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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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캐비닛.
이 안에 들어있는 글은 지난 역사 동안 재앙과 질병과 광기로 치부되어왔던 새로운
종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진화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엿먹어라.
내 고통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는데 무슨.

어떤 파일

옛날에, 그리 멀지 않은 옛날에 한 남자가 살았다.
그는 평범한 남자였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한 가정 교육을 받으면 자랐고,
평범하게 학교에 입학했으며, 평범하게 졸업했다. 그는 공부도 평범한 수준이었고,
놀기도 평범하게 놀았다. 그의 인생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평범했다.
너무도 평범했던 그를, 주변은 평범하게 받아들였다.

한마디로, 평범하게도, 그는 혼자였다.

그는 평범한 회사에 평범한 사원으로 취직했다. 
"내 삶은 그때부터 이상해져 버렸어요."
평범한 어느 날이었다. 너무나 평범한 날이어서 정확한 날짜조차 기억할 수 없는 날.
여느때처럼 평범한 차림으로 평범하게 버스를 타고, 평범하게 출근하고, 일했고,
퇴근을 했다. 
집에 도착해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평범한 속도로 현관문을 열고, 급하게 신발을
내던지거나 답답할 정도로 느려터진 동작도 아닌 평범한 태도로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있는데,
- 어서와.
누가 그러더란다. 평범한 그의 집에 누가 찾아올 일은 없었기에 평범하게 잘못 
들었겠거니 여겼단다.
- 힘들지? 오늘도 수고했어.
그 말은 강당에서 마이크에 대고 연설을 하는 목소리처럼 온 사방에서 울렸다.
"한참후에 깨달았죠. 그 소리는 바닥과 벽과 천장으로부터 나오는 소리였다는걸요. 
방이 말했던 거였어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전 미친게 아닙니다."
"네, 계속하세요. 괜찮습니다."
"그 이후로 방을 비롯해서 책상, 침대, 옷장, 볼펜...심지어는 칫솔에 면도기까지
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큰 것부터, 조금 더 지나니까 작은 것들까지,
그리고 이제는 내 방에 있는 것들뿐만 아니라 모든 무생물이 말하는게 들려요."

또 어떤 파일

"내 성기가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고 뱀처럼 마구 움직입니다. 그건 도저히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아요. 이녀석은 피리를 불면 춤을 추는 코브라처럼
어떤 소리에 자꾸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제멋대로 구는 통에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어제는 선을 보는데 말입니다, 호텔 종업원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제멋대로 춤을 추더라 이겁니다. 내 안에 또 다른 생물체가 있다구요!"


또 다른 어떤 파일

"처음에는 50kg까지만 빼려고 했어요. 아, 제 키요? 남들보다 조금 더 컸으면 좋겠지만
아주 작지는 않아요. 167cm예요. 원래 몸무게는 58kg이었죠. 남자친구는 항상 그랬어요.
’저 연예인 키가 170cm인데 몸무게가 45kg이래. 완전 이쁘지 않냐? 딱 내 이상형이라니
까.’ 라고요. 저는 남자친구를 사랑합니다. 그의 이상형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다이어트를 시작했죠. 밥은 하루에 한끼만 먹었어요. 점심에만요. 그것도 
반 공기로 줄였죠. 아침은 사과 반 쪽을 먹었고, 저녁엔 녹차만 마셨어요. 가끔 
어지럽기도 했지만, 일주일이 지나니까 2kg이 빠지더군요. 그리고 또 일주일이 
지나니까 3kg이 빠졌어요. 너무 기뻤죠. 그런데 남자친구는 시큰둥했어요. 
나는 살을 더 빼야겠다 생각했죠. 이주일이 지났어요. 그러니까 다이어트를 시작한지 
한 달이 되던 날, 내 몸무게는 52kg이 되어 있었어요. 너무나 기뻐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가 그러더군요. ’헤어지자,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나는 바보같이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뒤돌아 생각하니 너무 분하고 억울했어요. 
그래서 헤어진 그 날 지금까지 먹지 못했던 밥을 먹으려고 밥통을 열었는데, 
토했어요. 밥이 벌레처럼 보이기 시작했죠. 지금요? 지금 몸무게는 42kg이예요."


"저희도 심토머인가요?"
"걱정 마세요. 당신들은 아직 이 도시에서 견딜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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