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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큰 소설이다.
한국 문학의 지평과 공간을 확장시킨 소설이라는 평가가 온당할 것 같다.
북한을 시작해 중국과 영국, 쿠바까지.
세계에서 중요하고 복잡한 일들이 ’지금 바로’ 일어나고 있는 곳에 바리는, 있다.
우리가 너무나 무책임하고 무신경하게 흘려버리는 일들이 누군가에겐 생과 사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일들 이라는 사실을, [바리데기]는 보여주고 있다.
우리와 지리적으로, 혹은 사상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바리데기]는 필독을 권할 소설이다. 북한의 인권과 통일에 대한 문제에 시큰둥한 젊은이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테러를 비디오 게임 보듯이 보는 젊은이들, 살기 위해 죽음으로 뛰어드는 불나방같은 허름한 배 밑바닥의 수많은 밀항자들, 지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제국주의의 폭력들까지.
텍스트 안에 풍부한 상징을 담고, 읽어가면서 혹은 읽고 나서 사색에 빠지게 하는 소설이야말로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확고하고 분명한, 명징한 언어들로 이루어진 소설은 읽는 순간, 딱 하고 뒤통수를 때리지만 그것뿐인 경우가 많다. 되려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말이다.
<바리데기>는 본래 우리네 고전이다. 서사무가로서 신화적 틀을 가지고 있는 이 고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다양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작품이다.
논의를 더 전개하기 전에, 과거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 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이 한 문장에는 두 개의 시간 관념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말 그대로 ’과거’ 라는 시간과 ’읽는 것’ 의 현재라는 시간이다. 쓰여진 시간과 읽혀진 시간에는 아주 오랜 사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의 독자들이 공유했던 생각과 현재의 독자들이 공유하는 감각은 현저히 다르다.
<바리데기>에는 혁명성이 내포되어 있다든지, 남녀평등적 사상을 내세우고 있다든지 하는 해석은 모두 현대의 관점에서, 숨은그림찾기에서 답을 찾아내듯 발견해 낸, 현대의 사상과의 유사한 모티프일 뿐이다.
우리는 당대에 <바리데기>가 남성중심 사회에 던지는 화두를 짐작할 수는 있다.
주인공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독특한 설정과 그 여성이 구원해 내는 가정, <바리데기>는 <숙향전>으로 이행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 두 고전작품에, 그리고 황석영의 [바리데기]에는 공통적으로 이분적인 사고에 대한 초극 의지가 담겨 있다고 보여진다. 현실과 꿈, 인간과 자연, 이성과 광기와 같은 이분적인 사고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분적인 사고의 뿌리는 서구에서 찾을 수 있으며, 현재도 유효하다.
<바리데기>에서 <숙향전>, [바리데기]까지 고비마다 영적존재로부터 구원의 메시지를 들으며 삶을 연장하는 방식의 특성을 보인다. 여기에서 여성 주인공들은 적극적인 자아라기 보다는 내던져진 존재다. 사회의 고난과 갈등을 묵묵히 헤쳐나가기만 할 뿐 다른 언급은 없다. 그럼으로써 이 작품들은 사회적 모순과 대립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어떤 효과와 특징을 지니게 된다.
황석영 작가의 [바리데기]에서 발전된 논의는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바로 생명의 잉태다. 서사무가 <바리데기>에도 바리는 자식을 낳지만, 그것은 모성과는 거리가 있는 잉태라고 보여진다.
[바리데기]에서 생명의 잉태는 희망의 징조이며, 우리 세대가 지켜내야 할 어떤 것이라는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미래에 대해 책임을 지니고 있는 ’어머니’ 이다.
그러나 사회적 책임감이 없는 지금의 우리들을 생각해 보자.
[바리데기]에서 등장하는 모든 개인이 선량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그리고 모든 갈등과 고난이 사회적 모순과 대립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모성을 잃어버린 어머니다.
(+)
[바리데기]에서 알리가 포로로 수용되는 관타나모에 관련된 영화가 하나 있다.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의 ’관타나모로 가는 길’ 이 그것인데, 함께 보면 좋을 것 같다.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수상에 빛나는...이라는 수식어 없이도
이 영화는 참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