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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니 참 좋았다
박완서 지음, 김점선 그림 / 이가서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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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어렵지 않게 상상하게 하고, 그려내면서 사람의 마음을 향해 잔잔하게 손짓한다. 그 손짓이 마음에 닿고 또 닿으면 어느 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려진다. 꽁꽁 숨겨져 있던 것들이 환하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꽁꽁 숨겨져 있는 것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게 해준다. 글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몰랐던 세상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난다. 제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은 꿈과 같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꾸는 자가 제 모습을 보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낸다. 사람과 사람의 제 모습을 보고, 세상의 제 모습을 보도록 이끌어내는 꿈과 이야기는 그래서 소중하다. 본래의 생명력, 의미를 되찾아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답게 산다는 것은 거대한 것을 획득하는 것에 있지 않음은 분명하다. 얼마나 이야기할 수 있느냐, 얼마나 꽁꽁 숨겨진 것들을 바로 볼 수 있느냐, 그래서 얼마나 살아있음을 만끽하며 한가득한 생명을 나누어 가느냐, 얼마나 이런 꿈을 꾸고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여러 때묻지 않는 이야기를 들어서 좋았고, 특히 마지막 이야기,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의 이야기 속에서 꿈과 이야기를 함께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할머니는 오랫동안 어린이와 만나지 못해서 죽어버린 이야기들을 살려 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서두름이야말로 서투른 짓이라는 것을 할머니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천히 조심조심 죽어 버린 이야기들을 건드려도 보고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어도 봅니다. ... 이야기 선물을 마련해 놓고 아기를 기다리는 할머니의 마음은 마냥 찬란하기만 합니다. 할머니가 이야기 선물이야말로 으뜸가는 선물이라고 으스대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오래오래 사는 동안에 터득한 지혜로,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물이라도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물의 비밀과 만나는 일이야말로 세상을 사는 참맛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 사물은 제각기 가진 비밀 때문에 서로 평등할 뿐더러 자유롭습니다. 사물의 비밀은 이렇게 제각기 사물이 있게끔하는 목숨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나와 있기 보다는 꼭꼭 숨어 있으려 듭니다. 사람의 꿈만이 꼭꼭 숨은 사물의 비밀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 제아무리 오래 살고 여러 사람을 사귀었어도, 일생을 통해 단 한 사람의 진실과 만난 사람보다 어찌 참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할머니가 이야기 선물이야말로 아기에게 으뜸가는 선물이라고 으스대고 싶은 것은 이런 까닭에서입니다. 할머니는 아기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줄 작정입니다. 아기에게 꿈을 줄 작정입니다. 아기는 커가면서 꿈을 열쇠 삼아 사람과 사물의 비밀을 하나하나 열 수 있을 것입니다. 참답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아기 오는 날이 가까워질수록 할머니의 나날은 저녁 노을처럼 찬란해집니다. 깜깜한 밤이 오기 전에 잠깐이나마 노을이 있다는 것은 참 놀랍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156-1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