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아이스크림 같은 미술관
뉴욕에서 가장 큰 미술관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MetropolitanMuseum of Art‘은 80번가 80th St와 84번가 84th St 사이에 5번가5th Ave와 ‘센트럴 파크‘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다. 이 미술관은 고대 이집트부터 근대까지 오랜 기간에 걸친 엄청난 컬렉션을 자랑한다. - P227
하지만 미술을 잘 모르는 나에게 이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이집트 유물 전시는 인상 깊었지만 대부분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초상화를 지겹게 본 지루했던 미술관으로 기억된다. 특히나 불편했던 점은 방에서 방으로 연결되는 전시 공간이었다. - P227
그런데 잘 모르는 그림을 너무 많이 보고 있노라면 내가 이 벽에 걸린 그림을 본 건지 안 본건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아도 볼 그림이 많은데 본 벽을 한 번 더 보면 그렇게 시간이 아까울 수가 없다. - P228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은 앞서 말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5번가를 따라 네 개 스트리트만 더 걸어가면 나오는 88번가 88th 와 St89번가89th St 사이에 위치한다. 4분만 걸어가면 되는 거리다. - P228
이 건물을 바라본 첫인상은 뱅뱅 돌려서 만든 소프트아이스크림 같다는 것이었다. 달팽이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 파격적인 디자인은 1943년에서 1945년사이에 구상되었는데, 워낙 파격적이어서 1949년에 건축주인 솔로몬 구겐하임이 사망하자 다른 후원자들은 마천루의 도시인 뉴욕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건축을 반대했었다. - P228
건축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안타깝게도 이 건물이 완성되기 6개월 전에 세상을 떠나서 완성된 모습은 보지 못했고 그렇게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은 그의 유작이 되었다. - P229
이 미술관을 설계한 라이트는 주변 자연환경과 어울리게 땅에서 자라난 듯한 디자인을 추구하는 유기적 건축의 대명사다. 그런 그가 설계했다고 보기에 이 미술관의 디자인은 주변과 너무 이질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주변을 보면 그가 왜 이렇게 설계했는지 이해가 되기도 한다. - P229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벽‘이다. 그림은 태생적으로 벽이 필요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그림은 18000년 전쯤에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에 그려진 벽화다. - P229
그러다 이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도 회칠한 벽이 마르기 전에 완성하는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시간이 흘러 유화 물감이 발명되자 사람들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서양화가들은 캔버스를 벽처럼 세워 놓을 수 있게 이젤을 들고 다녔다. - P230
이래저래 그림은 벽이 필요했다. 그림이 많은 미술관에는 정말 많은 벽이 필요하다. - P230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벽이 필요하다는 미술관의 기본에 충실한 건물을 디자인했다. 하지만 네모난 방의 벽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기다란 벽을 만들었다. - P231
빙빙 돌아 올라가는 경사로의 가운데는 여섯 층이 뻥 뚫린 빈 공간을 만들었다. 그 공간 위에는 천창을 두어 햇빛이 들어오게 했다. - P231
앞서 설명했듯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경외심을 유발한다.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로비에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경사로가 돌아 올라가면서 만들어 낸 전시 공간이 시야에 꽉 차게 들어온다. 진입 로비에서 앞으로 구경할 미술관의 공간 전체를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 P231
큐레이터는 보통 1층에서 걸어 올라가면서 그림을 보게끔 전시 순서를 만들어 놓지만,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편하게 걸어 내려오면서 보는 방식을 택한다. 큐레이터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후에 내려오면서 전시를 보게 만들면 엘리베이터 줄이 너무 길어지는 문제가 생길 것이다. - P233
대부분 미술관에서의 경험이 그렇다. 그런데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정반대 경험을 한다. 관람 전에 아래와 위에서 전체 공간을 파악하고 나서 천천히 그림을 보면서 내려오거나 올라갈 수 있다. - P234
그런데 전시장이 거대한 경사로로 되어 있어서 걸을때마다 계속해서 높이가 변하기에 그 중앙 빈 공간 (Void)의 공간감은계속 변화한다. 마치 벽 쪽에서는 여러 악기의 오케스트라 연주 같은다양한 그림의 전시가 진행되는데, 내 뒤의 건축 공간에서는 차분하게 일관된 피아노 곡이 연주되는 것 같다. - P234
경계가 없는 미술관
만약에 이 경사로가 계속해서 같은 폭으로 1층부터 6층까지 올라갔다면 반복되는 공간에 자칫 지루해질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라이트는 상부로 올라갈수록 경사로의 폭이 넓어지게 했고, 반대로 밑으로 내려갈수록 경사로의 폭을 좁게 만들었다. - P235
관람객들은 벽을 따라 그림을 감상하다가 조금 지루하면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 난간에 기대 쉬며 전체 공간을 바라볼 수 있다. - P235
철근 콘크리트와 엘리베이터의 발명과 더불어 근대 이후의 건축은 여러 층의 평면이 똑같이 반복되는 구조를 가진다. 우리 주변의 모든 상가와 아파트가 그렇다. 그렇게 똑같은 평면이 층층이 쌓인 형태를 건축가들은 ‘팬케이크 평면‘이라고 폄하해서 이야기한다. - P236
그렇게함으로써 4층 전시장에 있어도 3층과 5층을 볼 수 있는 공간 구조를 만들었다. 각 층의 공간이 분절된 디지털적인 공간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아날로그적인 공간이 된 것이다. 한마디로 층간의 구분이 없어진 공간이다. - P237
마치 연속된 경사로로 된 주차장 건물처럼층간의 구분 없이 연속된 공간으로 디자인하는 것이 시대를 앞서 나간 디자인으로 취급받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를 연 선구자적인 작품은 일본에 있는 ‘요코하마 국제여객터미널 Yokohama International PassengerTerminal‘이다 (433쪽 사진 참조). - P237
(전략) 일본의 건축가 듀오인 사나SANAA가 설계한 이 건물은 층간 구분도 없고 방의 구획도 거의 없다. 1층은 2층으로 연결되고 다시 2층은 1층으로 연결된다. 이 건물은 어디까지가 1층이고 어디서부터가 2층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 - P237
누구는 들뢰즈 같은 현대 철학자를 인용해 설명하기도 하고, 어떤사람은 텔레커뮤니케이션의 발달로 하나의 공간이 다양한 기능으로사용되기 때문에 공간의 경계가 모호해져서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런 층간 구분이 없는 연속된 공간의 원조가 1943년도에라이트가 디자인한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라는 것이다. - P238
스티브 잡스 Steve Jobs 덕분에 인문학 열풍이 불어서 경제 경영에 인문학을 어떻게 접목하느냐로 난리지만, 원래 인문학적 디자인의 기본은 불편함을 없애고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다. 어렵지 않다. - P238
완벽한 수평의 공간에서 완벽한 평면에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훌륭한 그림에게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기울어진 바닥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화가가 평지에서 그린 그림을 감상할 최적의 상태는 평지의 공간일 수 있다. - P239
지금은 경사로 중간중간에서 다른 방으로 빠져서 구경하고 다시 경사로로 돌아오는 다채로운 공간 체험도 가능해졌다. 새로 추가된 전시실에서는 큰 그림 전시나 기획전시를 한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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