P39
영수는 욕조 속에 떠 있는 플라스틱 의자를 다시 한번 봤다. ‘내가 내 인생 포기한 내가, 누구를 살라고, 설득을 하라고?‘ - P40
6
0수는 눈을 떴다. 깬 건 맞는데 그게 잠인지 꿈인지 어딘지 출처를 모를 곳에서깨어난 느낌이었다. - P41
근데 내가 저 나무를 왜 즐겨 봤더라? 아,‘ 해볼 만한 나무. 회사는 가야 했다. (중략). 아파트를 나왔다. 나무들을 지나쳤다. 나무 뒤로 누군가가 이쪽을 쳐다보는 것도 같았다 - P42
어쨌든, 회사는 가야 했다. ‘오늘은 22번 모니터에 매달릴 차례구나.‘ 모두가 편집하느라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0모니터 약간 위쪽을 봤다. 천장과 단단하게 이어진 그 은색 봉을 봤다. - P44
해볼 만한 나무, 22번 모니터, 점심시간이 되고 직원들이 편집실을 빠져나갈 때까지 0기다렸다. 마지막 사람까지 모두 나갔을 때 0수는 조용히 일어나 문을 안에서 잠갔다. - P45
하지만 수는 눈이 떠졌다. 집이었다. 해내지 못했고, 눈앞에는 경찰이 있었다. 경찰은, 자살을 시도했으나 이행되지는 않았으니 아직까지는 위법 행위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족 셋에게 경고는 들어갔다고 0수에게 전했다. - P45
남은 가족이 셋이나 되나?‘ 0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한 것도 같았지만 다시 잠이 들었다. - P46
0수는 영수를 만났다. 0수가 한 첫 질문이 아마도 "어떻게 들어왔어요?"였을 텐데. 곧, (중략). ‘아니네? 똑같이 생겼는데!‘ - P46
"자살방지국에서 보낸 거 맞죠?" 0수가 물었더니, 수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대답했다. "......그렇죠. 자살방지국에서 일하는 거 맞네요. 자살을 시도하셔서, 아무래도 제가……………" ‘와 대박, 목소리까지 비슷해!‘ - P47
한동안은 둘 다 말이 없었다. 0수가 또 질문을 했는데, "너라고 불러도 돼?" "......" - P48
‘너라고 편하게 부르라곤 했지만 아무래도 주인님과 함께 자는 건 신경이 쓰이겠지.‘ ‘아, 왜 이렇게 자꾸 짠해 쟤? 너를 만난 오늘은 영 잠을 못 이룰 것 같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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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영수는 인간인 자신을 복제인간이라 여기는 복제인간 0수를 어떻게 대해야 하나 싶다. 자신의 침대에서 세상모르게 잘 자고있는 수를 보고 있자니 영수는 맘이 복잡했다. 지금쯤 잠들어있어야 할, 영원히 잠들어 있어야 할 사람은 영수였다. - P50
‘그렇지만 나님에게 너라니. 내가 너가 아니고 니가 나가 아니고 내가 난데, 자기가 먼저 나한테 너란다. 하지만,‘ - P50
"제가 어떻게든 계속 사시는 방향으로 도울 테니, 그러니까 해봐요. 자살방지. 이게 제일이니까요" 했더니, 복제인간 이분, 그러니까 네 식대로 하면 내 쪽에서도 너가, 훌쩍훌쩍 울었다. 울면서 내게 말했다. "불쌍해. 나 같은 걸 복제까지 해서 또 니가태어났다니까, 나는 니가 너무 불쌍해." 그렇게 내 존재는 급 불쌍해졌다. - P51
"저 복제인간이에요. 에이아이, 그런 거 아니구요." "아......." ‘그래, 모자란 날 복제한 너니 오죽하겠어.‘ - P51
"뭐라도 좀 먹을래요?" 물었더니, 너는 또 끄덕끄덕. 나는 하던 대로 냉장고 냉동실 문을 열어 냉동 음식을 꺼내려다가, 어쩐지 죽다가 살아난 애한테 냉동 음식은 아닌 것 같아기다리라 하고 집을 나왔다. - P52
너는 나에게 먹어봐라 권하지도 않고 먹기 시작했다. 참 잘먹었다. 입맛에 맞나보다. 하긴 내 입맛이나 니 입맛이나. 한데, 너무 잘 먹는다. 며칠 굶은 사람 같다. - P53
영수는 0보다 한참 늦게 잠들었다. 바닥이 딱딱해서 깼다가 다시 잠이 들려 하는데, 어디서 찬바람이 드는 것 같아 눈이 떠졌다. ‘창문을 열어두고 잤을 리가 없는데?‘ 영수는 창쪽을 봤다. 웬걸, 창이 열려 있었다. - P54
찰나에 영수는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다행히도, 창틀은 조금 작았다. 그래서 0수는 날렵하게 창을 통과하지 못했다. - P55
몸을 창밖으로 내민 인간은 울상이지만, 다리를 잡은 인간은 웃는 얼굴 같다. 죽으려는 인간과 말리는 인간, 두 인간은 몹시 닮았다. 한 사람이라 해도 믿겠다. 대체로 한 사람이긴 하다. 죽으려는 것도 나, 말리는 것도 나 - P56
8
영수는 0수를 끌어올려놓았다. 0수가 어깨를 부딪히던 모습이 자꾸 생각나서 영수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진짜 너무 웃겼는데, 진짜 이게 얼마 만에 웃는 건가 싶은데, - P57
영수는 0수와 같이 출근을 했다. 영수는 습관대로 모자 하나 눌러썼다. 챙이 짧아 방호복 안에서도 거치적거리지 않는 - P58
"회사에선 어땠어?" 영수가 0수에게 물었다. 진짜 하고 싶은 질문은 여전히, ‘왜 죽으려고 했어?"였지만, 그랬다가는 또 질질 짤 것 같았다. (중략). ‘그 사람이 왜?‘라고 한 거였다. 한 시간 동안 답할 이야기는아니었는데, 0수는 참 길게도 늘어놨다. - P58
"아니 진짜 죽고싶다가 아니라, 일테면 어색한 자리 가서 아무도 신경 안 쓰는데 혼자 어색한 티 안 내려고 말을 너무 많이할 때라든가." "어색한자리? 우리가 그런 자리 갈 일이 뭐가 있어?" - P59
앞으로 엄마와의 어릴 적 기억은 0수에게 물으면 되겠구나. 엄마가 해주던 음식의 레시피 같은 것도 기억 속 어딘가에 있을텐데, 영수는 물어볼까 싶었다. 그러다가도, ‘곧 죽을 텐데 묻긴 뭘 물어.‘ - P61
나는 조용한 사람인 줄 알았다. 혼잣말이 습관이 되긴 했지만 이렇게 수다스러운 줄 몰랐다. 대상이 없었을 뿐이었다. - P61
나 외로운 사람이었나? 한 번에 너무 많은 언어를 쏟아내 취해버린 사람처럼 불쑥 네가 내게 말했다. 헛소리에 가까웠다. "외로워지지 마. 아무나 만나게 돼. 그럼 더 외로워져."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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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수는 신경 써주는 영수가 어쨌든 고마웠다. 전자레인지가 아닌 가스레인지를 쓴 요리를 먹은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 P63
창틀에 걸려 있는 0수를 영수가 또 끌어올렸다. ‘너는 정말 나를 못 죽게 할 작정인가 보다.‘ - P63
0수는 사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도대체 언제 만들어진건지, 만들어진 채로 어디에 있다가 나오는 건지, 다 큰 채로 태어나는지, 나랑은 어떤 게 다른지, 나는 당장 죽고 싶은데 너는왜 아무렇지 않은지, 감정만큼은 똑같이 태어나지 않은 건지. - P64
오한은 원래가 대놓고 쳐다보는 사람이긴 했지만 요즘 들어 너무 자주 0수를 쳐다봤다. 점심을 먹으러 가려는 0수를 오한이 다가와 앞을 막고 섰다. 오한은 0수에게 물었다. - P64
어제 영수와 오랜 대화를 나눈 게 하루 사이 습관이라도 되었는지 수는 요즘의 자신에 대해 오한에게 꽤 상세히 얘기했다. 0수의 이야기가 끝나자 오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은근하게 물었다. - P65
물론 0수는 알았다. 기억을 판 사람과 산 사람 모두 매매에 대한 기억은 지워졌다. 그러니까 수가 기억을 팔았어도 당연히 그 기억은 없다. 그렇지만 기억 하나 팔았다고, ‘사람이 이렇게 우울해?‘ - P65
"응, 기록실에 매매에 대한 기록, 편집자에 대한 기록 같은 게 남아 있긴 하다. 하지만 아무나 들어갈 순 없겠지." "거길 들어가게 도와준다는 거겠지?"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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