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연습 - 골리앗을 이기는 19가지 습관
맥스 루케이도 지음, 최종훈 옮김 / 두란노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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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골리앗은 칼이나 방패를 들고 다니지 않는다. 대신 실직이나 자포자기, 성폭력, 우울증 다위의 무기를 휘두른다. 엘라 골짜기가 아닌 사무실, 침실, 교실을 휘젓고 다닌다. 무슨 수를 써도 지불 불가능한 청구서, 좀체 오르지 않는 성적, 도저히 비위를 맞출 수 없는 사람, 차마 거부할 수 없는 위스키, 뿌리치지 못할 포르노그래피, 피해 갈 수 없는 진로, 떨쳐버릴 수 없는 과거, 맞설 수 없는 미래 따위를 들이민다. ... 여러분의 골리앗도 마찬가지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종일 그 걱정을 하다 잠이 든다. 저마다의 골리앗이 하루 24시간을 온통 차지해 버려 기쁨을 잊은지 오래다. 거인이 그렇게 따라다닌지 얼마나 됐는가?  (10-11쪽)

맥스 루케이도를 접하게 된 첫 번째 책이다. 이 책의 초판 발행은 2007년 9월인데 2008년 6월에만 8쇄 발행을 했다. 저자의 다른 책들도 꾸준히 번역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맥스 루케이도가 기독교 관련 저술 부분에서 상당히 대중적인 저자임은 분명하다. 이 글은 일단 읽기가 상당히 쉽다. 이야기처럼, 수필처럼 그렇게 쉽게 마음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많다. 성서의 이야기를 쓰면서 그 이야기에 대한 해석을 오늘날의 일상 생활과 이어서 생각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삶에 대한 따뜻한 위로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다시 한 번 해 낼수 있다는 격려의 마음을 담았다. 어찌보면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명한 이치와 방법이지만, 그가 들려주는 성서 이야기 속에서 이것들은 성서적 관점에서 다른 옷을 입고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물러서지 말 것, 문제를 즐길 것, 선택하고 집중할 것, 결단하고 실천할 것". 이러한 유형의 제목들은 익히 들어서 아는 내용이지만 그의 이야기 속에서는 새로운 느낌으로 새로운 기분으로 다가오게 된다. 

과연 성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면 문제는 보다 복잡해지겠지만, 이러한 방법에서 성서를 읽고 해석해서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도 그리 밉지는 않은 것 같다. 성서의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무언가를 건져 올리는 상당히 복잡하면서도 어렵고 난해한 듯한 주석도, 그리고 이러한 쉬운 읽기도, 저마다의 가치가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하실 테니 힘을 내라는 식의 이야기 대신, 그래도 인간이 처한 자리에서 해야할 일들을 제시하고, 주술적인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서를 읽어야 한다는 권고가 빠지지 않으며, 기독교 공동체적 관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서 그 긍정할 만한 부분을 찾아본다. 어찌보면 전형적인 보수적 복음주의의 신앙에서 건강하게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가는 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골리앗과의 대결에서 믿음으로 이겨내라는 격려는 참 가슴 훈훈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분명 기독교는 이러한 자명한 이치를 넘어서는 깊은 세계를 담고 있음을 볼 때, 그리고 그러한 세계는 많은 경우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고, 따르기 싫어하는 것임을 고려해 본다면, 입맛 좋게 다가오는 이러한 내용이 기독교 신앙적인 삶을 모두 대변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면 그리 나쁘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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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로 말하라 (양장) - 언어 유진 피터슨의 영성 4
유진 피터슨 지음, 양혜원 옮김 / IVP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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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 사용하는 언어와 주변의 사람을 대할 때 사용하는 언어 사이에 세워 놓은 장벽을 무너뜨리고 싶다. 결국 그것은 모두 같은 언어다. 우리가 기도할 때 부르는 하나님 그리고 설교할 때 선포하는 하나님은, 지나가다 가볍게 혹은 따로 만나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삶에도 깊이, 영원토록 관여하신다. ...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그리스도로 구현되고 성령이 살아 움직이는 말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거룩성을 존중하는 언어를 계발하기 위해 내가 채택한 텍스트는 예수님이다. ...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의 기도에 참여하면서 저자와 독자인 우리가 함께 모든 형태의 비인격화하는 종교적 언어를 분별하고 경계할 줄 알게 되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언제나 인격적인 언어를 좋아하고 그것을 사용할 줄 알게 되기를 바란다. (15-17쪽)

말과 행동은 일치하기 어렵다. 말은 쉽고 행동은 피곤하게 한다. 종교의 세계에서 말 만큼 쉽게 내뱉어지는 것이 없고 더불어 행동하는 것처럼 하기 힘든 것이 없다. 그래서 종교는 인간에게 있어서 존중을 받는 세상이면서도 동시에 비판의 대상이다. 그리스도교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스도교 중심에 놓여진 신앙의 체계로서 내뱉어질 수 있는 말(교리, 체계적인 신앙의 내용 등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행동과의 큰 불일치를 겪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말과 행동의 이원화는 성과 속을 둘로 나누었고, 두드러진 이분법적인 세계 속에서 말은 말대로 행동은 행동대로, 교리는 교리대로 삶은 삶대로, 그대로 구별시켜내고야 말았다. 거룩이라는 말로 종교는 권위를 등에 업은 채 역사, 삶의 실제, 인격적인 고백에서 발 딛지 못하고 허공에 떠 다니고 있으며, 복음의 전파라는 지상 최대의 사명을 두고 타인을 향한 정죄의 말들, 다가오지 않는 구원의 은혜로 포장된 빈껍데기 말들을 쏟아놓고 있다. 행동에서는 인격이 사라진 형식과 제도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고 있으며 합리화되고 있는가 하면, 풍성한 하나님 나라의 삶 대신 도덕에 불과한 율법이 도덕주의로 인격을 옥죄고 있다. 여기서 인격과 인격의 만남은 그 어디에서도 발 붙일 곳이 없어 보인다. 말과 행동의 철저한 분리이다.

유진 피터슨은 여기서 말과 행동을 하나로 묶어 낸다. 그가 말하는 언어의 영성이다. 언어의 영성은 비인격화하는 종교적 언어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며 동시에 인격적인 언어로 고백해내는 삶의 영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의 영성은 일상의 영성이 된다. 언어는 삶을 담보하고, 삶은 언어를 담보한다. 바로 예수께서 하신 이야기와 기도가 그 두 축이다. 이야기와 기도를 통해 언어는 삶으로 초대되고, 삶은 언어로 인해 풍성해 진다. 여기에는 비인격이 자리붙일 곳이 없다. 이야기가 전해지고 듣는 자리는 종교적 권위가 허상의 굴레로 자리할 수 없는 곳이다. 이야기는 듣는 이로 하여금 말하는 이에게 참여하도록 잔잔히 이끌어주고 기다려준다. 그리고 여기서 비로소 인격과 인격이 만나게 된다. 그 참여는 단순한 이성적 이해가 될 수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야기와 같은 세계, 풍성한 상상력이 삶으로 이어지는 실제로서의 세계를 살아내도록 하는 참여로서의 삶이다. 그 삶을 오롯이 드러내는 것이 또한 기도이다. 기도는 이야기를 온 몸으로 드러내는 몸짓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 몸짓 한 가운데 인격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역시 하나님께서 인격으로 마주하시는 세상과의 만남이 있다. 언어의 영성이 일상의 영성으로 풍성해 지는 이유이다.

우리는 이미 창조와 언약의 거대한 이야기, 이스라엘과 예수님의 거대한 이야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와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들 안에 잠긴 상태로 잠에서 깬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를 형성시켜 주는 이야기들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특히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예수님이 일하시는 방식, 에수님이 말씀하시는 방식, 예수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방식, 즉 예수 방식(Jesus Way)을 익힌다. ...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들과 예수님이 사신 삶은 우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들과 우리가 살아내는 이야기 안에서 계속해서 순환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이 곳에 있다. 우리는 그 안에 살고 있다. (263쪽)

이야기는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항상 인지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지도로 그려 그 내용을 해독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다. 이 세상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명령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는 모호함과 참여의 여지를 제공해 주는 언어다. ... 우리는 언어를 탈육화해서 사상을 표현하거나 규칙을 요약하거나 정보를 나누어 주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267-268쪽)

기도는 하나님을 조작하는 언어(마술의 길)을 거절한다. 기도는 하나님을 나의 통제 대상으로 축소하는 언어(우상의 길)을 거절한다. 기도는 하나님을 사상이나 세력이나 느낌으로 비인격화하는 언어(경건주의적 자기 반성의 길)를 경계한다. 기도는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기도를 사용하는 일에 전문성을 가진 영적 기술자들의 영향을 경계한다. 우리의 뜻이 확실하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을 강제하는 기술을 경계한다. 기도는 기도를 사유화하고 성도들과의 교제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키는 우리 자신의 내적 성향을 경계한다. 그리고 기도는 분명 이 세상 그리고 이 세상의 문제와 책임으로부터 물러나는 행위를 영적으로 은폐해 주는 핑계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서 쓰는 언어이며,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된다. (444-445쪽)

성서의 깊이있는 세계로 들어가야하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간절하게 하는 책이다. 물론 이 세계는 그만한 배움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배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또한 그만한 삶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발 딛고 있는 땅이 소중하다. 배우고 사랑하고 살림을 일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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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의 습격, 해독 혁명 EBS 지식채널 건강 2
EBS 『해독, 몸의 복수』제작팀 지음, 전세일 감수 / 지식채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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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에게 병원은 일상적인 장소가 되었다. ... 생명을 좌우하는 큰 병은 아니더라도, 평생 계속 달고 살아야 하는 만성질병 한두 개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인간의 수명은 점점 길어지고 있는데, 우리는 왜 질병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것일까? ... 첨단을 달리는 현대의학이 고치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주목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른 대체의학, 그 중에서도 해독요법에 주목했다. 원인불명의 질환이나 만성질환을 추적하다 보니, 문제의 핵심은 독소였다. ... 신은 모든 인간에게 면역력과 자연치유력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이 두 가지 본능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인류의 생존을 가능하게 했고, 건강을 유지하게 했다. 면역력과 자연치유력이라는 몸의 본능을 강화시키느냐 도태시키느냐에 따라 건강이 결정된다.  (여는 말에서)

어느 순간 내게 건강이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올해 초, 겨울에 지독하게 아프고난 이 후였다. 아직은 어린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건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인생살이는 절대 불변의 상황, 합리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 있는 상황으로만 가득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느 순간 이유없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건 모르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스스로 한 번 진단해 보고 건강을 챙겨보는 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은 없는 것 같다. 오래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건강한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나. 

건강에 대한 책 내용이긴 하지만 조금은 가볍게 폭넓은 시각으로 살펴보면 현대인의 삶의 조건들을 되짚게 해보는 책이기도 하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환경에 대한 생각,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 존재의 본질, 신체의 신비로움 속에서 발견하는 자연 세계의 깊이를 떠올리게 해주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가공품들 속에서 소비를 미덕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욕망을 을 반성해 봐도 좋고, 지독한 인간의 이기적 존재성으로 인해 유기체로서의 존재를 망각하는 오만함을 반성해 봐도 좋을 것 같다. (음.. 여기까지 나가는 것은 조금 지나친 의미부여인 듯한 느낌이기는 하다.) 신학적으로는 창조세계 안에서 겸손히 피조물의 일원으로서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인간됨의 가치에 대한 반성의 필요성을 말할 수도 있겠다. 건강하다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삶,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의 다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 몸도 독소의 습격을 받고 있다. 해독의 혁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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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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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통해 씌어진 모든 위대한 문학작품들의 기본적 주제는 '같이 놀래?'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형색색으로 다르게 생긴 수십억의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고 자리싸움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인간적 보편성을 찾아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화합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가를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문학의 과업이기 때문이다. ...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뇌를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 그에게 동정을 느끼고 "같이 놀래?" 라고 말하며 손을 뻗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너와 내가 같고,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이 인간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고뇌와 상처를 이해하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다.   (6-7쪽)

역사와 문학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르다. 어찌보면 극과 극의 거리를 달리고 있는 듯하다. 인간을 다루고, 인간의 삶을 다루고, 살림살이의 이야기거리들을 남기지만 하나는 실제이며 다른 하나는 실제적인 허상과 같다. 실제를 써 내려가는 것은  때로는 차갑다. 실제여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가 과연 있느냐의 질문을 보다 깊이 생각해 봐야 함에도 어찌되었든 그 기본은 실제다. 그래서 사료가 있다. 하지만 문학은 사료가 필요없다. 실제적인 듯하지만 실제는 아니다. 얼마든지 지어내고 꾸며내고 느껴낼 수 있는 세계이다. 하지만 실제가 필요하다. 실제가 없는 허상만으로는 허황된 환상에 머물러 버리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두 장르가 공통으로 담보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성이며 삶이다. 어떤 삶을 살았는가, 어떤 삶을 꿈꾸고 있는가. 역사와 문학이 주는 즐거움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저자가 제시하는 즐거움, 문학의 과업도 여기에 맞닿아 있다. 진정한 인간되기,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맞다.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슬퍼도, 또는 상처 받아도 서로를 위로하며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는가를 추구할 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은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상상력, 창의력, 논리적 분석력도 결국은 인간됨을 제대로 이해하고 가장 인간적인 것을 추구하는 '올바른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같이 놀래?" 하며 손 내미는 어린아이의 마음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10쪽)

꿈을 꾸는 것, 진정한 인간됨의 삶을 추구하는 것을 문학작품을 통해서 말하는 저자의 이야기들은 참으로 정겹다. 저자 자신의 삶의 이야기들과 어울리면서 문학작품의 세계를 열어주는 듯하다. 그래서 재미있고 감정적 느낌을 풍성하게 안겨준다. 인간됨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금 뒤돌아보게 만든다. 하지만 한켠에서는 뭔가 모를 아쉬움이 있었다. 저자의 불편한 몸을 생각하더라도 너무 깔끔한 듯한 느낌이었다. 인간됨의 삶은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무형의 가치와 같은데, 때로는 그런 이상적인 가치가 실제적 삶에서 안겨주는 허망함 같은 느낌도 만만치 않은데, 실제는, 역사는 그렇게 깔끔하고 깨끗한 것은 아닌데 말이다. 삶의 의미 부여만큼 삶이 아름다울 수는 없으니까... 그러다 마지막에 이르러 그 마음을 풀었다. 저자 역시 실제적 삶을 살고 있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문학은 삶의 용기를, 사랑을, 인간다운 삶을 가르친다. 문학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치열한 삶을, 그들의 투쟁을, 그리고 그들의 승리를 나는 배우고 가르쳤다. 문학의 힘이 단지 허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도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318쪽)

인간, 인간됨, 인간적인 삶.. 이는 여전히 내게 중심된 화두이다. 인감됨의 꿈을 꾸고 현실을 직시하고 발을 내딛기 위해 문학의 이야기들을 듣고 마음에 떠올려본다. 그리고 실제의 발걸음을 내딛기 위한 마음가짐도 되짚어 본다. 여러 문학 고전들의 세계를 엿보게 해주고, 지금을 떠올리게 해준 참 좋은 책이고 재밌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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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家 이야기 - 한국과 가장 깊은 인연을 맺은 서양인 가문
서정민 지음 / 살림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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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곳에서는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시간의 흐름으로 이 흔적들을 바라본다면 소소한 모습으로서는 인생살이가 될 것이며, 조금 더 거창하게 본다면 역사가 될 것이다. 결국 역사는 사람들의 살림살이의 흔적이다. 이 흔적은 함부로 지우거나 꾸며낼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잊혀지거나 묻히기도 쉬운 것이기도 하다. 누구의 인생살이가 더 크고 보람되다라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역사라는 것에서는 지우거나 꾸며내어서는 안되는 것들, 그리고 잊혀지거나 묻히기에는 그 흔적이 남긴 것들을 되돌아볼 의미가 상대적으로 조금은 무거운 것들이 생겨난다. 언더우드 집안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런 측면에서는 역사에서 다루어질만하다고 볼 수 있다.

언더우드가는 4대에 걸쳐 한국에 살며 교육, 선교, 의료, 문화, 정치 등 각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 근현대사와 관계 맺으며 한국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가문이다. 1885년 기독교 선교사의 자격으로 이 땅에 처음 발을 디뎠던 언더우드 1세는 교파간의 차이를 초월한 선교활동을 펼치는 한편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사학인 연희전문학교를 세워 본격적인 근대 고등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선교사로 활동했던 언더우드 2세는 연희전문학교의 교장으로서 이상교육 실현에 이바지했으며, 식민지 시기 수원 제암리 교회와 수촌리에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등 한국의 주권회복을 위해서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언더우드가와 한국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3세인 원일한이 아버지 원한경과 더불어 한국전쟁에 자진해서 참전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UN 통역사로 활동하며 동생들과 함께 휴전회담이 성사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언더우드 가문의 이러한 절대적인 한국사랑은 4세 원한광의 형제들로까지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들이 이 땅에서 보낸 120년이라는 시간은 '한국 근현대사의 전부이자, 한국 기독교 역사의 모두'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책 뒤표지에서)

한국의 근대, 현대와 맞물려 있는 이들의 삶의 흔적들을 읽어내려가는 것은 그래서 흥미롭다. 한국의 모습이 보이고, 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여기에는 정치도, 문화도, 교육도, 종교도 있다. 복잡다단하게 얽혀있는 삶의 모습들을 들여다보게 한다. 주목해 볼 만한 것은 언더우드 1세가 설립한, 일생의 과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연세대학교에 관한 부분이다. 종교적인 이유로, 서구 제국주의적 문화권을 이유로 이모양 저모양 다른 말들을 많이 할 수 있다하더라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보다 긍정적인 언급을 아끼지 않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그의 사상적인 맥락도 짚어봐야할 부분이 다분하다. 

언더우드가 연희대학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하나의 가치와 진리와 정서로서 호소하고 싶었던 기독교는 그와 같은 정치적의 미의 민족 기독교만도 아니었고, 또한 문화적 이식 형태의 외래 기독교만도 아니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그야말로 한국의 문화와 혼에 내재하는 기독교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는 연희대학의 또 다른 가치축인 한국학, 곧 '한국'이라는 주제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 언더우드가 그의 대학에서 실현시키고자 한 가치는 한국인들로 하여금 한국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전통과 문화를 제대로 알게 하는 것이었다. ... 이러한 언더우드의 꿈은 민족 수난기라는 가장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연희대학을 중심으로 꽃 피어난 국학 연구의 전통 속에 그 첫 열매를 맺게 된다. ... 많은 사람들이 연세대학에 대해 선교사 설립의 대학, 서구적 이미지의 대학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와 같은 생각은 설립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안에서 가장 한국적인 학문의 명제들이 연구되고 창출된 실제를 본다면 언더우드의 이러한 구상은 적절히 실현된 것으로 보인다. (150-151쪽)

또 다른 하나는 한국전쟁 당시 이들의 삶이다. 이는 언더우드 1세의 아들들에 주목해 봐야 할 부분이다.

한국전쟁기 언더우드 가문의 활동과 변화에 대해 기록할 사항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집약하면 언더우드 2세 원한경의 활동과 죽음, 그리고 3세 원일한 형제의 종군 활동,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전쟁의 휴전회담에서 원일한 형제가 통역을 맡아 활동했던 일이 가장 중심에 놓일만한 사항일 것이다. 이들 언더우드 가문이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특징적인 점은 한국이 위기 상황에 놓일 때 늘 그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242쪽)

열세 개의 이야기거리 가운데 여덟 개가 언더우드 1세와 관련된 이야기이고, 나머지 다섯 개의 이야기가 그 아들들과 언더우드가의 여인들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외견 상으로는 언더우드 1세에 보다 무게중심이 실려있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같다. 다른 말로 한다면 아직은 후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역사로 부각되지 못한 측면이 많이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실제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할 부분은 언더우드 1세가 꿈꾸고 이루어내었던 기독교와 한국이 공존하는 연세대학교에 관한 부분이다. 사실 언더우드 1세는 연희전문 설립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기에, 그 이후 연희전문의 존립과 운영에 관련된 것은 언더우드 2세와 보다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용문에도 언급되었듯이 한국전쟁기 언더우드 가문의 활동과 변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볼 수 있다. 어찌되었든 사람들의 살림살이의 흔적,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들어보는 이야기들은 한 사람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만들며 또한 한 사람으로서의 나 자신도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이며 현재이며 미래가 아닐까. 언더우드 집안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주는 옛날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 또한 앞으로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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