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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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신문 한 귀퉁이에서 2011년 신간계획을 보았다. 거기에 김애란의 첫 장편소설이 있는 걸 보고 꼭 읽어야지 맘 먹었다. 그리고 지난 달인 6월 말, 나온다던 책이 드디어 발간되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이라는 제목을 달고, 예쁜 파스텔톤의 표지로 단장하고서. 7월 1일에 책을 샀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산 시점에서 책은 이미 베스트셀러가 되어있었고, 받아든 건 벌써 3쇄였다. 나만 그녀를 기다렸던 것은 아니었단 얘기다. 그만큼 김애란이 신뢰감 있는 작가라는 증거일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조울증 환자가 되었다. 웃다 울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첫 장편이라고 믿기 어려운 제법 탄탄한 스토리와, 곳곳에 번갈아가며 배치된 유머와 슬픔의 요소들이 한 번 집어든 책에서 쉽사리 손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주인공이 주고 받는 편지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중반 이후 약간 맥이 풀리는 감이 없진 않았지만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다시 단단해지는 느낌이었다. 

며칠 전에 읽은 한 소설은 가독성에 중점을 둔 문장이 주를 이룬 듯 했고, 실제로 글 자체를 음미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빨리 책장을 넘겨 이야기 전체를 보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들었다. 그런데 김애란의 이 소설은 허투루 쉽게 쓰는 법이 없는 듯한 밀도 있는 문장들이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까닭에 반추하며 읽느라 쉽사리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두 스타일 각자 나름의 장단점이 있을 것이나 소설이라면 독자로 하여금 후자의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소설이 담아내고 있는 '이야기'만 크게 부각된다면 에세이와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김애란 작가가 '유희열의 라디오천국'에 나온 적이 있다. 책을 읽고서는 '정말 위트 있는 사람이겠다'라고 짐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깨알같은 개그를 수시로 쳐댔다. 자신이 생산하는 글 만큼이나 매력적인 사람인 듯 했다. 같은 프로에서 유희열이 그녀에게 어렸을 때 꿈은 뭐였냐고 물었는데, 국어교사였다고 대답했다. 김애란이 그냥 평범한 국어교사가 되었더라면 정말 끔찍했을 것 같다. 그녀의 비범한 글들을 읽을 내 소중한 시간들을 거세당할 뻔 했잖은가. 

사실 소설을(아니 책 자체를...) 거의 읽지 않는 내가 작년부터 드물게나마 이렇게 소설을 찾게된 건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를 읽고부터였다. 그녀가 앞으로도 양질의 창작물들을 통해 내가 웃고 울고, 감상에 푹 빠지고, 사람과 삶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면 영광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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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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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여섯살 무렵의 일이다. 나는 크리스마스 공연을 위해 성당에서 꼭두각시 놀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내 파트너는 제법 이쁘장하고 귀엽게 생긴 아이였고, 난 그 현실에 충분히 만족해했다. 그런데 여느때처럼 연습을 위해 성당에 간 어느 날, 박색(薄色)의 아이가 내 상대로 바뀌어있었다. 나는 안 하겠다고 끝까지 버텼다. 결국 내가 있어야할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이내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시간이 제법 많이 흘러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우리 반에는 학교를 대표하는 최고의 '추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을순'이었다. 전교생 사이에서 '을순'이라는 한 사람 고유의 이름은 못생긴 여자의 대명사처럼 사용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은 자체 추첨 결과 내가 그 아이와 짝이 되었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주셨다. 나는 그 사실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을순이의 옆에 앉는 것 자체가 불행한 현실이었고, 그로 인해 놀림감이 되는 예측 가능한 비참한 미래를 감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일단 울고 보는 것이었다. 담임이 보면 불쌍해서라도 바꿔주겠지 싶었다. 그러나 바뀌는 것은 내가 울수록 점점 더 일그러지는 을순이의 얼굴 표정 뿐이었다. 

  지금까지의 장황한 옛 이야기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결국 나는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못생긴 여자는 철저하게 배격해왔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이 사실은 거의 모든 남자에게 해당된다. 그래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같은 책이 존재할 수 있는 거다. 

  이 책은 "토 나올 것 같이" 못생긴 여자와 제법 잘생긴 남자의 사랑이야기이다. 현실에서 이런 경우가 있다면 '여자가 돈이 많은가 보네?'라고 가정할 법 하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는 못생긴 것도 모자라 지지리 가난하기까지하면서 우리의 일반적인 예상을 배반한다.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 그것도 아름다운 로맨스의 히로인으로 못생긴 여자를 세우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일탈이고 외모지상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일으킬 수 있는 작은 균열일 것이다. 저자인 박민규는 아마 그 벌어진 틈새에서 기존 체제의 '주류'나 '대세'인 것들과는 다른 종류의 생각과 감정들이 피어나길 바랐던 것 같다. 

  박민규는 이 '일탈적 러브스토리'를 빌어 '부나 미모를 지닌 극소수의 인간들'이 '그렇지 못한 절대다수'를 지배하는 불합리한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 역시 하고 있다. 그는 이 시스템을 유지하는 동력을 '그렇지 못한 절대다수'가 지니고 있는 '부러움과 부끄러움'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부와 미모 같은 것은 '좋은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시시하다'며, 독자들로 하여금 그 '좋은 것'들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낙후시킬 것을 주문한다. 이러한 저자의 생각은 글 사이사이에서 등장인물들의 말과 생각을 통해 드러나고 있으며, 저자 후기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기도 하다. 그의 말대로 '좋은 것'들이 지금보다 시시해진다면 그것들을 못 가진 사람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분명 줄어들 것이고, '좋은 것'들에 의해 가려졌던 다양한 가치들이 좀 더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저자의 통찰력과 그것을 이야기에 녹여내는 재능에 자주 감탄했다. 다만 저자가 한데 묶은 부와 미모는 모두가 선망하는 '좋은 것'이라는 지점에서 만나기는 하나 엄밀하게 동일 선상에 놓고 취급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는 있지만 부는 노력과 능력으로 얻을 수도 있는 것인 반면, 외모는 그야말로 타고 나는 것인데다 이 소설의 여자 주인공처럼 이외의 다른 매력들을 키워도 외모라는 '예선'을 통과하지 못하는 한 그것들을 펼칠 기회조차 쉽게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 의학기술이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그 기술이 제대로 먹히려면 '원판'이 어느 정도 받쳐줘야하는 한계도 있고, 돈도 많이 든다. 그래서 '재력'으로 평가를 받는 남자에 비해 '외모'로 평가를 받는 여자들은 어쩌면 더 억울하고 불행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종종 개인적으로 고민하게 되는 부분은 이런 걸 읽고 또 읽어도 머릿 속에서 부유(浮遊)하고 입으로 배설되는 언어들이 늘어갈 뿐, 나 자신은 그냥 제자리에 서있다는 점이다. '을순이'가 자기 안에 어떤 아름다운 내용을 지니고 있는 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나는 여전히 그녀와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없는 남자일 것이고, 끝까지 다 읽은 이 책을 덮고 잠든 그날 밤도 내 타입의 '아름다운 누군가'에 대한 꿈을 꾸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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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보는 고대사 - 민족과 국가의 경계 너머 한반도 고대사 이야기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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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 이 책을 읽진 않았다. 그렇지만 내용들이 주로 <한겨레21> 연재분을 묶은 것이고, 그건 제법 잘 챙겨 읽었기 때문에 글을 쓸 기본 요건은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어설프게나마 역사학을 공부해서 나름 석사과정까지 밟고 있으니 말할 자격은 충분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으로 역사인식의 측면에서 내 입장을 이야기하자면, '민족'은 '젠더' '계급'등과 함께 당연한 역사의 일부로서 조명해야하지만, '민족'을 역사의 유일 주체이자 최상의 가치로 두면서 종종 역사를 왜곡하기도 하는 '내셔널리즘적 역사'는 지양해야한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나의 역사인식은 박노자의 그것과 결을 같이한다.  

한국 시민사회의 역사인식은 사실상 주류역사학이든 재야역사학(유사역사학)이든 할 것 없이 퍼뜨려놓은 '내셔널리즘'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게다가 그나마 과학적 역사이해를 바탕으로 연구하는 주류역사학자들은 대중과의 괴리가 심하고, 그 틈을 과학과 객관이라고는 모르는 유사역사학자들이 파고들어 대중의 역사인식을 오도한다. 그걸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이 책에 대한 몇몇 40자평 및 리뷰들이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 책에 대한 알라딘의 다른 리뷰들이 정말 얼토당토 않아 어이가 없기 때문이다. 박노자처럼 식민주의에 대해 무척이나 예민하고 비판적인 사람을 '식민사관에 물든 역사학자'로 몰아붙이는 우를 범하지를 않나, 소설을 써대는 이덕일 같은 '유사'역사학자의 논거를 들이대며 박노자를 비판하질 않나, 참 한숨만 나온다.   

 

2. '식민사관' 어쩌고 하는 사람들은 아마 고대 일본이 한반도에 대해 일정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 '임나일본부설'정도를 떠올리면서 치를 떠는 것 같다. 그러나 박노자 역시 그러한 '정치적 의도'가 내포된 주장에 대해서는 대단히 부정적이다. 그는 다만 그동안 줄곧 주장된 것 처럼 고대 한반도 국가들이 고대 일본에 대해 일방적 영향력을 준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대등한 쌍방관계였다고 말할 뿐이다.  

한반도에 유리한 해석이 아니라면, 혹은 한국 사람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학설이라면 설령 그게 나름의 설득력 있는 증거에 입각한 것이라 해도 전부 식민사관이 되어버리니 정말 우습다. '식민사관'이라고 딱지만 붙이면 전부 '악'이나 '거짓'이 되어버리는 현실도.  

지금까지 글과 말을 통해 접한 박노자는, 사회주의와 같은 이념을 중요시함과 동시에 이념으로 인해 가려진 사실들을 복원하고 그대로 보여주는데 관심이 많았다. 이 책에 실린 글들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이념으로 사실을 가리는 사람은 박노자가 아니라, 민족사관도 식민사관도 모두 거부하면서 최대한 '사실로서의 역사'를 보여주려 시도하는 박노자같은 사람을 '식민사학자' 취급하는 단세포적 사고를 하는 이들이다.  

 

3. 고대는 사료가 부족한 특성상 상당부분을 추측에 근거할 수 밖에 없는데, 박노자의 이 책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이덕일 류의 유사역사학자들은 추측 수준이 아니라, 아예 팩트를 무시하고 픽션을 써댄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아니, 최소한의 논리를 갖춘 사람이라면 그들의 논리가 얼마나 궤변인지 얼마든지 간파할 수 있다. 그들의 주장이 매력적인 이유는, 과거에 한민족의 조상들이 제국을 갖고 있었고 그처럼 한국도 앞으로 얼마든지 강대국이 될 수 있다며, 민족적 자존심을 치유함과 동시에 황홀한 내셔널리즘적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특정 집단의 자존심을 치유하는 기제로 작동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도구가 아니다.

박노자가 이 책을 쓴 이유 중의 하나도 아류제국주의적 인식을 내포하고 있으며, 객관적 역사이해를 방해하는 그러한 주장들이 힘을 얻는 세태를 비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덕일 류의 궤변 유사역사학자들의 허접한 글을 비판하는 글은 인터넷 상에 널렸으니 따로 언급하진 않기로 하자. 특히 '초록불의 잡학다식'이라는 인기블로그에 아주 친절히 잘 포스팅 되어 있으니 참고 바란다. 아무튼 비교를 하려면 주류사학자들의 주장과 비교를 하든가 해야지, 이덕일 같은 사람과 박노자같은 진지한 학자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령 유사역사학자들의 허무맹랑한 주장이 한치의 틀림 없는 사실이라고해도 현재의 한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고조선, 고구려, 신라, 백제 등등은 한국사도 아니고 중국사도 아니고, 지금 동북아시아라고 불리우는 이 지역에 존재했던 역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한국사나 중국사 등으로 명명하는 역사서술은, 국민국가를 부각시키고 정당화하려는 내셔널리즘 정치에 의해 탄생한 근대의 산물이며, 현재의 국민국가 형태를 수천년 전에 까지 소급적용한 왜곡된 역사인식이다. 

탈근대주의 역사인식의 긍정적인 측면들이 많이 수용된 요즘은, 한국사학자들조차 '국사(내셔널 히스토리)'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고조선, 고구려, 신라, 백제 등을 한민족의 역사라고 당당하게 말하진 않는다. 민족 자체가 근대적인 개념이며, 설령 유럽과 달리 한반도에는 원래 민족이 형성되어있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치더라도, 그 시점은 통일 중앙집권체제가 마련된 고려시대 이후 부터이기 때문이다.  

 

4. 잠도 오고해서 급하게 줄여야겠다. 아무튼 제발 바라건데, 학창시절 국사책 열심히 읽었거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 1급 땄다고, 또는 유사역사학자들의 공상소설책 몇 권 읽었다고 해서 역사에 대해서 마음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자제하자. 그런 책 수십권 읽을 시간에 이 책 한 권을 보는 게 낫다. 사람들이 이 책에 실린 박노자의 글을 통해 민족주의적 환상과 같은 갖가지 이념에 의해 재단된 왜곡된 역사이해로부터 탈피함과 더불어, 미약하나마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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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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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성당에서 성경퀴즈나 교리퀴즈대회 같은 것만 하면 늘상 혼자서 문제를 다 맞춰버리곤 하던 나다. 그러나 정작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그 어느 한 복음서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다. 그러다가 요즘들어 겪은 어떤 일을 계기로 최소한 신앙생활에 충실하려는 노력은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 일환으로 사놓고 책장에 꽂아두기만 했던 김규항의 <예수전>을 꺼냈다. 이 책을 읽어내면서 최소한 마르코복음 하나는 완독할 수 있었다.

  김규항은 책 전반에 걸쳐 예수가 살았던 시기의 역사적 상황을, 예수의 말씀 및 행위와 연결시켜서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로마제국 지배 하의 이스라엘 지역 안에서의 유다, 사마리아, 갈릴래아 세 지역의 역학관계 및 바라사이파나 사두가이파 등의 개념을 확실히 알고 나니까 성경의 내용이 머리에 잘 들어왔다. 성당 미사시간마다 성경의 파편들과 그에 해당하는 신부님의 강론을 그때그때 접할 때와는 달리, 이 책을 통해 예수에 대한 다소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했다.

  저자는 낮은 자들을 위하는 예수의 모습에 일관되게 초점을 두면서 최대한 존재했던 그대로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또한 무엇보다 그는, 예수를 현실정치와는 거리가 먼 인물로 치부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면서 예수가 각 개인이 삶의 자세를 바꾸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기를 주장하는 영성가일 뿐만 아니라 사회를 바꾸려고 한 혁명가이기도 했음을 강조한다. 예수는 사후의 구원만큼이나 현실세계에서의 '평화'를 중요히 여겼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란 무작정 갈등이 봉합된 그런 상태가 아니라, 불평등한 여러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들이 극복되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게 되는 상황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당연히 사회적인 저항이 요구된다. 김규항이 책에서 지적하듯이 예수가 단순히 영성가였다면 로마제국은 그를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제국에 대한 위협적인 인물이었기에 정치범으로 지목되어 제거되었고, 그것이 곧 사회적 혁명가로서의 예수의 모습을 증명해준다.

  이렇듯 예수의 존재가 함의하고 있는 정치적 성격을 비롯해 그의 사상에 녹아있는 평등과 같은 가치들 때문인지, 누군가는 그를 가리켜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자였다'라고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이렇게 얘기한 사람은 분명 '좌파'였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예수를 그렇게 편협한 틀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는 늘 여성과 어린아이,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처럼 같은 인간이면서도 차별받고 소외당하는 힘 없는 이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회복시켜주려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보편 가치'에 충실하려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을 쓴 김규항은, 어느 정도 진보적 성향을 가졌다는 이들이 보기에도 답답한 구석이 있는 좌파이다. 그래서 책을 읽기 전에 예수를 좌파적 입장에 끼워 맞추지는 않을까 하는 편견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기우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마르코복음에서 사회주의자로서의 예수가 아닌 보편가치주의자로서의 예수를 읽어냈다. 그렇기에 이 책은 예수의 사상에 가까운, 존재했던 그대로의 예수를 잘 복원해 낸 성경해설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좀 불편한 게 있었다면, 시민운동가들과 같은, 김규항이 소위 '양심적 자유주의자'라 일컫는 이들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었다. 저자는 그들의 활동이 근본적인 변혁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며, 그들을 예수가 살던 시기의 바리사이파인들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그러나 좌파적 변혁 운동 역시 절대선은 아니며, 그의 결과론적인 주장대로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막기 위해' 활동하는 시민운동가는 아무도 없다. 이러한 개량주의자들에 대한 비판 등에서 '좌파' 김규항의 조금은 경직되고 편협한 인식의 일부가 드러난다. 이에 대해 약간의 아쉬움도 있지만 이 책의 가치가 훼손될 만큼은 아니라고 본다. 

  예수를 훌륭한 인간으로서 수용할지 위대한 신으로 받아들일지는 각 개인의 몫이다. 그러나 요즘은 예수가 인류의 스승이나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가 아니라 '개독교'의 표상으로서 공공의 적이 된 듯 하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주요 원인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진정한 이해없이 벌어지는 공허한 공격적 전도와,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따라 삶의 자세 및 세상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세속적 욕망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예수를 제대로 알고 그의 말씀에 걸맞는 삶을 살고 싶다면, 교회에 나가는 것을 잠시 제쳐두고서라도 이 '예수전'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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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역사가들 - 서양사 연구를 위한 입문
마크 길더러스 지음, 강유원, 이재만 옮김 / 이론과실천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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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과제 때문이 아닌 지적 필요성을 위해 읽게 된『역사와 역사가들』은, '서양사 연구를 위한 입문'이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일종의 역사학 입문서이다. 역사 연구의 목적과 의도부터 시작해서 역사의식의 등장과 그 발전 과정, 그리고 역사철학과 최근 역사학의 경향 및 쟁점들까지를 다루고 있다. 한마디로 역사학의 역사를 다룬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존에 내가 접했던 역사학 입문서 격에 해당하는 책으로는 이상신의『역사학 개론』과 한스 위르겐 게르츠의『역사학이란 무엇인가』정도가 있다. 부끄럽게도 모두 사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읽은 책들인데 매우 생소한 용어들이 많았고 어려웠으며(이는 물론 개론 정도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사학과 교수들의 직무유기와 더불어 나의 지적 태만의 산물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었다.

  이 책은 역사학의 역사와 그 흐름 속에서 존재했던 대표적인 역사학자들의 입장 및 그동안 역사학과 관련해서 있었던 쟁점들에 대해, 앞서 언급한 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고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있다. 다만 역시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읽는 것은 불가능했는데, 아무래도 역사 책이 아니라 역사학 그 자체에 관련된 딱딱한 책이다 보니까 그럴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다른 개론서와 비교했을 때 이 책의 특징은, 역사가들이 이룩한 업적과 그것들이 역사학적 맥락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중점을 둔다는 것이다. 비록 간략하게나마 지금의 역사학을 있게 한 다양한 역사가들의 입장과 많은 역사학의 쟁점들이 실려있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부터 아우구스티누스, 볼테르, 랑케, 그리고 마르크스 등, 그 여러 거인들 중에서 어떤 이들의 어깨 위에 올라 앉아 역사를 바라볼지를 선택하는 것은, 이제 막 역사학과 역사 탐구에 관심을 가지려 하는 난쟁이들의 몫일 것이다.

  또한 역사철학에 대한 서술에 큰 비중을 할애한 것을 눈 여겨 볼만한 데, 사변적 접근과 분석적 접근으로 나누어 두 챕터에 걸쳐서 다루고 있다. 거시적 관점에서 일종의 패턴을 발견함으로써 역사의 행로와 목적을 파악하는 역사철학이 오늘날의 역사가들에게 있어 큰 관심사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점점 '인간'으로서의 개인 및 집단의 정체성을 상실해가는 이 때에, 역사를 단지 흥미의 대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공동의 기억'으로서 들여다보도록 해주는 역사철학에 시선을 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언급했듯 '서양사 연구를 위한 입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다수의 학문이 그렇듯이 역사학도 근대 서구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역사학 개론서들이 서구의 이론들로 채워져 있으므로, 서양사를 위한 책과 동양사를 위한 책을 구분 짓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서양사 연구 뿐만 아니라 역사연구와 역사학 그 자체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기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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