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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초상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2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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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 허망한 방황이 서글퍼지면서 바다가 비로소 실감나는 존재로 다가왔다. 녀석이 한 눈에 알아본 것은 바로 내 진정한 모습이었다. 나는 선배들의 신화와 모험을 동경했지만, 그들의 이념에는 투철하지 못했다. 내가 처음 그들에게 매혹됐던 것은 그들의 강인한 의지와 신념이 아니라 화려했던 지난 승리의 기억이었다. 그리하여 그것들이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분쇄되고 부인되자 나는 미련 없이 떠났다. 몇 개의 추상적인 이념의 껍질과 과장된 울분만을 품은 채. 다음에 내가 몸담았던 문예서클과 탐미의 세계에서도 그랬다. 그때 진실로 내가 추구한 것은 아름다움의 실체였던가. 아니었다. 사이비의 것, 촛불 문학의 밤에 낭독한 시 한 줄, 초라한 동인지에 실린 몇 십매의 잡문이 가져다 준 갈채에 취하고, 그 너머에 있는 보다 큰 허명에 갈급했었다. 그래, 그 때 나는 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렇지만 그 또한 탐구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내 마음에 불타고 있던 것이 진정한 이데아의 광휘였을까. 아니었다. 세 번 아니었다. 소년의 허영심으로, 목로주점의 탁자를 위하여, 어쭙잖은 숙녀와 마주 앉은 다방의 찻잔을 위하여 읽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감히 말하였다. 이념은 나를 배반했고, 아름다움은 내 접근을 거부했으며, 학문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라고. 판단을 얻기도 전에 가치를 부인했고, 근거없는 절망과 허무를 과장했다. 그리고 끝내는 말초적인 도취와 탐락에 빠져 모든 것을 망쳐버렸을 뿐이었다. (187-188쪽)

무언가를 찾아 떠난 여행길이었다. 그것은 어떤 완벽함, 어떤 완전함, 모든 것을 채우고도 남을 충분한 의미, 그야말로 절대적인 것을 향한 여행이었다.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다. 강진에서는 삶의 자잘한 군상들을 발견했고, 대학교에서는 끊임없는 지적 유희에 열을 올렸으며, 애잔한 사랑도 경험했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 무언가를 향한 질문이 몸을 마음을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리고 함께 대학시절을 보낸 김형의 죽음이 기어이 자신마저도 그 낯설고 두려운 경험을 마주하도록 이끌었다. 그 마지막 고개를 넘기 전에 주인공 '나, 영훈'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한 창백한 폐병쟁이로부터였다. 그 모습은 '방황의 허영성'이었다. 위의 인용문은 그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념이 자신을 배반했고, 아름다움은 자신의 접근을 거부했으며, 학문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는 근거없는 절망과 허무의 과장, 그에 따른 말초적 도취와 탐락에 몸과 마음을 내 던진 그 자신이었다. 이제 여기서 주인공은 한 발자국 더 나간다. 그리고 떨어질 나락이 더 이상 없는 그 곳에서 비로소 무언가를 발견한다. 창수령, 그 자연의 무한한 "아름다움"이었다.

고개를 다 내려왔을 때 나는 하마터면 울 뻔하였다. 환희, 이 환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 학자들이 무어라고 말하든 나는 그것을 감지한 것이 아니라 인식하였다. 아름다움은 모든 가치의 출발이며, 끝이었고, 모든 개념의 집체인 동시에 절대적 공허였다. 아름다워서 진실할 수 있고 진실하여 아름다울 수 있다. 아름다워서 선할 수 있고, 선해서 아름다울 수 있다. 아름다워서 성스러울 수 잇고, 성스러워서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모든 가치를 향해 열려 있고, 모든 개념을 부여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것, 거기에 아름다움의 위대성이 있다. .... 그 감격에 뒤이어 돌연히 나를 사로잡은 아름다움의 또 다른 측면은 그것이 어떤 신적인것, 인간은 본질적으로 도달이 불가능한 하나의 완전성이란 것이었다. 인간은 한 왜소한 피사체 또는 지극히 순간적인 인식주체에 불과하며, 그가 하는 창조란 것도 기것해야 불완전하기 짝이없는 모사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예감하는 삶의 형태는 처음부터 불가능을 향해 출발하는 셈이었다. 그런 삶을 채워가야 한다는 것은 그때의 나에게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어리석고 무모해 보였다. (198-199쪽)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공허'했다. 너무 아름다워서 완전했으나 도달할 수 없는 것,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찾고자 했던 그 무엇을 만났는데, 그것도 떨어질 곳이 없는 처절한 자기 인식의 끝자락에서 그렇게 바라던 것을 마주했는데, 안타깝게도 그것은 '공허'함, 불가능을 향해 달려가는 어리석음과 무모함이었던 것이다. 그를 엄습한 것은 또 한 번의 좌절이었다. 그는 길을 계속 걸어갔다. 산을 넘어 결국 바다에 닿았다. 그 곳은 '공허'와 맞닥뜨리기 위한 장소였다. '공허'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아름다움과 신적인 것이 지나가고 공허와 무의미, 죽음만이 남겨진 자리에서도 그는 자신을 끌어올리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더욱 큰 허탈함만 가져다 주었을 뿐이었다. 이 때 주인공 '나, 영훈'은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여태 몰랐던 것, 애써 무시했던 것, 그래서 어떤 이데아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히 본능적인 것이었다. 살고자 하는 본능, 몸의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여기서 비로소 모든 것이 끝이 난다.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나, 자신이었다.

돌아가자. 이제 이 심각한 유희는 긑나도 좋을 때다. 바다 역시도 지금껏 우리를 현혹해 온 다른 모든 것들처럼 한 사기사에 지나지 않는다. 신도 구원하기를 단념하고 떠나버린 우리를 그 어떤 것이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갈매기는 날아야 하고 삶은 유지되어야 한다. 갈매기가 날기를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갈매기가 아니고, 존재가 그 지속을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존재가 아니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다.  ... 사실 나는 아직도 절망을 내 존재의 출발로 삼을 만큼 그것에 철저하지는 못하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그 바닷가에서 확인한 절망은 내게 귀중한 자유를 주었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가치가 우리를 인도할 수 없다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의 손으로 넘어온 것이며, 우리의 삶도 외재적인 대상에 바쳐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서 시인되고 충만되어야 할 것이었다. ... 나는 생각한다. 진실로 예술적인 영혼은 아름다움에 대한 철저한 절망 위에 기초한다고. 그가 위대한 것은 그가 아름다움을 창조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도전하고 피흘린 정신 때문이라고 (212-213쪽)

이 여행길은 이렇게 끝났다. 절망 속에서 발견한 자아, 그 속에서 비로소 시작된 진정한 삶과 자유, 구원. 이 때문에 절망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또한 그만큼 처절한 절망을 해 볼 필요도 있다. '젊은날의 초상'을 아름답게 그려낸 이유다. 진정한 삶, 아름다움을 향한 불가능한 도전이 이 속에 담겨졌기 때문이다. 일견으로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뭔지 모르게 아쉽다. 이상하게 2% 부족한 듯한 느낌이다. 이 커다란 자각을 향해 달려온 숨가빴던 이야기들이 어느 순간 낯설게도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자아'의 재발견, 조금은 오만한 듯한 깨달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무엇일까. 가만히 보니, 이거 같다. 아름다움과 공허함의 끝자락에서 발견한 진정한 삶, 그러나 이 마저도 왠지 '허영'같이 들린다는 것이다. 어쩌면 주인공은 도리어 자아의 또 다른 '허영'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소설의 허구성을 인정하나 그 현실적 토대를 무시하지 못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또한 삶은 관념이나 이념을 뛰어넘어 마음을 향해 다가오는 진실한 삶에 더욱 쉽게 반응할 수 있음을 감안한다면, 이 '허영'같은 느낌은 삶의 현실적 토대, 삶 그 자체로 이야기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의 다른 말이 아닐지..    

(인용 페이지 수는 1995년 판본을 사용하여 기록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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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소설로 그린 자화상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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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자신의 말"의 지면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교정을 보느라 다시 읽으면서 발견한 거지만 가족이나 주변인물 묘사가 세밀하고 가차없는 데 비해 나를 그림에 있어서는 모호하게 얼버무리거나 생략한 부분이 많았다. 그게 바로 자신에 정직하기가 가장 어려웠던 흔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한계를 스스로 말하고 있음에도 작가는 이 이야기는 자화상을 그리듯이 쓴 글이라고 말했다. 이 부분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다시 읽을 수 있다. "우리 가족에게 참아 내기 힘든 가혹한 고통의 시기가 닥쳐왔다. (253쪽) ... 그들은 마치 나를 짐승이나 벌레처럼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돼 주었다. 벌레처럼 기었다. (254쪽) 다행히 그들은 빨갱이를 너무도 혐오했기 때문에 빨갱이의 몸을 가지고 희롱할 생각은 안 했다. ... 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들이 나를 벌레로 기억하는데 나만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그야말로 정말 벌레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 어떡하든지 망각을 물리쳐야 한다는 정신이 들곤 했다. (255쪽) ... 그 때 문득 막다른 골목가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269쪽)"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그것이 한계에 봉착하고, 정직하기 어렵더라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서 발견된다. 그것은 자신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록 제한이 있을지언정 완전히 감추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있는 힘껏 드러내 보이는 것, 가장 수치로운 순간 마저도 감추지 말고, 진정한 공포는 망각에서 온다는 것을 기억함으로써 최선의 증언을 선택하는 것, '벌레'로서의 삶을 보임으로써 '벌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자신을 살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생명과 삶 속에 자리잡은 역설과도 같은 진실이 아니겠나.

이러한 작가의 흔적은 이야기에 흠뻑 젖어들게 만들었고 그 속에서 그녀가 말하고자 했던 벌레같은 삶의 모습을 넘어선 주옥같은 삶의 모습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행복함 속에서 함께 웃고, 그녀의 슬픔 속에서 함께 울게 만들었다. 박적골의 이야기는 싱그러운 싱아를 찾아 맛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일제 시대의 암흑기와 해방기, 전쟁기를 거치는 시공간 속에서 들려진 이야기는 아린 가슴을 더욱 아리게 했다. 무엇보다 그녀를 '벌레'로 만들었던 해방과 전쟁기의 이야기는 읽는이로 하여금 그녀가 어서 그 곳을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읽게 했다. '순진하지만 허약했던' 오빠를 통해 자연스럽게 접했던 급진적인 사상, 그러나 전쟁의 와중에서 그것의 "황폐의 극치(248쪽)"를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며 지쳐 나자빠졌던 그녀, 죽음이 난무하는 현실 속에서 삶의 깊이가 매몰되고 단순한 흑백논리와 미치광이와 같은 광기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 그 모습을 읽는 것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희망을 찾는 절망과도 같았다. 이 가운데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버린 그녀의 마지막 순간은 그래서 더욱 가슴에 와 닿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조목조목 하나 하나 말해줄 수 있는 작가의 "기억과 묘사"는 놀라웠다. 아니 그와 더불어 그것을 "상상"으로 엮어가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 상상이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대면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사실성을 더했다. 그리고 희망을 현실화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감동을 더했다. 그녀의 이야기에 귀울 기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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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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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그게 어떻게 거짓말이냐, 농담이지."  "농담?" "그래, 농담이지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다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 거, 그거 농담 아니니? ... (142쪽)"  "텍사스에도 파리가 있냐?" "없지. 사람들은 다들 이 세상에 없는 데를 가고 싶어해." "그럼 느네 집도 거기 있게꾸나. 그리고 날 보내줘" "취했어, 가봐. 차 태워줄게.(312쪽)" 어쩌면 사람은 현실을 살고 있지만 그보다는 알수 없는 그 어느 곳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들으면 즐거운, 그걸 철썩같이 믿는다고 해도 절대 손해를 입지 않는, 어쩌면 여분의 보험과도 같은 것 말이다. 때로는 그 보험이 과하게 될 때 현실과의 경계가 모호해질지도 모르겠다. 현실과 현실 너머의 어느 곳 사이의 경계선이 갖는 긴장관계다. 그 속에 인간의 모순이 자리잡고 있다. 현실에 있지만,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그러나 현실은 벗어날 수 없는 그래서 갖게 되는 모순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모순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빈이 현금을 향하는 마음과 아내와 가족을 향하는 마음의 이중성, 그 속에서 팽팽한 긴장관계를 형성하며 둘을 지탱하는 허구적 가족 관계는 아마도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또하나 그 모순은 돈을 통해서 더욱 무지막지하게 드러난다. 어쩌면 사람보다 돈이 더 무서운 것 같기도 하다. 돈이라는 것 앞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느순간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경호의 죽음은,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면서 알면서도 그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영묘는, 그 모든 허울 마저도 돈으로 해결해 버린 영빈의 형은 이미 돈 앞에서 인격을 상실해 버린 듯한 사람의 모습을, 반대로 돈의 절대적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내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모순 속에 깊이 빠지면서 더욱 거짓말이지만 듣기 즐거운 농담같은 이야기를, 보험과도 같이 든든한 그 어떤 것을 기대하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삶은 살아가야하는 현실일텐데, 사람도 그리고 돈도 그 현실을 잊게 만들어 버린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래서 농담과도 같은 이야기를,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닌 듯 하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뭔가 그 곳을 넘어서는 것을 바라봐야 하지 않겠는가. 빨간 능소화의 생명력이 그것이라면 그 생명력의 모습을 한 번 눈여겨 봄직도 하다. 갑작스러운 현금의 변화가 그리 쉽게 납득이 가질 않지만, 삶은 이미 납득할 만한 이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법. 그래서 한 번 가능성을 찾아보아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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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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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체호프는 기 드 모파상과 함께 현대 단편소설의 형식을 확립한 가장 중요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특별히 놀라운 사건을 도입하기보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설정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 사건이 있더라도 그 자체의 외부적인 측면보다는 사건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다양하고 모순된 반응에 주목한다는 점, 대체로 매우 느슨한 플롯인데다가 그 결말이 미결정의 상태로 끝나고 주인공들도 이에 대해 어리둥절하고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는 점, 등장인물들 간의 의사소통의 단절 등 여기서 이루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이런 체호프의 특징들은 현대 단편소설의 출현을 예고하는 핵심적인 징후들이기도 하다. ... 체호프는 한없이 차갑지만 따뜻하고 단호하지만 부드럽다. 그의 익살 뒤에는 천근 같은 우수가 기대어 있다. 그의 페시미즘 속에는 질긴 낙관이 숨쉰다. 그의 비밀은 가장 단순하기에 결코 알아낼 수 없다.          - 작품해설, 현대 단편소설의 완성자 체호프, 191-192쪽 -
 
체호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마치 삶의 속내를 엿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삶의 짙은 그늘을 여지없이 그러나 아주 무덤덤한 듯 보여주는 그의 이야기는 도리어 그 삶에 대한 진한 여운을 드러내는 듯 했고, 삶의 아름다움을 즐거이 노래하는 그의 이야기 속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겹쳐지며 한 쪽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죽음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차갑도록 냉정하게 이야기의 끝을 내는 그 결말은 인간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가벼운듯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하게 드러내며 삶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하게 한다. 때로는 그 끝이 한 개인의 알 수 없는 마음의 문제인 것처럼(관리의 죽음), 때로는 미처 깨닫지 못한 사소한 행복을 잃어버린 막심한 후회인 것처럼(베짱이), 때로는 나로 인해 일어난 너무나 가슴아픈 불행인 것처럼(티푸스), 때로는 삶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풀어내는 실타래처럼(주교) 말이다. 그래서 삶에 대해 그가 보여주는 통찰은 날카롭다. 특히나 삶을 살아가는 가장 구체적인 실존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의 세계, 심리적 상태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어 때로는 흠칫 나 자신의 이야기인양 놀라게 된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몽환의 세계 속에서 인간의 처절한 욕망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작은 몸짓과 말 한 마디에서 인간 군상의 실재를 재현하며, 낯설고 이해되지 않는 세상의 얽힘을 보여준다. 이 삶을 무덤덤히 살아가는 것, 아둥바둥 무언가를 쫓고 무언가에 쫓기며 허우적 대는 것, 그러나 무언가를 꿈꾸고 갈망하는 것, 그 모든 이야기 속에는 바로 나도 있었다. 그렇다면 또 질문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삶은 무엇인가? 삶의 진정한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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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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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나'는 역설적인 존재다. '나'는 현실과 관념 속에서 헤메인다. 또한 완전성과 야만성, 이성과 욕망, 삶과 죽음의 역설이 주인공 '나'의 삶을 관통하고 있다. '내'가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순수함, 그리고 이를 향한 호기심은 파괴적인 욕망과 맞닿아 있어 도대체 구별할 방도가 없어 보인다. 이 모든 것은 현실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성(性)적 정체성이 그 현실을 살아가야만하는 '나'의 실존 가운데 깊숙히 뿌리내리고 있음에서 비롯된다.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살아내기 어렵다. 그 결과 가면이 필요해진다. 그리고 분열이 일어난다. '나'의 말처럼 "영혼과 육체가 서로 다르다는, 두 분열의 단순함과 직접성(216쪽)"이 그것이다.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사랑, 영적인 것에 대한 사랑, 영원한 것에 대한 사랑, 플라토적 관념은 실존하는 '나'에게 가면을 덧 입혀 주었다. 그러나 그 가면은 도리어 실존의 불안을 증폭시키며 존재의 심연, 육체의 욕망을 더욱 날카롭게 할 뿐이었다. 그의 실존은 "가늘고 긴 종이를 꼬아 양끝을 맞붙여 만든 원과 같은 측량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겉인가 싶으면 속이었고, 속인가 싶으면 다시 겉이 되는(160쪽)" 순환 가운데 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가면과 맨낯을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가면이 곧 맨낯이 되고, 맨낯이 가면이 되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여전히 관념은 남아 현실과 대결하고 불안은 증폭된다. '내'가 확인한 것은 그것이다. 역설적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불안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내'가 극복하고자 했던 이것은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시리도록 슬픈 아픔 속에 그저 재확인하는 것에서 끝나고 만다. 이 소설의 마지막 글자 "1949년 4월 27일(228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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