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본 한국
얀 아르튀스-베르트랑 사진, 이어령.존 프랭클 에세이, 김외곤.조형준 사진 에세이 / 새물결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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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땅에 살고 있는 어떤 분들에게.
제목만 보고 열폭하지 마시길. 전 아직 오른쪽, 왼쪽을 구분할 만큼 자라지 못했거든요.
그냥, 이영표 선수처럼 양발을 모두 잘 쓰는 재간둥이면 좋겠네요.

제발, 꼭, 끝까지 봐줘요.









나 잡아가지 마요.
이 책 샀다구요. 일련 번호까지 찍힌 한정판 정품으로요. 

우리가 금 그어놓고 싸우라고 찍은 사진이 아니니까요. 
여기 있는 사진은 일부에 불과해요. 책에는 더 환상적인 사진들이 많죠.
아라비안 나이트의 셰헤라자드처럼, 1000일 밤낮을 보아도 다 볼 수 없을만큼 많은
아름다운 우리의 땅이. 

그 모든 사진들을 천일 동안 보고 나면, 이렇게 말하고 싶어질거예요.

"미안합니다. 우린 하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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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의 시대 랜덤소설선 12
손홍규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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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사이좋은 오누이가 살았습니다. 오누이는 어머니와 살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매일 십 리나 되는 길을 걸어 떡을 팔았습니다. 여느 때처럼 어머니는 떡을 팔러 가고 오누이는 집에 남은 어느 날. 어머니는 떡을 팔러 가다가 몹쓸 호랑이를 만나서... 
(중략)
오누이는 나무 위로 줄행랑을 놓았습니다. 호랑이는 기다렸어요.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오누이는 하늘에 기도를 했어요.
- 저희를 불쌍하게 여기신다면 동아줄을 내려주세요.
그러자 거짓말처럼 하늘에서 줄이 내려왔어요. 오누이는 줄에 매달렸습니다. 그걸 본 호랑이도 똑같이 기도했지요.
- 미 투.
그러자 거짓말처럼 하늘에서 줄이 내려왔어요. 그런데 말이죠, 결말부터 말씀드리자면 셋 다 죽었답니다. 오누이는 매일 어머니가 장사를 하고 남은 떡을 처리하느라 고도 비만 상태였거든요. 뭐, 호랑이는 말할 것도 없죠. 줄은 둘 다 멀쩡했는데 서로 죽자사자 난리를 치는 통에, 안그래도 과적단속에 걸릴까 말까했던 줄은 뚝, 끊어지고 만겁니다.
The end.

모든 이야기는 여러분께 그럴 듯한 구라를 치고 있습니다.

귀신. 
죽었지만 죽은 것은 아니고, 산 것은 더더욱 아닌 구천을 떠도는, 형체 잃은 것들.
귀신은 필연적으로 어두운 음의 존재. 촛불과 등잔으로는 해소시킬 수 없는 그늘.
초를 켜 본 사람은 안다. 일렁이는 불꽃 뒤로는 어둠만큼 깊은 그림자가 드리운다는 것을. 
우리네 과거는 귀신과 더불어 살던 시대였다. 전기가 들어오고 전구가 보급되면서 찾아온 빛의 시대 이전의 시기.
이 책은 그들의 시대이고, 시대는 서사다. 

S#. 1  - 이 귀신들은 말한다.
자자, 이 얘기부터 먼저 들어보드라고, 아따, 좀 기다리오, 나가 말하고 있지 않소,
어허, 내 얘기가 먼저네, 아니, 이것부터 시작을 해야 한단께요, 글쎄 이게 먼저...
예예, 알겠습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보죠.

미리 말하는 바이지만, 이 이야기는 끝이 없는 이야기이다.
낫을 든 영수네 아버지와 체육 선생의 뜀박질처럼.

이 책의 각 인물들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주 중요하다. 한 인물은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며, 그 다른 인물들은 바로 이 인물에 의해 정립된다. 이거, 그물망이다. 지금 세기에 이 말은 너무 뻔한 상투적인 말이 되었지만.
이 이야기는 ’귀신’’서사’다.

그 그물망의 한 지점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본 궤도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다. 점차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이야기는 원경에서 근경으로 확대된다. 그 과정에서 우스꽝스러운 개인의 일대기는 괄호() 속에서 팔딱거리고, ’나’는 미신을 ’실험’ 한다.
이 모두는 귀신의 일대기이며, 사라져가는 그림자이고, 나의 여섯 번째 손가락이다.

S#. 글쎄? - 폭발적이고 숨가쁜 읍내 장면
나는 저수지로 들어간다. 
나는 죽는다?
물은 항상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지금도 그렇듯이.
물은 양수다. 양수는 생명이다. 나는 물로 걸어들어간다. 물에 몸을 맡기는 것은 
생각보다 두려운 일이었다. 되돌아 나오려 파닥였다. 수면의 파문은 점점 거세어져 갔다.
나는 귀신이 되는구나. 물로 돌아가는구나.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발견됐다.
여섯 번째 손가락의 자맥질만 저수지에 남았다.

따식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우리 존재의 비루함으로 인간 존재의 위대함을 매순간 역설하고, 위태롭지만 존재하는 끈질긴 생명의 연속성을 증명한다.
뭐? 아니라고?
당신의 18대조 할아버지가 총각귀신이 되었다면 당신을 비롯한 앞선 17대의 삶은 존재치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48대조 할아버지가 고자였다면 당신을 비롯한 47대조의 삶은 존재치 않았을 것이다. 수십만 년 동안, 당신을 이 시대의 사람이라는 존재로 현전케 하기 위해, 수천만 대의 생명이 끈질기게 이어져왔다. 그사이 단 하나라도 생명의 연속성을 보장받지 못하고, 다시 말해 대를 잇지 못하였다면, 당신은 지금 존재할 수 없다.
생명의 경외감.
귀신의 시대로부터 시작되어 지금 현재까지.

이 소설, 존재가치,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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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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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캐비닛.
이 안에 들어있는 글은 지난 역사 동안 재앙과 질병과 광기로 치부되어왔던 새로운
종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진화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엿먹어라.
내 고통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는데 무슨.

어떤 파일

옛날에, 그리 멀지 않은 옛날에 한 남자가 살았다.
그는 평범한 남자였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한 가정 교육을 받으면 자랐고,
평범하게 학교에 입학했으며, 평범하게 졸업했다. 그는 공부도 평범한 수준이었고,
놀기도 평범하게 놀았다. 그의 인생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평범했다.
너무도 평범했던 그를, 주변은 평범하게 받아들였다.

한마디로, 평범하게도, 그는 혼자였다.

그는 평범한 회사에 평범한 사원으로 취직했다. 
"내 삶은 그때부터 이상해져 버렸어요."
평범한 어느 날이었다. 너무나 평범한 날이어서 정확한 날짜조차 기억할 수 없는 날.
여느때처럼 평범한 차림으로 평범하게 버스를 타고, 평범하게 출근하고, 일했고,
퇴근을 했다. 
집에 도착해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평범한 속도로 현관문을 열고, 급하게 신발을
내던지거나 답답할 정도로 느려터진 동작도 아닌 평범한 태도로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있는데,
- 어서와.
누가 그러더란다. 평범한 그의 집에 누가 찾아올 일은 없었기에 평범하게 잘못 
들었겠거니 여겼단다.
- 힘들지? 오늘도 수고했어.
그 말은 강당에서 마이크에 대고 연설을 하는 목소리처럼 온 사방에서 울렸다.
"한참후에 깨달았죠. 그 소리는 바닥과 벽과 천장으로부터 나오는 소리였다는걸요. 
방이 말했던 거였어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전 미친게 아닙니다."
"네, 계속하세요. 괜찮습니다."
"그 이후로 방을 비롯해서 책상, 침대, 옷장, 볼펜...심지어는 칫솔에 면도기까지
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큰 것부터, 조금 더 지나니까 작은 것들까지,
그리고 이제는 내 방에 있는 것들뿐만 아니라 모든 무생물이 말하는게 들려요."

또 어떤 파일

"내 성기가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고 뱀처럼 마구 움직입니다. 그건 도저히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아요. 이녀석은 피리를 불면 춤을 추는 코브라처럼
어떤 소리에 자꾸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제멋대로 구는 통에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어제는 선을 보는데 말입니다, 호텔 종업원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제멋대로 춤을 추더라 이겁니다. 내 안에 또 다른 생물체가 있다구요!"


또 다른 어떤 파일

"처음에는 50kg까지만 빼려고 했어요. 아, 제 키요? 남들보다 조금 더 컸으면 좋겠지만
아주 작지는 않아요. 167cm예요. 원래 몸무게는 58kg이었죠. 남자친구는 항상 그랬어요.
’저 연예인 키가 170cm인데 몸무게가 45kg이래. 완전 이쁘지 않냐? 딱 내 이상형이라니
까.’ 라고요. 저는 남자친구를 사랑합니다. 그의 이상형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다이어트를 시작했죠. 밥은 하루에 한끼만 먹었어요. 점심에만요. 그것도 
반 공기로 줄였죠. 아침은 사과 반 쪽을 먹었고, 저녁엔 녹차만 마셨어요. 가끔 
어지럽기도 했지만, 일주일이 지나니까 2kg이 빠지더군요. 그리고 또 일주일이 
지나니까 3kg이 빠졌어요. 너무 기뻤죠. 그런데 남자친구는 시큰둥했어요. 
나는 살을 더 빼야겠다 생각했죠. 이주일이 지났어요. 그러니까 다이어트를 시작한지 
한 달이 되던 날, 내 몸무게는 52kg이 되어 있었어요. 너무나 기뻐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가 그러더군요. ’헤어지자,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나는 바보같이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뒤돌아 생각하니 너무 분하고 억울했어요. 
그래서 헤어진 그 날 지금까지 먹지 못했던 밥을 먹으려고 밥통을 열었는데, 
토했어요. 밥이 벌레처럼 보이기 시작했죠. 지금요? 지금 몸무게는 42kg이예요."


"저희도 심토머인가요?"
"걱정 마세요. 당신들은 아직 이 도시에서 견딜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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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 - 제1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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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덜컹.
맹수의 숨소리 같은 규칙적인 쇳소리. 그것은 달릴때만 온전하다. 
온전하다는 것은 다른 것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이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 가만히 앉아 있다보면 삶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다가온다.
깜빡이던 필라멘트, 하나, 둘, 셋과 동시에 팍, 하고 꺼져버리는 불빛.

그 이외의 모든 순간은 불규칙함과 혼돈의 결정체다. 
출발과 도착은 늘 불안정하다. 뒤뚱뒤뚱 커다란 몸뚱이를 뒤틀어 기지개를 켜는 출발과 제 속도를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뒷걸음질의 도착. 비명처럼 문이 열리고, 짓뭉개지듯 밀리고 밀치는 살덩어리들까지. 

끼긱끼긱.
달리는 지하철에서는 비명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멀리서 환청처럼 들리는 것이기에 누구도 신경을 쓰진 않는다. 아니, 신경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는 비명소리 앞에서 숙연해지기 때문에. 
주위를 둘러본다. 
검은 양말에 흰 구두를 신은 할아버지, 이어폰을 꽂은 채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는 젊은 여자, 과장된 몸짓으로 신문을 쫙쫙 펼치며 읽는 중년 남자, 발 밑에 무언가가 잔뜩 들어있는 비닐 봉지를 너댓개는 쌓아둔 채 졸고 있는 아주머니, 닌텐도 하나에 몽땅 달려들어 왁자지껄 소리치는 중학생들, 하모니카를 불며 절뚝이는 걸음으로 저쪽 칸에서 이쪽 칸으로 건너오는 할머니, 아마 다음 역에서는 단돈 이천원짜리 기능성 양말을 파는 남자가 타겠지.

Rewind 
"지하철에선 별의별 일이 다 생긴다고."

Rewind
그는 지상과 지하의 어디쯤에 서 있다.
어디에 소속되어야 할 지 모르겠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는 유령처럼, 유령같은 사람들을 보고 듣는다.

우리는 모조리 경계에 서 있다.
우리는 모조리 배제된 채 산다.
우리는 모조리 소속된 척 살고 있다.

Fast Forward
유령은 어디까지나 유령일 뿐이라고. 지상을 낙원처럼 생각하는가 본데, 지하에서도 삶은 분명히 존재하는거야. 지상에서 당신이 하루쯤 사라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 당신의 자리는 금세 누군가에 의해서 대체될거야.
뭘 망설여? 이 지하에서 당신은 완전한 하나의 존재야. 
우리는 여기서 누구나 동등한 방을 가지고, 동일한 수준의 삶을 살아.
모든 남자는 똑같이 여자를 품을 수 있고, 모든 여자는 똑같이 남자를 고를 수 있지.
말해봐. 넌 뭐지? 
넌 누구야? 

덜컹덜컹. 
그건 농담이다. 지독한 농담.
매트릭스를 보고나서 내가 했던 말.
나도 배꼽이나 열심히 파 볼까. 혹시 알아? 거기서 엄지 손가락만한 벌레가 튀어나올지.

이게 꿈이라고 믿고 싶다.
아무렇게나 울리는 공중 전화를 붙들고 소리쳐야 한다.
나, 여기있어!

Fast Forward
절대로 지하철을 벗어나지 마라. 사악한 탐욕이 넘쳐나는 지상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당신은 지옥으로 떨어진다.
 
Fast Forward
나는 서커스에 와 있다.
저 상자 안으로 들어가면, 나는 사라진다.
관객들은 열정적인 박수로 화답할 것이다.
쇼는 성공적으로 마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끼긱끼긱.
"어이, 일어나"

그건, 정말 지옥같은 악몽이었어. 아직도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아. 
세상에, 내가 어디 있었는지 알아? 내가 말해도 믿지 않겠지만...

하나,
둘,
호흡을 가다듬고,
셋.

Rewind
Rewind
Rewind


캠코더가 연결된 TV에서 화면이 켜진다. 복잡한 소리가 제멋대로 들린다.
거기엔 내가 있고, 아내가 있다.
"자, 여기보고. 그래그래,"
"안녕, 복잡하지만 너무 좋아. 당신과 이렇게 둘이 와 있으니까."
"으흠."
"다음엔 바다로 갈까? 너무 맑아서 에메랄드 빛이 나는 바다. 추워서가 아니라 햇살이 뜨거워서 옷을 입는 곳으로 말야. 침대에 누우면 창 밖으로 수평선이 보이는 그런 호텔에서. 거기에 누워있으면 바다 한 가운데에 누워있는 것 같을거야, 그치?"
"무섭지 않을까?"
"남자가 겁만 많아가지고. 그땐 내가 꽉 안아줄게. 행여나 파도가 쳐도 절대 떨어지지 않도록. 나 힘 엄청 쎄잖아."
"하하하!"

Rewind...







Fade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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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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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소설이다.
한국 문학의 지평과 공간을 확장시킨 소설이라는 평가가 온당할 것 같다.
북한을 시작해 중국과 영국, 쿠바까지. 
세계에서 중요하고 복잡한 일들이 ’지금 바로’ 일어나고 있는 곳에 바리는, 있다.
우리가 너무나 무책임하고 무신경하게 흘려버리는 일들이 누군가에겐 생과 사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일들 이라는 사실을, [바리데기]는 보여주고 있다. 

우리와 지리적으로, 혹은 사상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바리데기]는 필독을 권할 소설이다. 북한의 인권과 통일에 대한 문제에 시큰둥한 젊은이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테러를 비디오 게임 보듯이 보는 젊은이들, 살기 위해 죽음으로 뛰어드는 불나방같은 허름한 배 밑바닥의 수많은 밀항자들, 지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제국주의의 폭력들까지. 

텍스트 안에 풍부한 상징을 담고, 읽어가면서 혹은 읽고 나서 사색에 빠지게 하는 소설이야말로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확고하고 분명한, 명징한 언어들로 이루어진 소설은 읽는 순간, 딱 하고 뒤통수를 때리지만 그것뿐인 경우가 많다. 되려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말이다. 

<바리데기>는 본래 우리네 고전이다. 서사무가로서 신화적 틀을 가지고 있는 이 고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다양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작품이다. 
논의를 더 전개하기 전에, 과거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 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이 한 문장에는 두 개의 시간 관념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말 그대로 ’과거’ 라는 시간과 ’읽는 것’ 의 현재라는 시간이다. 쓰여진 시간과 읽혀진 시간에는 아주 오랜 사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의 독자들이 공유했던 생각과 현재의 독자들이 공유하는 감각은 현저히 다르다. 

<바리데기>에는 혁명성이 내포되어 있다든지, 남녀평등적 사상을 내세우고 있다든지 하는 해석은 모두 현대의 관점에서, 숨은그림찾기에서 답을 찾아내듯 발견해 낸, 현대의 사상과의 유사한 모티프일 뿐이다. 
우리는 당대에 <바리데기>가 남성중심 사회에 던지는 화두를 짐작할 수는 있다.
주인공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독특한 설정과 그 여성이 구원해 내는 가정, <바리데기>는 <숙향전>으로 이행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 두 고전작품에, 그리고 황석영의 [바리데기]에는 공통적으로 이분적인 사고에 대한 초극 의지가 담겨 있다고 보여진다. 현실과 꿈, 인간과 자연, 이성과 광기와 같은 이분적인 사고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분적인 사고의 뿌리는 서구에서 찾을 수 있으며, 현재도 유효하다. 

<바리데기>에서 <숙향전>, [바리데기]까지 고비마다 영적존재로부터 구원의 메시지를 들으며 삶을 연장하는 방식의 특성을 보인다. 여기에서 여성 주인공들은 적극적인 자아라기 보다는 내던져진 존재다. 사회의 고난과 갈등을 묵묵히 헤쳐나가기만 할 뿐 다른 언급은 없다. 그럼으로써 이 작품들은 사회적 모순과 대립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어떤 효과와 특징을 지니게 된다. 

황석영 작가의 [바리데기]에서 발전된 논의는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바로 생명의 잉태다. 서사무가 <바리데기>에도 바리는 자식을 낳지만, 그것은 모성과는 거리가 있는 잉태라고 보여진다. 

[바리데기]에서 생명의 잉태는 희망의 징조이며, 우리 세대가 지켜내야 할 어떤 것이라는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미래에 대해 책임을 지니고 있는 ’어머니’ 이다. 
  
그러나 사회적 책임감이 없는 지금의 우리들을 생각해 보자. 
[바리데기]에서 등장하는 모든 개인이 선량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그리고 모든 갈등과 고난이 사회적 모순과 대립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모성을 잃어버린 어머니다.

(+)
[바리데기]에서 알리가 포로로 수용되는 관타나모에 관련된 영화가 하나 있다.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의 ’관타나모로 가는 길’ 이 그것인데, 함께 보면 좋을 것 같다.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수상에 빛나는...이라는 수식어 없이도 
이 영화는 참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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