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중원과 초기 한국기독교
서정민 지음 / 연세대학교출판부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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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중원에 대한 앞서의 여러 부문과 연구 영역 중에서 맨 나중에 언급한 교회사적 접근의 하나임을 밝힌다. 특히 제중원의 정체성을 '선교 기관'으로 상정하고 이 기관이 지닌 초기 역사성 안에서 '선교 기능'의 일단을 분석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 중에서도 한국 초기 교회와의 관계, 다양한 선교적 효용성은 물론 특히 신앙, 예배 공동체의 형성과 발전에 미친 영향력, 역할 등을 해석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유의하고자 한 것은 제중원의 선교사적, 교회사적 의의를 좁은 한 공동체와의 관련 범주에 맞추지 않고 한국 초대 교회 전반에 걸친 관련성에 관심을 두고 접근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제중원의 교회사적 지평을 확장하는 일이며, 오히려 그 특성을 광역화함으로써 얻어지는 포괄성을 존중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 책머리에서 -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한 개인의 실존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면 그 실존이 몸담고 있는 물리적 환경이 이리 저리 복잡하고 다양하게 얽혀있고(관계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특히나 그 실존의 사유 세계를 헤아려 보아도 여러 가지의 것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만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개인에게 있어서 때로는 꿈과 현실 사이의 갈등과 방황을, 때로는 삶의 기쁨과 열정을 그려내게 한다. 개개의 실존이 만들어내는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이러한 삶의 모습이 더욱 복잡해 지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그래서 단순할 수가 없다. 연대기적 나열만으로는 그 삶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역사 기록은 그 어느 것도 삶의 폭 넓음을 완전하게 재구성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다만 역사가가 그 진폭의 충분히 느끼며 그 속을 향해서 할 수 있는 한 가까이 다가가고자 노력하고, 그 노력에 대한 최선의 표현을 다하는 것에서 역사 기록의 진정성, 가치를 충분히 읽어낼 수 있을것이다.

제중원이라는 공동체적 조직을 바라보는 시각도 분명 이러한 폭넓음이 필요하다. 제중원이 가지고 있는 반국영기관이라는 특수한 성격, 폭넓은 역사적 성격이 때로는 세브란스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역사 사이의 설왕설래가 오고가게 만드는 요소가 됨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반국영기관이라는 특수성만으로 역사성을 점철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제중원의 단편적, 단면적 이해에 불과한 것이고, 도리어 일그러진 오해의 역사 서술이 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할 수 있다. 어찌 그리 역사를, 삶을 그리 단순하게만 볼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저자의 폭넓은 역사인식과 사료 해석은 읽는 이로 하여금 제중원이라는 공동체적 조직을 또 다른 시야에서, 아니 보다 총체적인 관점에서 입체적인 그림을 그려내게 만든다. 눈이 뜨여지는 느낌이다. 여기서 저자의 시각을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저자는 한국 초대 교회의 역사 속에서 현상적으로 드러난 선교 방법의 양상을 분석하여 '트라이앵글 메소드'라는 특징적인 틀을 제시한다. 교회, 학교, 병원 선교의 삼각 구도가 그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현상적 구도를 한 층 더 깊이 분석하여 각 꼭지점이 깊이 관여하는 관계적 구도로 해석한다. 저자는 제중원의 의료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한 꼭지점으로 삼고, 이 꼭지점이 제중원 의학 교육 기관과 제중원 신앙 공동체라는 또 다른 두 꼭지점과 깊은 교류와 관계맺음을 이루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의료 기관으로서의 성격에만 몰두하기 쉬운 상황에서 제중원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성격,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신앙 공동체적 성격을 풀어내는 저자의 해석은 역사를 거꾸로 뒤집어 보게 한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제중원의 신앙 공동체적 성격을 한 차원 더 높여 한국 교회 초기의 상황 이해의 원류적 이해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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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 본질과 역사 신학텍스트 총서
한스 큉 지음, 이종한 옮김 / 분도출판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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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저자가 밝힌 목적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역사의 노정 속에서 이 본질은 어떠한 외양 가운데 존재해 왔는가? 이를 위해 저자는 그리스도교의 역사을 읽어내려가며 그리스도교의 패러다임을 분석해 낸다. 원그리스도교 묵시문학 패러다임, 고대교회 헬레니즘 패러다임, 중세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 종교개혁 패러다임, 근대 계몽주의 패러다임이 그것이다. 이 패러다임 속에서 교회가 지금껏 존재해 온 양태는 고대교회 헬레니즘 패러다임에서 정교회의 전통주의가, 중세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에서 로마가톨릭의 권위주의, 교회주의가, 종교개혁 개신교 복음 패러다임에서 개신교 근본주의가, 근대 계몽주의 패러다임에서 자유주의의 근대주의가 있어왔음을 공들여(거의 10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제시되는 새로운 물음은 어떤 패러다임이 펼쳐질 것인지, 앞으로의 그리스도교의 모습은 어떠해야하는지를 가늠해 보는 것이다. 여기서의 중심 축은 총체적 사고에 기반한 일치운동이다. 여기서 일치라는 의미는 하나의 단일 개념은 아닌 듯하다. 앞서 저자가 다룬 본질에 충실한, 그래서 오히려 '정통적', '가톨릭적', '복음적' 그리스도교의 다양성을 충분히 드러내는 개념이 가깝다 하겠다. 그 세세한 연결점과 이렇게 묶어내는 저자의 묵직하고 깊이 있는 통찰력은 이 책 속에서 저자와 대화할 때 더욱 맞갖고 풍성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책 속에서 저자와 대화해야만 한다. 이 짧은 글은 그 깊이를 드러내기에는 그저 얕고 얕은 겉면의 한 단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던지는 질문과, 여성의 문제에 대해서 던지는 질문은 주목해 볼만하다. 어쩔 수 없다. 책에 대한 나의 작은 기억들을 정리하는 끝맺음은 이 책을 위해서라도 저자가 이 책을 시작하는 목적을 통해 드러낸 큰 구상을 다시금 되짚어야 할 것 같다. 작은 끝맺음은 또 다른 시작, 더 깊은 곳을 향한 작은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개인적으로 이 책은 내게 올해의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그리고 당분간 그렇게 기억되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열어볼 것 같다. 이 내용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아무튼 참 좋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참 의미깊은 여행을 했다. 번역도 상당히 좋았다. 나도 이렇게 번역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도대체 그리스도교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그리스도교들 - 동방 정교회 그리스도교, 로마 가톨릭 그리스도교, 개신교 프로테스탄트 그리스도교 이외에 요컨대 바로 그 그리스도교라는 것이 있는가? 얼마나 많은 제도, 정당, 운동, 교조, 법규, 의례가 "그리스도교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는가! 그리고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얼마나 자주 소홀히 다루어지고 낭비되고 더 나아가 배단당했던가: 그리스도교 대신 오로지 교회주의,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정신 대신 로마식 체제, 개신교식 근본주의 혹은 정교식 전통주의. 그래도 어쨌든 그리스도교는 유다교 이상으로 모든 대륙에 현존하는 영적인 힘으로 살아남아 있다. 그리스도교는 파시즘과 나치도,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모택동주의도 없애버리지 못한 명실상부 최대의 세계종교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들의 교회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교를 내버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교"가 본디 무엇인지, 또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한다. 오늘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고 싶어한다. 이 책은 바로 이 일에 도움을 주고자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교회 안의 개혁적 역량들을 뒷받침하고자 한다.

그리스도교는 더 그리스도교다워져야 한다. 제3천년기의 미래전망도 다름아닌 이것이다. 로마식 체제, 정교식 전통주의, 개신교식 근본주의 이것들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외양들이다. 이것들은 언제나 있던 것이 아니며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어째서? 이것들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이 본질적인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를테면 그리스도교의 본질 같은 것이 존재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의 방향을 지시하는 원천들에 대한 돌이켜 깨달음 없이는 답을 얻지 못한다. 그 원천은 물론 그리스도교의 바탕문서인 성서와 전범적 인물 예수 그리스도다. 또한 각양각색의 종파적 특징들을 보여주는 교회 전통들에 대한 비판적 조망 없이는, 그리스도교계의 분열로 점철된 2천년 역사에서 참으로 그리스도교다운 것을 묻는 물음에 답을 얻을 수 없다.

지금까지 말한 바에 따라 이 책은 2천 년 그리스도교에 대한 일종의 비평사적 정산을 시도할 것이다. 이 책은 역사와 조직신학 두 차원의 종합을 감행하고자 한다.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이야기해 나가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대한 분석적 논증을 제시할 것이다. 이 책은 매우 극적이고 복합적인 역사를 서술할 터이지만, 동시에 그 역사를 거듭 새삼 그리스도교의 원천에 비판적으로 비추어보고, 그리스도교가 그때그때의 특정 패러다임 아래에서 치러야 했던 희생에 관해 캐물을 것이다. 또한 "미래를 위한 물음들"도 제기될 것인바, 사실 어떤 교회 전통이 경직되어 참된 "보편성"을 저버릴 경우에는 언제나 그러한 물음들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이 책은 단어의 가장 참된 의미에서 보편적(일치운동적)인 저작이 되고자 한다. 이 모든 작업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현재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과거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또 왜 오늘날의 모습으로 되었는가라는 문제다 - 그리스도교의 바람직한 가능태를 염두에 두면서. 이러한 유형의 역사서술의 특징은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라 시대들과 문제들을 교차시킴에 있다.

                                         - 한스 큉, 그리스도교, 분도출판사, 2002, 이 책의 목적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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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미술관 - 그림이 즐거워지는 이주헌의 미술 키워드 30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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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은 논리를 뛰어넘는다. 직관은 언어가 아니라 이미지를 소비한다. 순간적인 이미지로부터 본질을 파악하고 즉각적인 실천을 이끌어 낸다. 그래서 실수가 적지 않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직관에 따른 판단이 논리에 따른 판단보다 뛰어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가 미술작품을 중요한 감상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주어진 이미지의 감상을 통해 우리는 세계의 본질과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작품은 탄생할 때부터 의미의 전달을 위해 철저히 준비된 이미지다. 의미의 '레디메이드'다.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저 스쳐지나가는 다른 일상의 이미지들과 달리 나름의 가치와 의미를 풍성히 제공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이미지들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창조성이다.  학문적 성취든 예술감상이든 창조적인 시각만이 의미를 발견해내고 만들어낸다. 이 창조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앞에서도 말한 직관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작품의 가치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다시 지식의 습득과 경험의 확대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감식안이 되는데 있어 지식과 경험이 전부는 아니지만 지식과 경험은 직관이 가지고 놀 수 있는 기본적인 재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직관은 지식과 경험이라는 구슬을 꿰는 줄이기 때문이다.   - 글머리에서 -

준비된 이미지로서의 미술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나오고 대화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아니 참 어렵다. 그림을 통해 어떤 느낌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로. 어쩌면 그만큼 나는 미술의 이미지들을 보고서도 무심하게 그리고 바쁘게 지나치는 것에만 익숙해 왔고, 이에 덧붙여 이미지들에 관련된 경험도 지식도 변변찮게 갖추지 못한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래서 미술에 관련된 책을 접하면서도, 읽어내려가면서도 들어오는 생각은 뭐랄까,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뭔가 들어오는 듯 하지만 어느 사이에 사라져버리는 증기같은 지식 조각들, 그리고 그와 함께 나풀거리는 희미한 느낌들이 미술과의 대화를 방해하는 듯하다. 여전히 인내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래도 이 책을 통해 여러 이미지들과 느낌을 나누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지식, 경험, 그리고 어떤 느낌을 갖기까지의 작은 한 징검다리를 지났다고 생각하면 좀 마음이 편할 것도 같다. 책은 재밌었다. 여러 이야기거리들이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 준다. 배움의 즐거움이다. 한편으로는 이미지 역시 시대와의 소통을 피할 수 없음을 느낀다. 오리엔탈리즘, 로맨틱에의 열정, 인상파의 등장, 반달리즘과의 관계, 학살을 그린 그림, 냉전주의 속에 피어난 추상표현주의, 자본주의 속에 불거진 아트 매니지먼트 등의 이야기들은 보다 피부에 와 닿는 것들이었다. 시대의 삶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욕망과의 접점에 놓여있는 이미지들이다. 이렇게 삶을 느끼고 삶을 보고, 삶을 드러내는 작업으로서의 미술은 때로는 한 마디 말보다 풍성한 대화를 나누게 하고, 또한 그 나름의 소통 방법을 제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느낌을 나누는 것, 그 느낌의 폭을 넓히고 깊게 하는 것, 좀 더 인내를 갖고 즐겨도 될 일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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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교수의 영어로 신학 맛보기 밀알 아카데미 1
이현주 지음 / 신앙과지성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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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읽기를 하다보면 이런 욕심이 생겨날 때가 있다. 언어의 제한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마음이다. 특히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공부의 과정 중에서 원서를 접하게 될 때면, 원서를 한국어 저작처럼 자유롭게 읽지 못할 때의 마음은 뭐라 설명하기 힘들다. 이를 위해서는 분명 연습에 연습, 읽기에 읽기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신학이라는 분야에서는(뭐 어느 분야는 안그렇겠는가만..) 이런 연습과 노력이 많이 요구된다. 쉽게 말해 기독교 자체가 외래에서부터 비롯한 것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물론 전통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 여러 종교들에 관련된 글을 읽기 위해서도 외국어와 마찬가지의 언어를 습득해야 한다. 한문이다. 그러고보면 외래든 전통이든 큰 차이는 없는 듯하다.) 

 

그러나 연습과 노력을 위해서는 자신만의 의지로는 부족하다. 분명 도움이 있어야 한다. 언어라는 기술을 다루기 위해서는 특히나 그 도움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좋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영어 원서 읽기의 요령을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고, 조금이라도 그 요령을 쉽게 익힐 수 있는 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책이 만능이라고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 길을 통해 언어의 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분명 개개인의 몫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좋은 안내자가 있다면 그만한 이득을 볼 수 있겠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해당 원서의 내용과 관련된 한국어 설명이 현대 신학에 대한 일종의 전반적인 서술로 이루어져 개론적인 신학 담론을 살펴볼 수 있는 알찬 자료를 제공해 준다. 그러고보면 이 책의 제목이 잘 어울린다. 영어로 맛보는 신학, 한 번 읽고 공부해도 손해는 안 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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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니 참 좋았다
박완서 지음, 김점선 그림 / 이가서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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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매력적이다. 어렵지 않게 상상하게 하고, 그려내면서 사람의 마음을 향해 잔잔하게 손짓한다. 그 손짓이 마음에 닿고 또 닿으면 어느 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려진다. 꽁꽁 숨겨져 있던 것들이 환하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꽁꽁 숨겨져 있는 것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게 해준다. 글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몰랐던 세상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난다. 제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은 꿈과 같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꾸는 자가 제 모습을 보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낸다. 사람과 사람의 제 모습을 보고, 세상의 제 모습을 보도록 이끌어내는 꿈과 이야기는 그래서 소중하다. 본래의 생명력, 의미를 되찾아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답게 산다는 것은 거대한 것을 획득하는 것에 있지 않음은 분명하다. 얼마나 이야기할 수 있느냐, 얼마나 꽁꽁 숨겨진 것들을 바로 볼 수 있느냐, 그래서 얼마나 살아있음을 만끽하며 한가득한 생명을 나누어 가느냐, 얼마나 이런 꿈을 꾸고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여러 때묻지 않는 이야기를 들어서 좋았고, 특히 마지막 이야기,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의 이야기 속에서 꿈과 이야기를 함께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할머니는 오랫동안 어린이와 만나지 못해서 죽어버린 이야기들을 살려 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서두름이야말로 서투른 짓이라는 것을 할머니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천히 조심조심 죽어 버린 이야기들을 건드려도 보고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어도 봅니다. ... 이야기 선물을 마련해 놓고 아기를 기다리는 할머니의 마음은 마냥 찬란하기만 합니다. 할머니가 이야기 선물이야말로 으뜸가는 선물이라고 으스대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오래오래 사는 동안에 터득한 지혜로,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물이라도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물의 비밀과 만나는 일이야말로 세상을 사는 참맛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 사물은 제각기 가진 비밀 때문에 서로 평등할 뿐더러 자유롭습니다. 사물의 비밀은 이렇게 제각기 사물이 있게끔하는 목숨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나와 있기 보다는 꼭꼭 숨어 있으려 듭니다. 사람의 꿈만이 꼭꼭 숨은 사물의 비밀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 제아무리 오래 살고 여러 사람을 사귀었어도, 일생을 통해 단 한 사람의 진실과 만난 사람보다 어찌 참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할머니가 이야기 선물이야말로 아기에게 으뜸가는 선물이라고 으스대고 싶은 것은 이런 까닭에서입니다. 할머니는 아기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줄 작정입니다. 아기에게 꿈을 줄 작정입니다. 아기는 커가면서 꿈을 열쇠 삼아 사람과 사물의 비밀을 하나하나 열 수 있을 것입니다. 참답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아기 오는 날이 가까워질수록 할머니의 나날은 저녁 노을처럼 찬란해집니다. 깜깜한 밤이 오기 전에 잠깐이나마 노을이 있다는 것은 참 놀랍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156-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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