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대답은 명료하고 게다가 흥미로웠다. 『야광충』은 노노구치 오사무의 노트나 플로피디스크 속에서 내용이 일치되는 원고가 발견되지 않았던 작품 중의 하나라는 것이었다. - P144
그날 밤부터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노노구치 오사무에게 히다카 구니히코의 작품 중에 추리소설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이 작품의 제목을 말했었다. 뭔가 다른 의도가 있어서 이 책을 거론했는지 어떤지는 아직 알수 없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일부러 자신이 관여하지 않은 작품을 추천했는지도 모른다. - P145
고뇌를 거듭하던 그는 밤이면 밤마다 자신이 살해되는 꿈을꾼다. 천사의 얼굴을 가진 아내가 그에게 미소를 보낸 뒤에 침실의 창문을 여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로 한 남자가 들어온다. 남자는 나이프를 들고 그에게 덤벼들지만 그 직후에 남자의모습은 아내로 바뀐다. 그런 꿈이었다. - P146
히다카 쿠니히코는 모 사립대학의 계열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그대로 그 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곳을 졸업한뒤에는 홍보대리점과 출판사 등을 전전했고, 그 사이에 응모한 단편소설로 신인상을 수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작가활동을시작했다. 그게 약 10년 전의 일이다. 데뷔 후 3년쯤은 책이 거의 팔리지 않았지만, 4년째 되던 해에 『타오르지 않는 불꽃』이라는 작품으로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단숨에 인기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 P147
각자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이 재회한 것은 노노구치 오사무에 의하면 7년 전쯤이었다. 소설 및 잡지 등을 통해 히다카의 이름을 보고 반가워서 찾아갔던 게 계기였다고 한다. - P148
"결론부터 말하자면, 타오르지 않는 불꽃이 히다카 씨에게 모종의 분기점이 되었던 건 분명해요. 그 작품으로 한 꺼풀을 벗었다고 할 수 있죠. 둔갑을 했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 P149
『타오르지 않는 불꽃』은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한 남자가출장길에 목격한 불꽃놀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폭죽 장인이 된다는 이야기다. 스토리도 재미있지만 불꽃의 묘사가 특히 훌륭했다. - P150
"그걸 두 분이서 함께 생각해내는 건가요?" "아뇨, 기본적으로는 모두 히다카 씨가 생각해냅니다. 당연하죠, 그쪽이 작가니까요. 나로서는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간단한 의견을 말해주는 정도예요." - P150
"별로 그런 느낌은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전혀 뜻밖인 것도아니었죠. 폭죽 장인에 대해 다룬 소설가가 적지 않으니까요." "미무라 씨가 뭔가 충고를 해서 그 내용이 바뀌었다. 하는부분은 없습니까?" - P151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건 구별하기 힘들어요. 그 작가의 글이냐 아니냐를 알 수 있는 단서는 단어의 사용이나 표현 방식에 있거든요." - P151
나의 고스트라이터설은 흔들리지 않았다. - P152
단서는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에이프런이다. 체크무늬로, 여성용이 분명한 디자인의 에이프런이 노노구치 오사무의 서랍장에 세탁하여 다리미질을 한 상태로 들어 있었다. - P153
두 번째는 금목걸이였다. 이쪽은 아직 케이스에 든 채로 포장도 뜯지 않은 상태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석가게의 물건이다. 누군가에게 선물하려다가 그대로 넣어둔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 P153
그리고 세 번째는 여행 신청서였다. 그것은 작게 접혀서 목걸이 포장과 함께 작은 가방 속에 들어 있었다. 신청서는 모 여행대리점의 것으로, 그 내용에 따르면 노노구치 오사무는 오키나와 여행을 신청하려고 한 모양이었다. 신청서의 날짜는 7년 전 5월 10일로 되어 있었다. 출발 예정일이 7월 30일인 것을 보면 여름휴가를 이용해 여행을 떠날 생각이었던 듯했다. - P153
이런 세 가지 단서에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노노구치 오사무에게는 적어도 7년 전에는 연인이라고 할 만한 여자가 있었고, 현재 그 여자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노노구치 쪽에서는 아직도 그여자에 대해 호감을 품고있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추억의 물건을 오랜 세월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 리 없는 것이다. - P154
하지만 7년 전이라면, 히다카 구니히코가『타오르지 않는 불』을 발표하기 1년 전이었다. 그 무렵에 노노구치 오사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여자를 만나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P154
"공개하라는 건 아니고요. 그냥 저한테만 말해주시면 돼요. 만일 수사 결과, 사건과 관계가 없다는 게 밝혀지면 두 번 다시 이런 질문은 안 할 것이고, 물론 보도기관에 발표하지도 않겠습니다. 또한 상대 여성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것은 제가 보증하지요." - P155
하지만 노노구치 오사무는 그 여자의 이름을 말하려 하지않았다. 그 대신, 수사 방식에 클레임을 걸어왔다. "아무튼 더 이상 내집을 휘젓지 말아줘. 그 속에 남에게서맡아둔 귀중한 책도 있으니까." - P156
하지만 이 탐문수사에서는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노노구치의 자택 왼편 이웃집에 살고 있고 전업주부라서 늘 집에 있다는 아줌마조차 그의 집에 여자 손님이 찾아오는 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 P156
나는 노노구치 오사무의 교제 범위를 처음부터 다시 점검해보았다. 올 3월에 사직했다는 중학교에도 가보았다. 그러나 그의 사적인 부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단적으로 적었다. 예전부터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지만, 건강이 나빠진뒤로는 학교 밖에서 다른 교사들을 만나는 일은 아예 없어졌다고 한다. - P157
나는 다시금 인사말을 건네고 도네 선생의 근황 등을 으레하는 절차대로 물어보았다. 그런 뒤에 노노구치 전임 교사에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슬그머니 운을 뗐다. 도네 선생은 그 즉시, 요즘 큰 화제가 된 인기작가 살인사건을 머릿속에 떠올렸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승낙해주었다. - P158
"하지만 여자의 감이라는 건 적중했을 때는 꽤 인상적이지만 실은 틀리는 일도 많거든. 그러니까 객관적인 정보도 말해두는 편이 좋겠지? 노노구치 선생이 중매로 몇 번인가 선을 봤었다는 건 알고 있어?" "아뇨, 모르는데요." - P159
나는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갔다. 노노구치 오사무와 히다카 구니히코의 관계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아, 그렇구나, 그때 이미 가가 선생은 학교를 사직한 뒤였지?" "그때, 라고 하시면?" "히다카 구니히코가 무슨 신인상을 탔을 때 말이야." - P160
"잘 기억나지는 않는데 아마 그 시점에는 아직 교류가 없었을 거야. 한참 뒤에야 그를 요즘 다시 만나게 됐다고 우리한테 얘기했었으니까." "한참 지난 뒤라면 2, 3년쯤 지난 다음이라는 뜻인가요?" - P161
"노노구치 선생도 작가지망생이었잖아. 어렸을 때 친구가자기보다 먼저 작가가 된 걸 보고 나름대로 초조했던 거 아닐까? 그렇다고 모른 척 무시할 수도 없고 자기도 모르게 찾아서읽었겠지. 그러고는 뭐야, 이 따위 글로 작가가 되다니, 차라리 내가 쓰는 게 낫겠다, 그런 식으로 생각했을 거라고."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히다카 구니히코가 『타오르지 않는 불꽃』으로 문학상을 탔을 때는 노노구치 선생님이 어떤 모습이었어요?" - P162
"여전히 학교폭력은 없어지지를 않아." 그렇겠지요, 라고 나는 대답했다. 학교폭력에 관한 사건에는 나도 민감해져 있었다. 예전에 내가 범한 실수가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 P163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목적은 노노구치와 특별한 관계였던 여성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이었다. 에이프런, 목걸이, 여행 신청서. 현재로서는 그 세 가지 물품이 단서였지만 그 밖에 좀더 결정적인 증거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P163
에이프런이 있으니까 여자가 가끔 이 집에 왔었다는 건 틀림이 없다. 그런 때 사진을 찍는 것도 가능했을 터였다. 노노구치 오사무는 오토포커스 기능이 있는 카메라를 갖고 있었다. "사진이 있는데도 이렇게 눈에 띄지 않는 거라면 어딘가에감춰뒀다는 얘기겠죠?" "그런 얘기가 되지. 하지만 왜 감춰뒀을까? 노노구치는 체포될 때까지 이 집이 경찰에 수색을 당하리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을 텐데." - P164
나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퍼뜩 생각나는 게있었다. 지난번에 노노구치 오사무가 했던 말이다. 더 이상 집안을 휘젓지 말아달라, 남에게서 맡아둔 귀중한 책도 있다, 라고 했었다. - P165
"일하는 틈틈이 문득 그녀를 보고 싶다면 여기쯤에 사진을 세워두면 딱 좋을 텐데 말이에요." 그가 말한 자리는 워드프로세서 바로 옆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물론 탁상용 사진 액자 같은 건 없었다. - P166
사진 속의 여자는 히다카 하쓰미라고 했다. 즉 히다카 구니히코의 전처였다. - P167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 장례식 때였는데요, 노노구치 씨가 나한테 이상한 걸물었어요." "뭐였지요?" "비디오테이프는 어디에 있느냐고 했어요." "비디오테이프?" "처음에는 남편이 수집한 영화 비디오인 줄 알았어요. 근데그게 아니라 취재용으로 촬영한 비디오테이프 얘기더라고요." - P169
"짐이 도착하는 대로 알려달라고 했어요. 자신의 집필에 사용할 테이프를 우리 남편에게 맡겨뒀다고 하더라고요." "뭐가 찍혀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군요?" 네, 라고 대답하면서 히다카 리에는 탐색하듯이 우리를 보며 말했다. - P170
"이건 좀 지난 일인데요, 노노구치 씨가 하쓰미 씨에 대한얘기를 했던 적이 있어요." 나는 내심 놀랐다. "어떤 얘기였지요?" "하쓰미 씨가 사망한 사고에 대한 거예요." "노노구치 씨가 그 사고에 대해서?" 히다카 리에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었다. "그건 단순항 사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노수치 씨가 그렇게 말했어요." - P171
"네. 나도 물어봤죠. 그건 무슨 뜻이냐고. 그랬더니 노노구치씨가 그 즉시 후회하는 표정으로, 방금 한 말을 잊어버려라, 히다카에게는 말라고 하더라고요." - P171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따로 추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노노구치의 집에 에이프런이 있고, 그에게 목걸이 선물을 받을 예정이었던 여자, 그와 함께 오키나와로 여행을 떠나려 했던 여자의 정체가 히다카 하쓰였다는 것이다. 그 시점에 그녀는 분명 히다카 구니히코의 아내였으니까 두 사람은 불륜관계였다는 얘기다. 노노구치 오사무가 히다카 구니히코를 다시 만난 게 7년 전이고, 히다카 하쓰미가 사망한 것은 5년 전이니까 두 사람이 깊은 관계로 발전할 시간은 충분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또한 노노구치의 집에서 발견된 여행 신청서에 적혀 있던 또 한 사람의 이름이 노노구치 하쓰코였다. 그건하쓰미의 가짜 이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P172
나는 노노구치 오사무가 히다카 구니히코의 고스트라이터였다는 건 거의 명확하다고 추리했다. 많은 정황 증거가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추리는 왜 노노구치가 계속 고스트라이터로 하가카의 글을 대신 써주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은 되지 못했다. - P173
하지만 어쨌든 노노구치 오사무와 히다카 부부 사이에 어떤일이 있었는지 조사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유감스럽게도 부부가 모두 사망해버려서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겠지만. - P173
노노구치가 하쓰미의 죽음을 단순한 사고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노노구치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가. 또, 사고사가 아니라면 무엇이라는 건가. - P174
그렇다면 남는 것은 자살뿐이다. 즉 노노구치는 히다카 하쓰미가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자살했다고 생각한다는 얘기다. - P175
"아뇨 사위가 하는 일이 워낙 바빴으니까요. 웬만해서는 친정 나들이는 못 했어요. 그래서 전화로 잠깐 어떻게 사는지 물어보는 정도였지요." "목소리를 통해서는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는 말씀이시군요?" "예." - P179
"앨범은?" "그건 있지요." "그럼 우선 그것부터 좀 보여주세요." "하지만 앨범에 붙여놓은 건 사위하고 딸 사진뿐이에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참고가 될지 어떨지는 저희가 판단하니까요." - P180
이윽고 마키무라 형사가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그리고 말없이 내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나는 마키무라가 어째서 그 사진을 점찍었는지 금세 이해했다. - P181
나는 그의 빈정거리는 말에는 대응하지 않고, 가져간 사진을 그 앞에 내밀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의 국어사전에 끼워져있던 히다카 하쓰미의 사진이었다. "이 사진이 당신 방에서 발견되었어요." 그 순간, 노노구치 오사무의 안면이 기묘하게 뒤틀린 채딱 굳어버렸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 P185
"글쎄, 그게 언제 찍은 사진인지도 모른다니까. 더구나 그사진들이 어딨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앨범에 넣었는지 내버렸는지, 그것도 몰라. 아무튼 나는 기억에 없는 사진이야." 노노구치 오사무는 낭패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나는 다시 두 장의 사진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두 장모두 멀리 후지산을 배경으로 찍은 것이다. - P187
내 말에 대해 노노구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물론 긍정한다는 뜻의 침묵이었다. "여기 하쓰미 씨가 입은 에이프런은 어때요? 노란색과 흰색의 체크무늬가 눈에 익은 것이겠지요? 당신 집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에이프런이니까요." - P189
"제발 사실대로 얘기해주세요. 당신이 자꾸 감추려고 들면우리는 다시 조사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움직이면 당연히 매스컴에서 냄새를 맡을 확률도 높아져요. 아직은 그런 낌새가 없지만 곧 눈치를 채고 온갖 억측이 난무하는 기사를 써낼 거라고요. 당신이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으면 그런 쪽에 대한 대책도 세울 수 있어요." - P190
"세키카와? 그게 누구지?" "모르세요? 세키카와 다쓰오라는 게 풀네임이죠.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텐데요." "모르겠어. 나는 그런 이름, 들어본 적이 없어." 그가 단언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답을 알려주기로 했다. "트럭 운전기사예요. 하쓰미 씨를 치었던 사람입니다." 노노구치는 허를 찔린 얼굴이었다. - P194
"짐 속에 들어 있던 비디오테이프는 이것뿐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히다카 리에가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것은8 밀리미터 비디오테이프 일곱 개였다. 모두 한 시간짜리 녹화용 테이프였다. - P196
상자를 당겨 뚜껑을 열었다. 비닐봉투에 담긴 나이프가 들어 있었다. 손잡이는 플라스틱이고 칼날은 20센티미터 정도였다. 비닐봉투째 들고 가늠해보니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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