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아테나 1 - 날조된 고대 그리스 1785~1985, 서양 고전 문명의 아프리카.아시아적 뿌리 블랙 아테나 1
마틴 버낼 지음, 오흥식 옮김 / 소나무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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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인정하면서 살고 있는 이 체제는, 서구의 발전과정에서 등장하여 세계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궤를 같이하여, 산업혁명 이후 서구가 걸어온 경제적 성장의 길이 절대적 역사 발전과정으로 인식되고 있고, 역시 서구에서 발현된 '민주주의'가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는다. 유럽에서 시작되고 발전되어 온 것들이 지금을 사는 우리를 규정하고 있는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유럽적인 것들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이 세계를 당연시하며 살아가고 있다.

  마틴 버낼은『블랙 아테나』제1권에서 유럽중심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졌다. 이 책에서 그는 유럽중심주의라는 근대적 이데올로기가 미케네 문명의 형성에 관한 연구와 서술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다루고 있다. 유럽은 1800년을 전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대해 제국주의 정책을 펴고 있었고, 인종주의는 그러한 정책을 뒷받침 해주었다. 10세기 유럽 학자들은 이제 인종적으로 열등한 다나오스나 카드모스 같은 이집트, 페니키아 인들이 그리스 땅에서 왕조를 세우고 통치하였다고 말하는 그리스 신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스 신화는 허구 정도로 전락해버렸다. 유럽 사회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부상한 헬레니즘으로 인해 고전학과 고대 그리스사는 유럽중심주의적 시각에서 새로이 연구되기 시작했다.

  버낼은 애초부터 이 책을 쓰기 시작한 의도를 분명하게 밝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유럽중심주의'라는 그릇되고 불균형한 인식에 대한 비판을 통해 '유럽의 문화적 오만'을 줄이는 것이다. 버낼은 유럽 문명은 그리스로부터 시작했다는 기존의 '아리안 모델' 대신 유럽 문명의 기원은 아시아, 아프리카라는 '고대 모델'을 주장한다. 그러나 버낼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고대모델' 그 자체를 재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수정 고대모델'이라는 이름을 한 약간 수정된 형태의 학설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방대한 기존 저술들에 대한 분석과 신화 및 언어에 대한 고증을 선보인다.

  지배적 관점에 대한 도전이었던 만큼 버낼의 저서는 논란을 가져왔다. 어떤 학자들은 버낼이 유럽중심주의를 단호하게 비판하려하다 보니 아프리카 중심주의로 빠지는 경향이 있다며 비판했다. 그러나 마틴 버낼이 제시한 수정고대모델의 입장은 상당이 균형 감각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아리안모델을 고집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그의 수정고대모델과 고대 모델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하겠지만, 버낼이 고대모델에 가한 '수정'은 아프리카 중심주의로 치우쳤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페니키아와 이집트가 그리스 땅을 식민지로 삼은 것도 사실이고, 그로 인해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북부에서 아리안계 인종이 그리스로 이주해 그리스인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도 인정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비판은 버낼이 제시한 증거들에 대한 것이었다. 아리안 모델을 고집하는 학자들은 버낼의 저서가 학문적 엄격성이 떨어지는 증거 자료들을 사용했다는 데에 맹점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책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블랙 아테나』에서 사용한 증거들은 충분히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인문학에서 어느 누구 하나 반박하지 못할 증거를 내놓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 것은 자연과학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가장 반(反)실증주의적인 학자에게조차 실제적 증거에 입각한 연구 자세는 갖추어야할 기본적 소양이지만, 인문학자에게 지나친 실증주의의 잣대를 갖다 대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1980년대까지 존재했던 여러 주류 비주류 학자들의 주장과 그들이 내세운 증거들, 그리고 그것이 당대 사회적 배경과 맺는 관계를 친절히 설명해주고 있다. 학문이 결코 현실 세상과 동떨어져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해준다. 특히 역사는 종종 인종주의나 민족주의, 또는 근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재료가 된다. 과거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구성 요소이다. 정치적 정당화를 위해 과거는 이용되고 또 언제든지 날조될 수 있으며, 에릭 홉스봄이 말했듯 역사학도 핵물리학처럼 세상에 해악을 끼칠 수 있다. 역사가들은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증거에 입각한 연구를 통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며, 특히 역사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되는 것을 비판하고 경계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마틴 버낼의 작업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주목할 만 한 점은 과학적 객관성으로 위장하고 사실을 왜곡 날조해 온 역사학을, 지식사회학적 방법에 의거해 그 실체를 벗겨냈다는 데에 있다.

  솔직히 필자의 짧은 식견으로는 마틴 버낼의 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그의 주장과 증거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 철저히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다른 것들은 둘째치고 그가 '유럽중심주의'에 대해 제동을 걸었다는 점, 그 자체를 높이 사고 싶다. 혹자들은 말한다.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강한 반발은 그 동안 억눌리고 살았던 비서구인들의 피해의식의 발현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럽중심주의로부터 비롯된 기존의 왜곡과 불균형을 수정하려면, 반대의 의견을 강력히 주장하는 누군가들도 있어야한다. 설령 그것이 피해의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그것이 일정 정도 이상의 공신력을 지닌 실증적 증거에 입각해야 함은 당연하다.

  유럽중심주의를 타파하려는 목적을 기저에 깔고 시작했던 만큼 버낼의 작업에 약간의 편파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편파적인 주장을 하게 되는 과정만큼은 '아리안 모델'을 주장했던 그 어느 학자들보다 '공정'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가 학자적 열정으로 제시한 엄청난 양의 분석과 증거들이 그것을 대변해준다. 더불어 열정 못지 않은 학자적 양심으로 학계의 이단아로 전락할 위험을 무릅쓰고 기존의 지배적 주장에 대한 전복을 시도한 마틴 버낼의 용기를 높이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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