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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ㅣ 박완서 소설전집 10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1.
사람은 자신의 세계관을 사물에 투영한다. 자신이 바라보는 것들에는 지극히 자신의 감정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같은 그림을 보더라도 각기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아래의 그림을 보도록 하자.
무엇으로 보이는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는가 아니면 체스말과 유사하게 보이는 흰빛의 기둥이 보이는가. 처음에 당신이 본 것은 무엇인가 살펴보라. 사람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볼 수 있다. 가령 위 그림에서 당신은 당신이 보고자 하는 모습에 집중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정은 의식 중에 혹은 무의식 중에 이루어지며 이는 당신만의 시각을 반영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경아는 위와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된다. 소설 속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등장하는 환쟁이(화가) 옥희도씨가 그린 그림을 보고 말이다. 그녀는 그 그림을 처음 볼 당시에는 고목(枯木)으로 보았으나, 훗날 환쟁이(화가) 태수와 결혼한 뒤 옥희도씨 유작전시회에서 볼 때에는 나목(裸木)으로 인식하게 된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枯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裸木)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p.284)
그것은 왜였을까? 이는 옥희도씨를 바라보는 그녀의 관점이 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물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초래한다. 우리는 이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변하는가, 우리를 둘러 싼 세계는 변하는가? 여기에 우리는 어떠한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실제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변화할 수 있다. 그러한 변화는 실제적이므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어떨까?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실제적인 변화가 없는 경우 말이다. 이럴 경우에도 우리는 세계가 변화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감히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바라본다. 또한 우리가 가진 세계관(혹은 관점)의 변화는 우리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즉 관점이 바뀌었을 때 우리는 물리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사물을 보면서도 그것이 변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여자친구가 선물해준 적당한 가격의 시계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되었다면? 여전히 똑같은 시계일까? 헤어지기 전보다 그 시계의 가치는 한없이 떨어지고 말 것이다. 물리적이며 실제적인 변화가 그 시계에 없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경우에도 세상은 변할 수 있다. 실제로 변화가 있을 경우에도,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말이다. 우리가 지닌 관점(세계관)의 변화가 있을 때에 우리자신을 둘러싼 세계도 함께 변화되기에.
당신은 어떠한 세상을 원하는가? 당신이 바라보는 세상은 당신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당신은 위에서 살펴본 그림을 볼 때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물을 볼 때에도 또한 세계를 바라볼 때에도 모두 당신 자신만의 고유한 관점을 통해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당신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꿈꾸길 도전한다. 당신의 생각이 당신의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으므로.
2.
이번에 읽은 나목은 박완서씨의 초기작품이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저자의 개성과 완숙미가 넘치는 문장들을 살펴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초기작품이라는 풋풋함과 앞으로의 소설들에서 드러날 작가만의 필체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6.25사변)을 경험한 작가의 경험들이 이 소설 속 인물들과 배경 곳곳에 손때묻어 있으니 더욱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3.
현재의 이야기 - 나와 사람들
(가족: 큰아버지댁, 어머니 / 직장동료들 : 환쟁이들, 사장, 미숙, 다이아나)
과거의 이야기 - 아버지가 돌아가신, 오빠들이 죽게된 이유(폭격, 꿈틀대는 고깃덩어리)
큰아버지가 우리집에 미안해 하는 이유.
어머니 曰 '어쩌다 계집애만 살아남았노'
다시 현재의 이야기 - 어머니를 미워하는 나(애증) 또한 큰집에 신세지지 않으려는 나,
계속된 방황의 종지부를 찍다(태수와의 결혼, 옥희도씨의 유작전)
4. [밑줄긋기]
p. 38
전쟁은 누구에게나 재난을 골고루 나누어주고야 끝나리라.
p. 97
「엄마. 우린 아직은 살아 있어요. 살아 있는 건 변화하게 마련아녜요. 우리도 최소한 살아 있다는 증거로라도 무슨 변화가 좀 있어얄 게 아녜요?」
「왜? 이대로도 우린 살아 있는데」
「변화는 생기를 줘요. 엄마, 난 생기에 굶주리고 있어요. 엄마가 밥을 만두로 바꿔만 줬더라도..... 그건 엄마가 할 수 있는 아주 쉬운 일이잖아요. 그런 쉽고 작은 일이 딸에게 싱싱한 생기를 불어넣을 수도 있다는 걸 엄만 왜 몰라요?」
p. 150
아아, 전쟁은 분명 미친 것들이 창안해 낸 미친 짓 중에서도 으뜸가는 미친 짓이다.
p. 290
남들은 잘도 잊고, 잘도 용서하고 언제 그랬더냐 싶게 상처도 감쪽같이 아물리고 잘만 사는데, 유독 억울하게 당한 것 어리석게 속은 걸 잊지 못하고 어떡하든 진상을 규명해보려는 집요하고 고약한 나의 성미가 훗날 글을 쓰게 했고 나의 문학정신의 뼈대가 되지 않았나 싶다. - 박완서, '나에게 소설은 무엇인가' p.123
그때 내가 미치지 않고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그래, 언젠가는 이걸 소설로 쓰리라, 이거야말로 나만의 경험이 아닌가라는 생각이었다. 그건 집념하고는 달랐다. 꿈하고도 달랐다. 그 시기를 발광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정신의 숨구멍이었고, 혼자만 본 자의 의무감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세상이 살 만해지고 나 또한 보통사람으로서의 무사안일을 누리는 동안 그건 짜릿한 예감이 되어 나의 안일에 잠복해 있다가 발병처럼 갑자기 망각을 들쑤성거리곤 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세상에 글장이로 선을 보이게 되었을 때의 감상도 꿈을 이루었다든가, 노력한 결실을 거두었다든가 하는 보람보다는 마침내 쓰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안도와 체념에 가까운 거였다. - 목마른 계절, 작가의 말 p.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