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 - Why God? 결코 사라지지 않는 질문 필립 얀시 시리즈
필립 얀시 지음, 이용복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지진, 토네이도 등의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총기난사사건, 폭발사건, 테러 등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저자처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에 어떤 식으로 개입하시는가?" 

저자의 아버지는 저자가 첫돌이 되기 전에 폴리오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어 돌아가신다. 당시, 저자의 아버지는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기 위하여 준비 중이었다. 왜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이런 잔인한 상황이 일어나는 것인가? 

문제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러한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 벌을 주는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이나 사탄의 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믿음을 보시기 위해 특별히 당신을 선택하셔서 사랑의 마음으로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그분의 뜻은 당신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 대규모 재앙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그때부터 "선한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저런 참사를 허락하셨는가"라고 말하며 유신론자가 된다. 저자는 회의론자들이 그들의 신념 체계에 일치하는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본 적이 없다고 일단 이야기한다. 

"당신들은 이런 대규모 비극에 왜 놀라고 충격을 받습니까? 어차피 의미도 목적도 없는 무신적 우주에서 이런 재앙은 당연한 것입니다." 

재밌는 것은 회의론자들이 갑자기 유신론자가 되어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참사를 허락하실 수 있나라고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반론'이 이미 성경에 나온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그 주인공들은 기드온(삿6:13), 욥(욥19:7), 시편(시44:23), 전도자(전1:2), 이사야(사45:15), 예레미야(렘14:8,9), 심지어 예수님(마27:46)까지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부르짖는다. 나아가, 이런 부르짖음에 성경은 대부분 침묵한다는 점이다. 성경에는 이러한 부르짖음에 시원시원한 대답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대표적으로 욥기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아주 긴 말씀을 해주시지만 거기에 왜 고난이 발생한지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없다. 다만, 욥에게 '너는 네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나 하는 거냐?'라고 물으신다. 

저자는 이어서 성경의 기록자들은 '왜 선한 사람들에게 악한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이 세상은 사탄이 점령하여 다스리는 곳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덧붙인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이 원수를 멸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낙관주의와 기독교의 소망이 다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상황이 점진적으로 개선될 거라고 주장하지만 기독교의 소망은 피조 세계가 변화될 거라고 약속한다. 그 변화의 시간이 올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악한 사건이나 자연재해 때마다 개입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런 사건이나 재난이 아무리 슬프다 할지라도.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문제가 많고 적대적인 세상에 개입하라고 사명을 주셨다." 

결국,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근원적 개입이 있기 전까지는 이 땅의 고통에 대하여 그 어느 누구도 만족스러운 대답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불신앙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붙들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믿음은 미래로 가서 되돌아볼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을 미리 믿는 것이다." 

저자는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성경이 대답을 회피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통의 원인을 안다면 사람들의 관심이 고통당하는 사람에게서 그 고통을 초래한 상황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막상 고통당하는 사람은 거의 도움을 못 받게 된다." 

즉,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그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나아가 저자는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신약의 거의 모든 기록은 '고통의 원인'에서 '고통에 대한 반응'으로 강조점을 옮긴다"라고 설명한다. 이를 통하여 고통 가운데 의미를 찾고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실제적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빅터 프랭클을 인용하며 불가항력의 고통에 반응하는 게 인생의 의미를 찾는 주요 방법이라고 언급한다.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여기서 드러난다. 바로 크고 작은 고통과 비극을 당하는 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건강한 교회에 대해 말하며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전 12:26)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오히려 극단적인 말들로 교회가 고통을 주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고난이 더 큰 선을 이룬다는 말도 자신의 비극을 슬퍼하며 어떻게 삶을 다시 시작할까 고민하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위로를 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로하여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저자는 유일한 방법은 슬픔에 충분히 공감하면서 "하나님께서 당신보다 더 슬퍼하십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결국, 저자는 '왜 고통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편을 택할 것이라고 말한다. 만족스러운 설명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 될 수도 있어서이다. '왜'라고 질문하는 대신에, 고통받은 자들에게 찾아가 그들과 함께하며 위로하고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나아가 세상에 고통과 악, 원수가 여전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떤 비극적 상황이 오더라도 의지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된다. 나아가,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근원이 된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아들이 25살에 죽는 아픔을 경험한다. 그때를 생각하며 쓴 책 <Lament for a Son>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는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필요한 것이 있다고 결론 내린다. 그것은 우리의 슬픔 중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확신이다. 그는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신 분 안에서 그분의 임재를 발견했다." 

필립 얀시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인간의 고통에 반응하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은 마법의 지팡이를 휘둘러 악과 고난이 사라지게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한 사람 안에 담는 것이었다'라고 덧붙인다. 

예수님이 바로 본을 보이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는 곳에 직접 내려오시어 우리의 이웃이 되셨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말로만 안타까워하고 동정하신 것이 아니다. 죄 많은 세상 가운데 몸소 내려오시어 친구가 되어 주셨다. 이렇게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자들 편에 서신다. 내려오시어 신학적 교훈을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라 자비와 치유의 손길을 내미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는 방법을 택하시지 않고, 대신 악이 넘치는 곳에 사는 우리를 찾아와 악의 희생자 중 하나가 되는 방법을 택하셨다. 예수님은 악을 제거하지 않으셨고, 대신 하나님을 드러내셨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 수 있다. 저자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바꿔놓는다!'라고 말한다. 선을 이루기 위해 고통을 '보내시는' 분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고통 그 자체를 선하게 사용하신다. 더불어 고통이 속량되어도 상처는 남는다고 저자는 언급한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저 멀리에 있는 분, 이 땅의 고통에 무감각한 분으로 보지 않고, 이 땅의 고통을 몸소 겪길 원하시는 분으로 보게 된다. 인간과 이토록 깊이 자비 가운데 연합하시는 하나님을 전하는 종교는 없다." 

"고통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고난 중에 일어나는 속량적 변화 때문에 가치가 있다." 

저자는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의 말을 인용한다. 

"고통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그들의 위로이시며 그들의 고통이신 하나님을 포기할 수 없다... 선한 하나님을 믿을 때만 비로소 세상의 악을 막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에 대한 항의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에 대하여 세 가지로 답변한다. 첫째로,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눈물을 닦아 주신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과 곡하는 것이나 아픔이 없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계21:4,5) 하나님은 고통의 속량으로 선한 것을 만들어내신다. 둘째로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나'라는 질문은 '고통의 시간에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교회에 속한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사랑해야 한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미래의 회복을 약속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새 집을 준비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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