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O

부활절 연휴의 첫날 나는 네 시에 일어났다. 한나는 그날 새벽 근무였다. - P50

전차는 정거장이 나와도 정차하지 않고 그냥 통과했다. 정거장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날은 아직 밝지 않았고 하얀 하늘 아래로 모든 것이 창백한 대기 속에 창백하게 놓여 있었다. - P51

 에펠하임을 지나자 전차의 선로는 도로 가운데를 벗어나 도로 옆의 자갈이 깔린 둑 위로 나 있었다. 전차는 여느 기차처럼 규칙적인 덜커덩 소리를 내며 점점 더 빠르게 달렸다. - P51

그러던 중 나는 정거장 하나를 발견했다. 넓은 벌판에 자리잡은 조그만 승차 대기소였다. - P52

나는 열두 시 정각에 그녀의 아파트 앞 층계참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슬퍼하면서 초조하게, 그리고 분을 삼키면서.
"너 학교 또 빼먹었니?"
"연휴잖아요. 오늘 아침엔 어떻게 된 거예요?"
그녀는 열쇠로 문을 열었고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 부엌으로 갔다.
"뭐가 잘못됐다는 거니?"
"왜 나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어요? 나는......." - P53

"너 정말 딱한 애구나. 네 시 반에 일어나다니. 그것도 연휴에 말이야."
그때까지 그녀가 그렇게 야비하게 보인 적은 없었다. 그녀는머리를 가로저었다.
"네가 왜 슈베칭엔으로 가는 전차를 탔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네가 왜 나를 모른 척했는지 어떻게 알아. 그건 네 일이지내 일이 아냐. 이제 좀 돌아가주지 않을래?" - P54

"미안해요. 한나, 모든 게 엉뚱하게 돌아갔어요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렇지만 내 생각으로는.....
"‘내 생각으로는‘이라고? 너 네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다고 말하려는 거지? 넌 내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없어. 넌 그렇게 할 수 없어. 이제 제발 좀 가줄래? 난 일하고 왔어. 목욕하고 좀 쉬고 싶어." - P55

"나를 용서해주는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날 사랑해요?"
그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욕조에 물이 아직 그대로 있어. 자, 목욕시켜줄게."
나중에 나는, 그녀가 내가 돌아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욕조의 물을 그냥 그대로 둔 것은 아닌지, 그녀가 내 앞에서 옷을 벗은 것도 그렇게 하면 그 장면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결국은 내가 돌아오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지, 그녀가 오직 파워 게임에서 승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해 자문해보았다. - P56

. 한 번인가 두 번 나는 그녀에게 긴 편지를썼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어보았을 때, 그녀는 내게 이렇게 되물었다.
"너 또 시작하는 거니?" - P57

II

한나와 내가 부활절 연휴의 첫날 이후로 다시는 행복하지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4월의 그 몇 주처럼 행복한 적은 없었다. 그 첫 싸움은 전혀 엉뚱한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의 싸움은 늘 그랬다. - P58

나는 앓아누워 있는 동안 용돈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한나의 몫까지 돈을 쓰려면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하일리히가이스트 교회 옆에 있는 우표 가게를 찾아가서 우표첩을 팔겠다고 내놓았다. - P59

나만 여행의 열병에 걸려 있던 건 아니었다. 놀랍게도 한나 역시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녀는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이리저리 궁리하고 내가 구해준 자전거 안장 밑에 매다는 자루와 배낭을 꼼꼼하게 꾸렸다. - P59

"나는 지금 너무 흥분돼 있어. 네가 다 알아서 해, 꼬마야."
우리는 부활절 월요일에 출발했다. 태양은 빛났다. - P60

우리는 대개 나란히 달렸다. 달려가면서 각자 본 것을 서로에게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성, 낚시꾼, 강 위에 떠 있는 배, 텐트, 강가를 따라 한 줄로 걸어가고 있는 가족들, 지붕을 열어젖힌 미국산 대형 승용차 등등. 방향이나 길을 바꿀 때에는 내가 앞장서야 했다.  - P60

한나는 내게 방향과 도로의 선택권만 넘겨준 게 아니었다. 우리가 밤새 묵을 여관도 내가 직접 골라 숙박인 명부에 우리를 어머니와 아들로 기입했고, 그녀는 거기에 서명만 했다. 메뉴에서 음식을 고르는 것도 내 몫이었다.
"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걸 좋아해." - P61

"어떻게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간단히 가버릴 수 있어!"
나는 아침 식사와 장미가 담긴 쟁반을 내려놓고서 그녀를끌어안으려 했다.
"한나......."
"건드리지 마." - P62

나는 그때 그녀를 두 팔로 끌어안아주었어야 했다. - P62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 P62

"우리 아침 먹을까?" 그녀는 내게서 몸을 풀었다. "맙소사,
꼬마야, 네 꼴 좀 봐!" 그녀는 손수건을 적셔 와 내 입과 턱을 깨끗이 닦아주었다. "셔츠도 피투성이잖아."
그녀는 나의 셔츠를 벗기고 뒤이어 바지도 벗겼다. 그러더니 그녀도 옷을 벗었고 우리는 사랑을 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예요? 왜 그렇게 화가 났었어요?" - P63

"도무지 알 수 없군요. 아침 식사를 가지고 금방 돌아오겠다는 쪽지를 써놓고 나갔거든요."
"그랬어? 난 쪽지를 보지 못했어."
"내 말을 못 믿겠어요?"
"물론 널 믿지. 하지만 나는 쪽지를 보지 못했어."
우리는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 - P64

(전략). 그녀는 소설 내용에 대해 갈팡질팡하다가 내가 책 읽기를 마치면 그 후로 몇 시간 동안 내게 질문을 퍼부었다.
"통행세 징수관? 그건 좋은 직업이 아니었나 봐?"
우리 사이의 싸움에 대해 다시 이렇게 자세하게 이야기했으니 이젠 우리의 행복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까 한다. 싸움은 우리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어주었다. - P65

나는 그때 쓴 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시라고 할 만한 게 못된다. 그 시절 나는 릴케*와 벤*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두 시인을 한꺼번에 닮고 싶어 했던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 시를 보며 우리가 그때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도 다시 깨닫는다. 그 시가 여기 있다.

(후략) - P65

12

한나와 여행을 떠나기 위해 부모님에게 둘러댔던 거짓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부활절 연휴의 마지막 주 동안 혼자서 집을 지키며 치러야 했던 대가는 아직도 생생하다. 부모님과 누나 그리고 형이 어디로 여행을 떠났었는지는 이제 모르겠다.  - P66

돌이켜보면 부모님이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에게 일주일씩이나 집을 보도록 맡겨두신 건 놀라운 일이었다. 한나와의 만남을 계기로 나의 가슴속에 자라나기 시작한 독립심을 눈치챘던 것일까? - P67

물건을 훔치는 일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쉬웠다. 나는 청바지를 여러 벌 입어보면서 여동생에게 맞을 만한 청바지도 한벌 집어 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을 통이 넓은 양복바지의 안쪽 배 근처에 집어넣은 채 상점을 빠져나왔다. 벨풀오버 니키는 백화점에서 슬쩍했다. - P68

. 그녀의 눈길은 피곤해 보인다.
"여기 이것들이 모두 너의 아버지가 읽거나 쓰신 책들이니?"
나는 아버지가 쓴 칸트 책과 헤겔 책을 알고 있었다. 나는그 책들을 찾아보았다. 마침내 두 권을 찾아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내게 그 책을 조금만 읽어줘. 꼬마야. 그렇게 해주지 않을래?" - P70

나는 그녀에게 그 비단 잠옷을 선물했다. 그것은 가지색이었고 가느다란 어깨 끈이 달려 있어서 어깨와 팔이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치맛단은 복사뼈까지 내려왔다. 잠옷은 반짝이면서 은은하게 속이 비쳤다. 한나가 기뻐하며 웃자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녀는 발밑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빙그르르 돌기도 했다. - P72

13

새 학년의 시작은 늘 하나의 분명한 단락처럼 느껴졌다.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진급은 특히 하나의 시기를 칼로 자른 듯한 변화를 몰고 왔다. - P72

우리는 그 사실을 새 학년이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되었다. 교장 선생님은 우리를 한 교실에 모이게 한 다음 우리반이 흩어진다는 사실과 그 방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다른 급우 여섯 명과 함께 나는 텅 빈 복도를 지나 새 교실로 갔다. - P73

모든 사람이 다 그럴까? 나는 젊었을 때 지나치게 자신감을느끼거나 지나치게 자신 없어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나 자신을 너무 무능력하고 초라하며 보잘것없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스스로 전체적으로 보아 성공했으니 모든 일에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다. - P74

우리는 《오디세이》를 번역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작품을 독일어로 읽었다. 나는 그 작품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나는 선생님에게 지명을 받으면 별로 지체하지 않고 번역할 곳을 찾아 마음을 가다듬은 후 우리 말로 옮겼다. - P76

14

비행기 엔진이 고장났다고 해서 그것이 비행의 끝은 아니다. 비행기는 날아가던 돌멩이처럼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미끄러지듯이 날아간다. 초대형 다발 여객기는착륙 시도 시에 산산조각이 날 때까지 반 시간에서 45분 정도까지는 날아간다. 승객들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다. - P76

우리는 책 읽기와 샤워, 사랑 행위 그리고 나란히 눕기로 이어지는 우리의 의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전쟁과 평화》*를 읽어주었다. - P77

우리는 서로를 위해 애칭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이제 나를 꼬마라고 부르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 수식어나 축소형*명사들을 이용해 개구리나 두꺼비, 새끼 늑대, 돌멩이 그리고 장미 등으로 불렀다. 나는 한나라는 이름을 고집했다. 그러던중 그녀는 내게 물었다. - P78

나는 그녀에게 내가 왜 그런 연상을 하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그녀는 자기 장딴지 근육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말이라고."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모르겠어......."
그건 평소의 그녀 태도가 아니었다. 평소에는 동의나 거부의사를 아주 분명하게 표현했다. - P79

한번은 함께 가까운 도시에 있는 극장에 가서 《간계와 사랑》을 보았다. 한나는 연극 구경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연극의 상연부터 휴식 시간의 샴페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마음껏 즐겼다. - P80

 한나에게 가기보다 차라리 수영장에있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지 않게 되기까지는 오랜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7월의 내 생일에 나는 수영장에서 친구들의 생일 축하를 받고 친구들이 아쉬워하는 가운데 그곳을 빠져나와 일 때문에 탈진한 한나에게서 형편없이 기분 나쁜 영접을 받았다. - P81

그녀는 그해 여름 나의 생활이 이제 더 이상 그녀와 학교 그리고 공부 주변만을 맴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늦은 오후 그녀에게 갈 때면 나는 수영장에 들렀다가 가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 P80

15

그 후 나는 그녀를 배반하기 시작했다.
한나와 나 사이의 비밀을 세상에 알렸거나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내가 침묵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은 어느 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 P82

내가 나의 속을 완전히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친구들이눈치 챈 것은 상황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 P83

"너 오랫동안 아팠지. 간염 때문에 말야. 너를 괴롭히는 게바로 그거니? 넌 다시 전처럼 건강을 되찾지 못할까 봐 겁나니? 의사 선생님들이 무슨 말이라도 했니? 그래서 넌 매일 병원에 가서 피를 바꾸어 넣거나 주사를 맞아야 하니?"
한나를 병으로 생각하다니. 나는 부끄러웠다. - P84

16

(전략). 우리는 함께 공유하는 생활 세계가 없었으며, 그녀는 그녀 인생에서 내게 허용하고 싶은 만큼의 자리만 내주었을 뿐이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 P85

게다가 나는 그녀가 자주 즐겨 간다고 말한 거리나 상점, 영화관에서 그녀를 단 한 번도 우연히 마주친 적이 없다. 만나고 처음 몇 달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런 곳에 함께 가자고 졸랐지만, 그녀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 P86

한나는 하루 종일 평소와 다른 특이한 기분이었다. 변덕스러웠고, 고압적이었으며, 동시에 그녀를 극도로 괴롭히고 예민하게 만드는 무슨 압박감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 P87

17

다음 날 그녀는 떠났다. 나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그녀의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다. - P90

나는 이름 하나와 키르히하임에 있는 주소를 얻었다. 나는 차를 타고 그곳으로 갔다.
"슈미츠 부인이요? 그 여자는 오늘 아침에 집을 비웠어요."
"그러면 가구들은요?"
"그건 그 여자 물건이 아니에요." - P90

"그녀가 오늘 아침에 전화를 걸었어요. 그래도 제때 전화를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대신 투입할 수 있었지요. 이제 안나온다고 하더군요. 영원히." 그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2주 전에 그녀는 바로 여기에 앉아 있었어요.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의자에 말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전차 운전기사 교육을 받아보라고 제안했지요. 그런데 그녀는 모든 것을 내팽개친 겁니다." - P91

몇 번이고 나는 내가 본 것은 그녀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시켜보려고 했다. 얼굴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녀였다고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 P92

그러나 나는 그것이 그녀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서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 P92

제2부


나는 내가 그녀를 배반하고 부정했기 때문에 그녀가 내게서 떠나버렸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단지 전차 회사에서 자신의 약점이 노출될까 봐 두려워 도망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쫓아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내가 그녀를 배반했다는 사실을 바꾸어놓지는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유죄였다. 그리고 범죄자를 배반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으므로 내가 유죄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범죄자를 사랑한 까닭에 유죄였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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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그러면 이번 질문은 대답하지 않아도 돼. 백해나를 좋아했니? 릴리만큼은 아니더라도, 확실히 결론 내릴 수 없더라도… 속으로만 생각해봐."

(개, 말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신경 관계망의 더 넓은 부분이 반응하는데, 두 질문에서 공통으로 보였던 패턴이 다시 나타난다. 여기에는 부연 설명이 없지만 시청자는 그 의미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도하는 프로그램을 조작해 초기화 화면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잘못 설치된 프로그램을 지우듯이, 아무 망설임도 없이 초기화 명령을 내린 다음 정면을 바라본다.) - P165

도하

"인공지능 설계가 인간의 오만인지 아닌지는, 그리고 인공지능이 설계되는 방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주제로 떠드는 사람은 아주 많고, 여러분에게도제각기 의견이 있을 테니까요. 다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싶습니다 인간이 완전히 설계되거나 수정될 수 없다는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삶으로부터 결핍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건, 한편으로는 타인의 해결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건 사실 고통스러운한계가 아닐까요?"

(초기화 게이지가 100퍼센트에 달하자 알림창이 뜬다. 도하는 확인 버튼을 누르고, 프로그램을 종료한 뒤, 워크스테이션을 짐리해 협회 가방에 넣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카메라를 향해 다가온다. - P167

"미인가 인공지능이 걱정만큼 많진 않을 거예요. 쉬운작업이 아니거든요. 설계를 마친 신경 관계망을 범용 칩셋에서 실행 가능한 형태로 만들려면 건전성 검사를 포함한포팅 과정을 거쳐야 해요. (후략)." - P168

"우회하는 방법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박사가 단호하게 말허리를 잘랐다.
"그런가요? 보안 취약점을 미리 말해줘야 협회도 빨리대처할 텐데요." - P169

"면허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기대하지는 않으려고요. 그래도 어쨌든, 면허가 박탈당하더라도 수많은 사람 앞에서 떠드는 값으로는 충분하다고봐요. 흔한 기회가 아니니까요." - P170

"그래요, 편집 방향을 스스로 정할 기회는 흔치 않죠. 문제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늘어놓는 것과, 마음에 드는 반응이 돌아오는 건 완전히 별개라는 거죠. 다큐멘터리 반응이 많이 갈릴 거예요. 사람들이 누굴 제일 많이 욕하려나. 아무래도 나일 것 같은데. 탓할 상대가 하나쯤은 필요한데, 죽은 사람을 들먹이기엔 미안하니까." - P170

"때마침 우리 개는 기억도 날아갔으니까,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고요. 내가 위험한 약을 구한 다음 가루로 갈아서백해나가 술을 마실 때 몰래 섞었다고, 처음부터 죽을 줄알고 있었다고, 백해나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것처럼 개를 들고나온 게 그 증거라고, 설계사도 공범이고, 개도 공범이고, 그래서 아예 초기화해버린 거라고, 그런데 백해나는 평소에도 그렇게 살았으니까 날 의심할 수는 없을 거라고, 신나서 떠들 사람이 한 명쯤 있겠죠." - P171

03

개와 소녀


쿠키 영상 촬영이 끝나자 릴리는 그 대목을 편집하지 말라는 언질을 남기고 떠났다. (후략). 자극적인 내용이 들어갈수록 쿠키 영상의 결제율이 올라갈 테니 배급사에는 기쁜 제안이었다. - P175

"거짓말이지. 릴리도 농담이라고 했잖아."
무엇보다도 필론 독살이 그토록 쉬운 일이었더라면 나는 설계사 면허를 따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다. 어지간히 많이 먹은 게 아니라면 중간에 깨어나서 속에 든 걸 모두 게워내게 되고, 단번에 혼수상태에 빠질 만한 양은 들키지 않고 술에 섞을 수가 없다. - P177

"그 사람, 저녁에 만났다면서? 낮에 워크스테이션으로뭐 했어?"
"무슨 소리야?"
"가윤 씨. 그 사람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들고 나갔다고했잖아. 6시 넘어서 만났으면, 그전까지는 어디 있었던 거야?"
(중략).
"누가 그랬는데?"
"아까, 박사가." - P178

이제 나는 상황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이미지들 사이를 부유하고 있다. 중력을 무시하듯 솟아 올라가는 마천루들, 각각의 마천루 난간 위에 줄지어 선 인간들, 인간들이 차례차례 떨어지고 16차 선로를 질주하던 자동차들의 프레임은 예리한 날이 되어 몸을 토막 내고 보닛이 우그러지고 전면부 카메라가 피로 물든 자동차들이 서로 충돌한다. - P179

이 노력과 갈망에 액면 이상의 가치가 있길 바란다. 최소한 죽음보다 현명한 선택이었으면 한다. 그런데도 이따금 실수를 저지른다. 이를 너무 악물어서 턱이 아프고 눈앞이 깜빡거리는데 지금 당장 필요했던 질문이 정신의 어스레한 부분을 꿰뚫고 들어온다.
"지금 이게 재밌지? 재밌어서 미칠 것 같지?" - P181

정신은 물리적인 것에 얽매여 있다. 어긋난 뇌에는 훌륭한 영혼이 깃들지 못하며 금속의 마음을 좌우하는 것은 칩셋의 성능이자 신경 관계망의 설계다. 그것이 내가 평생으로부터 얻은 교훈이다. 다양함에 우열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설계상의 오류가 사소하므로 그러는 것이다. - P180

나는 아마도 웃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확실히 웃고 있다.
나는 잇새로 질질 흐르는 웃음을 그러모은다. 아니라고, 사무소 고객을 만났는데 밝히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 P181

변명하고 싶지 않으므로 나는 솔직히 받아들인다. 긴정적 끝에 동생도 솔직해지기를 내가 그 새벽에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제야 겨우 고개를 돌려 동생을 마주 보자 거기에 두 눈이 있다. 고양이가 죽은 날처럼 아무런 기대가 없이 어두운 눈, 동생이 내게 내리라고 말한다. (중략). 여기까지 택시를 부르는 비용이 얼마지? 사무소까지 가는 비용은? 그나저나 아직은 기회가 남아 있다.
"내리라니까." - P182

. 하지만 나는 릴리에게 어떤 약이든 준 적이 없고 백해나를 죽인 것은 백해나 자신이니까, 존재의 증거는 댈 수 있어도 부재의 증거는 댈 수 없으니까 길게 덧붙일 변명도 없다.  - P183

코앞에 있는 문이 들썩거리다가 멈춘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 조수석 방향으로부터 돌아 나온 동생이 망연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살덩어리를 뱉으며 정말로 아니라고 중얼거리고(다행히 나는 충분히 불쌍한 처지기 때문에 연기할 필요가 없다) 동생은 내가 바보라고 말한다(그런지도 모르겠다). - P185

내 입이 다시 한 차례, 고해하듯 피를 쏟아내고 동생의흰 손마저 피로 엉망이다 - P185

백해나의 죽음에 대해서라면 나도 박사도 릴리도 개도조금씩 거짓말을 했다.
동생이 알고 있는 것 외에도 세 차례의 만남이 있었다. - P186

하나, 3년 전의 초봄, 스무 살의 릴리는 첫 만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내 사무소로 걸어 들어왔다. - P186

"오랜만이에요. 백해나한테 감금당한 줄 알았는데요."
"뉴스는 보고 살았군요?"
"아뇨, 그런데 카페에 갔더니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역시나. 그나저나 3년 만에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거예요?" - P187

이건 집단상담에 익숙한 상담사나 법무법인을 찾아가야할 문제였고, 릴리에게는 충분한 수임료가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개가 미인가 인공지능인 덕분에 출로가 틀어막힌 상태였다. - P188

"음. 어차피 복사본을 만드는 건 쉽지 않아요.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죠. 복사본을 만들 때도 등록을 거치는데, 그쪽 보안 취약점이 최근에 막혔거든요. 초기 파일은 남아 있지만 지금의 개와는 차이가 있을 테고요. 그거라도 보내줄까요?"
릴리는 얼어붙은 듯 나를 바라보았고, 개와 시선을 마주쳤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안 돼요." - P188

"고급스러운 아파트든 단독주택이든 간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라는 이야기죠. 개를 데리고 무작정 도망쳐 나오더라도 갈 곳은 있어야 하니까요. 떨어져 지내다 보면 감정의 골이 메워질 수도 있고요."
"그런 다음에는요?"
"다음은 나중에 가서 생각해볼 일이죠. 지금은 뭐랄까.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 같아요." - P189

"혹시 말만 그렇게 해두고 사본을 만들려는 건 아니겠죠?
만약 그렇다면 ・・・ 생각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생각을 하면 막을 방법은 있고?"
나는 일부러 농담을 던진 다음 개의 표정 변화를 즐겼다.
인간형 몸체에 설치되었거나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복제본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지금의 개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 P190

"이것부터 묻자. 백해나를 좋아해볼 마음은 없어?"
"릴리를 그렇게 대하는 사람은 싫어요. 악의가 있든 없든, 백해나가 외롭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그 애가 이 소리를 들으면 슬퍼할 텐데. 협박 때문에 시작된 관계라 해도, 너희한테는 은인이고 말이야." - P191

백해나는 그해 여름이 끝나기 전에 죽었다. 약물중독이었다. 나는 그게 잘못된 생활 습관의 종착지인지, 아니면개의 태도와 연관이 있었을지 의문을 품었지만 릴리가 다시 사무소에 찾아오는 일은 없었으므로 금방 잊어버렸다. - P192

릴리는 개는 물론이고 박사와도 상의를 마친 상태였다.
잠적을 했을지라도 인맥이 아예 끊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개와 릴리는 다큐멘터리에 나가 죽음의 전말을 밝힐 예정이었고 제작 지원과 배급은 박사의 몫이었다. - P193

전개를 설명하는 릴리는 무언가를 되돌려놓으려는 것처럼 보였고 무언가를 앙갚음하려는 듯도 했다.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는 동안 흘러간 대사건들을 곱씹었다. - P194

출연을 결정하는 데에는 긴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내가 요구할 만한 부분도 하나 있었다. 동생이 방송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고, 그 애의 커리어에 선물을 안겨주고 싶다고 말하자 박사와 릴리는 기꺼이 승낙했다. - P195

사무소에서 다큐멘터리의 도입부에 들어갈 장면을 찍은다음 동생의 차를 타고 바닷가를 떠났다. 당분간 동생의 집에 머무르며 스튜디오로 출퇴근하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협회 수리소에 들른 것도 기억 추출인으로서의 역할 때문이었다. - P195

대기실에서 5시간을 기다려서 장비를 돌려받은 다음 동생에게 이제 들어가겠다며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동생의 답장과 동시에 릴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 P196

그리고 솔직히 이 시간에 이런 식으로 통보를 내리는 건달가운 상황이 아니다. 전직 슈퍼스타와 대기업 회장님이라 남을 부려 먹는 일이 익숙한 건지. 나는 살짝 으르렁댔고 은근한 협박도 섞었다. - P198

세 번째 만남. 시영과의 만남과 가윤과의 약속 사이에놓인 빈 시간, 나는 경제특구 외곽의 무인공장에 불려 나와있었다. 도심에서 그리 멀지는 않지만 오가는 사람이 거의없는 곳이었고, 근무자라고는 방범용 산업기계뿐이었다. 건물 전체가 박사의 통제를 받고 있는지 경로에 맞추어 문이 스스로 열렸다. - P199

"그러니까, 노이즈를 넣어야 할 대목이・・・ 어떤 내용이죠?"
"직접 봐요."
릴리는 그 말을 툭 던진 다음 일어나서 접견실 바깥으로향했다. 자신은 결코 보고 싶지 않다는 투였다. 박사가 직접 기억을 지울 수 있을 텐데도 구태여 나를 여기까지 부른 것은 기억의 내용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조금 더 뚜렷해졌다. - P200

"백해나가 그때까지 한 소리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었어요. 저는 화를 내지도 않았고 욕을 퍼붓지도 않았어요. 사소한 이야기였어요. 백해나가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 알지만, 설명도 할 수 있지만, 말 몇 마디 들었다고 죽는 건 수긍이 안 가요. 릴리가 무서워하는 것도요. 가끔은 그날 일때문에 마음이 아프지만, 그건 릴리가 저를 꺼리기 때문이지 백해나한테 미안한 감정을 느껴서는 아니에요. 후회한적 없어요." - P201

몸이 떨리고 있었다. 눈물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도같았다. 나는 개의 등줄기에 손을 얹은 채 내가 모르는 세상 어딘가에는 플라스틱과 금속과 단백질이 자연스레 뒤섞이고 화학물질과 전류가 하나 되어 흐르는 과학 법칙이 있으리라고, 그러니까 개와 나의 영혼이 이 순간에 공명하고 있다는 것도 진실일 거라고 믿어보았다. - P203



"믿고 싶은 걸 믿으려 하는군요. 전 이제 처음으로 거짓말을 멈춘 건데. 물론 당신이 저한테 의지했던 건 알고있어요. 알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거짓말을 한 거고요."
(비슷한 대화가 몇 차례 더 오간다. 길고 고통스러운 침묵.) - P206

백해나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 P206



"당신은 소리 지르고 화내고 두려워하는 것 외에는 모르고 살아갈 사람이죠."

(백해나, 개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그만 내던진다. 시야가 뒤흔들리다가 기울어진 채 정지하고, 곧바로 올바른 위치와 각도를 되찾는다. 개는 똑바로 선 채 백해나를 올려다본다. 여전히 단조롭고 친절한 목소리.)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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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은 도덕과 법이 작동하는 방식을 혼동한다. 옳고 그름을 가르는 기준이, 타인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명백한 규칙들로 이루어진 체크리스트라고 여기는 것이다. - P115

 타인을 이용해서는 안 되고, 서커스 무대에 장애인을 내보내서 구경거리로 만드는 건 역겨운 일인데, 공짜 상담을 미끼로 정서불안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수억 명의 안방에 던져주는 건 왜 용인되는 걸까? - P116

어쨌거나 도덕적 직관은 가끔 규범과 충돌한다. 그리고 괴리에 엄밀한 원칙을 들이대면서 남들의 기분을 해치는사람은 친구를 잃어버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명확한 체계 속에서 살아간다고 믿으며 상대가 자신과 같은태도를 보이길 기대한다. - P116

도하

"달리 말하면, 이런 난제를 해결하는 능력이야말로 설계사 업무의 핵심입니다. 인공지능에게 올바른 행동과 적절한 행동의 차이를 알려주고, 상황에 어울리는 감정을불어넣죠. 그 감정이 다시 행동 원리를 구성하고요. 이점을 깊이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게 되는 상황에 대한 공포를 예로 들겠습니다. 아끼는 사람이 죽거나, 나 자신이 죽거나 하는 경우 말이에요." - P120

큰 틀이 주어졌을 뿐이지 각본이 확정된 장면은 아니었다. 적당히 말하면 알아서 편집한다기에 평소 생각을 즉흥적으로 떠들어댔을 뿐이다. - P124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전, 박사 때문에 언짢은 일을겪긴 했지만 면전에서 따질 마음은 없었다. 지금은 점수를따놓으면 윤리위원회에 회부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더 컸다.  - P124

"도하 씨, 반갑습니다. 인터뷰룸 밖에서 인사드리는 건오랜만이군요. 저번엔 실례했어요."
박사가 익숙한 태도로 악수를 건넸다. 나는 손을 맞잡고가죽 장갑 아래의 기계 뼈대를 느꼈다.
"실례라뇨, 당연한 일을 한 거죠. 여하간 반갑습니다."
"촬영분은 잘 봤어요. 꽤 떠들썩해질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협회에서 좋아하지는 않을 텐데."
"미인가 인공지능만으로도 이미 문제가 크죠." - P125

"윤리위원회에 불려 나갈 준비는 하고 계십니까?"
"어지간하면 면허 박탈 처분이겠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시는군요. 면허가 아쉽진 않으신가요?" - P126

"나는 겸양과 거절을 구분하지 않는 편입니다. 괜찮겠어요?" - P128

"청문회에 나가면 정치인들은 건전성 검사를 요구합니다. 내가 충분히 도덕적이며 순종적이라는 증거를 가져오라는 겁니다. 인간 기업가들은 절대 듣지 않을 소리죠. 게다가 나는 내부적으로도 충분한 체계를 갖춰놓은 상태예요. 하나의 결정에 네 종류의 윤리 판단기가 동시에 작용하고, 그 판단기 각각은 서로에 의해 감시받고 있습니다. 이구조는 협회의 검증을 거쳐서 청문회 자료로 제출됐고요. 그런데도 다들 의심을 거두지 않습니다." - P129

"그래서 나는 설계사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합니다. 대칭적이죠. 나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기계였고, 당신들은 기계를 만드는 인간이니까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도움이 되는 관점을 얻어가게 됩니다."
"제가 박사님께 도움이 될지 모르겠는데요." - P130

"인간의 마음은 사후적으로 만들어진다던데요. 일단 중동적으로 저질러놓은 다음 거기에 의미를 가져다 붙이는거라고요.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에너지는 그중에서도 제일모호한 것이고요. 허상을 이해하려 애쓸 필요가 있을까요." - P132

"상상력은 좋은 도구입니다. 상담사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해요. 인간의 뇌는 수식 단위로 분해할 방법이 없거든요.
내담자들은 거짓말을 하거나 기억력이 나쁘거나 자기 본위로 판단하고요. 거기에 비하면, 나는 도하 씨에게 아주 쉬운 질문을 하는 겁니다." - P133

감정 데이터와 신경 패턴은 사람의 뇌에 전극을 꽂아 추출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상품을 만들기 어렵다. 길거리에지나다니는 사람을 아무나 데리고 와서 옷을 벗겨낸 다음그걸 맞춤복이랍시고 팔아먹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 P133

나는 뇌설계사들이 기쁨과 분노의 경로를 조율하는 세계를 상상하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설계사는 평론가가아니라 엔지니어니까 결과물을 성공과 실패로 나눌 수밖에 없다고. - P134

"적어도 박사님이 처음에 말씀하신 경우엔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 같은데요. 릴리의 열성 팬이 단지 외로워서 드론테러를 저지른 건 아닐 테니까요. (후략)." - P136

"감정과 사유가 몸에 좌우된다는 건, 뇌가 그다지 섬세하지 않다는 건 교양서에도 종종 나오는 내용이죠. 고통과쾌락이 이어져 있다는 것도요. 사람들이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지만, 다들 한번 읽고 충격을 받은 다음 잊어버려요. 자신에게 복잡하고 고결한 영혼이 있다고 믿으려 하죠." - P137

장광설을 듣는 동안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진단명이하나쯤 있으리라 짐작하는 투였다. 나는 환자가 맞지만 보건소 바깥에서까지 그런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다.  - P138

"버추얼 아이돌은 서브컬처로만 남아 있지만 이모지 박사라는 캐릭터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 차이를 알아내는 게 중요하죠. (후략)." - P139

콘크리트 덩어리 속의 컴퓨터에게 산책은 무슨 의미일까. 카메라에 인식된 정보와 GPS 좌표를 통해 단말 기기의경로를 설정하는 작업? 박사의 신경 관계망이 그 작업에어떤 감정적 보상을 주는지 묻고 싶어진다. - P142

문명이 아무리 발전해도 치유되지 않는 병이 있다. 자식에게 깔끔하게 정돈된 자연을 보여주고 감탄사를 기대하는건 모범적인 부모의 고질병이다. 정돈되지 않은 땅에서 고대의 성채를 발견하고 얻을 것 없는 모험을 하려는 건 아이들의 고질병이다.  - P143

"크고 작은 사건이 그 후로도 몇 개 더 있었어요. 남을괴롭히거나, 혼자서라도 위험한 짓을 벌이거나, 부모님은아니라고 믿으려 했는데 동생만 혼자 눈치가 빨라서 고생을 많이 했죠. 어릴 때는 저도 꽤.. 똑똑했거든요. 그러다가 열네 살쯤, 집에 난리가 나서 상담을 시작했어요. 약도먹고요. 약을 먹었더니 놀랍게도 문제가 거의 사라지더군요. 조금이라도 일찍 병원에 가야 했는데, 제가 어렸죠." - P147

물론 박사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분명한 것은 샛노란 머리에 그려진 미소뿐이다. 관측되지 않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라고들하고, 어떤 의문은 의문으로만 남겨 두는 게 가장 아름답다. 우리는 조용히 산책로를 마저 걸어 원점으로 돌아왔다. - P148

백해나의 사인은 약물중독이었고, 그 애가 혼자 사는 집에서 죽어갈 때 나는 침대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영화를봤을 수도 있고, 아무 일도 없었던 날의 저녁에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 없다. 어쨌거나 나는 살인죄로 기소당하진 않을 사람이다. - P149

고양이를 죽였을 때 아버지는 내 변명을 믿어주었지만동생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둘만 남은 뒤에야 갑자기두 문장을 툭 던지고 달아났다. 그냥 하고 싶어서 한 거잖아. 거짓말하지 마. - P150

사실 약을 아예 안 먹고 지내던 시절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 P151

한쪽 손으로 동생의 가슴팍을 짓누른 채 울대뼈 바로 밑에 칼날을 가져다 댄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멈추고 추락을 택하는 듯한 홀가분함이 나를 가득 채우는 찰나 동생이 눈을 뜬다. - P151

씻고 자리에 누운 다음에도 나는 긴장과 기쁨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잠을 몇 시간이나 잤는지 모를 노릇이다. 가까스로 눈을 붙였다가 깨어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출근 준비를 마쳤다.
"어제 방에 들어왔어?"
"아니."
힐문이 이어지기를 기대했지만 동생은 이모지 박사 이야기로 주제를 돌렸다. 나는 깊은 안도와 미묘한 상실감을동시에 느끼면서, 백해나의 죽음을 곱씹어 보았다. - P153



"백해나한테도 나름대로 도와줄 이유가 많았을 거예요.
남의 소송에 참견하는 건 재미있는 일이고, 옛날 생각도났을 테고, 무엇보다도 릴리와 얽히는 건 누구에게나 이득이니까요. 그런 이유 중에 뭐가 제일 컸는지는 모르겠어요." - P153



"릴리가 저를 데리고 막무가내로 집을 나왔다가 돌아가는 일이 몇 번쯤 있었죠. 백해나는 사과를 하거나 화를냈고요. 뭔가 선물을 해주기도 했는데.. 문제는 릴리한테도 돈이 충분히 많았다는 거였죠. 그런 거로는 해결될일이 아니었어요." - P158

도하

"다시 떠올려봐. 백해나가 릴리한테 뭐라고 했지?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카메라가 워크스테이션에 연결된 모니터를 비춘다. 신경 관계망의 우상단에서 집중적인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전문적인 인상을 주는‘ 기억 추출 절차를 8초가량의 쇼트로 삽입한다. 해당 쇼트 이후에 이어지는 영상은 여전히 노이즈로 왜곡되어 있다. 개는 모니터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어트린다.) - P160

릴리

"부담감이 너무 심해서, 오히려 모든 걸 포기해버리는 일이 종종 생기잖아요. 제가 그랬어요. 당장에라도 기자들의 연락을 받고 카메라 앞에 서야 할 것 같았는데,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적어도 그 사람들이 원하는 이야기는 해주고 싶지 않았죠."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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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6장 우리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것들

국가, 종교, 문화, 가족, 혹은 그 외의 어떤 형태이든 사회적집단이 같은 집단 내의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를 통해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 P151

(전략).
여러분은 아마 오래 생각하지 않고 이러한 결정을 내렸을것이다. 비용과 편익을 따졌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작위적 결정이라고 느껴진다. - P152

이러한 동조는 몇 가지 이유로 흥미롭다. 그중 일부는 학습(어떤 열매가 안전한지, 어디로 강을 건널지, 또는 어느 식당이 좋은지)에 관한 것이고, 다른 측면은 집단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심지어는 처벌을 피하기 위한 욕구(2장에서 살펴보았으며, 다음 장에서 다시 논의할 것이다)에 대한 것이다. - P153

집단의 동조 : 석화림 국립 공원의 사례

규범을 준수하는 것은 종종 이로우며, 대부분의 사회는 법을 지키거나 재산권과 공유 재산에 대한 기여도를 존중하는 등의 규범을 준수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마을에서 살아남기 어렵고, 도시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 P153

한편, 여러분이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사회적 규범을필요로 한다. 기원전 2000년 메소포타미아에서 화폐가 출현한 이후로(이 당시에는 창고에 저장한 곡식에 대한 영수증 정도의 의미였다), 마치 돈이 가치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규범이 존재해왔다. - P154

물론 우리는 화폐가 없는 유토피아적 미래에 살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돈을 이용해 아주 손쉽게 거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은 돈(금속, 종이, 플라스틱 카드 또는 은행 데이터베이스 숫자)이 가치 있다는 공통된 망상에 의존한다. - P155

물론 모든 규범이 동일하지는 않다. 어떤 규범은 집단 응집을 형성하고 긍정적인 행동을 끌어내지만, 어떤 규범은 우리와 우리의 환경에 해를 끼칠 수 있다. - P157

연구원들은 공원과 협력하여 이 빈번한 절도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를 연구했다. 그들은 하루 중 각기 다른 시간, 각기 다른 장소에 다른 표지판을 붙였다. 연구진은 두 시간마다 전략적으로 배치된(그리고 훔치기 쉬운) 석화목 조각이 도난당했는지를확인한 뒤 표지판을 바꾸었다. (중략). 전자의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숲이 소중하며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방문객들은 이 메시지를 훔치는 행동이 규범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석화목을 훔쳤고, 그 결과 자연이 영구적으로 훼손되었다. - P158

이에 답하기 위한 실험이 한 투자은행에서 이루어졌다. 이 은행에서는 전국적인 모금 활동의 일환으로 아직 자선 단체에 기부하지 않은 은행원들에게 기부를 요청했다. 일부 직원에게는 영국 내 근로자의 7.5퍼센트가 이미 기부를 했습니다‘라고 알렸는데, 이를 읽은 직원들은 근로자의 92.5퍼센트가 기부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사전에 예상한 바와 같이, 이메일에 이 문구를 추가한 것은 기부 확률을 높이지 못했다. - P159

. 이것은 군집herding이라고 알려진 현상으로, 1992년 경제학자 아브히지트 바네르지Abhijit Banerjee가 처음으로 공식화했다. 사회적 규범에 따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워서, 우리는 어떤 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믿을 이유가 없을 때조차도 누군가의 희미한 흔적을 따른다. - P162

감추어진 규범 : 세금 납부율을 높이는 비결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 때조차 동조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사실 솔로몬 애쉬 Solomon Asch의 유명한 동조 실험은 마이클이 16살때 심리학에서 배운 첫 번째 연구였다. - P162

이를 위한 일부 실마리는 우리 대부분이 종종 어떤 것이 규범인지를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가 따를 수 있는 많은 행동은 감추어져 있으며, 이는 이러한 행동들의 발생 빈도를 과대 또는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 P163

사회적 집단의 규범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는것은 진정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 P164

처음으로 사회적 규범의 힘을 정부 차원의 좋은 용도로 사용하도록 한 사람 중 하나는 현재 BIT 북아메리카의 이사인 마이클 홀즈워스 Michael Hallsworth였다
(중략).. 신고서를 제출하고 체납세를 내거나 미납에 관한 결과를 받아들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상당히 딱딱한 편지의 본문은 그대로 두었지만, 앞부분에 한 문장이 추가되었다.

열명 중 아홉 명은 기한 안에 세금을 납부합니다.

이 메시지는 소수의 사람만 아직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세금을 제때 내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을 명확히하고(이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경우), 또한 중요한 것으로(이를 알지만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경우) 만든다. - P165

‘여러분의 거주 지역‘을 추가한 것은 사회적 규범의 영향을약간 증가시켰으나, 통계적으로 유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여러분의 부채에 대한 개인적인 메시지와 결합되었을 때효과는 더 컸고, ‘여러분의 거주 지역‘을 추가한 것만으로도 납세율이 2퍼센트 증가했다.

(중략).

이러한 효과는 미미한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모두 더해지면 매년 2억 파운드(2억 7,000만 달러)가 넘는다. - P166

이 점은 로버트 치알디니 Robert Cialdini의 체인 호텔 실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애리조나대학교 치알디니 교수와 그의 동료들은 체인 호텔과 협력하여 호텔 재정을 절약하고 환경 보호에 동참하기 위해 수건의 재사용을 늘리고자 했다. 그들은 투숙객들에게 대부분의 손님들이 수건을 재사용한다고 알리는 것이 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도덕적인 메시지에 비해 재사용률을 34퍼센트 증가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 P167

예를 들어 코스타리카 국립 공원의 직원들은 ‘일반적인 기부‘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가장 일반적인 기부액은 2/5/10달러입니다.

이 짧은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지배적인 사회적 규범에 대한감을 주었다. 이전에는 방문객들이 그들이 생각한 기부액이 적절한지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지만, 이제는 그들이 따를 수있는 액수가 주어졌기 때문에 결정이 훨씬 쉬워졌다.  - P168

 첫째, 규범은 바뀔 수 있으며, 둘째, 사회적 집단의 규범이 변함에 따라 우리는 아주 빠르게 이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 P168

규범의 변화 : 온라인과 조직 내부로 들어가기

온라인 환경에서 규범이 바뀔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관찰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 P169

(전략). 이는 경제학자들이 ‘하방경직성(sticky downwards,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당연히 내려가야 하는 가격이 어떠한 이유로 내려가지 않는 것)‘이라고 부르는 현상으로 보인다. 아마도 우리가 나쁜 행동에 대한 처벌을 두려워하는 경향 때문에 기준을 높이는것이 낮추는 것보다 쉽다는 것이다. - P170

조직 내부의 변화 또한 살펴보자. 관리자들도 사회적 규범을 활용할 수 있을까? - P171

신중하게 사용되는 사회적 규범은 사회 환경에 강력한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사용량을 줄이게 하거나 조세 회피자들이 세금을 내도록하고, 대학생들이 술을 덜 마시도록 하는 것처럼 말이다. - P175

또한, 우리는 사회적 규범이 사회적 선택 구조의 나머지 부분에 어떻게 들어맞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P176

III 8장 선택의 유도와 확산

우리는 사람들이 그들과 같은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의 기대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사회적 규범 또는 사회적 신호에서 비롯된다. - P211

(전략). 하지만 사회적 집단은정적이지도, 영원하지도 않다. (중략).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적확산(social diffusion, 정보의 확산이 사회적 집단을 통해 이루어지는것)‘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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