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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톰 라이트 지음, 최현만 옮김 / 에클레시아북스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즐겁다. 작고 작았던 눈이 열리고, 새로운 앎이 마음을 사로잡아, 내 삶을 두드릴 때의 설레임은 다시 나로 하여금 읽고 배우는 자리로 인도한다. 톰 라이트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나를 그 속으로 이끌어 준다. 그러나 아쉽다. 내 이야기로 말하지 못해서.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부족함이 나의 빈 자리를 자극한...다. 천천히 더 걸어볼 셈이다.
2.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바울이 뿌리내린 유대교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의 중심은 ‘유일신론’, ‘선민의식’, ‘종말론’에 있다. ‘이 세상에는 한 하나님, 단 하나의 참 하나님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하나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 미래는 그렇게 멀지 않았으며 그 종말의 때에 참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고 악을 물리치시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다소의 사울은 이 모든 내용들을 믿었다.’(44)
3. 바울은 유대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바울은 유대교의 오랜 이야기가 나사렛 예수 안에서 그 이야기의 절정과 성취에 이르렀다고 믿었다. (58) 여기서 바울의 ‘복음’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방법, 어떤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취하고 우리는 그의 의를 취하는 신학 메커니즘, 또 다른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예수가 나의 개인적인 구원자가 되는 방법, 또 다른 말로는 나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 나의 삶을 그에게 헌신하는 것’(60)과 구별된다.
4.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개인적이고 비역사적인 의미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다음과 같은 예수에 대한 사중적인 선포가 바울이 이해한 복음이었다.(94)
1)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꼭 집어 이야기하자면 그의 십자가 안에서, 죄와 사망을 포함한 모든 악의 권세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셨다. 2) 예수의 부활 안에서 새로운 시대가 동텄다. 모든 예언들이 성취되고, 이스라엘의 유배 생활이 끝나며, 모든 세계가 유일하신 창조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날이 시작되었다. 3)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한 예수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메시아, 즉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이었다. 4) 따라서 예수는 주이시다. 그는 이 세상의 참 왕이시며 모든 무릎이 그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94)
이 메시지는 하나님에 대한 극적이고 이중적인 선포이기도 하다.
1)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야말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며, 이교의 신적인 존재들은 그저 우상들에 불과하다. 2)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제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95)
5. ‘바울은 유대교 유일신론의 중심에, 즉 유일하신 하나님의 유일성 안에 복수성이 있으며 상호작용하는 관계가 존재한다고 믿었고 주장했다.’ (115) ‘이것은 삼신론이 아니다. 유대교 유일신론에는 오직 한 하나님만이 존재한다. 또한 그것은 단연코 범신론도 아니다. 이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일치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이신론도 아니다. 이 하나님은 세상으로부터 소원하지도 격리되어 있지도 않으며, 오히려 이 세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또한 그것은 결단코 양태론도 아니다. 이 셋은 분명하게 구분이 되는데 그 중간항은 사람 예수이다. 바울은 어떻게 하나님이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일 수 있는지에 관해 수수께끼를 풀고 있었던 게 아니다. 바울에게는 그 모든 사실 그대로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였다.’ (119)
6. 바울은 이 복음을 이방세계에 전했다. 이것은 이교도들을 위한 기쁜 소식이었다. 이교가 모방하고 있는 것들의 진정한 실체가 이 ‘복음’에 있기 때문이었다. 동시 이 ‘복음’은 이스라엘에게도 기쁜 소식이었다. ‘하나님의 의’가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톰 라이트는 언약, 법정, 종말론의 개념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설명한다. 여기서 ‘칭의’가 새롭게 정의된다. (이 부분은 다소 어려웠다. 그리고 논쟁적이다. 톰 라이트는 <톰라이트 : 칭의를 말하다>, 에클레시아북스에서 이 논의를 집중적으로 전개한다.) 톰 라이트는 칭의는 ‘개인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 공동체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특별히 그 내용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때인 종말론적 사건에 앞선 현재 시기에, 어떻게 분별하여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라고 말한다. (198)
7. 바울은 복음으로 인하여 새로워진 하나님의 인류의 모습을 제시했다. 그것은 신앙없는 이스라엘이 달성하는데 실패한 소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인류가 성취하게 된 것, 또한 성취해 나가야 할 것이었다. 새로워진 인류의 중심은 예배다. 새로워진 인류의 목표는 부활이다. 새로워진 인류의 변화는 거룩이다. 새로워진 인류의 일치는 사랑이다. 새로워진 인류의 열심은 선교다.
8. 바울의 ‘복음’은 예수가 주라는, 즉 그가 이 세상의 주시며, 이 우주의 주시며, 이 땅의 주시라는 선언이다. (257) 이 말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다시 사신 예수의 주권이라는 권세의 도마 위에서 판단 받지 않을 삶의 영역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예수에게 충성을 바치라는 소환을 거절할 수 있는 영역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258) 예수가 온 세계의 주라면 위대한 신 맘몬은 이 세계의 주가 아니다. (259) 예수가 이 세상의 주시라면 에로틱한 사랑의 여신인 여신 아프로디테도 이 세상의 주가 아니다. (260) 권력도 예외가 아니다. 예수가 진정으로 이 세계의 주라면 이전과 다르고 좀 더 강력한 종류의 권력, 즉 약함 가운데 완전하게 되는 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교회가 선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262) 복음은 충성을 불러일으키지 경험 자체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263)
9. ‘복음’이 창조하는 것은 개인적인 기독교인들의 무리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이다.(264) 칭의교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식탁에 속해 있다고 우리에게 선언한다. 칭의교리 자체가 교회 일치를 위한 교리이다. (265)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임을 구분 지으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공격을 가한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민족, 계층, 혹은 성별에 기초하여 자신의 지위를 주장할 가능성을 없애버린다. 아주 단순히 얘기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 이외의 다른 것으로 교회의 일원임을 정의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우상숭배이다. (269)
10. 바울의 복음 선포가 그 선포에 놀란 이교도들에게 들려준 소식은 참 하나님이 계시며 그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활동적이시며 세상을 돌보시고 사랑하시며, 전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서 역사와 인류 안에서 행동하셨고 또한 행동하고 계신다는 내용이었다. (271)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복음의 메시지 속에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또한 예수의 성령에 의해서 자신을 알리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271) 결국 기독교인들은 창조의 작은 한 조각인 그들 자신의 몸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사랑에 복종해 드리도록 명령받는다. 기독교인은 하나님께서 장차 우리에게 계획하신 바에 비추어 오늘을 살아야 한다. (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